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위탁

56 pp.289-296 제 3편 제 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호평 ★거룩한위탁

은가루리나 2019. 2. 15. 14:29


옴니아  등급변경▼  조회 158  추천 0  2013.01.02. 05:40



제3편 위탁의 대상



제1장 위탁의 일반적 대상


제2장 현세적 사물에 있어서의 위탁 일반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제3절 부귀와 빈천 ①

 제4절 장소와 환경 


제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건강과 질병 

 제2절 질병의 지연과 그 결과 

 제3절 삶과 죽음 

 제4절 자연적 은혜의 분배에 관한 불평등에 대하여

 제5절 직무

 제6절 휴식과 평온


제5장 명성의 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호평

 제2절 굴욕

 제3절 선인으로부터의 박해


제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영광의 생명

 제2절 은총의 생명

 제3절 선덕의 실천

 제4절 죄를 피하는 일

 제5절 계명, 서원, 회칙 등의 준수


제7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어떤 종류의 영적원조의 상실


제8장 7장의 계속 - 실패와 과실

 제1절 분발심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3절 남의 영혼의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4절 우리 자신의 죄과


제9장 8장의 계속 - 내적시련의 일반


제10장 9장의 계속 - 유혹


제11장 10장의 계속 - 위안과 건조


제12장 11장의 계속 - 암흑, 무감각, 기타

 제1절 정신의 암흑

 제2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제3절 의지의 무력

 제4절 영적빈곤


제13장 12장의 계속 - 평화, 불안, 소심

 제1절 평화

 제2절 각가지 공포

 제3절 거룩하고 정의이신 천주께 대한 경의

 제4절 양심상의 小心


제14장 13장의 계속

 제1절 일반적 길인가, 신비적 길인가

 제2절 신비적 관상의 갖가지 상태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

 제4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제15장 기억해야 할 두가지 실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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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편 위탁(委託)의 대상(對象) 


제 5 장 명성(名聲)의 선익(善益)에 있어서의 위탁(委託) 



제 1 절 호 평 (好評)




자신에 관해서 호평, 

특히 장상과 수도단체로 부터 받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귀중한 것이다.

실제, 장상이나 형제가 주는 존경과 신뢰를 우리는 가장 높이 평가한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또한 일의 시비곡직(是非曲直)을 불문하고,

구설(口舌)이 우리를 거슬러 광분(狂奔)하는 일은 결코 드물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결코 작은 시련이 아니다.



성영 작자는 이에 관해서 자주 천주께 탄식하여, 호소하고 있다.


그는「 여러 사람의 말다툼」

「그들의 이빨들은 창들과 화살들이요, 또 그들의 혀는 날 선 환도」라는 것,


간교한 혀는, 

장정의 뾰족한 화살들, 또 금작의 숯불덩어리들임을 잘 알고 있었다.

(성영 30.21, 56.5, 19.4 등)




음으로나 양으로 발사된 혀의 화살이 우리의 호평을 손상시키는 경우에,

우리는 항상 인내로써 그 고통을 꾹 참고 

천주의 임의의지에 적합하여야 한다.


참으로 사람들의 배후에 보아야 할 것은 천주 한 분 뿐이며,

알거나 모르거나를 막론하고 그들은 그 연장에 불과하다.


천주께서는 그들을 그 한마디 한마디에 관하여 심판하시고,

그 행위에 따라 맞갖게 갚으시리라.


그러나 그때까지 천주께서는 우리를 시험하시기 위하여 

열심도 어리석음도, 악의까지도 이용하시려 하신다.


우리의 호평은 천주의 것이며,

천주께서는 뜻대로 그것을 처리하실 권리를 잡고 계신다.



우리는 직무의 수행을 위하여 호평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천주께서는

당신의 영광과 사람들의 영혼과 우리의 영적 진보를 위하여

무엇이 가장 알맞는 것인지를 우리보다도 잘 알으신다.



만일 천주께서 호평을 받는 점에 관해서 우리를 시험하시기를 바라신다면,

이 목적에 알맞는다고 생각하시는 연장을 택하시는 것은 온전히 자유시다.


본성의 탄식과 불평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힘써 인간을 잊고, 천주의 손만을 보기로 하자.



