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위탁

12-1p.4428-p.433

은가루리나 2019. 8. 31. 22:24



제 3 편 제12 장 심령생활(心靈生活)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계속 )(1)|★거룩한위탁


옴니아|등급변경▼|조회 116|추천 0|2013.07.22. 19:56




p.428




- 암흑,   무감각,  기타 -



나는 내적 고통에 관해서는,

아마 이미 충분히 말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시련 가운데서 가장 고통이 큰 것이므로,

그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아무리 견고하게 무장한다 해도 결코 지나치다고 말할 수 없다.


중복되는 번잡이 있기는 하지만,

이하 그런 것 가운데서 가장 고뇌가 많은 것,

즉 정신의 암흑, 마음의 무감각, 의지의 무기력,

따라서 영적 궁핍에 관해서 간단하게 대략을 고찰해 보자.



이런 고통은 때로 체력의 소모에 의한 것인데 

그런 경우의 치료법은

육체에 얼마만큼 기력을 주는 것이다.


이 고통은 또한 의지의 냉담과 죄를 범하는 습관에 의해서도 생길 수 있다.



재화(災禍)인 이 두가지 것은,

점차로 영혼에게서 광명, 미묘함, 힘, 풍요함을 앗아 가고,

차츰 맹목(盲目), 냉혹(冷酷), 마비(麻痺), 비참함에 이끈다는

슬퍼할 비결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 꺾인 것은 의지다.



즉 의지는 이제 의무를 수향해 나갈 용기를 잃고

도처에 태만이 잠입하는데도

팔장끼고는 기도에도 내적 수행(內的修行)에도 나날의 임무에도

모두 태만이 횡행하는 대로 맡겨 버린다.



냉담자나 죄인은 하루라도 빨리 이 치명적인 무기력의 손을 뿌리치고,

열심한 생활에 되돌아서도록 힘쓰기를!


그들에 대한 충고는 위의 말로 충분하다.


p.429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각가지 고통은

유의적(有意的)인 것이 아닌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영혼은 참으로 관대함을 간직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이미 감각적 신심(感覺的信心)에 의해서 고무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힘도 생명도없는 것 같이 생각된다.



천주를 찾아내고,

또한 자기의 소원대로

천주의 감미로운 현존을 즐긴다는 인상을 이미 받지 않는다.



그러나 전력을 기울여 천주를 탐구하고,

기도 안에서도 모든 노력을 경주하여 피로에 지는 일 없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수행한다.


물론 그 효과는 찬란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그러나 실제로 의지는 그 모든 의무에 충실할 것임이 틀림 없다.


이 관대한 영혼에 대하여

나는「선의의 사람들에게 평안할지어다!」라고 외치고 싶다.


천주만이 그대의 고통의 원인이므로

자기를 그 손에 맡기고 그 고통스러운,

그러나 생명에 충만한 활동을 신뢰로써 감수하라는 것이다.






제 1 절    정신의 암흑 (1)




우리는「빛의 아들」이므로, 빛을 사랑하여야 한다. 


성인들의 지식은 아무리 그것을 탐구하여도 과분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의 신앙은 아무리 조명(照明)되어도, 지나치지 않는다.


현세에 있어서는 신앙은 항상 어둔 곳을 남기며,

명백한 천주의 직관(直觀)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연구와 묵상에 의해서,

그리고 영혼이 더욱 정화(淨化)되고 천주와 일치함에 따라,

더욱 더 암영(暗影)은 사라지고 광명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행동에 있어서도

우리가 의무를 명백하게 볼 수 있는

광명의 길을 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천주의 의지를 분명히 인식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 얼마나 즐거운 일 또한 용기를 복돋우는 일이랴!


p.430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가 언제까지라도 위안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존자「루이.드.블로아」도 말하였다.


「오늘 정의의 태양은 그대의 영혼 위에 그 광선을 풍부히 던지며

그 암흑을 추방하고,

그 폭풍을 가라앉게 하며,

그대에게 행복한 평화를 돌려 주신다.



그러나 이 혁혁한 태양이 그 빛을 감추려고 바라실 적에는,

누가 그것을 주시도록 강요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대는 이 태양이 때로는 자취를 감추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이 신적 광휘(神的光輝)가 이미 나타나지 않고,

다시 암흑과 미혹과 초조 안에 떨어지는

암야(暗夜)가 찾아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수도자의 모범」6장 )



좋은 사상이 떠오르는 것도 드물게 애정이 고갈해 감에 따라,

짖궂은 건조는 이미 암야를 자아내고 있다.


우리의 내적 생활 또는 남의 지도에 관해서도

천주께서는 뜻대로 

다른 각가지 수단에 의해서 암흑을 만드시며,

또한 그것을 깊게 하신다.



그 때, 영혼은 공포에 사로잡히며 낭패하고,

아마 주께서는 불만하시어 물러가시지나 않을까 걱정하리라.


또 영혼으로서는 자기 노고가 허사가 되고,

덕에도 기도의 길에도

이제는 더 진보하지 못하는 것 같이 생각될 것이다.



악마가 강력한 공격을 하려고

이런 괴로운 시련을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그리고 성「알퐁소」가 말하고 있는 것 같이,


「한편, 악마의 충동은 맹렬하게 되며,

육욕에 빈번히 위험을 당하면서 다른 편에 있어서는

암흑에 싸여 있는 영혼은 의지에 있어

아무리 저항하고 있을지라도 과연 해야 할 저항을 하고 있는지,

혹은 유혹에 승낙했는지 어떤지 충분히 식별할 수가 없으므로,

천주를 잃고 그래서 이런 싸움에 있어서의 불충실의 정당한 벌로서,

천주께 온전히 버림을 받지나 않을까 하고 점점 두려워 하게 된다.」

(「예수.그리스도에의 사랑」13.2 )

 

만일 이런 시련이 되풀이 되고, 오래 계속된다면,

드디어는 영원한 구령에 관해서까지도

괴로운 불안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p.431


선의의 영혼이여,

왜 그런 두려움을 가지는가.


