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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식 신부의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 (6) 우리는 누구인가 ② / 하느님 주신 ‘토대’에 중심 두고 살아야 |━정영식 신부의

은가루리나 2019. 9. 30. 00:19



moowee 등급변경▼ 조회 199 추천 0 2018.07.09. 08:27




[정영식 신부의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 (6) 

우리는 누구인가 ②



발행일2008-03-23 [제2591호]



하느님 주신 ‘토대’에 중심 두고 살아야

인간은 몸·정신·영·사회적 토대로 형성

외적인 것에 매일 때 소중한 삶도 허비 




그럼 이제 하느님께서 인간 안에 미리 형성해 주신 토대에 대해 알아보자. 

이 토대는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우선 신체적 토대를 들 수 있다. 

이를 ‘생체’라고 부를 수 있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몸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누구나 신체를 가지고 태어난다.


우리는 이 몸으로 먹고, 자고, 생활한다. 


너무나 당연하게 주어져서 일까. 

우리는 신체의 고귀함과 소중함에 대해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매일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면서도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에는 이 신체를 무시하는 일도 일부 있었다. 


정신과 영혼을 고귀하게 생각했던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체는 죄의 원인, 죄의 덩어리로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신체와 정신, 영 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신체가 죽으면 그 정신도 없다. 


남을 험담하면 신체의 혀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정신이 잘못한 것이다.



육신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정신세계를 넓혀주고, 영적 세계를 넓혀주는 육신이다. 


육신의 돌봄 없이 정신과 영적인 세계를 발전할 수가 없다. 

정신적으로도 영적으로로 성장할 수 없다.




두 번째 인간 토대는 정신이다

정신은 또한 역할이라 부를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이 정신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저 대충 ‘생각하고’ ‘기억하고’ ‘계획 세우고’ ‘상상하고’ ‘판단’하는 등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는 정신의 고귀한 기능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선 정신 안에 굉장히 중요한 기능을 토대로 마련해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그 토대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대충 생각나는 대로 생활해 오고 있다. 


말하자면 정신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정신이라는 것은 

무한대 차원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순수 영 자체이신 그분과 

연결을 가지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정신은 하느님과 생체(살아있는 몸)를 잇는다. 

그래서 눈이 변하고 입이 변하고 귀가 변하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대충 생각하고’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러면 이 세상은 잘못된 생각과 오류가 판치는 혼돈의 세상이 된다. 

이성과 지성의 모든 에너지를 저 높은 곳을 향해 열어 두어야 한다.




▲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마련하신 세 번째 토대는 ‘영’(靈)이다. 

이를 초월(超越)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몸과 정신은 한계가 있다. 


우리 몸에서는 매일매일 수많은 세포가 죽어가고, 

그 기능도 점차 약화되어 간다. 정신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깜박깜박하지 않는가. 


하지만 영은 다르다. 

영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놀라울 정도로 성장을 계속한다.


그 한계는 끝이 없다. 

그런 점에서 영은 초월적이다.




▲ 또한 

하느님께서 주신 네 번째 토대로서 사회 역사적 토대를 들 수 있다. 


결국 인간이 ‘잘 살고’ ‘못 살고’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이 토대를 사회 역사적 관계에 있어서 

어떻게 다이나믹하게 연결 짓느냐에 혹은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이것을 잘하느냐, 잘못하느냐에 따라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나올 수 있고, 히틀러가 나올 수 있다. 



이는 성경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사실 구약성경의 위대한 분들의 이야기는 

바로 하느님께서 주신 몸과 정신, 영의 토대를 

당시의 사회 역사적 토대와 잘 연결지어 살았던 분들의 이야기다. 


아브라함이 그렇고 위대한 왕들이 그렇고, 예언자들이 그렇다.



이 토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상대방과의 이견차이가 

몸뚱이와 돌멩이, 화염병, 곤봉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촛불 혹은 건전한 대화, 양보로 이어질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다락방에서 기도를 할 수도 있고, 

사회적 문제에 대한 학문적 열의로 나타날 수도 있다.



결국 하느님께서 주신 토대를 어떻게 잘 사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우리의 주요한 관건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의 경우, 

이 토대가 아닌 외적인 것에 매여 살아간다. 


주관이 없고 객체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객체란, 돈이 될 수도, 권력이 될 수도, 

이성(異性)이 될 수도, 컴퓨터 게임이 될 수도 있다.



오늘도 많은 이들이 이런 것들에 모든 정신이 팔려 생활한다. 


그렇게 살다 40대 50대가 돼서 정기검진 받으러 병원에 가면 

폐암 3기, 4기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몸도 간수하지 못했고, 정신도, 영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그렇게 소중한 삶을 날려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중심’을 밖에 두고 산다. 

이제 그 중심의 이동이 필요한 때다. 


‘나중에~ 나중에~’하다 보면 늦는다.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 * *




이해욱프란치스코 18.07.29. 20:50



<다음사전>

성의(誠意) : 진실되고 정성스러운 뜻


무성의(無誠意) : 진실되고 정성스러운 뜻이 없음



<모든 일에 성의를 다해야 합니다.

성의를 다 하라는 말은 일을 완벽히 처리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일의 결과가 부족하게 드러나더라도, 일에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의를 다하는 것은 < 정신적 차원의 활동 >입니다.


<성의(誠意) : 진실되고 정성스러운 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