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위탁

68 pp.349-355 제 3편 제 8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계속) 제1절 분발심(奮發心)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은가루리나 2019. 5. 17.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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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위탁의 대상



제1장 위탁의 일반적 대상


제2장 현세적 사물에 있어서의 위탁 일반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제3절 부귀와 빈천 ①

 제4절 장소와 환경 


제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건강과 질병 

 제2절 질병의 지연과 그 결과 

 제3절 삶과 죽음 

 제4절 자연적 은혜의 분배에 관한 불평등에 대하여

 제5절 직무

 제6절 휴식과 평온


제5장 명성의 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호평

 제2절 굴욕

 제3절 선인으로부터의 박해


제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영광의 생명

 제2절 은총의 생명

 제3절 선덕의 실천

 제4절 죄를 피하는 일

 제5절 계명, 서원, 회칙 등의 준수


제7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어떤 종류의 영적원조의 상실 - 



⑷ 


제8장 7장의 계속 - 실패와 과실

 제1절 분발심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3절 남의 영혼의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4절 우리 자신의 죄과


제9장 8장의 계속 - 내적시련의 일반


제10장 9장의 계속 - 유혹


제11장 10장의 계속 - 위안과 건조


제12장 11장의 계속 - 암흑, 무감각, 기타

 제1절 정신의 암흑

 제2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제3절 의지의 무력

 제4절 영적빈곤


제13장 12장의 계속 - 평화, 불안, 소심

 제1절 평화

 제2절 각가지 공포

 제3절 거룩하고 정의이신 천주께 대한 경의

 제4절 양심상의 小心


제14장 13장의 계속

 제1절 일반적 길인가, 신비적 길인가

 제2절 신비적 관상의 갖가지 상태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

 제4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제15장 기억해야 할 두가지 실례





p.349


제 3 편 위탁(委託)의 대상(對象) 


제 8 장 심령생활(心靈生活)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계속)



―실패(失敗)와 과실(過失)―



제 1 절 분발심(奮發心)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먼저,

「분발심에 기인하는 수행, 자선사업의 지도와 같이,

어떤 종류의 도덕적 또는 영적 선(善)」

즉, 천주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企圖)하는

우리의 모든 외부적 사업에 관해서 말하기로 한다.



천주의 섭리가

이러한 일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시는 것은 물론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천주께 대한 참된 사랑은, 

최고의 선이신 천주의 의지를 위하여,

이런 이차적 선(二次的善)을 희생하도록 우리에게 명하며,

또는 권장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가장 훌륭한 선인(善人)이라도

가끔 위험한 암초(暗礁)에 부딪치는 경우가 있다.


즉, 이런 사람들은,

천주께 대한 사랑을 선에 대한 사랑과 혼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는 전연 다른 것이다.


우리는 자주 오직 홀로 천주와 강하게 일치하여,

그 거룩한 섭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기 위해서는

천주께서 요구하지 않으시는 선은 

이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될 경우가 있다」라고


「도스다」신부는 말하고 있다.


p.350


천주의 섭리가 이런 사업에 우리를 사용하실 적에는,

우리는 그 안에 오직 천주만을 찾아야 한다.


또한 그것은 초자연적인 눈으로써 해야 한다.




「선도 이것을 나쁜 의향으로써 탐구할 때,

또는 선을 위해서만 선한 일을 바랄 때까지도,

그런 선의 추구는 참된 애덕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의심할 여지 없이,

신적 애덕(神的愛德)은 선을 바라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천주를 위하여 바라는 것이다.



주의 벗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선의 벗인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자주 낙담과 질투와 비굴함에 충만돼 있는가!


선을 위하여 바친 그들의 노력은 흔히 수포로 돌아가는데,

그 때문에 그들은 낭패하고 만다.


다른 이가 자기 일에 가담하는 것을 보면 시기하게 된다.


또한 자기의 사업에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같은 위대한 속죄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다른 이의 명성이나 신용을 손상시키고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또는 그들에게 방해를 가하는 것마저 감히 사양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신적 선(神的善)보다도, 오히려 인간적 선(人間的善)을 바란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 쪽에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교묘한 그리고 자주 무의식적인 우회(迂回)를 하여,

자기 밑에 되돌아 올 뿐이다.



그들은 선인(善人)과 천주의 사람과의 구별을 모른다.


외관상 찬란한 많은 사업이 

천주의 사랑에 의해서보다도,

자기애(自己愛)에 의해서 기도(企圖)되고 인도됐기 때문에

실제에 있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끝나리라!」

(도스다 「천주와의 일치」4편, 3,4장)



모든 일을 기도(企圖)함에 있어 중요한 점

단지 의향의 순결에 관해서 경계함으로써 만족하지 않고,

의무, 즉 천주의 의지에만 굳게 고착하여,

일의 성부(成否)에 관해서는,

덕에 의한 무관심한 태도를 견지한다는 것이다. p.351



실제, 우리는 한편에 있어,

천주께서 이러한 사업을 현재 우리에게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현명하게도 믿고 있다.


