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위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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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가루리나 2019. 8. 7. 16:08





옴니아|등급변경▼|조회 106|추천 0|2013.07.09. 17:52




-  위안(慰安)과 건조(乾燥) -  (3)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적은 완전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우리가 바라는 일이나 바라지 않는 일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천주의 뜻에 합쳐,

우리를 밀접하게 천주께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 사랑이야말로 신심(信心)의 핵심(核心)이다.



우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수단을 다하여,

이 사랑을 얻기 위하여 거룩한 열심을 기울이자.


그리고 그 수단은 천주의 명시의지에 의해서 우리에게 제시돼 있다.


위안은 그것이 비록 천주에게서 온 것이라 하드라도

신심(信心)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의지에 의하지 않는 건조는 불심신(不信心)이 아니다.


위안도 건조도 천주의 섭리의 수단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을 장해물로 바꿔 버릴 수도 있다.



우리에게 있어 가장 유익한 것은 위안의 길이겠는가.

또는 건조의 길이겠는가.


그것은 우리로서 알 수 없는 일이며,

오직 그 결정은 천주의 손에 달려 있다.


따라서 가장 현명한 길은,

건조의 유의적 원인(有意的原因)을 제거하여,

덕에 의하여 무관심한 이가 되며,

자신을 섭리에 맡기는 것이다.



그런 교설(敎說)은 그것을 자신의 행동의 규범으로 한

허다한 성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여기에서 나는 다만,

내가 가장 애호하는 두 성인 박사의 말을 인용하는데 그치겠다.



우선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로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대들에게는 

곧 신심업에 아무런 위안도 느끼지 않을 때가 도래하리라.

그것이 천주의 성의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안과 적막의 어느 것에 대해서도,

최대의 무관심 안에 머물러야 한다.



이 자기포기의 태도는

모든 유혹,건조, 무감각, 권태, 혐오 안에 있어서의

천주의 임의의지(任意意志)에 대한 위탁도 포함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이 우리의 과오에 의하지 않고 일어날 때,

또는 죄가 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런 것 안에 천주의 뜻을 발견한다」라고.



이와 같이 말한 후에

성인은 마치 유아가 자신을 유모(乳母)의 손에 맡기고,

또는 무한히 거룩하신 성자 예수께서

당신을 인자하신 성모의 품에 맡기셨음과 같이,

남김 없이 완전히 섭리의 배려에 자신을 맡기도록

거듭거듭 우리에게 권고하여 다음과 같이 이어 말하고 있다.



「위안이 주어졌을 때는,

그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


위안이 없을 때에는, 그것을 바라지 않고,

천주의 섭리에 의한 각가지 사건을 맞이하기 위하여

마음의 준비가 돼 있도록 힘쓰며,

더구나 될 수 있는대로 모든 것을 같은 마음으로 받도록 준비하자.



묵상에 있어서는 

어떤 곤란에 부딪치드라도, 어디까지나 이것을 멈추지 않는다는 

확고한 결심이 필요하다.


또한 묵상 안에 위로 또는 만족함을 받겠다는 소망에 전념해서는 

안된다.


대개 이런 소망은

우리의 의지를 주의 의지에 적합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는 우리가 묵상에 들어갈 때에는,

끊임없는 정신의 산만(散漫), 건조, 싫증 등의 고뇌를 

감수할 결심으로써

많은 위안과 평화가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이것에 만족하고 있기를 바라신다.


항상 우리의 의지를 지극히 엄위하신 천주의 의지에 적합시켜

기도에 있어서나 그밖의 경우에 있어서도,

사랑으로써 

그 임의의지(任意意志)에 기인하는 사건을 맞이하기 위하여,

순박한 대기(待機)와 마음가짐 안에 머물러 있다면,

천주께서는 모든 일이 우리의 이익이 되고,

그 눈에 드시는 것으로 하시리라.」(「대화편」2,6,18,21)




같은 의미로, 거룩한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조금 밖에 바라지 않는다.

소망은, 그것을 극히 조금 밖에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거의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다시 태어난다면, 전연 소망을 가지지 않으리라.



만일 천주께서 위안을 가지시고 나에게 오신다면,

나도 천주께로 가리라.


그러나, 나에게 오시기를 바라지 않으신다면,

나는 여기에 머물러 있어, 천주께로 가지 않으리라」고.

(「동서」21, 보수에「묵상의 상태」8.16)



그리고 실제 성인은,

「건조와 위안, 감미와 적막, 활동과 고통 안에 있어,

이 완전한 무관심을 실행하였다. 」




성녀「요안나.드.샹딸」의 증명을 여기에 들자.


「그는, 천주께 대한 봉사의 참된 태도는 적나라하고,

단순한 신앙의 빛 외에, 

위안, 감정, 광명 등 아무런 지탱도 없이 주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였읍니다.


