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위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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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가루리나 2019. 8. 7. 16:06




옴니아|등급변경▼|조회 176|추천 0|2013.07.01. 18:44



-  위안(慰安)과 건조(乾燥) -   (2)



영적 건조(靈的乾燥)에 관해서 말한다면,

우리는 우선 성「알퐁소」와 함께,

유의적(有意的)이 아닌 것이 있다는 것을 지적해 두자.


정신이 산란하고 마음이 사물에 애착하며,

의지가 제멋대로 흐르는 것을 막지도 않고,

그래서 자신을 시정할 노력도 하지 않으며,

많은 죄를 범하는 경우에는 건조는 그 원인에 있어 유의적(有意的)이다.



그것은 이미 단지 감정의 건조가 아니고, 의지의 냉담이다.


「이런 상태는,

영혼이 억지로 거기에서 나오려고 힘을  다하지 않는 한,

어디까지나 악화(惡化)해 가는 것이다.



바라건대,

이런 영혼이 점차로 보다 커다란 불행에 떨어지지 않기를!


이와 같은 건조는 만성병(慢性病)과도 비슷하다.


그것은 일격(一擊)에 생명을 빼앗지는 않지만,

그러나 확실히 죽음에 이끄는 것이다.」



이런 건조에 대해서는 우리의 힘이 미치는 한,

이를 치료할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래도 만일 그것이 계속된다면,

자비하신 손에서 내리시는 벌로써 그 고통을 달갑게 받아야 한다.



「유의적(有意的)이 아닌 건조는,

완덕의 길에 나아가려고 노력하며,

부러 소죄까지도 범하지 않도록 경계하고 기도의 길에 정진(精進)하며」

모든 의무에 충실한 영혼에서 볼 수 있는 건조를 말한다.

(성 알퐁소「내적 고뇌」2절)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주로 이런 건조에 관해서다.


영적 건조(靈的乾燥)나 적막(寂寞)은,

사람이 죄의 부채(負債)를 갚기 위한 하나의 탁월한 연옥이며,

영혼의 정화(淨化)에 있어서는,

더우기 유효한 불가마다.


하늘로부터의 은혜가 풍부할 때, 

영혼은 확실히 지상을 떠나 천주께 애착할 것이 분명하리리라.


그러나, 각가지 방법으로써,

더구나 그것을 거의 느끼지 않고, 자기 만족을 찾는다.


그래서 그 영혼은 자기의 평화의 의지처(依持處)를 가장 불확실한 것,

즉 자기 감정의 움직임 위에 두고,

위안에 애착하며, 자신을 유덕(有德)한 이로 생각한다,



따라서 온전히 천주로 충만되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자신을 비게 하는 일이 적다.


그 상태는 항상 보고, 알고, 느낄 것을 바라마지 않는 본성의 경향에

매우 잘 적합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거룩한 사랑,

즉 자기를 잊고 천주를 기쁘게 함으로써

자신의 기쁨으로 삼는 거룩한 사랑의 요구를 채우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만일 천주께서 그 인자하심으로써

영혼을 엄격한 오랜 치료에 복종시키지 않고 방치하신다면,


영혼은 언제까지나 약하고, 많은 결점으로 채워지며

자애(自愛)의 밧줄을 완전히 끊어버릴 수 없는 상태에 머무를 것이다.

(드.고사드「위탁」2편 4.5)



최초에 치료돼야 할 병은,

위안에 탐닉하여 만족할 줄 모르는 영적 탐식(靈的貪食),

즉 위안 안에 그 가장 맛있는 양식을 찾아내는 세련된 감각욕이다.


그래서 천주께서는 그런 병자에게 감식(減食)시키고 필요하다면,

단식 요법(斷食療法)까지도 시도하신다.


그 결과,

감각욕은 식량의 결핍에서 점차로 약화되며, 소멸되고

그리고 때가 흐름에 따라 영혼은 차차 즐거움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온전히 맑은 마음으로 천주만을 찾으며

정신을 더욱 감각에서 독립시키는 것을 배운다.



또한,

더욱 교묘한 더욱 위험이 많은 다른 또 하나의 병이 있다.


그것은 영적 오만(靈的傲慢)이다.


영혼이 천주로 부터의 위안에 충만될 때,

실제보다도 훨씬 진보해 있다고 자부하기 쉽다.


헛된 자기 만족과 참람(僭濫)이 그 영혼에 침입하여,

남을 어신여기고, 또한 엄격하게 판단한다.


그래서 천주께서는 영혼을 포착하시어,

건조, 암흑 그밖에 마찬가지의 고뇌 안에 던져 넣으시고,

가라앉게 하시며, 실컷 그것을 맛보게 하신다.



성「벨나도」에 의하면


「오만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나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도

 항상 은총의 감소(減少)를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

(「아가」에 관한 제 54의 설교 10)



이 오만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천주께서는 혹 미리 그것을 예방하시고,

또는 그것을 억제하시려 하신다.


자신의 무력함과 비참함을 느끼는 것으로써

영혼은 드디어 천주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또한 이토록 풍부한 은총을 받은 후에도,

자기는 전연 보잘것 없는 존재임을 충분히 깨닫게 된다.



영혼은 무한히 거룩하신 천주의 엄위 앞에,

자신을 온전히 미소한 자로 하고

보다 깊은 겸손으로써 기도할 수 있으리라.


또한 공손하게 남의 충고를 구하고,

단순하며 솔직한 이가 되리라.


자신의 비참함을 느낌으로써 남에게 대해서도 깊은 동정심을 가지리라.


