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위탁

52 pp.259-263 제 3편 제 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3절 삶과 죽음

은가루리나 2019. 1. 4. 16:48


옴니아  등급변경▼  조회 159  추천 0  2012.11.20. 12:39



제3편 위탁의 대상



제1장 위탁의 일반적 대상


제2장 현세적 사물에 있어서의 위탁 일반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제3절 부귀와 빈천 ①

 제4절 장소와 환경 


제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건강과 질병 

 제2절 질병의 지연과 그 결과 

 제3절 삶과 죽음 

 제4절 자연적 은혜의 분배에 관한 불평등에 대하여

 제5절 직무

 제6절 휴식과 평온


제5장 명성의 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호평

 제2절 굴욕

 제3절 선인으로부터의 박해


제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영광의 생명

 제2절 은총의 생명

 제3절 선덕의 실천

 제4절 죄를 피하는 일

 제5절 계명, 서원, 회칙 등의 준수


제7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어떤 종류의 영적원조의 상실


제8장 7장의 계속 - 실패와 과실

 제1절 분발심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3절 남의 영혼의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4절 우리 자신의 죄과


제9장 8장의 계속 - 내적시련의 일반


제10장 9장의 계속 - 유혹


제11장 10장의 계속 - 위안과 건조


제12장 11장의 계속 - 암흑, 무감각, 기타

 제1절 정신의 암흑

 제2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제3절 의지의 무력

 제4절 영적빈곤


제13장 12장의 계속 - 평화, 불안, 소심

 제1절 평화

 제2절 각가지 공포

 제3절 거룩하고 정의이신 천주께 대한 경의

 제4절 양심상의 小心


제14장 13장의 계속

 제1절 일반적 길인가, 신비적 길인가

 제2절 신비적 관상의 갖가지 상태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

 제4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제15장 기억해야 할 두가지 실례




p.259


제 3 편 위탁(委託)의 대상(對象) 


제 4 장 육체(肉體) 및 정신(精神)의 

각가지 자연적 선(自然的 善)에 있어서의 위탁(委託) 제1절 



제 3 절  삶과 죽음 



조만간 우리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 또한 어떤 모양으로 될지 우리는 전연 모른다.


즉, 생사(生死)의 절대주권자(絶對主權者)신 천주께서는

그 날과 시를 당신 손 안에 쥐고 계신다.

보통 천주께서는 그 비밀을 누구에게도 말씀하지 않으신다.


위대한 성인 중에는 죽기 3, 40년 전에 죽음이 다가왔다고 말하였다.


우리에게 항상 준비를 재촉하고 끊임없이 영적활동(靈的活動)을 자극하는

죽음에 관한 무지(無知)는 얼마나 복된 무지랴!


우리는 이 죽음의 시기의 불확실함을 복종으로써,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락하여야 한다.


그런데 죽음이 지금 부터 얼마 후 오는 것과,

긴 세월 후에 찾아드는 것과, 어느 편이 바람직하겠는가.


죽음을 갈망할 것을 허용하는 많은 이유가 있다.



p.260


1. 현세의 생활의 각가지 악



사람이 태어나자 마자, 죽음은 그이 안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을 막기 위하여 사람은 빈틈 없이 싸워야 한다.


비록 영양과 수면과 의약을 섭취하드라도,

사람은 발을 재촉하여 무덤으로 향하고 있다.

인간의 생명은 완만한 그리고 끊임없는 죽음이다.


노고와 피로, 계절의 불순, 질병과 허약, 마음과 정신의 고뇌, 불안과 근심,

이런 것은 모두 자상을 눈물의 골짜기로 변하게 하는데 협력하고 있다.


그 위에 또한 자신의 고통에 근친자의 고통이 따라온다.


그리고 그토록 허다한 악이 

아직도 부족한 것처럼,

사람들의 악의는 그런 것을 무제한으로 악화하는 것에 혈안이 돼 있다.


개인은 개인을 거스르고, 가족은 가족과 서로 다투며,

국민은 국민과 대립하고 있다.



사람들은 서로 상대방을 괴롭히기 위하여 어떠한 투쟁,

더욱 철저히 서로 멸망시키는데 어떠한 무기를 발명하면 좋을지 

이미 모를 정도로 돼 있다.