그가 고독, 적막, 내적 비애안에 있음을 사랑한 것은

그 때문이 었읍니다.


어느 때,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였읍니다.

자신은 위안 안에 있는지, 고뇌 안에 있는지,

그것마저 전연 유념하지 않는다고.


주께서 그에게 좋은 감정을 주실 때에는 그는 단순하게 그것을 받고

또는 주어지지 않을 때에는 별로 그것에 번민하는 일은 없었읍니다.


그렇지만 어느 편인가 하면,

그가 평소에 커다란 내적 감미(內的甘味)에 충만돼 있었다는 것은

그 용모가 잘 그것을 나타내고 있었읍니다.」

(「동 성녀전」5편 및 부록)



그러므로, 이 장에서 다루는 문제에 관해서,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가 지니고 있던 이상은,

위로에 향하여 나아가려고도 하지 않고,

건조에서 멀어지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현명한 입상(立像)과도 같이 평온한 기대 안에 말없이 머물러 있으며,

자기의 주인의 뜻대로 움직여짐에 맡기고,

천주의 뜻에 온전히 맡기는 태도였다.

(「신애론」6편 11장, 보수에「묵상의 상태」8.16)



실제,

그는 성녀「요안나.드.샹딸」에게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나는 그대가 위안을 사랑하지 않고,

그것을 바라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에 결코 애착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단지 소망은 인종(忍從)에 거스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마음의 격동(激動), 하나의 활갯짓 ,

의지의 하나의 동요에 불과합니다.


그대는 조바심을 가지지 않고,

사랑의 마음에서 주께 호소해도 괜찮읍니다.



주께서는

우리가 마치 징계의 매질을 하는 사랑하는 어머니에 대한 유아처럼,

보내신 고통을 당신께 말씀드리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나 그럴 때라도

그대는 위안에도 신심업에도 애착하지 않고,

고뇌는 인간의 나약함이 허용하는정도의 유화(柔和)함으로써

이것을 받아들이는 그 정신의 자유를 간직하여야 합니다.

(「서간」390,391)




이렇게 하여,


「영혼은 고난의 잔을 마셔야만 할 때,

말하자면 승낙의 잔을 마시지 않으면 안될 때,


천주께 대하여,

『내 원의대로 말으시고, 오직 네 원의대로 하소서!』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침착을 간직하리라.」

(보수에「묵상의 상태」8.17)




경건한 박사는 말을 계속한다.


「그대는 십자가를 바라지만,

자신의 선택에 맡겨, 택하기를 바라고 있읍니다.


아, 그렇지 않고서 나는 그대의 십자가도, 나의 십자가도 

온전히 예수님의 것이기를 바라고 있읍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 이상,

건조가 아무리 많아도 괜찮습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주를 섬기지 않으면

결코 훌륭한 봉사라고 말할 수 없읍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그대가 감미도 감정도 따르지 않고,

혐오와 정신의 동요 안에서 섬기기를 바라십니다.


이 봉사는 그대에게는 만족을 주지 않지만,

주의 뜻에 맞는 것입니다.


그대의 뜻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그러나 주의 뜻에는 적합한 것입니다.


그대는 

현재의 고뇌에서 언제까지나 해방되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하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천주께 대하여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나의 무수한 비참함이 당신의 성의에 맞갖는 것이라면

그 번수와 시간을 더하소서.』라고 기도하게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는 그대가 위와 같이 말하는 것,

그리고 이미 고뇌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는 것,

적어도 그것에서 도피하려고 서두르는 것을 멈추리라는 것을,

주에 있어 깊이 신뢰하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더우기 지금 바로 그렇게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읍니다.


일생 동안 그것과 떠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여,

그대의 일에 익숙하도록 하십시오.


그대는 이미 고뇌에서 해방되기를 생각하지 않을 때에,

주께서 스스로 그것에 관해서 배려해 주신다는 것,


또한 그대는 이미 초조하지 않을 때에,

주께서는 그대를 도우시기 위하여 달려 오신다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서간」391, 392)



요컨대 경건한 박사는,

오히려 고난쪽에 기울어져 있었던 것 같다.


어떤 곳에 있어,

그는 자기의 거룩한 딸인「요안나.드.샹딸」을 위해서도,

그것을 구하고 있었다고 생각될 정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모든 이에게 영적 변동의 복판에 있어서는

최고의 무관심의 태도를 견지(堅持)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자기자신에 관해서는

그 지극히 사랑하올 규범이신 천주의 흠숭하올 의지에 

보다 잘 일치하기 위하여 아무런 소망도 지니지 않음을 낫게 여겼다.


물론,

스스로 말하는 바와 같이 천주의 명시의지(明示意志)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구령과 자신의 덕의 진보에 대해서는

열렬한 원의(願意)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소망에 있어서마저

온전히 천주의 의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그것 이상에도, 그것 이외에도 아무 것을 덧붙일 것을 바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