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69 pp.356-362 제 3편 제 8장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은가루리나 2019. 5. 25. 20:23


옴니아  등급변경▼  조회 132  추천 0  2013.04.03. 06:18



제3편 위탁의 대상



제1장 위탁의 일반적 대상


제2장 현세적 사물에 있어서의 위탁 일반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제3절 부귀와 빈천 ①

 제4절 장소와 환경 


제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건강과 질병 

 제2절 질병의 지연과 그 결과 

 제3절 삶과 죽음 

 제4절 자연적 은혜의 분배에 관한 불평등에 대하여

 제5절 직무

 제6절 휴식과 평온


제5장 명성의 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호평

 제2절 굴욕

 제3절 선인으로부터의 박해


제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영광의 생명

 제2절 은총의 생명

 제3절 선덕의 실천

 제4절 죄를 피하는 일

 제5절 계명, 서원, 회칙 등의 준수


제7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어떤 종류의 영적원조의 상실 - 



⑷ 


제8장 7장의 계속 - 실패와 과실

 제1절 분발심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3절 남의 영혼의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4절 우리 자신의 죄과


제9장 8장의 계속 - 내적시련의 일반


제10장 9장의 계속 - 유혹


제11장 10장의 계속 - 위안과 건조


제12장 11장의 계속 - 암흑, 무감각, 기타

 제1절 정신의 암흑

 제2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제3절 의지의 무력

 제4절 영적빈곤


제13장 12장의 계속 - 평화, 불안, 소심

 제1절 평화

 제2절 각가지 공포

 제3절 거룩하고 정의이신 천주께 대한 경의

 제4절 양심상의 小心


제14장 13장의 계속

 제1절 일반적 길인가, 신비적 길인가

 제2절 신비적 관상의 갖가지 상태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

 제4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제15장 기억해야 할 두가지 실례





p.356


제 3 편 위탁(委託)의 대상(對象) 


제 8 장 심령생활(心靈生活)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계속)



―실패(失敗)와 과실(過失)―



제 2 절 자기 성화(聖化)에 있어서의 실패



자기 성화에 관해서도 위와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덕의 진보와 결점의 시정(是正)에는,

천주의 작용과 우리의 협력이 서로 필요하다.



물론, 은총은 기도하는 이, 충실한 이에게 약속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은혜의 분량, 그 시기, 그 밖의 사정에 관해서는

어디까지나 판정자(判定者), 절대주(絶對主)가 되신다.




자기 성화처럼 우리에게 있어 귀중한 것은 없다.

그리고 우리 성부께서는 우리보다 더욱 그것에 깊이 마음을 기울이신다.


성화가 우리 자신에게 의존하는 한,

큰 소망을 품고, 이에 대한 동경을 될 수 있는대로 높이 올리자.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그 생명을 넘겨 주시고,

제대 위에서 날마다 자신을 바치시며,

풍부한 약속에 충만돼 있는 천직(天職)에 우리를 부르신 주께,

어찌 신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선의(善意)가 자신을 의지하는 일 없이 천주께만 의뢰한다면,

우리는 다만 자기 성화를 충분히 바라지 않는 것,

또는 많은 은총을 불모상태(不毛狀態)로 방치해 두는 것만을 

두려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는 노력과 모든 방법을 강구하여,

바라고 기도하며, 일하기로 하자.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열심의 분량을 배가하여 

이 거룩한 일에 있어, 중도에서 좌절하는 일이 없도록 힘쓰자.


그러나,

결과에 관해서는, 더 자세히 말한다면,

성공의 정도. 그 시기, 그 형태, 및 그밖의 사정에 관해서는 

천주 성부께 맡기고

불안, 초조 그 밖에 목적에 도달하는데 알맞지 않는 모든 방법을 일소하자.



P.357


덕의 진보에 관해서는

성「프란치스코.살레지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거룩한 사업에 성공하는데 필요한 것은

한가지라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리가 심고 물을 준 다음에는 

소망과 일의 열매는, 이것을 천주의 섭리에 기대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기대할만큼 신심생활(信心生活)에

진보의 발자취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어도,

그렇다고 결코 마음을 산란케 해서는 안된다.


언제나 평온함이 마음을 지배하도록 평화 안에 머물러 있자.



우리의 영혼을 훌륭하게 배양한다는 것은 우리의 임무이며,

따라서 그것에 충실히 종사해야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수확의 풍요함에 관해서는 그 배려를 주께 일임하자.


훌륭한 추수를 거두지 못했다 하여 농부는 결코 책망을 받지 않겠지만,

만일 그 밭을 갈지도 않고, 씨를 뿌리기를 태만히 했다면 어떻겠는가.



