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창에 찔린 예수 화살에 꽂힌 신

제1부 14 {천상의 책 12권18장}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사는 것' 과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는 것' 의 차이} 위무위 신부님의 댓글 말씀

은가루리나 2020. 2. 27. 23:14


사람들 가운데 이루어질 하느님 뜻의 나라


천상의 책


사람들로 하여금 질서와 그 본연의 위치와 창조된 목적에로 돌아오게 하시는 부르심



12-18



1917년 8월 14일



예수님 생애의 중심이었던 아버지의 뜻,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사는 것' 과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는 것' 의 

차이.



- 위무위 신부님의 댓글 -



12.06.11. 12:44


2~9 까지의 예수님의 말씀은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아버지이신 성부의 뜻에 맡기고 사신 것과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사는 것과는 "큰 차이" 가 있는 것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이 "죄" 의 차이 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 이셨고,
우리는 인간이기에 "죄에 속한 존재" 라는 사실입니다.

무죄하신 분이 무죄하신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사시는 것
유죄한 존재가 무죄하신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사는 것과는
당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고,
또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입니다.

저는 루이사가 이 사실을 배제하고,
아니면 생각을 못하고 위의 글을 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죄하신 분이 무죄하신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사시는 것은 곧,
그 삶 자체가 "하느님 뜻 안에 사는 것" 이 될 수밖에 없지만,
유죄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사는 것은
처음부터는 그것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뜻에 내맡기는 것(봉헌 서약)"이 아니겠습니까?

이범주 신부님께서도 세미나 후에 봉헌 예식을 하시는데,
그 봉헌 예식과 "거룩한 내맡김의 봉헌 예식" 은
많은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범주 신부님의 봉헌 예식은 "하느님 뜻 안에서만 살기로",
다시 말해, 하느님의 뜻을 전혀 벗어나지 않기로 서약을 하는 것이고,

거룩한 내맡김의 봉헌 서약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겨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로
서약하는 것입니다.

이 둘의 차이점은
한 가지는 전혀 죄에서 벗어나기(하느님 뜻 안에 사는 것)를 서약
하는 것이며,
또 한 가지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김으로
죄마저도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살아가겠다는 서약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겨 드리면,
지금 당장의 내가 죄없는(무죄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내맡겼기에
하느님께서 점점 죄에서 멀어지게 이끌어 주십니다.

이 점이 가장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이 점에 우리가 얼마나 큰 위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확신합니다.
부족하고 허물이 많고 죄스런 인간이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100%의 결심으로 하느님께 내맡겨드린 사람들은
이 세상 마치기 전의 어느 순간에는 정말로 당신처럼
무죄한 상태로 만들어 주실 것임을 말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집고 넘어갈 부분이 있는데,
루이사를 소개한 책자에서
그녀는 수십 년의 세월을 "산 송장" 처럼 사신 분이라고 소개한 사실입니다.

그녀는 성체외에는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으며,
그녀는 잠자리에 잠이 들면
아침에 영적지도 신부님이 미사를 드리기 위하여일으켜 세워주기 전까지는
거의 죽은 상태의 몸으로 수십 년을 살아가신 분입니다.
아니 평생을 그렇게 사신 분입니다.

그러하신 분과 세상의 죄 속에서 부딪끼며 살아가야 하는 보통 신자들과
비교하는 것은 無理일 것입니다.

저는 한 인간이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루이사를 통하여
죄를 벗어난 삶을 살게 해 주신 그 높은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남습니다.

그것은 그녀를 통하여
하느님께 내맡긴 삶을 사는 사람도
하느님의 뜻에 더욱 충실하게 되면,
언젠가 루이사처럼 무죄한 삶을 살게 해 주신다는 확신을 주시기 위함

이라고 말입니다.




12.06.11. 12:44


루이사의 말처럼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착한 아들" 이다.

그 착한 아들이 내맡김의 길에 접어들어서
처음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을 가르키는지 몰라
때로는 서성거리고 주춤거릴 수도 있고
그래서 죄에 떨어지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처음엔 하느님의 뜻에 자기의 뜻을 섞을 수 있는 일이
빈번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교류와 소통을 끊을 수는 없는 것이다.

부족하지만
굳은 결심을 100% 내맡겨드렸는데 하느님이 그것을 그냥 놔두시겠는가?
만일 하느님과의 교류와 소통이 끊긴다면
하느님과 내맡긴 영혼, 둘 중의 하나가 문제인 것이다.

하느님 편에서 문제가 있을 수는 없는 일이고,
분명히 인간 편에서 문제가 있를 것인데,
저는 그것을 늘 말씀드리지만,
봉헌시의 결심이 100%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교류와 소통이 끊기지 않게 하는 가잘 탁월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겠다는 "화살기도" 이다.
이 화살기도가 있기에
절대로 하느님과의 소통이 끊길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루이사의 17번의 글 그대로,
처음엔 많이 부족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사는 것은
성덕으로 나아가는 가장 탁월한 탄탄 大路인 것이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처음부터 "하느님 뜻 안에서" 만 살 수는 없으며,
단 번에 그것을 바라는 것조차도 저는 "교만" 이라고 믿는다.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은
자신의 부족과 죄 속에서도 전혀 서두름 없이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나날이 조금씩조금씩, 하나하나, 때로는 엄청나게
이끌어 주시는대로 살아갈 뿐이다.


그것 자체로만 해도 너무 행복할 뿐이다.




12.06.11. 16:09


자아~~~ 또 이어서 쓰겠습니다.

제가 이처럼 긴 루이사의 글을 올린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루이사의 글을 읽고 "기가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 입니다.

