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기도-새로

예수기도(2) 1 성경과 교부 전승에 나오는 예수의 이름 ★예수기도★

은가루리나 2019. 8. 23. 17:47

 

★예수기도★
예수기도(2)

작성자 무소 16.10.05 18:49

 

 

 

차 례

 

 

서문 : 예수기도 - 그 기원과 발전, 동방교회 전승 안에서의 그 실천 ------5

 

 

1. 성경과 교부 전승에 나오는 예수의 이름 -------------------------9

2. 시나이 헤시카즘과 예수기도 ---------------------------------- 26

3. 아토스 헤시카즘과 예수기도 -----------------------------------8

4. 필로칼리아의 시대 -------------------------------------------64

5 「순례자 이야기」와 우리 시대의 예수기도 ----------------------84

6. 예수기도의 실천 ---------------------------------------------99

 

 

부록1 : 예수기도의 정신생리적 방법 ------------------------------123

부록2 : 서방의 예수 호칭 기도 -----------------------------------128

주 ------------------------------------------------------------134

역자후기 ------------------------------------------------------155

 

 

 

p.9

 

성경과 교부 전승에 나오는 예수의 이름

 

 

예수기도는 가깝게는 신약에, 그리고 멀게는 구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또 히브리어 성경에 나타나 있듯이, 

어느 정도는 하느님의 이름을 대하는 유다인들의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유다인들에게 주님¹의 이름은 

그분의 말씀처럼 신성(神性)과 분리될 수 없는 실체,  

그분 곁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위대함이었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천사를 하느님의 이름을 지닌 존재로(탈출23,21),

예언자를 하느님의 이름을 멀리서 보는 자로 여겼다.(이사3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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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이름 야훼(lahveh)를 신성시하여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야훼는 모세에게 계된 하느님의 이름이자 거룩한 네 글자 YHWH("나는 나다"라는 뜻)로, 

이를 발음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여진다.

 

 

p.10

 

   한 고장에서 또는 한 개인이 하느님의 이름을 발음하면

그때부터 그 고장이나 개인이 주님께 속하여 그분의 소유가 되고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창세48,16; 신명28,10; 아모9,12).

 

하느님의 이름은 성전에 머무른다 (1열왕8,29).

 

그분 이름은 

인간이 살아가고 하느님을 섬기는 데 안내자의역할을 한다 (미카4,5).

 

시편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피난처, 도와주는 힘, 경배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이스라엘의 다른 민족들도 하느님의 이름을 높이 받들었다. 

하느님 이름에 대한 흠숭은 이시스² 와 아스타르테³ 여신의 숭배는 물론, 

만다교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들의 이름은 원시 부족들의 신앙에서 큰 역할을 했다. 

그들에게 이름은 실재하고 본질적인 어떤 것, 

명명된 존재나 위격의 일부, 또는 그 분신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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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대 이집트의 가장 중요한 여신 가운데 으뜸가는 어머니 여신으로, 

유사한 기능을 가진 다른 여러 여신과 관계를 가지면서 점점 다양한 속성을 지니게되었다.

 

3. 고대 서아시아 지방의 대모신(大母神)으로, 가나안 지방뿐 아니라 

이집트 . 우가리트 등지와 히타이트족 사이에서도 숭배되었다. 

뒤에 그녀는 이집트 신 이시스. 하토르로, 그리스 로마에서는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등 

모든 종류의 대모신들로 흡수된다.

 

4. 만다교는 '앎', '영지'(靈知)를 뜻하는 아람 말 '만다'(Manda)에서 유래한 종교로, 

영지주의와 비슷하게 아브라함, 모세, 예수를 거짓 예언자라 보고 세례자 요한을 숭배한다. 

세례를 중요시하고 반드시 흐르는 물에 세례를 하여 

오늘날에도 이라크, 특히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

 

 

p.11

 

   이러한 비교를 통해 이끌어낼 수 있는 피상적인 결론은  

하느님의 이름에 대한 성경의 태도가 

원시 부족들의 전(前)논리적 정신세계를 희미하게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다.