덕의 수업(修業)에 있어서는

언제까지 경과해도 자신이 아직도 초심자라는 것을 보고

조금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 하면,

신심생활의 수도원에서는 누구나가 항상 자신을 초심자로 간주하고

또한 거기서 일생을 수련(修練)하도록 돼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스스로 수련기가 끝났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실제로는 아직도 수련자이며,

세속에 되돌아가기에도 알맞는 자라는 것보다 명백한 증명은 또 없다.


왜냐하면,

천주를 섬기고 천주께 대한 사랑에 진보해야 할 의무는,

죽는 순간까지 계속하기때문이다.」(「신애론」9편7장, 「대화편」7)




거룩한 박사 「프란치스꼬.살레시오」는,

성녀「요안나.샹딸」을 지도함에 있어,

그의 마음을 매우 괴롭히고 있던 어떤 종류의 소망에 경계하도록 

성녀를 격려하여,


「이런 소망은 

자기 계획의 방해가 되는 극히 사소한 것까지도 불쾌히 여기며,

아무런 어두운 그림자도 없이

모두가 이런 소망은 신심행위(信心行僞)에 있어

불쾌함도, 반항도, 유쾌함도 없이, 오직 영적인 감미(甘味)만을 구한다.


어떤 내적 유혹이 생기자 마자,

이런 소망은 우리가 그것을 승락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그 유혹이 생기자마자,

그 유혹을 느끼지 않을 것마저 요구하고 있다.」



이 현명한 지도자는 자기의 거룩한 영적 딸에게,

커다란 용기, 즉 쓴맛도 단맛도, 광명도 암흑도 개의치 않고,

참된 강함, 불요불굴한 천주께 대한 사랑 안에 과감하게 나아가고,

유혹의 망령(亡靈)으로 하여금 자유로이 뛰어다니도록 방치하는 것과 같은,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는 커다란 용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다.

(「서간」419, 드.고사드「위탁」6편22장)



p.358


한편, 실패는 실제의 것보다는 흔히 의관상의 것에 불과하리라.


사실상 우리가 자신에게 기인하는 것을 하는 한,

바꿔 말하자면, 

진보하려는 의지를 간직하고, 진지한 노력으로써 그것을 견고케 한다면,

아마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끊임없이 진보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성「벨나도」는,

「진보하려는 불요불굴의 소망, 그리고 완덕에의 끊인없는 노력은 

이미 완덕이라고 간주된다」라는 

위안에 넘친 보증을 주고 있다.(「서간」254)


여기서 잘 유의할 점은, 성인이 

감정에 관해서가 아니라, 노력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의지만 어디까지나 견고하게 의무를 완수한다면,

혐오(嫌惡)의 정은 보잘것없다.



위대한 사도 성「바오로」도 묵은 사람의 저항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것을 극복해 나갔다.


감정은 정확한 기준이 아니다.


선덕은 영적 세계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비록 감정이 따르지 않아도, 훌륭히 덕을 닦을 수 있는 것이며,

그리고, 그 열매로써 그것을 판단해야 할 것이다.


어떤 이는 위안에 충만되고, 넘칠만큼의 감미에 젖어 있다.

그러나 관대함이 결여되고, 시련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을 모른다.

그렇다면 단지 어린이의 사랑이다.


그런데, 다른 이는 사막과 같이 메말라 있다.

그렇지만, 항상 자기 임무에 충실하며,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에 만족하고

남에게서 견책되며 반대될 때에도, 미소를 담고 있다.

그의 사랑이야말로 

전자보다도 더욱 백배도 견고하고 진실한 것이다.


p.359


성녀 「요안나.샹딸」은

이미 신앙도, 희망도, 애덕도 빼았긴 것처럼 느껴져

뜨거운 눈물로 지새고 있었는데,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는 그를 위로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그대에게서 모든 덕의 즐거움만을 앗아간 참된 무감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그런 모든 덕을 갖고 있으며, 

더구나 그것은 극히 견고한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께서는 그대가 그것을 즐길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라고.

(드.쇼지 「동 성녀전」3편 26장)




끝으로 우리는 은총과 선의와 함께,

시간도 역시 필요한 것임을 염두에 두자.


육신과 재능과의 충분한 발육에는 지적 교양(知的敎養),

예술의 숙달에는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고덕(高德)의 영역에 이르기에도 역시 시간이 필요하다.



휴식도 중단도 없이,

열렬한 마음으로써 정진(精進)하고,

덕과 공로를 거대하게 쌓아 올린 성인이야말로 복된 이들이다.