그리고, 

사랑의 계획에서 우리를 치시는 손에 효애(孝愛)로써 친구하고,

시련이 우리에게 가져올 수 있는 모든 효과를 거두도록 전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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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통은,

실제, 많은 견고한 선덕을 육성하는데 드문 기회를 우리에게 준다.


자기 호평에서 이탈한 영혼은 

온전히 순수한 의양으로써 천주를 섬기기 위하여,

사람들의 비평을 초월하여 다만 천주 한 분에게로 높이 오른다.



영혼은 이 쓰라린 시련을 기꺼이 받을 때,

그 겸손은 힘을 얻고, 더욱 더 깊이 뿌리를 박게 된다.


그런 때야말로 

의인은 자신을 경멸하고, 남에게서 모욕당하는 것을 감수한다.


영혼은 분노의 반역을 침묵시켜,

그 유화함은 견고하게 되고,

또한 그런 불의(不義)에서 오는 슬픔을 억제하여 

그 인내는 견고한 것이 된다.



모든 불의(不義)를 용서하고 적을 사랑하며,

반감을 가지지 않고 그들에 관해서 말하며,

악을 선으로 보답하는 애덕은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겠는가!


천주께 대한 신뢰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마음의 고요함 가운데 전개하며,

그리고 주께 대한 사랑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섬기는 충실함 가운데 진보한다.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정신」12. 3,  

존자 듀뽕「발다살. 알바레스 전」40장 참조)


이 쓴 시련의 한가지 달콤한 열매는 

자주 선으로써 악을 이기며,

온전히 양선하고 자비로우며,

화목함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행복을 항상 맛보는 것이다.

(마태오 5.4, 7, 9)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마태오 5.4,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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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께서는, 시련에 의해서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와 그 충실한 벗의 모범과, 교훈을 본받게 하시어,

우리를 마음으로 겸손한 이가 되게 하시기를 바라신다.



「예수 . 그리스도처럼, 그 명성이 손상된 사람이 있었겠는가.

어떤 모욕이라도, 그리스도에게 가해지지 않았던 모욕이 있었던가.

어떤 훼방도, 그이에게 지워지지 않았던 훼방이 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 성부께서는

그이에게 모든 이름을 초월하는 거룩한 이름을 부여하시고,

천대를 받으실만큼 그를 높이 현양하셨다.


사도들 역시 예수의 거룩신 이름을 위하여

모욕을 받은 집회에서 환희에 충만되어 나오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이처럼 존귀한 이유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참으로 영광이다.


우리의 허영심이 고난중에서 빛을 내기 위하여

호화로운 박해만을 바라고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영광 중에 십자가에 못 박히고 싶어한다.


그대들은 순교자가 그와 같은 참혹한 고통을 당했을 때,

그것을 보고 있던 구경꾼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아니 도리어 그들로 부터 증오와 저주의 말을 듣지 않았던가.


아, 끝없는 영광에 우리를 이끄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그처럼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신 분의 영광을 

더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 호평을 희생하려는 자 그 얼마나 적은가!」  

(성「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정신 10.15)




이와 같이 말한 후

성「프란치스꼬. 살레시오」는 이어 덧붙인다.


「호평이 무엇이기에 

그다지도 많은 이가 이 우상에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있는가.


결국, 그것은 일장춘몽(一場春夢), 

하나의 그림자,  한 조각의 풍문,  한 가닥의 연기, 

그 기억은 물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리는 허망한 칭찬이다.


그것은 

많은 이가 자신에게는 조금도 없는 결점에 관해서 비난을 받고,

또한 자신에게는 악덕이 있다고 잘 알면서,

그 반대의 덕이 있는 것 같이 칭찬을 받는 것을 보고

가끔 놀라지 않을 수 없을만큼 평판은 거짓이다. 」(동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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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거룩한 주교에게,

사람이 그에게 욕설을 퍼붓는다든가,

남의 악한 표양이 되는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든가를

말하기 위해 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때 성인은 자신을 변호하는 대신 이렇게 대답하였다.


「다만 그것 뿐 입니까. 

아, 참으로 그들은 전부를 알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내게 아부하여 나를 너그럽게 보아 줍니다.

그들은 내가 실제보다도 착한 이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천주는 찬미를 받으소서!


나는 자신을 개선해야 합니다. 

비록 이 일에 관해서는 시정할 필요가 없다 하여도

내게는 그 밖에 많은 시정해야 할 결점이 있읍니다.