 

구약 성경을 보면 주술적 효과를 위해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주님의 이름은 특정 효과를 낳고자 사용할 수 있는 임의적인 양식이 아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다른 셈족들과 마찬가지로 

이름에 특별한 애착을 지닌 정신세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심리적 성향은 하느님과의 객관적인 소통과 닿아 있으며, 

이 소통이 추구하는 궁극의 의도는 영적인 질서에 속한다.

 

주님의 이름은 그분의  위격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본질을 표현하지만, 

또 다른 한편 

그러한 계시, 하느님 신성을 그렇게 이해하는 새로운 양상은 

하느님과 인격적이고도 실질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곧 그분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도 되기 때문이다.²

 

 

 

 

 

 

 

 

 

 

 

   랍비 전승은 한층 하느님의 이름을 드높이 받들었다. 

경배의 표시로 주님의 이름 , 네 글자(YHWH)를 결코 말하지 않았다. 

오직 대사제만이 욤 키푸르, 곧 속죄일에 하느님의 이름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이름은 아도나이라는 단어로 대체되었다.

 

하느님의 이름을 지칭하는 히브리 말 

"schem hameforasch"조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름'을 뜻하는데, 

이 단어는 흥미로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문자적으로 보면 

이 단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과는 정반대의 뜻을 가진다.

 

 

   'schem hameforasch'의 어원을 살펴보면

'분명하게 발음된 이름'을 의미한다.

하지만 차츰 숭배의 너울이 이 거룩한 이름을 덮으면서 

하느님의 이름이 공표됨을 표현하던 단어조차 

분의 이름은 입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단어로 뒤바뀌었다.

 

 

   이처럼 

한 단어의 의미론적 변천은 숭배의 진화 과정을 그 속에 담고 있다.

 

카발리스트들은 거룩한 이름에 특별히 애착을 가졌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철자와 숫자, 

경구의 사용에 얽힌 미신에 빠졌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공정하게 말하자면 

카발라(Cabala)는 그 본질에서 주술이 아니고, 

하나의 영적 해석 방법이며 영적 생활 방식이었음에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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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음력 티슈리 월(9,10월경)10일로, 

이날 유다인들은 자기 죄를 씻고 하느님과 화해하려 노력한다.

욤 키푸르는 '샤바트 샤바론'(안식일)이라 불린다.

 

6. 아도나이는 "나의 주님"이라는 뜻이다.

 

7. '카발라'(kabbalc)은 유다교의 비교(批敎)전통으로,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글로 된 공식 율법인 토라(모세오경)을 받을 때 함께 받았다고 전해지는 

구두로 된 비밀 율법이다. 

'수용, 받아들임'을 뜻하는 히브리 말 'Qabalah'에서 유래한 카발라는

그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수용의 지혜, '전통'을 뜻한다. 

따라서 카발리스트는 전통을 받아들인 자를 뜻한다.

 

 

p.13

 

   유다교 전통은 

하느님 곁에서 효과적인 기도를 올리고 상당한 권능을 지닌 사람을  

'이름의주인'이라는 뜻을 가진 '바알 솀'(baal schem)이라 불렀다. 

이 이름 또한 주술적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

 

바알 솀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11세기의 벤냐민 벤 제라, 18세기의 이스라엘 벤 엘리에제르가 있다

이 18세기의 유다인 성자는 

하시디즘 이라 불리는 근대의 주요 신비주의 학파를 창시하였다.

 

 

   또 가깝게는 19세기의 바알 솀 엘리야 거트마허가 있다.

 

끝으로 현대와 고대라는 시간을 초월하여 

유다교 영성 안에는 두가지 중요한 개념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는 "이름의 성화"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름의 속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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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디즘

8. 18세기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유다인들 사이에 일어난 신비주의적 경향의 신앙 부흥운동으로, 

'경건한 자'를 뜻하는 히브리 말 'hasid'에서 유래하였다. 

하시디즘이 종전의 카발라 전통과 구별되는 것은, 

그때까지의 카발라가 교리와 메시아의 도래를 강조했다면, 

근대 하시디즘은 실생활의 체험과 실천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p.14

 

"이름의 성화"라는 표현은 

단순히 하느님의 이름에 바치는 경의나 찬미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1세기에 사용된 전문 용어로 매우 강한 뜻을 지니고 있다.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자기 목숨을 바쳐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이고, 

필요한 경우 피를 흘려서라도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름의 성화는 순교와 거의 동일시되었다.

