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위탁

11-1

은가루리나 2019. 8. 7. 16:02



제 3 편 11장 심령생활(心靈生活)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계속) - 위안(慰安)과 건조(乾燥) - (1)|★거룩한위탁


옴니아|등급변경▼|조회 159|추천 0|2013.06.24. 22:09





-  위안(慰安)과 건조(乾燥) -   (1)



천주께서는

때로는 감각적 위안과 영적 감미(靈的甘味)를 아낌 없이 풍부히 베푸시며,

때로는 알맞게 이를 주시는데,


후에 그 감미로움을 제거하실 적에는

영혼은 자신의 공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감정은 식어가고, 상상은 목표없이 방황하며,

지성(知性)은 무디게 되고,

그리고 흔히 권태, 혐오의 정이 의지의 깊은 바닥에 까지 침입하는 때도 있다.


성인들 마저, 이 괴로운 마음의 동요를 경험하였다.



성「벨나도」는 다음과 같이 그 고뇌를 토로하고 있다.



「나의 마음은 얼마나 메마른 땅처럼 건조한가.

이 굳어지고 무딤은, 통회의 눈물마저 흘러 나오지 않을 정도다.


『성영』도 내게는 맛이 없으며,

독서도 마음을 끌지 않고, 기도도 감미를 잃었다.


지금은 그저 전의 묵상을 헛되이 찾아 구할 뿐.

영혼의 황홀이여, 어디에 있는가!


마음의 맑음, 성신에 있어서의 평화와 환희여,

어디에 있는가!」

(「아가에 관한 설교」54의 8)




성「알퐁소」도 또한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그렇게도 커다란 건조, 영적 페허(靈的 廢墟)에 부딪쳐,

나는 이미 기도 안에서도, 영성체에서도 주를 찾을 수 없다.


주의 수난하심에도 거룩한 성체에도 나는 이미 감동을 느끼지 못하며,

모든 신심업(信心業)에도 무감각하게 돼 버렸다.



나에게는 자신이 사랑도 희망도 신앙도 없는,

말하자면 천주께 버림 받은 영혼과 같이 느껴져 견딜 수 없다.」라고.


(내적고뇌2) 이런 고통은 언제 종말을 고할지도 모르며,

오래 연장될 적에는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위안을 떠나,

오직 천주의 뜻에 고착(固着)됨에 따라,

그 고통은 점차로 부드럽게 되고,

평화가 이를 대신하여 마음을 차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위안과 건조에 처할 것인가.

이 점에 관해서 길을 잘못 디디는 영혼이 적지 않다.



당황하지 않도록,

우리는 항상 자기의 목적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된다.


그런데, 우리는 영적 생활의 완전을 향하며,

그 특징은 애덕의 완전에 있다.


그러나 사랑은 행위에 의해서 증명된다.



원하는 것이나 원하지 않는 것이나,

모든 것에 관해서 천주와 의지를 하나로 하고 따라서,

그 명시의지에 의한 모든 명령은 신속하고,

과감하게 이를 수행하려 하며,


그 섭리의 모든 배합(配合)에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상태에

우리를 확립하기 위하여,

사랑이 충분한 지배력을 획득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완전한 것이 된다.


이것은 진실하고 활발한, 그리고 세력이 있는 것이며,

자신을 남김없이 천주께 바치고,

은총에 자신을 온통 맡기는 사랑의 구현(具現)이다.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와 성「알퐁소」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참된 신심, 천주께 대한 진실한 사랑이다.


이것은 우리가 기도에 있어,

영성체에 있어 그 밖의 거룩한 신심업에 있어 유일한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성 알퐁소「거룩한 성찰」39, 성 프란치스꼬.살레시오「입문」4편13,14,15장 참조)



그러나,

「참된 신심이 천주께서 바라시는 것만을 바라고,

또한 실행한다는 단호한 결의에 있는 이상,」

(성 알퐁소「수도자의 성화」10문 3. 2의 10)



위안은 반드시 신심이 아니고,

건조는 반드시 신심이 아닌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이 견고하고 단호한 의지는,

건조에도 불구하고 깊이 우리 마음에 뿌리를 박고 있을 수 있는데 반하여,

감미에 젖어 있으면서 아직 의지는 표면의 것에 불과하며,

하등 확고한 것이 아닐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경험에 의해서 증명된 사실이다.



위안과 건조는 결코 신심의 확실한 기준이 아니다.


물론,

신심은 본질적으로 의지 안에 있는 것이며,

감정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무를 식별하는데 열매로써 하는 것처럼,

신심은 그 초래하는 감정의 움직임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 업(業)에 의해서 평가하여야 한다.



감동(感動)은 나무의 꽃과 비슷하다.


그것은 풍성한 결실을 생각케 하는 훌륭한 장식(裝飾)이지만,

그러나, 슬프도다, 얼마나 많은 희망이 배반되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미혹(迷惑)이 감각적 신심(感覺的信心)안에 잠입하고 있는가!



위안도 건조도, 이것을 좋게 성화(聖化)할 때에는,

우리를 목적지에 이끄는 하나의 길이 된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유일한 길도 아니고,

또한 주요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근본적인 나날의 수단을

천주의 명시의지(明示意志) 안에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것에 관해서는 이미 말했다.