우리 역시,

비록 성인들처럼 덕을 닦지 못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四분의 一, 또한 절반까지라도 도달할 수 있으면,

그리고 그들의 모범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고, 

그 발자취를 따르고 있다면,

성인과 같지는 않을지라도,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보수는 노고에 비례하고,

또한 주께서는 양(量)과 질(質)을 함께 시험하신다는 것은,

끊임없이 우리의 영적 활동을 자극해 마지 않는 좋은 생각이 아니겠는가.


p.360 


우리의 정욕과 결점에 대해서도 또한,

우리는 결코 개의치 않고, 같은 평온한 위탁의 태도를 간직해야 한다.


성「프라치스꼬.살레시오」는 말한다.


「천주께서는 분노에도, 정욕에도 

감각적 욕구의 반역이 우리 안에 남아 있기를 허락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에 저항하면서, 영적 용기(靈的勇氣)를 발휘하여,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그것은 참된 『이스라엘』백성이 어디까지나 넘어뜨릴수 없고,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뻘리슈뜨』인이며,

그 세력은 꺾을 수가 있어도, 이것을 전멸시킬 수 없는 적이다.


이『뻘리슈뜨』인은 우리가 죽지 않는 한 죽지 않으며,

우리가 숨쉬고 있는 동안에는

어디까지라도 우리에게 붙어다니며 살고 있다.


그것은 최악에서 나오고 또한 끊임없이 죄악을 향하여 나아가는 만큼 

저주하고 증오해야 할 것이다.


성교회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있어 분노, 탐욕, 공포

그 밖에 이와 비슷한 정욕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고

어떤 은수자가 주장한 것을 잘못이라고 배척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정욕에 당황할 것까지는 없다.


왜냐 하면,

완덕은 이런 정욕과 싸우는데 있는 것이며,

만일 그런 것을 찾아낼 수 없다면, 싸울 수도 없고, 

그런 것에 부딪치지 않으면, 정복(征腹)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실제, 우리의 승리는,

정욕의 반항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겸손한 덕을 닦기 위해서는 

이 영적 투쟁에 있어, 때로는 상처를 입는 것도 면할 수 없다.


더구나, 생명 또는 용기를 잃지만 않는다면, 

싸움에 패배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신애론」9편 7장,「입문」1편 5장)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와 견인(堅忍)으로써 마음을 산란케 하지 말고,

평온함 가운데서 싸우기를 결심해야 한다.

할 수 있는 한도의 일을 참으로 수행했을 때에는,

자기의 의무의 모든 것을 완수한 것이다.


그것 이상은 천주의 섭리에 속하는 일이다.


p.361


그렇지만,

끊임없이 거듭되어 언제 완결할지도 모를, 이 집요한 싸움을 앞에 두고,


「가련한 영혼은 근심하고, 초조하며, 불안하게 되고,

그리고 마치 이 슬픔이 천주께 대한 사랑에서 생긴 것처럼 생각하여,

슬퍼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데오띰』이여 그러한 불안을 자아내는 것은 결코 천상적 사랑이 아니다.

왜냐 하면, 이 사랑은 죄를 위해서만 선동되기 때문이다.


정욕의 공격이 우리에게 주는 노고를 제거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의 자애심이며,

우리를 불안에 빠지게 하는 것은,

그것을 느끼기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에 저항하는 쓰라림이다.」(「신애론」동상)



그러나, 어떤 이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만일 내 죄가 많아져, 그 때문에 덕의 진보가 방해되고,

태만 때문에 결점의 시정이 늦어진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찌 불안 없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


그렇다면,

천주께 용서를 애원하고,

그 성의에 거스른 것을 깊이 증오하며,

반항하였기 때문에 우리 위에 닥쳐오는 고뇌와 굴욕을 겸손되이 받자.


그리고 쓸데 없는 탄식에 시간과 용기와 평화를 잃는 것보다는

장차 보다 커다란 진보를 기도(企圖)하며, 분발하자.



그러나 어디까지나 평화 안에 머물러 있자. 


왜냐 하면,

불안은 약이 아니고, 도리어 또 하나 새로운 해악(害惡)이며,

낙담은 최악의 불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분발하여 소심(小心)과 불안(不安)에 빠지는 일 없이

다시 길을 계속해 나가기만 하면,

과거의 죄 그 자체까지도 진보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성「그레고리오」에 의하면,

「죄는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식시키는 드문 완전성」을 우리가 배우게 한다.


죄는 또한,

천주께서 우리에게 헛된 자기 만족을 면하게 하시기 위하여

영혼에 그 덕을 감추시는 「베일」이다.


사람은 죄를 기회로 하여 자신을 낮추어 경계하고,

나아가 정신을 일신(一新)하여 보다 간절히 천주께 기도하게 된다.


p.362


그것은 우리를 가르치는 하나의 교훈이며,

우리의 걸음을 빠르게 하는 하나의 박차(拍車)다.


결국 죄 자체도 선용(善用)함을 알고 있는 이에게는 유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