 

마카베오인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이름의 성화가 지닌 유다교적 개념은 

님의 기도 첫 문장을 특별한 빛으로 비추고 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그녀가 낳을 아들이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라 불릴 것이라고 예고하였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 말 '(예수)의 그리스 말 음역인데, 

히브리 말도 ''(여호수아)로 같다.  

곧 예수는 여호수아의 축약형이다. 

유다인들은 히브리 모음(?) 와 ou의 연속되는 발음을 몹시 듣기 싫어하여 

이를 피하려고 음을 축약하였다.

 

'예수' 의 뜻은 전체적으로는 분명하지만  

엄격하고 정확하게 그 뜻을 풀이하기는 어렵다.

 

예수는 일반적으로 "구원자"로 풀이되는데,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주님의 구원" 또는"주님은 구원이시다"를 뜻한다.⁵   

이처럼 천사의 예고 속에서 

우리는 고대 격언처럼 "이름이 곧 예언"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름은 특정한 방식으로 사람과 그의 운명을 표현한다.

 

 

p.14

 

   신약의 세 본문은 예수의 이름에 대한 흠숭과 관련하여 

특별히 중요성을 갖는다.

 

우선 연대순으로 볼 때 

바오로 사도의 다음과 같은 훌륭한 구절을 살펴보기로 하자.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 (필2,9-10).

 

 

 

   이어서 사도행전은 이렇게 엄숙히 선포한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이름밖에 없습니다."

(사도4,12)

 

   끝으로 요한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계시한 신비를 이렇게 전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요한16,23-24).

 

   신약 성경에는 예수의 이름이 참으로 많이 언급되어 

일일이 다 살펴볼 수 없지만 

연구를 통하여 그 안에서 숨겨진 '일치'를 발견한다면 매우 유익할 것이다.

특히 묵시록에서 우리는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다.

 

 

p.16

 

그러나 특별히 예수의 이름에 관한 책이라 불릴 만한 것은 사도행전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음이 선포되고, 

개종자들이 신앙을 얻고 세례를 받았으며,  

병자들이 치유되고 

그 밖에 다른 '표징들'이 나타났으며, 

위험에 처한 이들이 목숨을 바쳤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을 계속 부르는 것은 

단순히 주문을 외는 것과 다르다.

 

예수님과 내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아무도 그분의 이름이 지닌 효력을 얻을 수 없다.

 

애석하게도 

프랑스 말 표현 '...의 이름으로'와 라틴 말 표현 '...의 이름으로'는 

그리스 말에 담긴 뜻의 풍요로움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라틴 말과 프랑스 말 표현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예수님의 권위로"와 거의 같은 뜻이다.

'...의 이름으로'가 '...의하여(근거하여)'라는 뜻이 되었다. 

이는 그리스 말로 된 신약을 빈곤하게 만드는 것으로, 

신약이 지닌 진실성과 그 미세한 어감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과 관련된 그리스 말 문장은 다음의 세 양식으로 사용된다.  

έπί τώ όνόματι“,είϛ τό όνομα“, έν τώ όνόματι“.

이 세 양식은 그 뜻이 조금씩 다르고, 

저마다 이름에 대한 특별한 태도를 표현하고 있다. 

우선,"έπί τώ όνόματι "는 이름에 "근거하여" 기대는 것이다.

 

 

p.17

 

   곧 이름이 바탕이 되어 

궁극적인 행동을 향한 출발점, 진일보를 위한 출발점을 세운다.

"είϛ τό όνομα"에는 이름을 "향한" 움직임, 곧 

도달해야 할 목표로 이름을 제시하는 합목적성의 역동적 관계가 담겨 있다.

 

"έν τώ όνόματι"에는 정적인 태도가 담겨 있다.

곧 목표 달성의 결과로 얻은 휴식, 어떤 내면화 또는 내재성을 표현한다.

 

영은 이름 "안으로",  

이름 속으로 옮겨지고 이름과 하나가 되고 그 이름의 거처가 된다. 

"έν τώ όνόματι"는 히브리 말 'be-schem'과 일치하고  

"είϛ τό όνομα"는 히브리 말 'le-scje,'과 같다. 