마음을 속속들이 내다보시는 천주께서는

그대가 온통 당신의 소유물이 되고,

또한 그 마음에 맞갖는다는 것이

그대의 유일한 소원임을 알고 있지 않으신가.



천주께서는 인자 그 자체가 아니신가.

그 사랑에 충만된 엄격함의 깊숙한 곳에는,

치열하게 타오르는 애정,


그대를 나눔이 없이 온통 소유하시기를 바라시는

거룩한 질투가 있으심을 엿볼 수 없는가.



비록 그대의 가장 사소한 불충실을 벌하시드라도,

혹은 시련 위에 시련을 거듭하실지라도

그 손을 이끄시는 것은 언제나 그 마음이시다.



그러나 천주께서는 그대를 위하여 유한한 때보다도 무한한 때를,

지상보다도 천국을 택하여 주시려는,

현명하고도 강한 사랑을 가지고 계시며,

그대를 성덕의 길에 있어 가급적 멀리까지 걷게 하시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그 엄격한 시련은 그데에 대한 주의 사랑의 증거 이며,

또한 그 신임(信任)의 입증이다.


그대가 아직 나약할 적에는,

주께서는 그대를 애무로써 끌어 당기시며,

모든 것에 관해서 그대의 나약함을 참작하여 다루셨다.



그러나,

그대는 그와 같은 유약함과 어루만짐 안에 있어서는

참으로 그대의 자아(自我)에 죽지 않았으리라.


이제 그대는 힘있는 이가 되었으므로 천주께서는

이미 그런 취급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천주께서는 그대를 야비한 감각에서 이끌어 내시어,

순수한 신앙과, 순박한 정신에 의해서 보다 친밀하게,

보다 견고하게, 보다 탁월한 방법에 의해서 

당신께 일치시키시기 위하여 

그러한 위로를 앗아 가신다.



이 정화(淨化)가 완성되기에는 이런 위로의 상실에 고난,

적어도 내적 고난과 유혹과 고뇌와 무기력,

때로는 일종의 죽는 고통마저 겪게하는 고난까지도 덧붙여야 한다.



영혼을 그 자애심(自愛心)에서 구해내기 위해서는

이런 모든 것은 놀랄만큼 유용하다.」

(드.고사드「위탁」2편4.2 )


p.432


그런데 위에서 일반적인 관찰은 마쳤으므로,

이제부터 잠시 이런 시련 가운데서 주요한 것을 검토하자.



우선, 이런 시련 안에는,

기도의 가치에 대한 불안이 있다.



즉 때로는 기도가 우리에게 있어 가치가 없는 것 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천주께 마음을 향하고,

있는 수단을 찾아 우리의 최선을 다하자.



우리가 천주께 말씀드리는 것을 몰랐던 것이라도

천주께서는 그것을 깨달으실 것이다.


천주께서는 우리의 선의를 기꺼이 여기시고,

이에 만족하시리라.



즉, 천주께서는 노력만을 요구하시지

성공은 조금도 이를 바라지 않으신다.


이와 같이 바쳐진 기도는

위안을 수반하지 않드라도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니다.



대개 그런 기도는

우리를 모든 의무에 어디까지나 충실한 이가 되게 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영혼을 비추며, 기르는 것이다.



그리고 「드.고사드」신부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경험은 나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가르쳤다.

즉 이런 탄식을 발하는 선의의 사람들은

모두 다른 이보다 잘 기도하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 하면,

그들의 기도는 더욱 단순하고, 보다 겸손에 충만된 것이며,

그리고 그 단순함 그자체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기도에 주의하지 않기 때문이다.」(동서)


p.433


다음에 우리의 선덕의 가치에 대한 불안이다.


그러나, 성「알퐁소」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유혹에 저항하며, 천주께 희망하고 천주를 사랑하며,

그 원하시는 것을, 원하시는 선행을 하는 것과,

이런 선행을 실제로 행한 것을 자각하는 것과는 전연 다르다.



후자의 경우,

즉 우리가 어떤 선행을 실천한 것을 아는 기쁨을 주지만,

그러나, 우리의 공로는 전자,

즉 선업의 실천 그 자체 안에 있다.



그런데 천주께서 전자에 만족하시고,

행위의 가치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은 모든 만족감을 제거하시려고

후자를 영혼에게서 앗아가시는 것은 우리의 만족감이 아니고,

우리의 공로이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에의 사랑」13.2 )



성녀「요안나.드.샹딸」이 이런 고통에 몹시 시달리고 있을때,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는

그를 위로하여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오직 상부의지(上部意志)에만

적나라한, 무미건조한, 무감각한 행위를

수행해 가는 것에 만족하는 것은,

거룩한 신심(信心)의 가장 훌륭한 절정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스러운 섭리를 흠숭하고, 그 팔 안에, 그 품 안에 안심하며,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주여,

은총에 의해서 베푸신 선덕의 실행에 있어

내가 아무런 즐거움을 느끼지 않음이 원의시라면,

비록 그것이 의지를 거스르는 것이라도

나는 전심으로 이에 승복하나이다.



비록, 아무런 맛을 느끼지 않드라도 그러나 진실로

『나는 신앙과 희망과 사랑을 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바란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나의 신앙과 희망과 사랑에서 아무런 기쁨도 바라지 않나이다.」

(「서간」4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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