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가운데 이루어질 하느님 뜻의 나라
천상의 책
사람들로 하여금 질서와 그 본연의 위치와 창조된 목적에로 돌아오게 하시는 부르심
9-29
1910년 3월 8일
"올바른 지향은 영혼의 빛이다."
1 오늘 아침에는 복되신 예수님께서 아주 잠깐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 "딸아, 올바른 지향은 영혼의 빛이다.
그것이 영혼을 빛으로 변화시켜 신적인 방식으로 활동하게 한다.
영혼은 어두컴컴한 방에 불과하지만,
올바른 지향이
태양과도 같이 빛살을 보내어 방을 조명해주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올바른 활동은 모든 것을 빛으로 바꾸는 반면,
태양은 방의 벽까지 빛으로 바꾸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제9강의 지향의 순결, 순수함
카를로스신부님 사제피정 제9강의 2010. 9. 9. 사제 피정 강의록 p.134
제9권 1910년 3월 8일 일기;
예수님께서는 몇 번이나 몇 십 번이나 이 문제로,
이 지향의 문제로 되돌아오십니다.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려는 지향,
신적인 방식으로 일하는 법을 그녀에게 알려주십니다.
여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행하는 것이고,
다른 것은 신적인 방법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들을 모두 품어서 하느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사람들을 그냥 이 눈물의 골짜기에 다 남겨두려고,
그냥 거기 같이 살려고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데려가려고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의 원 성소는 하느님의 모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아서 하느님의 모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모상이 된다, 그분과 닮는다는 것은
그분 식으로, 하느님 식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 안에 영성 신학들은
성령께서 우리 영혼 안에서, 성령의 선물을 가지고 일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신비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움직여주셔서,
감동시켜 주셔서 우리가 행동을 하면
우리의 행동이 신적인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영성 신학은 사람을 두 시기로 구별합니다.
영혼이 가는 길에서
수덕적인 부분과 신비적인 부분을 갈라서 이야기합니다.
수덕적인 단계에서는 영혼이 하느님의 영향을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의 영향을 받아서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 능력으로 자기 힘으로 일을 행합니다.
영혼이 신비적 단계에 도달하면
성령이 당신의 선물을 통해서 영혼을 움직이십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자신의 선물을 가지고 영혼을 움직이십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말할 수 없이 존중하시지만
성령이 영혼 안에서 주 활동자이십니다.
우리는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신비적인 단계에서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내가 원해서 행동하는 것을,
그래서 성령이 가르치시는 대로 감동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신적인 방법으로 일하는 것이라고
영성 신학은 말합니다.
내가 돌리도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신부님이 주신 아름다운 예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수덕적인 단계는
작은 배, 노를 저어가는 작은 배입니다.
영혼은 아주 힘들게 자기 힘으로 노를 저어서 갑니다.
수덕적 단계에서는 그렇게 하는데
언제나 은총이 가르쳐 주는 대로 힘들게 노를 저어갑니다.
신비적 단계에서는 작은 배가 있는데, 돛단배입니다.
성령이 바람을 불어줘서 돛단배가 돛을 달아서 갑니다.
그러면 영혼은 그렇게 할 일이 많지가 않습니다.
바람을 불어서 배를 몰아가는 것은 주로 성령이 하시는 겁니다.
교회와 영성 신학은 지금까지는 이 상태를
하느님 뜻대로, 그것이 신비적인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또 지향에 대해서 20권 어디에선가 말씀하십니다.
“지향이 없는 행동은 시체와 같다. 시체이다.”
왜, 이것을 하는지 목적도 없이, 지향도 없이 무슨 행동을 하면
그것은 죽은 시체와 같습니다.
지향이 우리 행위의 영혼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행위들 안에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영혼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그 목적에 따라서
우리 행위에 여러 가지 다른 영혼을 줄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목적이면,
내가 인간적인 목적으로 일하면 그 목적에 주는 영혼은 인간적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무슨 일을 행동을 하면,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행동에게는
우리가 거기에 맞는 영혼을 주게 됩니다.
이렇게 지향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바로 아침에 봉헌을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봉헌입니다.
수도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지향을 두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도 기도 생활을 좀 하는 사람이라면,
하루가 끝나면서
그날 하루 잘못한 것을 용서하고, 감사하고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아침에 바로 그날 할 모든 걸 봉헌하면서,
그날 하루 자기가 할 일 안에, 할 일들에게 지향을 주어야됩니다.
평신도들이 다 이렇게 해야 됩니다.
아침에 봉헌하는 것을 평신도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일상생활, 보통의 생활, 보통의 일들을 하느님께로 들어 올리는 것,
하느님의 수준으로 들어 올려야 됩니다.
그렇게 아침에 봉헌해야 합니다.
이것은 평신도들에게 큰 도전입니다.
이것은 평신도들에게 큰 도전이 되고 평신도들에게 아주 중요한 것인데,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수준으로 신비적인 수준으로 들어 높여야 합니다.
우리 사제들은 이미 벌써 아침에 미사 봉헌하고,
성무일도를 드리고, 기도 바치고 있고,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초자연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은 이미 다 초자연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을 따로 들어 높일 필요는 없습니다.