프라(Frat) 신부는 이 세 가지 양식의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하면서,  

이 세 표현이 

예수의 이름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심의 형태를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교부 문헌 가운데 예수의 이름이 언급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2세기 초에 저술된 <헤르마스의 목자>이다.

헤르마스는  인간에게 

"하느님 아드님의 이름을 받아들이는 것"은 

"음을 면하고 생명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이라고 말하였다⁸ 

¹ 

 

그는 또한 

"성자이 이름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⁹  

 

그러면서 그는 

"성자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 관하여 들려준다. ¹⁰ 

이것을 단순히 세례와 순교를 암시한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 이름에 관한 신학의 효시로 보아야 할 것인가.

 

이 두 번째 가설이 

다음과 같은 헤르마스의 또 다른 문장에서 설득력을 지니는 듯하다. 

"하느님 아드님의 이름은 위대하고 무한하여 온 세상을 떠받치고 있다."¹¹

 

 

p.18

 

   중세 시대에 예수기도를 전파한 동방교회의 신비주의자들이 

바로 이 기도문을 만든 장본인이다.

앞의 문장에 뒤따르는 몇 줄의 글과 바로 앞 장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러한 생각들이 다소 혼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헤르마스의 목자안에서 

성자의 이름과 처녀들의 이름, 힘들과 돌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르마스에게 

이름은 객관적이고 존재론적 가치를 지닌 매우 실재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리게네스는 이 책의 저자가 지나치게 허식적인 사색을 하려고 

그의 글 솜씨를 발휘할 만한 소재를 찾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은 

던지지 않았다

대신 그의 시대에도 예수의 이름이 사도들의 시대와 똑같은 효과를 낳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평했다. 

"오늘날에도 

예수의 이름은 

불안한 영혼들을 달래주고 악마들을 몰아내며 병들을 치유한다.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면 놀랄 정도의 온유함이 생긴다. 

예수의 이름은 

풍속을 정화하고 인간미와 관대함과 너그러움을 불러 일으킨다......" ¹²

 

 

p.19

 

   4~5세기의 위대한 그리스 신학자들도 

예수의 이름을 깊이 성찰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아타나시우스나 카파도키아인들, 크리소스토모, 치릴로는 

이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 더러는 예수기도를 언급하기도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으로

이따금 그들이 저술한 전기에서 상세한 묘사로 나올 뿐 , 

그들이 전하고자 했던 교리의 주제는 아니었다. 

이름에 대한 신심이 발전하는 데 영향을 준 교부들은 교의론자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다소 사변적인 주류에서 벗어나 내적인 삶의 문제에 천착하였다.

 

 

   서방 교회로 눈길을 돌려보면, 

성 암브로시오가 개인적으로 예수의 이름을 두고 성찰했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예수의 이름은 단지 안에 담긴 향처럼 이스라엘 안에 담겨 있었는데,

단지의 뚜껑이 열리고 향기가 두루 퍼져 나갔다.

거기에는 참다운 "그 이름의 분출"이 있었다. 

기서 분출이란 은총이 넘칠 정도로 충만한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은총이 성 암브로시오의 말을 빌리자면

"차고 넘칠 정도로 뿜어져 나오기" ¹³ 때문이다.

 

 

   놀라(Nola)의 성 바울리노 (354-431)는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시를 썼다. 

그는 그리스도의 이이  

"입안에 든 감로수요, 혀 위에 놓인 꿀"로, 

"한 번 맛보면 결코 헤어날 수 없는 살아 있는 신들의 음식"이고, 

"눈에는 투명한 빛이고, 귀에는 생명의 소리 그자체" ¹⁴라고 묘사했다. 

이 시는 오랜 시간이 흘러 성 베르나르도에게 영감을 준 듯하다.

 

p.20

 

교황 성 다마소 1세도 예수의 이름에 관한 두 편의 이합체 시를 썼다. ¹⁵

 

9. 이합체의 시는 

각 행의 첫 글자를 붙이면 그 시의 주요 단어나 작가의 이름이 되는 시글 말한다.

 

 

아를르의 성 세제르는 

예수의이름과 구리 뱀 사이의 상응 관계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은총 속에서 하느님의 이름이 여러분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를 생

각해 보십시오. 