루이사가 위의 글에서 어렵게 표현한 말을 한 마디로 종합해 말하면,
"성덕의 최고 경지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뿐입니다.


루이사가 한 번에 하느님과의 완전한 사랑의 일치를 이루었습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저의 견해로는
루이사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도구로 뽑혀,
예수님으로부터 어린 시절부터 특별하게 교육을 받아
그러한 경지까지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루이사는 하느님의 뜻의 도구로서
보통 일반인들과는 전혀 다른 생활을 했던 분입니다.

그런 분이
보통의 일반 신자들에게 성덕의 최고의 경지에 들지 못한다고
"수치스런 성덕이니, 맹랑한 성덕이니"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고급의 단계에 이렀다는 신앙인들에게 하는 말로
저는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기가 죽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보시면 너무나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루이사 피카레타와 같은 완전한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으셨습니다.
정말로 어리석은 제자들, 그리고 세리, 창녀들과 어울려
그들에게 큰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만 하더라도 보십시오!
얼마나 용감히 무식한 사람들이었나를 말입니다.
제자들이 처음부터 예수님과 완전한 사랑의 일치를 이루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일치를 이루기 보다
자신들의 이익에 더 급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그들의 모습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지만
그들의 모든 것을 품어 주시고,
3년 동안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잠자고 하셨던 분입니다.


코 찔찔이 제자들이
스승 예수님과 완전한 사랑의 일치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나중에 당신이 그들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한 뒤,
성령을 통해서 입니다.

제자들이 그들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예수님과 완전한 사랑의 일치를 이룬 것이 아니라,
완전히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의해서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루이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을 사랑하려는 노력도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하느님의 이끄심(사랑과 은총에 의한)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자신의 노력으로 코찔찔이 신세를 벗어난 성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더구나,
루이사는 사회생활도 거의 없이 집 안에서만 생활한 사람이었던 점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의 뜻의 도구로 사용되기 위하여
특별히 선별되어 온실과 같은 환경 속에서 살아간 루이사와
세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동일화시켜서는 아니 됨을
다시 상기시켜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내맡김의 봉헌 서약"을 하려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참으로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노력만으로는 우리 자신의 성화를 이룰 수 없기에
하느님의 은총에 부족한 우리를 맡겨드려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화된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내맡김(위탁)의 서약" 은
이미 세례나 견진이나 수도서원이나 사제서품으로 이루어졌으나,
우리가 실지로 하느님께 위탁된 삶을 살지 못하기에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굳은 결심" 을 하느님 대전에 재봉헌하는
세례 갱신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결심이 완전하면
하느님이 우리의 모든 부족함을 100% 다 받아주시어,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나날이 조금씩조금씩 성화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가장 큰 활력이 되는 것이 "화살기도" 입니다.

화살기도는 루이사의 위의 글
"36번(이 변화에 이르는 과정이야말로 끊임없는 기도이기에)" 처럼,
부족한 우리를 변화된 삶, 성화된 모습의 신앙인으로 바꾸어 줍니다.


기도란 어려운 것이 절대 아닙니다.
기도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내 안에서 키워 나가는 행위
뿐입니다.
가장 쉬운 기도 방법이 가장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는 "화살기도"
입니다.

내맡김의 봉헌 서약 이후에
이 화살기도를 집중해 나가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내 안에 들어차기 시작했다는 것임다.




12.06.11. 23:18


하느님께 부족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긴 영혼들은 루이사처럼
고무 풍선이 되든 찌그러진 쪽박이 되든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고무 풍선이 되어도
주님께서는 그 고무 풍선을 가죽 풍선으로 바꾸어 주실 분이시고,
깨어진 쪽박이 되어도
그것을 통하여 金박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시니까요.

우리는 아직도 너무 부족한 주제이기에 
루이사 피카레타처럼 무죄한 최고의 경지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부족하기에
우리의 죄를 통해서도
점점 당신의 거룩함으로 이끌어 주시는 분이심을 굳게 믿고
기쁘게 그리고 즐겁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대개 영성의 최고의 경지에 이른 훌륭한 분들은 늘 걱정이 앞섭니다
루이사의 글대로
내맡김의 영성은 성덕의 첫걸음이기에 부족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앞 날을 이끌어 주시는데
무엇을 빨리 성취하려 안달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12.06.11. 22:58


이제 보십시오, 제 말이 "진실인가 거짓인가" 를 말입니다.
저는 정말로 이 세상에서 바라는 욕심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 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저도 하느님께 내맡겼지만
아직도 루이사처럼 "죄에서 해방된 삶" 을 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아직도 많이 정화되지 못한 저의 모습을 가끔씩 발견하곤 합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저의 모습을 저의 생활을 통하여 보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주님께 더욱더 의지하고 의탁하고 위탁하는 내맡김의 삶을 통하여
제가 생각하기에도
과거보다는 저~엉말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저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의 은총의 결과입니다.
저는 정말 부족하지만 저의 굳은 결심을 내맡겨 드렸을 뿐인데
주님께서 그렇게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정말, 이번 기회에 여러분도 굳은 결심을 내맡겨 보시면,
저나 여러분보다 먼저 내맡겨 살고 계시는 선배님들처럼
누구나 그것을 체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내맡김의 삶은 정말 신비롭습니다.

하느님을 점점 뜨겁게 사랑하실 수 있는 아주 "건실한 신앙의 길" 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길로 여러분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결심만 굳게 준비하시면 끝입니다.

그다음의 모든 일은 하느님의 일이십니다.

기쁘고 가벼운 맘으로 그분께 나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