미사나 성무일도나 이런 것은 다 이미 초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은,
우리가 하는 이런 모든 초자연적인 일들을 잘못하면
자연적인 수준으로 내려 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조심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평신도도 성직자도 다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평신도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
자기들의 모든 것을 영적인 초자연적인 수준으로 들어 올려야 되고,
사제들은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인간적인 수준으로 낮춰버리지 않도록
그것을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 교회 안의 두 부분에, 두 가지 도전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곳으로 가는 출발점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지향의 순수함이 없이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무엇 때문에 가는지를 분명히 모른다면,
만약 우리가 순수한 지향이나,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올바른 의식이 없다면
이런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말들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제들의 중요한 의무는
평신도들에게
자기들의 일상생활의 모든 것들을 초자연 수준으로 들어 올리는 것,
그렇게 하도록 도전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하느님을 위해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하느님과 함께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느님 안에서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 뜻 영성 카를로스신부님 제2차 피정 강의록
메리놀 외방선교회 제15강의 (2013. 4. 25 사제 피정)
13권 30장 1921년 11월 4일
하느님께서 천지창조 때 ‘피앗’을 발하신 이유.
하느님 의지의 반영이 되도록 창조된 인간의 의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하느님 뜻
1 다정하신 예수님과 온통 동화된 느낌이 들었으므로,
예수님께서 오시자 나 자신을 내 중심이신 그분께 완전히 맡기면서
그분의 팔 안에 뛰어들었다.
그분의 팔 안에 머물러 있으려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자 다정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9 그런즉, 보아라,
나 자신과 피조물 사이에 얼마나 많은 관계가 있는지를!
내가 피조물을 끔찍이 사랑하는 까닭이니,
그들을 나에게서 태어난 것으로, 오로지 나의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10 게다가 내가 또 사람의 의지를 얼마나 고상하게 만들었느냐?
그것을 나의 의지와 결부시켜 내 모든 특성을 부여했고,
내 의지와 똑같이 자유롭게 만들지 않았느냐?
사람의 몸에는 영원한 빛에서 출발한 작은 빛을,
즉, 그 둘레에 선을 그어 한정한 두 개의 작은 빛만 있었지만,
사람의 의지는 온통 눈이 되게 만들었으니,
이 의지는 스스로 이루는 행위의 수와 같은 수의 눈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묵시록으로 가보면,
여러분은 하느님 어좌에 가까이 있는 생물들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생물들은 안팎으로 온통 눈이 가득 달려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 눈들은 하느님께서 창조해주신 이 인간의 뜻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 의지로 우리가 행하는 행위의 수와 같은 수의 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10 사람의 의지는 따라서 전후좌우를 다 볼 수 있는 것이다.
11 한데 사람의 생명은 내 의지의 생명을 받지 않으면 아무런 선도 행하지 못한다.
사람의 의지를 창조하면서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땅에서 내 자매가 되어라.
내 뜻이 하늘에서 너의 뜻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의 반영이 되자.
그러면 무엇이든지 내가 하는 일을 너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본성상 그러할 것이고,
너는 나의 끊임없는 반영이 되는 은총으로 그러할 것이다.
내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절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의 삶에서는 이것이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당신의 삶을 완성하시면서
“내가 할 것은 무엇이나 너도 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않고서 내가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의 인간적인 뜻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 뜻의 완전한 자매였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모님의 인간적인 뜻도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뜻의 이 땅의 완전한 자매이셨습니다.
“나는 본성상 그러할 것이고, 너는 나의 끊임없이 반영이 되는 은총으로 그러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주님께서는
“나는 그림자처럼 너를 따라다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인간적인 뜻을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우리의 뜻을 언제나 계속해서 따라다니실 것입니다.
12 내가 피조물을 창조한 유일한 목적은
피조물이 모든 일 속에서 내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
우리는 다른 목적 때문에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 의지로 하느님의 뜻을 완수하기 위해서만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원하고 무한한 뜻을 우리 피조물의 한계 안에 넣으시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성취하실 수 있는 최대의 기적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사람들을 부활시킨 것보다 더 큰 기적입니다.
12 그러나 이와 함께 나 자신의 새로운 탄생들이 일어나게 하는 것도 나의 바람이었다.
피조물을 내게 합당한 놀라운 존재로,
모든 면에서 나와 비슷한 존재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아 슬프게도, 사람의 의지가 제일 먼저 나에게 대항하려고 들었다!
13 한 번 둘러보아라.
모든 것이 두 개로 이루어져 있다.
너는 눈을 가지고 있지만, 너를 비추는 영원한 빛이 없다면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이다.
너는 손을 가지고 있지만, 일을 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 없다면 아무 일도 못할 것이다.
나머지 모든 것도 이와 같다.
14 그러므로 나는
사람 안에, 사람과 나 사이에, 곧 우리 양자 사이에 거룩함이 있기를 바란다.
그 방식은 이러하다.
서로 다른 입장에 처한 채,
나는 사람에게 그의 충실한 동반자로 나 자신의 생명을 주며 내 거룩함을 소통시키고,
사람은 나의 충실하고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로서 그것을 받는 것이다.
15 이와 같이 사람은 사물을 보는 눈이 되고 나는 그에게 빛을 주는 태양이 된다.
사람은 입이 되고 나는 말이 되며,
사람은 손이 되고 나는 사람이 일할 수 있게 조처하는 관리자가 되며,
사람은 발이 되고 나는 걸음이 되며,
사람은 심장이 되고 나는 심장박동이 되는 것이다.
16 한데 너는, 누가 이 거룩함을 이루는지 알겠느냐?
홀로 나의 뜻만이 창조 목적을 순조롭게 유지한다.
내 뜻의 거룩함이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에 완전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한 피조물이 내게서 나온 참된 모상들이다.“
이것은 그분의 모상이 되고 그분과 같아져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 시대에 우리 인간의 성소를 완성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