형상 속에서 그분의 이름이 이미 그만큼 도움이 되었습니다!" ¹⁶

 

   성 아우구스티노는 예수의 이름에 관해 말한 적이 없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라틴어로 된 하바쿡 예언서의 한 구절을 접한다.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

그는 그 구절이 다른 라틴어 이본에는 

"나의 예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로 적혀 있음을 알게 된다. 

라틴 말 'salutari'(구원의) 또는 'salvator'(구원자) 와 

히브리말 'Ieshouah'(예수)는 서로 같은 의미이기에 

그러한 대체는 어느 정도 정당했다.

 

p.21

 

그런데 <아우구스티노>가 그 구절을 쓰자 별안간 그 말의 뜻이 환하게 빛났다. 

"'나의 예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고 적힌 몇몇 필사 이본들은, 

라틴 말로 된 하바쿡 예언서에 적힌 단어의 원래 뜻을 살리고자

'salutari'(구원의)로 번역되는 예수의 이름을 넣지 않은 이본보다 

나에게 더욱 큰 행복감을 주었다. 

그분의 이름을 발음한다는 것은 얼마나 사랑스럽고 감미로운가." 

비와 함께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 ¹⁷

 

 

   성 아우구스티노와 동시대 인물인 역사가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173년경에 일어났음직한 사건을 전한다. 

'12번째 번개군단'의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비와 함께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 ¹⁸ 

 

거룩한 이름이 기적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악마들을 쫓아내는 데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을 

스치듯 언급하였다.¹⁹

 

니사의 성그레고리오도 

<성 그레고리오 타우마투르구스>¹⁰ 의 생애를 다룬 책에서 

그가 예수의 이름을 불러 악마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고 전한다. ²⁰

 

 

 

   사막의 교부들도 거룩한 이름이 지닌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성 안토니오>(251-356)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며 마귀를 쫓아냈다고 전한다.²¹

 

성 예로니모도 <성 힐라리온>(291-371)에 관하여 똑같은 말을 했다. ²² 

 

그러나 사막의 교부들은 

거룩한 이름을 호칭 기도로까지 체계화시키지 않았던 것 같다.

 

   부세 신부가 수집한 교부들의 200가지 격언을 보면,  

예수의 이름에 관한 격언은 시리아에서 유래한 두 가지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한다.

 

 

p.22

 

   그러나 

이 사막의 수도승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예수 기도를 준비했다. 

곧 그들 개인의 기도에 짧은 호흡의 형태를 부여한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에 대하여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물론 이집트에서도 형제들이 자주 기도를 한다네.  

그런데 아주 짧게,  급히 쏘듯이 그렇게 한다네."²³

 

바로 아우구스티노의 말, 

 "급히 쏘듯이...기도한다"라는 표현에서 "화살기도"가 유래했다.

 

이 화살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향해 급히 쏜 화살이었다.

화살기도는 자비송(Kyrie eleison)¹¹ 이나 다음과 같은 구절로 이루어졌다. 

"오 하느님, 저를 도와 주소서. 주님, 어서 저를 도와 주소서."

 

p.23

 

    이처럼 화살기도는 하느님께 간청하는 기도로,

성자의 이름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예수의 이름이 화살기도와 연결되어, 

거룩한 이름과 호흡 사이에 만남이, 곧 융화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예수기도를 얻게 되었다. ²⁴

 

 

 

 

 

   이러한 조합은 '헤시카즘'의 작품이었다.  

우리는 14세기의 비잔친 신비주의, 

특히 팔라마스¹² 의 전통을 헤시카즘이라 부르며 

종종 이 용어에 매우 제한된 역사적 의미만을 부여해왔다.

사실 헤시카즘은 5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널리 퍼졌던 영적 전통이다. ²⁵  

 

이 단어는  17세기 초에 이미 전문 용어로 자리를 잡았고 

성 요한 클리마쿠스코는 

<천국의 사다리 Ecbelle>의 한장을 전부 헤시카즘에 할애할 정도였다.²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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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타우마투르구스(Thaumaturgus)는 '기적 행사자'라는 뜻이다.

 

11. 자비송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은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기도이다.

 

 

12. 성 그레고리오 팔라마스는 금욕과 신비 신학의 뛰어난 이론가로 

14세기 그리스 정교회에서 헤시카즘 논쟁을 불러 일으킨 장본인이다. 