우리는 천주께서 바라시는 한,

쾌히 시련을 감수할 것을 수락하는데,

그러나 죽음을 갈망한다는 것은 자연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왜냐 하면,

죽음의 동정어린 손길은, 우리의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고,

이미 원수도, 증오도, 비통도, 다른 어떤 고뇌도 없이 

오직 영원한 정온(靜穩)과 평화와 끝없는 휴식만 있는 행복한 거처에로 

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p.261


2. 현세의 생활의 위험과 죄과 



지상은 하나의 싸움터다.

우리는 거기서 자지도 않고, 피로도 동정도 모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밤낮 싸워야 한다.


이 적은 6천년의 기나긴 경험에 의해서 싸움에 익숙해져

무엇이 우리의 약점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포위하는 우리의 마음 안에 

가장 막연한 것 같은 공범적 경향(共犯的傾向)을 찾아낸다.


우리는 참으로 나약함 그 자체, 간단 없이 변동하는 존재다.


그래서 천주께서 부여하시는 유력한 지지가 있어도,

우리편에서는 항상 죄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 해야 한다.


현재 우리는 천주와 친밀한 우정에 맺어져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끝까지 항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특은이며,

오늘 성덕의 길을 걷는 이도

내일은 태만의 길을 걷고 

구렁에 이끄는 가파른 언덕을 굴러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는 이 최대 불행의 운명을 면할 수 있다 하드라도

적어도 지향하고 있는 완덕의 이상에서는 항상 머물러 있으며,

무수한 소죄를 거듭하고 

마음 속에는 가공할 욕망과 악한 경향과의 세계가 뒤끓고 있음을 

반드시 느낄 것이다.


만일 오늘 훌륭한 결심이 돼 있다고 생각한다면,

죽음이 하루 빨리 찾아와 은총 안에 우리를 확정시켜,

항상 범하는 죄와 쉴새 없는 공포에 매듭을 짓는 것을 절망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죄악과 범죄가 점점 범람하고 악덕이 승리를 차지하며,

선덕이 박해되고 교회는 원수로서 취급되며,

도처에서 천주가 추방되는 간악한 시대에 생활하여야 한다.


아, 참으로 평화의 천주께서 군림하시고

모두가 우리의 눈과 마음을 기쁘게 하는 모든 성인의 모임

어찌 그리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p.262


3. 천국의 희망과 천주에의 사랑



우리는 

세상의 헛됨과, 허무함과, 그 행복이 거짓임을 이해한지 이미 오래다.

그래서 세속을 버리고 오직 천주만을 탐구하는데 전념하였다.


우리의 영혼이 모든 사물에서 이탈하여, 정화됨에 따라,

천국을 바라는 마음은 더욱 더 치열하고,

천주께 대한 사랑은 더욱 더 열렬하여, 

거의 견딜 수 없게 된다.


우리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될 것은 천주시며,

즉 일각이라도 빨리 천주를 직관하고, 사랑하며, 차지하는 것이다.


천주 없이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괴로운 일이다.


우리 마음의 천주는 바로 가까이, 성체성사 안에 계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베일」을 벗으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우러러보기를 바라고 있다.


때로, 천주께서는 기도중에 당신을 드러내신다.


그렇지만,

일시적인 불완전한 천주와의 일치만으로는 우리로서 만족 할 수 없으며,

영원히 그리고 완전하게 천주를 소유하려 한다.


우리의 육체는 감옥의 두터운 벽과도 같이 

영혼과 그 지극히 사랑하는 분 사이에 개재(介在)하고 있다.


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드디어 무너져,

우리의 모든 애정의 대상(對象)인 유일한 분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여, 나의 귀양살이가 끝나는 것은 어느 날이리오?

당신이 오시어 나를 찾으시는 것은 어느 날이리오.

나,  당신 얼굴 앞에 나타나는 것은 어느 날이리오.

아, 이때가 오는 것이 이렇게도 늦음이여!

그러므로, 누가 만일 나에게 그 때의 가까움을 알린다면,

나의 기쁨 얼마나 크리오」,


「나는 언제 가서 천주의 얼굴을 뵈올 수 있으리오?

『주의 전당에로 가세』하고 사람들이 나에게 이를 제, 나는 기뻐하였더니,

『예루살렘』이여, 너의 성문에 내 발이 이미 서 있도다」

(「로드리게스」신부 제8「논술」20, 성영16.15, 41.3, 121.1-2 등)


p.263


위대한 사도 성「바오로」도 「아가」의 신부 (新婦)와 같이,

사랑에 초췌(憔悴)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위하여 육체가 멸하기를 절망하였다.