그러나 다른 편에 있어,

우리는 미래에 관한 천주의 의향을 전연 알 수 없다.



「천주는 당신에 대한 우리의 봉사에 있어,

이 거룩한 무관심을 수련시키기 위해서는,

흔히 그 성공을 바라지 않으시드라도,

극히 고상한 계획을 우리 마음 안에 일으키신다.」

(「신애론」9편 6장)



얼핏 그것은 섭리의 장난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실패 안에서 이익을 거둘 수 있는

극히 이윤(利潤)이 많은 방법이다.


천주께서는 이로써 우리에게

경건한 소망과 양심적 근로와 시련의 감수와의 이익을 

동시에 주시기 바라신다.


이에 반하여 

성공은 아마 겸손, 이탈, 그 밖에 각가지 선덕을 

우리에게 잃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의 사업을 되는대로 내던져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천주께서 우리의 손에 맡기신 사업에 있어,

올바르게 성공하는데 필요한 모든 일을 결코 등한히 여겨서는 안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기대에 거스르는 것과 같은 사건이 일어나도,

온순히, 평온하게 그것에 복종해야 한다.


왜냐 하면,

천주의 영광에 관한 일, 

또한 우리의 직무에 속한 일에 관해서는,

충분히 유의하도록 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건 그 자체가 우리의 권한 안에 없다면

우리는 그것에 관해서 아무런 의무도 책임도 부과돼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가급적 태연스럽게 과감하게 사업에 착수하고,

견인(堅忍)으로써 그것을 계속해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주께서 우리에게 보내시기를 원하시는 사건에 대해서도 역시,

온순히, 평온하게 이에 동의(同意)해야 한다.」

(「신애론」9편 6장)




성「벨나도」는 교황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둘째 십자군(十字軍)의 유세(遊說)에 나섰다.


그는 무수한 기적으로써

자기가 설파하는 것이 진실하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드디어 많은 이상한 사건은,

그가 천주의 의지를 참으로 성취했음을 증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의 원정(遠征)은 비참하게도 실패로 돌아가고

악평의 폭풍은 이 거룩한 설교자 위에 일시에 닥쳐왔다.


p.352


그는 그 일에 관하여 고민하였다.

복자「요왕.드.까사마리」는 서신을 보내어 그를 위안하였다.


「만일 십자군의 병사들이 참된 그리스도신자의 행동을 취했다면,

주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죄악의 구렁에 빠졌읍니다.

천주께서는 그들의 악의에 대하여 관대하게 대하지 않으셨읍니다.


천주께서는 그들을 정화(淨化)하시고

천국에 이끄시기 위해서만 그토록 고난을 주십니다.


많은 이는,

조국에 돌아가서 다시 죄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 하여

오히려 세상을 떠나가는 것이 다행하다고 고백하면서 죽어 갔읍니다.



당신에 관해서는 주께서 이번 일에 있어,

당신께 웅변과 활동과의 은혜를 베푸셨읍니다.


왜냐 하면,

천주께서는 이 원정(遠征)에서 이끌어 내실

모든 효과를 미리 알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군의 사업은 사람들 눈에는 실패로 끝났다고 하지만,

천주의 계획의 훌륭한 성취였다.


동방의 교회를 구출할 수는 없었지만,

천국의 교회에 속하는 이의 수를 더하게 했다.


성인은 그 고뇌에도 불구하고,

천주의 심판을 우러러보며,

굴욕을 기꺼이 맞아들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이 불평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천주께 대해서가 아니고, 내게 대한 것이기 바란다.

나는 주의 방패가 되는 것을 행복하게 여긴다.


나는 기꺼이 악담하는 이의 공격을 받고,

모독자의 독시(毒矢)는 천주에까지 이르지 않도록,

스스로 이것을 받기 원한다.


사람이 천주의 영광만을 소중히 여긴다면,

나의 명예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성찰」2편 1장,「서간」386,「전기」3편 4장)



p.353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와 함께 다음의 보기를 들자.


성『루이』왕은,

영시(靈示)에 의해서 바다를 건너 원정(遠征)을 시도하였는데,

실패로 끝났다.


그는 마음을 산란케 하지 않고 그것을 조용히 받아 들였다.


이 평온한 인종(忍從)의 태도야말로 오히려

그 원대한 계획보다도 존중할 것이 아니겠는가.



『아씨지』의 성 『프란치스꼬』는 이교도를 회심시키고,

또는 순교할 목적으로 『에집트』에 건너 갔는데,

그것은 분명히 천주의 뜻에 적합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 어느 것도 달성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그런데 그것 역시 천주의 뜻이었다.



마찬가지로 

『빠두아』의 성『안또니』가 순교를 열망한 것도,

순교할 수 없었던 것도, 모두 천주의 뜻이었다.