여하튼, 나를 그렇게 관대하게 주의시켜 주는 것은 

참으로 자비로운 일입니다.」라고. (동12 . 4)




호평에 대한 우리의 이탈과 그것에 관한 천주에의 위탁은,

비록 어느 정도 완전하드라도,

아직도 그것에 정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구약의 현자(賢者)가 명백히 권고하고 있는 것이며(집회서 41.15), 

따라서 천주의 명시의지(明示意志)이다.




성「프란치스꼬 . 살레시오」는 말한다.


「호평은 사회성립의 근본의 하나이며,

이것 없이는 우리는 공중(公衆)에게 무익할 뿐 아니라,

악표양이 되어 남에게 해를 끼칠 우려가 있으므로,

우리가 호평을 바라고 이것을 중요하게 여길 것을 

애덕은 우리에게 요구하며,

겸손도 역시 허용한다.



그리고 호평은 

또한 우리의 선덕 특히 나약한 초보의 선덕을 보호하는데 

매우 유익하다.


우리의 호평을 유지하고, 

남의 신용에 맞갖도록 행동할 의무는,

우리의 용기를 강력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자극한다.



그러나 호평을 간직하기 위하여 너무나 열심한 나머지,

이에 구애되는 것도 좋지 않다.


자기 호평에 관해서 신경이 과민한 사람은,

마치 사소한 불쾌감을 느끼면, 곧 의약을 사용하는 사람과 같다.


남이 악담하거나 무함할 때에,

오불관언하여 이에 무관한 태도로 있는 것은,

민감하거나, 반박하거나, 쟁론하는 것보다 일반적으로 훨씬 유효하다.


비방은 이것을 무시하면 점차로 소멸한다.

너무 관심을 갖는 것은 비난을 인정한 일이 된다.



우리는 호평을 소중히 여겨야 하지만,

이것을 우상(偶像)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선인의 눈에 기쁘게 보이는 것은 좋지만,

악인의 눈에 아부함은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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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평을 손상할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무익하고 어리석은 교제, 관례, 우의(友誼), 야심 등을 온전히 버려야 한다.

호평은 그런 허망한 즐거움보다도 훨씬 귀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신심(信心)의 수행(修行), 선덕의 진보, 영원한 행복을 위한 노력 때문에,

혹 조소하고, 혹 훼방하며, 혹 악담을 마구 뇌까리는 사람이 있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 그리스도를 우러러보며,

그런 사람들이 하는대로 맡기는 것이 좋으리라.


주께서는, 우리의 호평의 수호자가 되어 주시리라.


만일, 주께서 그 실패를 허용하시는 일이 있으면,

그것은 혹 우리에게 더욱 호평을 주시기 위해서거나,

혹 그 1『그램』을 백『킬로그램』의 명예보다도 소중히 여겨야 할

귀중하고 거룩한 겸덕(謙德)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서다.


이유 없이 남에게 비방을 받는다면,

우선 이 무함에 대하여 조용히 진실을 입증하자.


그래도 남이 뇌까린다면,

우리는 겸손으로써 이를 인내하며,

우리의 호평을 영혼과 더불어 천주의 손에 맡기자.


호평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것보다 훌륭한 길은 또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소의 예외가 있다.


첫째로,

어떤 종류의 극히 불명예스러운 죄악에 관해서는,

훼방을 정당하게 면할 수 있는 경우에 극력 이를 부인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 호평이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특수한 사람들의 경우는 예외이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에는 조용히 손상된 명예를 회복하도록 힘써야 되기 때문이다.」

(「입문」3편 7장 )



p.294


이와 같이 「필로테아」에게 말하고 있는 성「프란치스꼬 . 살레시오」

말 그대로 이것을 실행하였다.


그는 주교라는 현직(顯職)이 자신의 몸에 있어서까지도 존경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존경에도 멸시에도 무관심하였고,

비난도 칭찬도 모두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는 자기 직무를 위태롭게 하는

어떤 종류의 중상에는 조용히 변호하였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남에게서 가해지는 모욕이나, 악평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또는 극히 드물게 그것을 상기할 때에도 다만 웃어 넘겼다.


「남의 악담을 뇌까리는 이는 너무나도 민감하다.