헤시카즘은 특정한 자세를 취하고 호흡을 조절하면서 기도문을 되풀이하는 

신비주의적인 기도의 금욕적 방법인데,  

이를 비판하는 신학자들 및 인문주의자들과 몇 차례  공개적인 논쟁을  벌인 뒤 

팔라마스는 1344년 정치적인 이유로 파문당했다. 

1347년 이 헤시카즘 논쟁이 끝났을 때 그는 테살로니카의 주교로 임명되었고, 

이후 그를 비판하던 인문주의자들을 반박하는 글을 쓰면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사후 1368년 콘스탄티노플 지역 공의회에서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정교회의 아버지요 박사'라는 칭호를 받았다.

 

 p.24

 

 

 

   그러나 이미 5세기 초부터 이 전통을 따르는 이들이 있었고,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나이의 닐로(혹은 닐로스)나, 포티케의 주교 성 디아도쿠스, 

또 

스키토폴리스의 치릴로가 그 생애를 저술했던 헤시카스트 성 요한 등이 있다.²⁷

 

 

 

   역사적으로 볼 때  마지막 헤시카스트는 

18세기 아토스에서 수덕을 쌓은 성산의 <니코데모>로 보인다.

 

헤시카즘을 어떻게 정의 내릴 것인가?

 

그리스 말 "hesychia "는 '휴식'을 의미한다.

헤시카즘이 추구한 수덕 생활의 이상은 최초의 사막 교부들은 물론이고, 

성바실리오와 성테오도로 스투디테스가 콘스탄티노플에 설립한 

수도원 제도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헤시카즘은 사막에서 일어난 최초의 수도원 제도로, 

침묵과 피정을 강조했고 세속과도 관계를 끊었으며, 

심지어 모든 인간적 교류마저 끊고자 했다. 

 

그러나 헤시카스트들은 사막 교부들에 비해 금욕 수행에 덜 집착했고, 

그보다는 오히려 기도와 관상신비 생활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새로운 면모로 응송 방식을 추구하고 관상 기술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p,25

 

   한편, 

바실리오와 테오도로 스투디테스가 추구한 수도원 제도와 헤시카즘은 

그 방식에서 서로 확연한 차이가 있다.

 

우선 두 성인이 추구한 수도원 제도는 

공동생활수도 방식을 준수하고 동생활과 공동기도를 강조했던 반면, 

헤시카즘은 개별적인 개인의 성화를 강조했다.

 

 

 

   또한 전자가 경우에 따라 

수도승들이 특정 교회 활동이나 자선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인정했던 반면, 

후자는 세상과 철저하게 단절된 생활을 하도록 권장했다. 

또 전자가 수행 또는 실천(Praxis)에 특히 관심을 가졌던 반면, 

헤시카즘은 인식 또는 테오리아(theoria)¹³ 에 관심을 가졌다.

 

 

   앞으로 우리는 헤시카즘의역사와 예수기도의 역사 안에서 

매우 확연히 구분되는 두 가지 헤시카즘, 

곧 시나이 헤시카즘과 아토스 헤시카즘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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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여기서 '테오리아"(theoria)는 가장 높은 차원의 인식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관상 혹은 인식', 곧 '신학'

(theologia)을 의미한다. 

참고로 '테오리아'는 "어떤 목적으로 무언가를 유심히 바라보다" 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 말동사 '테오레인'(theorein)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p.12

 

카발리스트(전통주의자)들은 거룩한 이름에 특별히 애착을 가졌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철자와 숫자, 경구의 사용에 얽힌 미신에 빠졌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공정하게 말하자면 

카발라는 그 본질에서 주술이 아니고, 

하나의 영적 해석 방법이며 영적 생활 방식이었음에 유념해야 한다.

 

 

p.13

 

18세기에 유다인 성자는 하시디즘 이라 불리는 근대의 주요 신비주의 학파를 창시하였다.

 

*18세기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유다인들 사이에 일어난 신비주의적 경향의 신앙 부흥 운동으로

'경건한 자'를 뜻하는 히브리 말 "hasid"에서 유래되었다.

