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위탁

11-4

은가루리나 2019. 8. 7. 16:11






옴니아|등급변경▼|조회 109|추천 0|2013.07.17. 22:05




- 위안(慰安)과 건조(乾燥) - (4)



성「알퐁소가 가르치는 것도 역시 이것과 」공명(共鳴)하고 있다.

아래에 그것을 요약해서 기록한다.



1,

천주께서 사랑에 충만된 방문으로써 우리에게 위안을 주실 때,

또한 그 은총에 의해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게 하실 때,


어느 그릇된 신비가들이 주장한 것처럼

이런 특수한 은혜를 거절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이런 은총은,

세상의 재보(財寶), 명예보다도 더욱 귀중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커다란 감사로써 받아야 하지만,

그러나 일종의 영적 탐식(靈的貪食)으로써 그 감미를 즐겨 맛보지 말고,

또한 천주께서 그런 은총을 베푸시는 것은

자기가 남보다 탁월하게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잘못 믿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이다.



이런 관능적 욕망은 천주의 뜻에 맞지 않으며,

천주를 우리에게서 물리치고,

우리 자신을 자기의 비참함 가운데 포기하시도록 강요하리라.


우리는 끊임없이 지난 날의 죄과를 목전에 두고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은총은 오직 천주의 인자하심의 열매임을 생각하자.


천주께서는 그 요구하시는 각 가지 희생에 대하여 각오를 하게 하시며,

또는 아마 장차

보내실 시련을 인내로써 감수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시기 위하여,

그런 은총을 주신다.


위로 안에 있어, 고난의 날에 대비하자.


그러면 그 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내적 및 외적인

모든 고난, 즉, 질병, 박해, 영적건조(靈的乾燥), 고독 등의 고뇌를

인내하려고 자신을 주께 맡겨 이렇게 말하자.   



「주여,보소서.

나와 나에게 속한 모든 것에 대해서,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당신을 사랑하고, 거룩한 의지를 결여된 것없이 성취할 은혜를 베푸소서.


나는 그 밖에는 아무것도 찾지 않겠나이다.」라고.



2,

영적건조(靈的乾燥), 고독 가운데 있어서는, 이를 인종(忍從)해야 한다.


「우리가 천주의 현존을 느끼는 기쁨을 빼앗길 때,

이에 조금도 고뇌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주장하는 바가 아니다.


우리는 이런 고통을 느끼지 않고,

또한 그것을 탄식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왜냐 하면,

우리의 천주신 구세주 자신 마저,

십자가 위에서 그것을 탄식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 사랑에 충만된 인종(忍從)과 모든 성인의 그것을 본받아야 한다.


성인들은 가장 자주 감각적 위로 안에서가 아니고,

건조, 고독 안에서 생애를 보냈다.


그들이 평생 간절히 바라고 찾아 얻기를 그치지 않았던 것은

즐거움 안에 있어서의 감각적인 열심이 아니고,

고뇌 안에 있어서의 영적 열성(靈的熱誠)이었다.」



그대가 만일 건조 안에 있다면 이를 인내하라.


그리고 일상의 어떤 신심업도,

특히 묵상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그대는 결코 그런 신심업을 포기하고 엄격함을 이완시켜,

관능을 억제함을 그치고

이제까지의 노고의 열매를 상실해 버리는 것과 같은,

초자연적 정신에 결핍된 사람들을 모방해서는 안된다.


이런 건조가 그대의 죄과의 벌이라고 생각된다면,

이 자비로운 징계를 겸손되이 받고,

이 비참한 상태의 원인,

즉 이러저러한 본성적 애정, 정신을 내부에 집중시키는 것의 부족,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말하려는 갈망을 제거하도록 모든 수단을 다하라.



그리고 그대는 이미 어떤 환희도 맛보기에 부당하다는 것을 인정하라.


각별히 인종하고,

여느 때보다도 더욱 깊이 천주의 인자에 신뢰하라.


그 때는,

과거보다도 더욱 자기를 천주신 천상정배의 뜻에

특히 맞갖은 것으로 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천상정배를 찾아 구하는 것을 용기로써 계속하라.


아마 그이는 그 감미로써 그대를 다시 찾으실지 모른다.


그렇지만,

주께서 그대에게 당신을 사랑하고,

바라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힘만 주신다면,

그것은 그대에게 있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강한 사랑은 부드러운 사랑보다도 천주의 마음에 드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겸손되이 그 의지에 복종하자.



「그렇게 한다면,

건조는 위안 이상으로 우리에게 있어 유익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인은 다음과 같은 훌륭한 기도를 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나의 희망, 나의 사랑, 내 영혼의 유일한 사랑이신 예수여!

나는 당신의 위안과 감미를 받기에는 알맞지 않나이다.


항상 당신을 사랑해 드린 조촐한 영혼을 위하여 이런 것을 보류하시기를.


당신을 거스른 나는 그 은혜를 받기에 부당한 이오니,

어찌 그것을 당신께 구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나의 유일한 소망을 보살펴 주소서.


아, 나의 천주여,

나로 하여금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평생 당신의 뜻을 성취시키시며,

그렇게 함으로써 성의대로 나를 처리하소서.