그는 사랑에 병들어 있었다.

그리고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분을 즐겁게 해드리려는 

견디기 어려운 열망 끝에,

순간도 영원처럼 여겨지고, 마음은 비통에 충만돼 있었다. (필립피 1.23)




임종하는 마당에 있어서의 영해 예수의 성녀「데레사」의 심정도 이와 같았다.


「신부님,  체념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산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도리어 기쁨입니다.」(자서전12)



위에서 우리는 죽음을 바라는 많은 정당한 이유가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또한 오래 살기를 갈망케 하는,

이에 못지 않는 정당한 이유를 들 수도 있다.

그런 것은 거의 앞의 것과 마찬가지다.



53 pp.259-263 제 3편 제 4장 제3절 삶과  죽음 ②



p.263


1. 현세의 생활의 각가지 악



현세의 악은 

인내와 신앙의 정신에 의하여 가장 커다란 선익의 기회가 된다.


그런 것은 우리로 하여금 지상에서 이탈시켜,

보다 좋은 세계를 그리워 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훌륭한 정화(淨化)의 수단이며,

선덕이나 공로가 무진장한 광산이다.


현세의 악이 많으면 많을수록 천국의 수확도 풍부하게 된다.


비록 사람들의 악의가 거기에 들어가려고 하드라도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우리는 연장의 배후에 천주의 섭리만을 보고,

그리고 모든 우리의 영적 진보, 천주의 영광, 많은 영혼의 구원을 가져 오며,

연옥 영혼은 주의 성혈로써 풍부히 젖게 되는 결과에 이른다는 것만을 생각하자.


천국에는 이미 고뇌가 없음은 확실한 것이지만,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현세와 같이

천국에서는 사랑으로써 시련을 기꺼이 받는다는 훌륭한 증거를 

착한 스승에게 이미 드러낼 수 없다.


p.264


2.  현세의 생활의 위험과 죄과(罪過)



위험에 처해 있다는 느낌이,

우리에게 천국을 갈망케 한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래도 영원한 영광을 획득하려 하고,

가장 사랑하는 왕에게 자기 사랑과 충성을 보이려고만 바라는 

용감한 영혼에 있어서는, 

싸움은 마음을 끌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그 기치(旗幟) 밑에 부르신 것은 왕 자신이시므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 틀림 없다.



수도원은 가장 안전한 요새(要塞)이다.

우리는 기도와 경계에 의해서 그다지 상처를 입지 않고

거기서 훌륭한 싸움을 할 수 있음을 바라고 있다.


이제까지의 우리 승리는 결코 완전한 것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때의 도움이 없으면 

우리는 어떻게 패배를 회복하고 죄과를 보상하며,

자기의 무용함을 보충하고 풍부한 전리품(戰利品)을 획득할 수 있겠는가.


그 위에 

천주가 모든 방면으로부터 적에게 공격되고 있는 지금의 시대에 있어,

그 자녀들, 그 가장 사랑하시는 종들의 위치는, 

천주의 곁에 있어 싸우고 그 영광을 위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젤뜨루다.마리아」동정으로 하여금 이렇게 말하게 한 까닭이다.


「아시다시피, 나는 천주를 뵈옵기를 뜨겁게 바라고 있읍니다.

그러나  이 박해의 때를 당하여,

나에게는 천주를 위하여 고통을 당하겠다는 더욱 치열한 다른 원의가 있읍니다.」

(「현대의 한 신비자」6 )


p.265


3. 천국에의 희망과 천주께 대한 사랑



이제 바로 죽는다는 것은 아마도 가장 안전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보다 신속하게 가장 사랑하는 분과 일치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비록 천주께서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키실지라도,

종국에는 우리를 항구에 인도하신다면,

우리는 그것에 관해서 천주를 영원히 찬미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순간마다 은총을 더하고 따라서

항상 새로이 천국의 영광의 정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몇년 안에 우리는 몇 만, 아마도 몇 백만이라는 은총을 획득할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천주를 뵈옵고, 천주를 차지할 수 있는 능력에

몇 십만도 몇 백만도의 새로운 「에너지」를 증가시킬 수 있다.


참으로,

그것은 영원히 천주의 영광과 우리 행복의 얼마나 놀라운 증가가 되겠는가!

