천상의 책 4권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

은가루리나 2018. 9. 26. 01:06




20-26,2 "딸아,

내 거룩한 뜻의 고통은 인간이 상상할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고통이다.

내 뜻이 모든 피조물 안에 있지만,

끔찍하고 처참한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 악몽에 허우적이듯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내 뜻에 통치권을 주어 

그들 안에서 내 뜻의 생명을 살게 하기는 고사하고,

내 뜻이 움직이고  숨쉬며  고동칠 자유도 주지 않고  계속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3 인간의 뜻은 자유롭게 움직이며  숨쉬고  원하는 대로 고동치는 반면,

내 뜻은 오랜 세기에 걸쳐 임종 때처럼 가쁜 호홉으로 질식할 지경이 된 채, 

다만 그들의 뜻과 활동에 이바지하며 그들의 행위 안에 머물러 있는 형국이다.

내 뜻이 피조물 안에서 끔찍한 단말마의 악몽에 시달리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6 내 뜻의 그 고뇌는 너무나 혹독한 것이어서 

겟세마니에서 이를 겪기로 했던 나의 인성이 바로 사도들의 도움을 구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조차 얻지 못하자  괴로운 나머지 생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내 거룩한 뜻의  그 끔찍하고도 오랜 고뇌의 엄청난 무게에 깔려 죽을 것만 같아진 나는 

그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도움을 청하며 이렇게 말씀드렸던 것이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7 그러나 내 수난 중의 다른 모든 고통 속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혹독한 것이었건,

'하실 수만 있으면 이 고통이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한 적이 없었다.

그 대신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다' 하고 부르짖었을 뿐이다.

고통에 목마르다고 말이다.


8 하지만 지고한 뜻의 이 고뇌 속에서 

나는 너무나 오랜 고통의 모든 무게를 고스란히 느꼈다.

대대로 사람들 안에서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는, 거룩한 뜻의 모든 고통을!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지!

이에 필적할 만한 고통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 * 




9-25,2 "딸아, 영원한 사랑은 나의 내면 전체에 작용한 반면,

인간은 다만 내 인성의 외피에만 영향을 끼쳤을 뿐이다.

그러므로 내 고뇌의 시간 동안 -인간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이, 무한한 사랑, 헤아릴 수 없는 사랑, 숨어 있는 사랑이 

불타는 못으로 나를 꿰뚫고, 불타는 가시관을 내 머리에 씌우고, 

들끓는 쓸개즙을 마시게 하였다.

그리하여 내 인성은 

그 숱한 종류의 순교적 고통을 동시에 다 견딜 수 없어졌으므로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아내었고,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이렇게 부르짖을 정도가 되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만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르 14,36)."  


3 이 말은 그러나 이후의 수난 과정 속에서 다시는 나온 적이 없었거니와,

수난 과정 전체에 결쳐 겪었던 모든 것을 나는 동산의 고뇌 속에서 전부 겪었고,

그것도 더욱 격렬하고 더욱 고통스럽고 더욱 내밀한 방식으로 겪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내 뼛속까지 깊이, 내 마음속 가장 깊은 데까지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코 여기까지 들어올 수 없었지만,

사랑은 모든 것에 도달할 수 있고 

그 무엇도 사랑에는 저항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의 일차적인 사형 집행자는 사랑이었다."




* * * 




14-46,9 "아, 예수님,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고통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도 저는 아직 심한 반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훨씬 더 혹독해 보이는 사랑의 죽음을 제가 어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11 그러자 예수님은 매우 자애로우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덧붙여 말씀하셨다.

"내 가련한 딸아, 용기를 내어라. 두려워하지 마라.

그리고 네가 반감을 느낀다고 해서 심란해하지도 마라.

너를 안심시켜 주려고 하는 말이지만, 이 반감 역시 나를 닮은 점이다.


12 내 인성은 거룩했으며 고통 받기를 한없이 열망하고 있었지만,

이 인성 역시 그런 반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반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선을 행하면서, 

또 받아 마땅한 고통을 받아들이면서 느끼는 모든 반감이었다.