참으로 악담은 바람에 날리는 말의 작은 십자가에 불과하다.

파리의 날개소리나, 찌르는 것을 참을 수 있기 위해서는

부드러운 귀와 피부가 필요하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심한 훼방을 당했을 적에는,

두 도적 가운데서 십자가상에 

사람이면서 사람 아닌 것과 같은 죽음을 당하신 구세주에게 시선을 쏟고, 

이렇게 말하였다.


「보라, 참된 청동(靑銅)의 뱀을,

이것이야말로 

바라보는 이를 뱀의 독설(毒舌)에 물린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이다.


이 위대한 모범을 앞에 두고도, 한탄하는 것은,

더구나 비방하는 이에게 원한을 품는 것은 수치스럽게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우리를 완전한 정의로써 따지게 될 최후의 심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다만 지극히 사랑하올 주의 기쁨을 사기만 하면,

사람들로부터의 비난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p.295


그는 또한 남이 그의 변호를 하는 것까지도 바라지 않았다.


「나를 대신하여 성을 내시도록 부탁하였읍니까.

말하는대로 맡겨 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말만의 십자가, 바람의 움직임에 불과합니다. 


아마 훼방자는 

나를 사랑하는 이보다도 나의 결점을 잘 알아챌지 모릅니다.


그들은 나와 힘을 합하여, 나의 자애심을 없애는 일을 돕고 있으므로,

원수라기보다는 오히려 벗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요컨대,

성인은 칭찬에도 경멸에도 전연 무관심한 태도로써

자신을 온전히 천주 섭리의 손에 맡기고,

호평에서나 악평에서나,

다만 자기 의무를 수행하는데만 전념하였고,

천주께서 당신께 대한 봉사에 있어

유익하다고 생각하시어 허락하신 호평 이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성 프란치스꼬 . 살레시오 「정신」10.15,  12. 4,7, 「전기」5, 「서간」424 )



성인들은 

훼방을 물리칠 수 있고, 거의 그 임무가 있다고 생각될 때에도,

일반적으로는 고난의 주의 모범을 본받아,

천주께서 적당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자신들의 올바름을 입증해 주실 배려를 섭리에 맡기고

오히려 침묵을 지키는 편을 택하였다.




허다한 보기 가운데서

성 「제랄도 . 마옐라」의 그것은 특히 기억할 만한 모범이다.


「어느 파렴치한 여인이, 

불미로운 죄가 있다고 그를 모함하였다.


성『알퐁소』는 불안과 놀라움에 싸여 그를 불러,

내용을 말하고 무죄하다면, 사실을 진술하라고 명하였다.

석상(石像)처럼 『제랄도』는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았다.


성인은 그에게 영성체를 금지시키고,

모든 외부와의 접촉을 끊게 하였다.  p.296


그래도 그는 한마디의 불평도 말하지 않았다.

그의 무죄함을 믿고 있던 신부들은 무죄를 해명하도록 자주 권하였다.

『천주가 계십니다.  천주께서 이 일을 배려해 주실 것입니다』라고 

그는 대답할 뿐이었다.


사람들이 그의 순교와도 같은 고통을 어루만지기 위하여

다만 영성체의 허락을 청하도록 권고했을 때,

『아닙니다, 

천주의 의지의 압착기(壓搾器)밑에 압착되어 죽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로부터 50일 후에, 천주께서는 『제랄도』를 

성자와 같이 『사람들의 수치』로 하신 것을 만족히 여기시어 

그 무죄함을 밝혀주셨다.

즉 그를 모함한 가련한 여인은

자기가 악마의 권고에 의해서 행동했음을 자백하고 무함을 취소하였다.


백일하에 무죄의 몸이 된 『제랄도』는,

무함을 당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태연하였다.


그리고 성『알퐁소』가 해명을 거절한 이유를 묻자,

그는 숭고한 대답을 하였다.

『신부님, 회칙(會則)은 결코 변명을 하지 않고 

도리어 침묵을 지켜 어떤 고통이라도 인내하라고 

명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베르트  「성 알퐁소 전기」2편 8장)



물론 그런 경우에는 회칙을 지킬 의무는 없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위의 보기는 감탄할 것이지만, 그대로 모방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보기는 호평에 대한 우리의 민감함을 얼마나 통쾌하게 분쇄해 주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