또는 그것이 더욱 풍부하게 되는 것은 바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연장되드라도,

그 때문에 천국은 무제한으로 더욱 화려하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 천주께서 우리의 성급한 소망을 들어주신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에게 커다란 손해를 초래하는 일이 되리라.


p.266


4. 만일 누군가가 둘레의 사람들에게 있어 상당히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 천주의 의지의 표시이므로,

그 사람은 자신의 소망을 억제하여야 한다.



「뚜르」의 성「말딩」은 임종하는 마당에 있어,

마치 이와 같은 경우에 있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도 않았고, 삶을 거부하지도 않았으며,

다만 섭리의 손에 온전히 자신을 맡겼다.



위대한 사도 「바오로」역시 같은 궁지에 처하여

「대저 내게 관하여는 죽는 것은 이익이니라.

만일 육신 안에 사는 그것이 내게 정하신 것이라면,

이는 내가 수고로 말미암아 결심하여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그 어느 것을 가릴 것인가 나 모르노라.


나는 양편으로부터 둘러 싸여 진퇴양난(進退兩難)이니

(육신이) 분해되어 그리스도와 한가지로 있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나에게는 가장 좋은 일일 것이니라.


그러나 나 육신에 머물러 있는 것이 너희들을 위하여는 더 필요한 것이니라.」

(필립피 1.21-25)고 「필립피」신자들에게 써 보냈다.



성 「알퐁소」는,

천주의 의지에 완전히 적합해야 된다는 것을 확실히 말하고 있는데,

그러나, 그의 논지(論旨)에는 가끔 삶보다도

오히려 죽음을 바라게 하는 점이 보인다.



「로드리게스」신부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 어조로 말하고 있다.



「아뷜라」의 성녀 대「데레사」에게 있어서는,

삶의 유일한 이유는, 고통을 당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주여, 죽음을 , 그렇지 않으면 고통을」이라고 항상 부르짖었다.

성녀는 천주 없이 더 사는 고통에 이미 견디기 어렵게 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있어

하나의 높은 영광의 단계까지 도달하기 위하여,

세상 끝날까지 이 귀양살이의 땅에 있어 고난을 기꺼이 받기를 원하였다.

( 자서전 16, 37, 40 참조)



성녀의 벗이었던 「마리아.디아스」는 80세의 고령에 이르렀을 때에,

더욱 수명을 연장시켜 주시도록 주께 기도하였다.



어느 날, 성녀「데레사」는 

자기가 얼마나 몹시 천국을 갈망하고 있는가를 그에게 말하였을 때,

그는 

「나는 될 수 있는대로 오래 살기를 바라고 있읍니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고 고통을 당함으로써

무엇인가를 주께 바칠 수 있는 것은,

이 귀양살이의 땅에 있어 살고 있는 동안 뿐 입니다. 

천국에 있어서는 이미 아무 것도 바칠 수 없읍니다.」라고 대답하였다.


p.267


존자(尊者)「듀뽕」신부에 의하면,

「이와 같이 매우 다른 두가지 마음가짐은

어느 것이나 견고한 기초 위에 서 있는 것인데

그러나 『마리아.디아스』의 편이 훨씬 바람 직한 것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은총이 활동하는 범위를 보다 넓히고,

또한 은총만이 십자가의 사랑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발다살.알바레스 전」10장 )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는 그  마지막  와병(臥病)때에,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며 

아무 것도 구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거절하지 않는다.」라는 자기「모또」를 충실히 지켰다.


곁에 있는 이가,

성「말딩」이 임종 때에 읊은

 「주여, 만일 당신 백성을 위하여 나를 필요로 하시오면,

나 일하기를 거절하지 않겠나이다.」라는 기도를 

자주 하도록 권하였을 적에,

성인은 깊은 겸손으로써 대답하였다.


「나는 그렇게 기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결코 하등 필요한 이도, 유용한 이도 아닙니다.

전연 무익한 이에 불과합니다.」라고.




성「비리버.네리」도 같은 경우에 같은 말을 하였다.



끝으로 「즈네브」의 성인 주교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말을 인용하자.