아, 불행하도다, 나 자신이여.

내가 당신께 끼친 불의(不義)함을 보상하기 위하여,

더욱 많은 암흑과 공포와 고독을 감수해야 할 자로소이다.


참으로,

나는 지옥의 가혹한 벌을 받기에도 마땅한 자,

거기에서 당신을 떠나,

영원히 버림을 받고 당신을 이미 사랑할 수 없어,

영원히 통곡해야 할 자로소이다.



아, 예수여,

이 가혹한 벌을 내게서 멀리 하소서.


다른 어떤 고난에도 순종하겠나이다.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힘,

나 자신을 정복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나 온전히 당신의 것이 되기를 바라옵니다.

나의 영혼도 육신도, 의지도 자유도 모두 당신께 바치옵니다.


나는 이미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만 살기를 바라옵니다.



당신의 은총과, 당신의 사랑, 이것만 주시오면,

뜻대로 고통에 부딪치게 하시며,

모든 것을 내게서 앗아가시기를 !」(성「알퐁소」의 여러 저서에서)



적어도,

우리는 천주께 위로를 기구하는 것, 건조, 고독의 정지를 바라며,

또한 간청할 것이 허용될 것인가.


물론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의무적으로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우선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천주로부터의 이런 은총이 우리에게 가져 오는

커다란 지지(支持),또는 짓궂은 건조, 고독에 의해서 생길 수 있는 낙담 때문이다.


성신은「성영」안에서,

성교회는 전례(典禮)에 있어 우리의 입으로 하여금 그런 기도를

바치게 한다.



가톨릭 저술가로서,

그 정당함을 인정하지 않는 이는 한 사람도 없다.


도리어,

모든 저자는 순수하고 올바른 의향과 애착이 없는 마음과,

순수한 의지로써 그렇게 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원리(原理)에 있어서는 모든 저자가 일치하고 있지만,

실천면에 있어서는 각기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알바레르.드.빠스」,「루도비꼬.드.그라나드」, 및 약간의 근대의 저자는,

극구 그런 기도를 바치기를 권장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는,


「천주를 불러,

영혼을 고갈시키고 결실하지 못하게 하는 이 북풍을 멈추시고,

위로의 미풍을 보내시도록」기도 할 것을


「필로테아」에게 허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위안, 또한 건조에 대하여 최상의 무관심을 지니도록」

우리에게 장려하고 있다.(「입문」4편.14장)



성「알퐁소」는 또한

「천주께서 다시 그대에게 그 현존(現存)의 감미를 맛보게 하실 것이나,

결코 이런 은혜를 구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어디까지나 충실을 지키는데 필요한 힘이야말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수도자의 성화」13.2)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견해는 다르지만,

그 어느 것을 택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다.


다음에,

위안을 구하고, 또는 처량한 고뇌의 정지를 기도함은 의무가 아니다.


이에 관해서 나는 유감스럽게도 존경하는 몇몇 저자의 의견에는 따를 수 없다.

이 저자는 그것을 의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을 의무로 인정하지 않고 정반대의 것을 가르치며,

또한 실천한 심령생활의 위대한 두 박사인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와 성「알퐁소. 리고리오」를 비난하고,

또한 위안과 건조의 어느 것에 관해서도

완전한 무관심 위에 행동의 규범을 둔 허다한 성인도 비난하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그런 의무는 어디에서 생기는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위안은 신심(信心)의 본질도 아니고

그것에 이르는 유일한 길도 필요한 수단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건조 역시 불신심(不信心) 그 자체가 아니고,

또한 그것은 극복하기 어려운 장해물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극히 자주 우리에게 필요한 약이기도 하다.



위에 말한 저자는,

천주께 대한 사랑을 배양하고 간직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마찬가지로 자애심을 억제하고,

징계하여야 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어떤 이는 논박하여,

건조는 하나의 질병이며, 그 치유는 흔히 기도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으리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는 참된 악,

우리의 모든 악의 근원 자체는 오만과 육욕이며,

그리고 건조의 고뇌는

이런 것에 대한 인자에 충만된 징벌이며,

섭리에 의한 특효약이라고 생각된다.



다른 경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역시, 

천주께서는 죄과의 악을 고치시는데 고통의 악으로써 하신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천주께 

그 치료방법을 바꾸시기를 강요하거나 짓궂게 원할 것인가.


그보다도, 우리의 의지를 보다 순순한 것으로 하여 의약이 유효하게 작용하도록

천주께 기도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어떤 이는 혹 이렇게 반박할지 모르겠다.


그런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신뢰가 결핍돼 있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정반대다.



물론, 위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어린이의 단순함으로써 천주께 기도할 때에는,

이런 신뢰에 복종의 정신만 수반한다면,

천주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된다.


그러나, 천주의 손에 온전히 맡기고 평화스러운 대기의 태도를 간직하며,

미리 그 바라시는 모든 것을 인종하기에는 그것 이상의 것이 요구된다.



완전한 위탁의 태도는 동시에 보다 탁월한 현명이며,

보다 완전한 관용(寬容)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것이 하늘에 계신 우리 성부의 마음을 깊이 감동케 한다는 것은

추호의 의심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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