위안과 건조는,

천주께서 그 임의의지(任意意志)에 의해서

우리에게 가끔 주시는 변하기 쉬운 수단이다.


그런 것은 극히 현실적인 그리고 때로는

결정적인 유효성이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때문에 본질적인 수단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위에 말한 바에서,

위안과 건조에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즉, 우리의 주요한 주의는,

목적과 그것에의 본질적인 수단에 향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위안과 건조는 단지 이차적의미(二次的意味)밖에 가지지 않는다.



위의 고찰과 마찬가지로 유익한,

또 하나의 반성해야 할 점은 ,

위안과 건조는 이것을 좋게 성화할 때는,

우리에게 있어 유력한 지주(支柱)가 되며,

그것을 잘못 사용할 적에는 위험이 많은 장해물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용하는 보기는 결코 드물지 않다.


감각적 신심(感覺的信心),

특히 각가지 영적 감미 (靈的甘味)는 극히 귀중한 은총이다.



즉, 그것은 우리의 정신을 고취하여,

죄악에의 먹이인 지상의 쾌락에 대하여 혐오와 싫증의 정을 일으켜,

기도와 덕의 길을 걷고, 달리며, 나는 희망과 힘을 준다.


비애는 우리의 마음을 좁히고, 환희는 이를 넓힌다.



그리고 이 마음의 확장(擴張)은 육욕을 억제하며,

정욕을 시정하고, 고집을 포기하며,

시련을 감수하는데 유력한 도움이 된다.



그것은 관대함의 비약(飛躍)과

영적 상승(靈的上昇)의 큰 희망을 심중에 치솟게 한다.


신적 감미(神的甘味)에 충만될 때,

고행(苦行)은 오히려 위안이 되며,

순종하는 것은 기쁨이 되고,

최초의 종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일어나며 덕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라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어떤 일을 하는데도 평화와 안정(安靜)안에서 한다.



성「알퐁소」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 것도 고통을 느끼게 하지 않고,

아니, 오히려 모욕도, 고난도, 박해도,

모든 것은 전부 희생 위에 희생을 가하는 기회,

지극히 엄위하신 천주와의 더욱 긴밀한 일치를 맺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희열의 원인이 된다.」(「수도자의 성화」3.2의 10)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에 의하면,


「위안은 영혼의 탐욕을 자극하며,

정신을 강화하고 신심(信心)의 신속함에

일종의 거룩한 쾌활함과 희열을 가하여,

이로써 우리의 행위를 외관적으로도 아름답고, 상쾌한 것으로 한다.



여하튼,

신심의 가장 사소한 위안도 세속의 가장 탁월한  오락보다 훌륭하다.」

(「입문」4편 13장)




위안은 생명의 태양이다.


물론,

천주께 대한 봉사에 있어서의 경향, 용이성(容易性), 교묘함 등,

만일 그런 것은 영혼이 모든 사물을 떠나 오랜 동안 덕을 닦은데서 나온다면,

특히 바람 직한 것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참으로 수득(修得)된 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우기 하늘로 부터의 은총에 의해서 가해지는 용이성은

그것이 감각적 위안에서 생기는 것이라도 결코 업신여겨질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몰리노스」와 같이,


「심령생활에 있어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모든 것은

혐오해야 하며 멸시해야 하고, 더러운 것이다.」라고는

꿈에도 말해서는 안된다.


위의 명제(命題)는 성교회에 의해서 배척된 것 중의 하나다.



「슈아레」는 말한다.


「영적인 사람은 감각 안에 경험하는 신심(信心)을 경멸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단지 초심자에게만 특유한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극히 완전한,

그리고 극히 높은 영역에 이른 관상에서도 일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감각적 신심은,

관상을 보다 쉽게,

보다 간단 없이 맛봄을 돕고,

그 준비를 이루는 것이다.」

( 수도생활 제42편 18.4)



감각적 능력은 우리를 천주께로 향하게 할 때에는,

극히 잘 조정된 것이며,

또한 그 활동이 공헌하는 바 매우 유용하다.



그 때, 우리의 모든 능력,

상부(上部)와의 어느 것도 서로 협력하여 활동하며,

서로 지탱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안의 모든 것이 기도하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더욱 완전한 것이 된다.



위에 말한 것은 위안의 아름다운 방면이지만,

그러나 그 이면(裏面)도 있다.


즉,

우리가 그것에 애착하여,

일종의 영적 탐식(靈的貪食)에 빠지고,

이에 탐닉하는 위험이 생기고

남에게의 모욕의 기회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위안이 우리의 본성,

또는 악마에게서 나온 때에는, 더욱 그렇다.


천주께서 그것을 베푸시는 주일 경우,

그것은 참으로 우리를 순명, 겸손, 희생의 정신,

그밖에 모든 덕에 이끄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있어서도 본성과 악마는 아마,

그 작용을 천주의 작용에 섞어 넣으려고 시도하리라.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위안을 배척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는 않지만,


그것을 남용하고,

미혹함에 떨어진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