이 괴로운 시련이 연장됨에 따라,

그것은 영혼을 낮추며, 자신의 눈에 허무처럼 보이게 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영혼은 드디어 헛된 자기 만족과 참람에서 해방되어

자신에게 의뢰하지 않고, 천주께만 신뢰하며,

말하자면 오만이 없는, 겸손에 충만된 이가 되기에 이를 것이다.



이와 같이

영적 생활에 있어서의 두가지 재난인 오만과 육욕에서 해방된 영혼은,

은총에 자신을 열고,

천상으로부터의 은혜 깊은 작용에 온전히 자기를 맡겨진 것이 된다.



이제야 견고하고 순수하며,

완전한 모든 덕 안에 확실한 걸음거리로 나아갈 때가 이르렀다.


그리고 만일 그 가장 훌륭한 선물을 주시는 것이 천주의 성의시라면,

영혼 편에서는 이미 그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



과연 성「벨나도」에 의하면

커다란 시련은 커다란 은총을 준비하는 것이며,

양자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성 벨나도「설교집」91)



그러나,

건조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이면(裏面)이 있다.


영적 건조와 감각의 적막(寂寞)과는,

천주께 대한 봉사에 있어 신심의 본질을 이루는 의지의 관대(寬大),

또는 수득(修得)된 덕의 특징인

선에의 경향, 용이성(容易性), 기묘함까지도 잃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건조나 적막은 많은 경건한 사상이나 거룩한 애정의 움직임을 방해 하는 것이며,


그것은 위안에 의해서 증가된 힘과 환희를 제거하여,

그 대신 고뇌와 곤란을 남기는 것이다.


이러한 건조는 고유의 의미로는 유혹이 아니다.



왜냐 하면,

직접적으로는 악에로 충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마는 이것을 이용하여 영혼과 천주와의 사이에

독초(毒草)의 씨를 뿌리기를 기도(企圖)한다.


주께서 광명도 신심(信心)의 좋은 생각도

이미 보내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를 보살피지 않으시고,

노여워 하시며, 마음이 언짢으시기 때문이 아니시겠는가.


더구나 우리편에서는 보다 잘 행동할 수 없다.


그래서 두려움과, 신뢰의 부족은 암운(暗雲)을 부르고,

폭풍을 일게 하겠다고 위협하며,

본성도 역시 자기만을 찾지 못하고,

그 종말도 엿볼 수 없기 때문에,

그토록 오래 괴로움을 겪는 것에 싫증을 느끼며,

천주에게는 이미 찾을 수 없는 것을 피조물에게서 찾으려고 이에 나아간다.



그처럼 위안도 건조도,

영혼 안에서 극히 유익한 역활을 수행하기 위하여

천주께서 사용하시는 수단이지만,

그러나 스스로 각기의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전자의 활동은 후자의 그것을 완성하며, 또한 시정한다.



즉 위안은 천주께 대한 사랑의 불을 타오르게 하고,

건조는 자애심을 없애는 것이다.


감미(甘味)가 영혼을 높이는데 대하여

무력감(無力感)은 이를 낮추며,

적막이 의기를 저하시키는데 대하여 위안은 이것을 드높인다.


천주께서는 그 어느 것이나 자유로이 주시고, 또는 제거하신다.


더구나,

같은 예지와 견고함으로써 우리의 이익이 되도록

때로는 교대로, 때로는 함께 섞으시어 그것을 주신다.



일반적으로 천주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획득하시고

나약함을 지탱하시기 위하여 위안으로써 시작하신다.


영혼이 성장하고,

보다 엄격한 취급에 견딜수 있게 됐을 때,

천주께서는 특히 고난을 보내신다. 


대개 우리는 부득이 자기 의사에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알퐁소」의 말에도 있는 것처럼,

「모든 성인들은 이런 건조, 영적 고독(靈的孤獨)의 고뇌를 맛 보았다. 


그들은 감각적 위안 안에서가 아니고,

건조 안에 가장 자주 날을 보냈다. 


이 일시적인 은혜를 천주께서는,

이것을 드물게 밖에 주시지 않으시며,

더구나 우리의 충성의 보수가 될 지상(至上)의 기쁨,

그것은 천국에 있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만일 그대가 고독 안에 버림을 받아 고민할 적에는,

거룩한 위로주(성신)께서 그대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여

자신을 위로해야 한다.


그대는 2년 동안의 건조를 호소하고 탄식하는가.



성녀『요안나.드.샹딸』은

40년동안이나 건조를 인내해야 되지 않았던가.


성녀『마리아.달레나.빠찌』는 5년동안,

사소한 위안도 없이 끊임 없는 고뇌와 유혹에 계속 괴로움을 겪지 않았던가.」

(「적합」5절.5,「내적고뇌」2절)



「아씨지」의 성「프란치스꼬」는, 2년 동안,

전연 천주께 버림을 받은 것처럼 생각할 만큼 커다란 고독 안에 있었지만,

이 세찬 폭풍을 깊은 겸손으로 감수한 후에,

구세주께서는 순식간에 이전의 행복한 평화를 그에게 돌려 주셨다.


이에 관하여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는


「천주의 가장 위대한 종들 마저, 이런 동요를 면할 수 없는데,

더구나 초심자가 때로 그런 시련에 부딪치드라도

그다지 이상히 여길 것은 못된다」라고 결론하고 있다.

(「입문」4편15장)



천주께서 성인을 이끄심에 있어, 그 길은 동일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성인들을 보면,

천주께서 그들을 가장 혹심한 시련에 복종시키신 것은,

그 성덕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처럼 생각된다.



그 사랑하심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욱 더 시련에 부딪치게 하시어 정화(淨化)하신다.


그러나 최고의 시련, 최후의 정화(淨化)는,

그들이 이런 거룩한 엄격함에 충분히 견딜 수 있는 힘을

획득한 때를 기다려 이를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