성『이냐시오.로욜라』

저 예수회의 건설에 심혈을 기울인 후,

이미 허다한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장차 더욱 더 유익하게 보였을 때를 당하여,

그 회의 파탄은 그에게 있어 분명히 가장 큰 비통사(悲痛事)였지만,

비록 30분 후에 그 회의 해산(解散)에 실제로 부딪쳤다 할지라도,

감연히 그것을 체념하고 

천주의 의지 안에 마음의 평온함을 회복할 수 있다고

스스로 확신할 정도의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

(「신애론」9편 6장)




그 밖에도 무수한 보기를 들 수 있겠지만,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자신의 보기도 그 하나다.


그는 저 「방문회」의 창립에 있어,

그 모퉁잇돌이었던 성녀「요안나.샹딸」의 중환(重患)때문에,

겨우 탄생한 회가 곧 소멸할 것처럼 생각됐을 때,


「아, 천주는『아브라함』의 희생을 기꺼이 여기신 것처럼,

우리 의지의 희생도 기꺼이 여기시리라.

주는 나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셨다.

주는 또한 앗으셨다.

그 거룩한 이름은 찬미를 받으소서!」(「정신」6편10) 라고 외쳤다.




성「알퐁소」역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항상 우리 수도회를 대해(大海)의 복판에서

역풍(逆風)에 시달리고 있는 일엽편주(一葉片舟)와 같이 생각하고 있다.


만일 천주께서 그것을 깊은 바다 속에 가라앉게 하시려는 뜻이라면,

나는 미리서, 그리고 언제나 이렇게 말하리라.


『당신의 거룩한 의지는 찬미를 받으소서!』라고.」

(베르트 「성 알퐁소 전」6편 2장)


p.354


또한,「즈네브」의 성인 주교는 덧붙여 말한다.


아, 천주께서  그들의 마음에 고취하시는 커다란 사업에 과감히,

그리고 대담하게 착수하드라도,

동시에 천주께서 그것을 앗으실 때에는,

온순히 평온하게 그것을 버리고 뜻대로 복종하는 영혼은 얼마나 행복하랴!


천주께서 원하신다면, 선업도 버리고,

그리고 우리의 안내자신 천주의 의지가 그것을 명하실 때,

중도(中途)에 돌아선다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무관심의 태도다. 




아, 실패에 있어서의 그러한 위탁은 얼마나 천주께 영광을 돌리고,

또한 우리를 풍부하게 하는 것이랴!


이에 반하여 그럴 때 불안, 근심, 낙담에 지배되도록 맡기는 것은,

얼마나 초자연적 정신이 희박함을 폭로하는 것인가!



「『요나』는,

천주께서 『니니베』위에 그 예언을 성취하지 않으신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슬퍼한 것은 커다란 잘못이었다.


『요나』는『니니베』의 파멸을 알려 천주의 의지를 완수하였다.


그러나,

그는 천주의 의지에 자신의 이익과 고집을 섞었기 때문에,

천주께서 그 예언을 말씀대로 엄격하게 실행하지 않으심을 보았을 때,

그는 노하여 부당하게도 불평하였다.


만일 그가 오직 천주의 의지만을 행동의 유일한 동기로 삼았더라면,

『니니베』가 범한 죄의 벌을 받는 것을 보고,

만족했으리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주께서『니니베』가 받아야 할 벌을 용서하시는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겨야 했을 것이다.


우리는 기도(企圖)하는 것이나 취급하는 것에서 성공을 바라지만,

그러나 천주께서 모든 것을 우리의 뜻대로 하시기를 요구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신애론」9편 6장)


p.355


만일 어떤 사업의 실패가 우리 자신의 잘못에 의해서,

예컨대 열심 또는 현덕(賢德)의 부족때문에 생겼다면,

그런 경우에도 역시 천주의 의지에 동의(同意)할 것인가.


그렇다.

왜냐 하면 천주께서는 과오를 배척하시지만,

그러나 그 벌은 바라시기 때문이다.



「천주는 『다위』왕이 죄를 범한 원인은 아니시지만,

그 벌을 내리신 것은 천주시다.


또한 천주께서는 『사울』을 죄에 빠지게 하지 않으셨지만,

그 벌로서,

이미 그 수중에 있었던 승리가 상실된 것의 원인이심이 분명하리라.


그러므로,

우리의 과오의 벌로서,

거룩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는 경우에 깊이 통회하여,

과오를 싫어함과 아울러

과오때문에 생긴 고통의 벌을 기꺼이 받아야 한다.


왜냐 하면,

죄는 천주께서 결코 바라시는 것이 아니지만,

고통스러운 벌은 그 의지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동상)




요컨대,

천주의 영광이 돼야 할 모든 사업은 

천주의 작용과 우리의 작용을 함께 요구한다.


「잘 심고, 잘 가꾸는 것은 은총의 도움과 상반(相伴)하여,

우리가 해야 할 임무지만,

발육케 하는 것은 홀로 천주의 일이다.」(동상)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성공은 이것을 천주의 손에 맡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