13 나는 그래서 나를 심하게 괴롭힌 이 고통들을 적지 않게 겪어야 했다.

그들에게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또 그들의 고통을 완화시켜 주기 위해서 였다.

그러므로 나는 겟세마니에서 아버지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마태 26,39)

하고 부르짖었다.


14 너는 그렇게 말한 것이 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네 생각이 틀렸다.

나는 고통 받는 것을 미치도록 좋아하였고 죽음도 좋아하였다.

내 자녀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말이다.


15 그러므로 그것은 내 인성 안에 메아리친 온 인류 가족의 부르짖음이었고,

그들에게 힘을 주려고 나도 그들과 함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세 번이나 부르짖었다.

마치 나 자신의 말인 것처럼 그렇게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말하고 있었지만,

짓눌러 으스러지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16 네가 느끼는 반감도 네 것이 아니고, 내 반감의 메아리다.

그게 네 것이라면 내가 너에게서 제거했을 것이다.




* * * 




16-33,2 "딸아, 내가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한 것이 내 수난의 잔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느냐?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인간의 뜻이라는 잔 때문이었다.

고약한 악덕이 어찌나 넘치도록 가득 찬 잔인지 

하느님의 뜻과 일치해 있었던 나의 인간적인 뜻이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해 주십시오.' 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을 정도로 큰 역겨움과 공포와 경악을 느꼈던 것이다. 


3 하느님의 뜻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의 뜻은 추악하기 그지없다.

하느님의 뜻은 그러나 거의 잔 속에 있는 것처럼 개개의 피조물 안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사악치고  

그의 뜻이 그것의 기원이고  씨앗이며  샘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내 뜻의 거룩함 앞에서 

인간의 뜻이 낳은 그 모든 사악한 것들로 뒤덮여 있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나는 죽어 가고 있음을 여실히 느꼈다.

신성이 나를 지탱해 주지 않았다면 실제로 죽었을 것이다.




* * * 




9-36,2 "딸아, 나는 특히 죽어 가는 모든 사람들의 선종을 도와주려고 

'동산'의 고뇌를 겪고자 하였다.

나의 고뇌가 그리스도인들의 고뇌와 얼마나 깊이 결부되어 있는지 잘 보아라.

그 노고와 슬픔과 번뇌와 피땀을 - .

나는 개개인 모두의 죽음을 느꼈다.

특히 각 사람을 위하여 실제로 죽어 가고 있는 것 같았으니,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노고와 슬픔과 번뇌와 피땀을 내 안으로 느꼈고, 

나 자신의 것으로 모든 이에게 도움과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그들의 죽음을 내 안으로 겪음으로써 

그들 모두가 단 하나의 숨 안에서  곧 나의 숨으로 내 안에서 죽는 은총을 받고 

나의 신성에 의해 즉각 지복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3 '동산'의 고뇌가 죽어 가는 이들을 위한 특별한 도움이었다면,

십자가의 고뇌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을 위한 도움이었다.

둘 다 고뇌이지만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즉, 동산의 고뇌는 슬픔과 두려움과 근심과 공포가 가득한 것이었지만

십자가의 고뇌는 평화와 차분한 고요가 가득한 고뇌였다.


4 그런데 내가 '목마르다!' 하고 외친 것은 

모든 사람이 내 마지막 숨 안에서 그들의 마지막 숨을 거두게 하려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 마지막 숨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비탄에 잠겨 외쳤던 것인데,

이 '목마르다!' 는 지금도 여전히 각사람 모두에게, 

그 마음의 문에 달린 초인종처럼 이렇게 외치고 있다.


5 '목마르다. 오 영혼아, 나는 너를 갈망한다!

부디 내 밖으로 나가지 말고 내 안으로 들어오너라.

그리하여 내 안에서 너의 마지막 숨을 거두어라!'


6 그러니 

내 수난 중 여섯 시간을 사람들에게 주어 선종하도록 하게 하였으니,

동산의 세 시간은  임종 중에 있는 이들을 위하여,

십자가 위의 세 시간은  바로 죽음 직전의 마지막 한숨을 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