「나는 올바르게 사는 것만을 유념하고 있는데,

죽음에 관해서는 이것을 천주의 배려에 맡기고 있읍니다.」




요컨데 모든 성인은 완전한 위탁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는 죽음 또는 삶을 보다 많이 희망하고

다른 이는 그 어느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에 든 이유를 검토하드라도,

또는 우리의 모범인 성인들의 보기를 생각 하드라도,

성「바오르」와 같이 삶과 죽음과의 중간에 놓여져

어느 것을 택할지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천주께서는 이 결정을 보류하시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어느 것을 택할 필요도 없으며,

따라서 그러기 위하여 많은 기도를 할 필요도 없다.



마찬가지로 죽을 때,

죽는 장소, 그 밖의 조건에 관해서도

우리는 자녀로서의 희망을 천주 앞에 피력할 수 있으며,

또는 우리의 이익임과 동시에 당신의 최대의 이익이 되도록,

뜻대로 만사를 처리하시는 배려를 

천주께 일임(一任)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의식이 명료한 때에 최후의 성사를 받고,

드디어 임종할 때에는 형제들의 기도에 둘러 싸여

평안하게 이 세상을 하직하는 은총을 간단 없이 기구하여야 한다.


왜냐 하면,

그런 때야말로 우리에게는 성사를 받을 의무가 있음과 동시에 

귀중한 도움을 이용해야 되기 때문이다.


p.268


여하튼 우리는 참으로 각오하고 있다는 조건으로

위에 말한 소망이 아무리 정당한 것이라 하드라도

그것은 항상 천주의 뜻에 대한 복종을 동반해야 한다.



성「벨나도」는 성교회에의 봉사때문에

부재중(不在中) 자기 수도자들에게 써 보냈다.


「아,  나의 사랑하는 예수여, 

나의 온 생애는 고뇌 안에, 

나의 세월은 비탄 안에 지나가 버려야 하는 것입니까.

오히려 죽음이 좋겠나이다.


그러나 나의 형제들, 나의 자녀들,

내가 극히 사랑하는 이들에게 둘러 싸여 죽는 것이 소망이로소이다. 

그런 죽음이야말로 보다 감미롭고, 보다 안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여, 나의 현세를 영원히 하직함에 앞서 이 위안을 나에게 주심은

당신의 인자하심에 관한 일이로소이다.


나는 아버지라고 불리기 합당하지 못한 이오나

그래도 만일 주의 뜻이오면,

바라건대 

그 자녀들이 아버지의 눈을 닫고, 그 임종에 참여하며, 

그 영원에의 여로(旅路)를 위로하고,

그들의 기도가 지복(至福)한 분들의 거처에까지 그 영혼을 따르며,

그 유해(遺骸)가 

함께 가난하게 살았던 형제들의 곁에 묻히기를 허락하소서.


주여,

나  만일 당신 어전에 은총을 얻는다면

이는 나의 형제들의 기도와 공로에 의하여 얻기를

충심으로 절원하고 바라는 바로소이다.  

그러나 주여 내 원의대로 하지 말으시고,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그것은 내가 삶을 바라는 것도,

죽는 것을 소망하는 것도,

나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로소이다.」(「서간」144)


p.269


성녀 「젤뜨루다」는 어느 날 험준한 절벽을 오르고 있을 때,

발이 미끄러져 골짜기에 굴러 떨어졌다.


동료 수녀들인 동정녀들은 

성사를 받지 않은채 죽는 것을 두려워 하지나 않았느냐고 

성녀에게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임종 때에 성사의 도움을 받을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지만,

그 보다도 더욱 천주께서 원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있읍니다.


왜냐 하면,

사람이 훌륭한 임종을 맞이하기 위한 최선의 준비는

천주님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임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합」5절의 6, 「루도」저 「성 젤뜨루다 전」2장)



요컨대 가장 근본적인 것은

거룩한 생활에 의해서 거룩한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다.

왜냐 하면, 영원한 운명은 오직 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만사를 초월하여 바라고,

또한 절대 무조건으로 기구해야 할 것이다.


섭리에 의해서 정해진 날을 기다리면서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을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최대한 풍성한 결실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시시각각에 있어 유념해야 할 유일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때가 다가왔다고 생각될 때,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는 죽음 그 자체에 관해서도,

그 모든 상황, 가장 굴욕적인 상황에 관해서까지도

온전히 우리의 의지를 천주의 의지에 적합시켜,

일치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과연 죽음을 거룩하게 하고 평화스러운 것이 되게 하려면,

이보다 더 탁월한 길은 그 밖에 결코 없기 때문이다.  p.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