하시디즘이 종전의 카발라 전통과 구별되는 것은,

그때까지의 카발라가 교리와 메시아의 도래를 강조했다면

근대 하시디즘은 실생활의 체험과 실천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현대와 고대라는 시간을 초월하여 유다교 영성 안에는 두가지 중요한 개념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름의 성화"라는 표현은 단순히 하느님의 이름에 바치는 경의나 찬미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1세기에 사용된 전문 용어로 매우 강한 뜻을 지니고 있다.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자기 목숨을 바쳐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이고,

필요한 경우 피를 흘려서라도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화는 거의 순교와 거의 동일시 되었다.

 

 

 

p.14

 

예수는 일반적으로 "구원자"로풀이되는데,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주님의 구원" 또는 "주님은 구원이시다"를 뜻한다.

이처럼 천사의 예고 속에서 우리는 고대 격언처럼 "이름이 곧 예언"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름은 특정한 방식으로 사람과 그의 운명을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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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이 선포되고 개종자들이 신앙을 얻고 세레를 받았으며,

병자들이 치유되고 그 밖에 다른 '표징들'이 나타났으며,

위험에 처한 이들이 목숨을 바쳤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을 계속 부르는 것은 단순히 주문을 외는 것과 다르다.

예수님과 내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아무도 그분의 이름이 지닌 효력을 얻을 수 없다.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예수님의 권위로"와 거의 같은 뜻이다.

 

예수의 이름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심의 형태를 보여준다.

 

 

 

p.17

 

교부 문헌 가운데 예수의 이름이 언급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2세기 초에 저술된「헤르마스의 목자」이다 

헤르마스는 인간에게 "하느님 아드님의 이름을 받아들이는 것"은

"죽음을 면하고 생명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p.18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평했다. 

"오늘날에도 예수의 이름은 불안한 영혼들을 달래주고 악마들을 몰아내며 병들을 치유한다.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면 놀랄 정도의 온유함이 생긴다. 

예수의 이름은 풍속을 정화하고 인간미와 관대함과 너그러움을 불러 일으킨다."

 

 

p.21

 

거룩한 이름이 기적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악마들을 쫓아내는 데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을 언급하였다.

 

 

p.22

 

<사막의 교부들도 거룩한 이름이 지닌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성 예로니모, 성 힐라리온 등

사막의 교부들은 거룩한 이름을 호칭기도로까지 체계화시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사막의 교부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예수기도를 준비했다.

곧 그들 개인의 기도에 짧은 호홉의 형태를 부여한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에 대하여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물론 이집트에서도 형제들이 자주 기도를 한다네,

그런데 아주 짧게, 급히 쏘듯이 그렇게 한다네

바로 이 아우구스티노의 말, 곧 "급히 쏘듯이...기도한다" 라는 표현에서 "화살기도"가 유래했다.

 

이 화살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향해 급히 쏜 화살이었다.

 

화살기도는 하느님께 간청하는 기도로,

그러다 어느 날 예수의 이름이 화살기도와 연결되어, 

거룩한 이름과 호홉 사이에 만남이, 곧 융화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예수기도를 얻게 되었다.>

 

 

p.24

 

<헤시카즘은 사마에서 일어난 최초의 수도원 제도로,

침묵과 피정을 강조햇고 세속과는 관계를 끊었으며,

심지어 모든 인간적 교류마저 끊고자 했다.

 

그러나 헤시카스트들은 사막 교부들에 비해 금욕 수행에 덜 집착했고,

그보다는 오히려 기도와 관상, 신비 생활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새로운 면모로 응송 방식을 추구하고 관상 기술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수도원 제도와 헤시카즘은 그 방식에서 서로 확연한 차이가 있다.

 

전자가 수도승들의 특정 교회 활동이나 자선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인정했던 반면,

후자는 세상과 철저하게 단절된 생활을 하도록 권장했다.

 

또 전자가 수행 또는 실천에 특히 관심을 가졌던 반면,

헤시카즘은 인식 또는 테오리아에 관심을 가졌다.

 

(* 테오리아는 가장 높은 차원의 인식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관상 혹은 인식 곧 신학을 의미한다.

참고로 '테오리아'는 '어떤 목적으로 무언가를 유심히 바라보다"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 말 

동사 '테오레인'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시나이 헤시카즘"과 "아토스 헤시카즘" ...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