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13회 머튼의 고독과 침묵 2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3. 21. 12:54


+찬미예수님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의 박재찬 안셀모 신부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번시간에는 토마스 머튼의 고독, 그리고 후반부에는 

침묵에 대해서 한번 나눠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이 고독과 침묵에 대해서 다루면서 

제가 끊임없이 지금 함께 여러분들과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요.


'홀로 있는 시간'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시간이었고 

또 실제로 토마스 머튼이 이 고독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을 만나면서 

더 큰 하늘의 고독과도 만났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시간을 통해서 보다 더 깊은 차원의 고독을 더 깊이 한번 나눠보고, 

또 토마스 머튼을 통해서 내 삶의 여정에서의 내 신앙생활 안에서 정말 홀로 

하느님 앞에 있는 시간이 얼마나 값진 시간이고 또 얼마나 더 성장해 나갈 수 있는 

시간인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지난 시간에 제가 거짓 고독과 참된 고독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었죠! 

또 이어서 계속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지난시간에 제가 토마스 머튼이 이해한 고독은 어떤 단순한 외롭고 쓸쓸한 

그런 수동적인 고독을 넘어서 보다 더 깊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과 만나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지리적으로 혹은 또 공간적으로 또 시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그 다음에 또 어느 정도 일정한 단계에서 그런 깊은 예수님의 고독과 

만나게 되면 이제는 외적인 그런 분리된 것을 넘어간다는 이야기를 이번 시간에 

좀 더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더 깊이 있게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이제는 어떤 외적인 것들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지는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선 지난 시간에 마지막 부분에 참된 고독 그 다음에 거짓된 고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었죠. 그래서 참된 고독은 진정으로 겸손 안에서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거짓 고독을 찾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내 공간안에 들어오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배척하죠. 딱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거죠.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문을 열으셨습니다. 그죠? 

심지어 뭐 그 당시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배척하고 비난했었죠. 

뭐 세리와 창녀들과 함께 어울린다. 이런 표현을 썼는데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홀로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면서 동시에 또 사람들에게 다가가셔서 

그들을 어루만져주시고 하셨습니다.


토마스 머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홀로 은둔처에서 1965년부터 머물렀지만 결코 홀로 혼자 있는 것만을 즐기지 않았습니다.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으로 대했고, 또 그들에게 자기 자신이 깨달은 바를 

나누어 주었죠. 그리고 또 여러가지 글로써, 혹은 또 종교간 대화를 위해서 직접 아시아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로부터 뭔가 배울려고 하고, 또 그들의 고독에 함께 참여할려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보는 것처럼 토마스 머튼이 이해한 고독은 단순히 홀로 있는 고독을 

넘어간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과 만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참된 고독 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더 이상 욕망이 없기에 

그 고독은 사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움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쓰라린 괴로움에서도 자유롭다. 

쓰라린 괴로움이 정화되었기에 그 영혼은 안전하게 홀로 있을 수 있다." 

굉장히 아름다운 표현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진실로 고독한 영혼은 완벽한 무색의 존재가 되어 

고독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사랑이나 증오를 자극하지 않는다. 

진실로 고독한 영혼은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그 영혼은 모든 곳에서 홀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토마스 머튼이 쓴 <No Man Is an Island >(인간은 섬이 아니다)라는 책을 한번 읽어보시면 

그 후반부에 고독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고독을 단순히 고독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고독과 사랑을 연결시키게 됩니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요나의 표징>에서. 


"고독과 침묵은 나에게 형제들이 하는 말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형제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또 1966년 4월 14일에 쓴 일기에는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오늘 <고독 속의 명상> 일본어판 머리글로 쓴 고독에 대한 단상을 다시 고쳐썼다. 

글 내용이 좀 더 깊이 있어 보인다. 한 가지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사랑이 없다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과 자유로 열리지 않은 고독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이 없다면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과 자유에로 열리지 않는 고독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과 고독은 진실로 성숙과 자유로 나아가는 바탕이다. 

고독을 위한 고독, 고독 이외의 것은 모두 배제한 고독은 아무 의미가 없다. 

진정한 고독은 모든 것을 끌어 안는다. 

고독은 아무것도, 아무도 거부하지 않는 사랑의 충만함이기 때문이다. 

고독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에 열려있다."



이 일기를 저는 읽으면서 와, 정말 이 고독이 사랑과 이렇게 연결될 수 있구나, 

그리고 고독을 통해서 진정으로 토마스 머튼은 하느님 사랑을 느끼고 체험했구나 

하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독으로 깨어난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대해서 사랑을 나누고  

세상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세상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는 것을 구원으로 

표현하셨던 것처럼, 찬가지로 고독을 체험해서 고독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깨어난 이는 세상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안다는 겁니다. 


그 책임이란 무엇인가 하면,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말씀을 전하고 또 삶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토마스 머튼은 


"저는 이제 저의 고독이 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진정 다른 이들에게 속한 것임을 이해하고, 

단지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 

고독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역시 고독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이끌어줘야 한다는 책임이 있다는 것이죠.  

머튼은 스스로가 자신의 영적인 체험과 새로운 깨어남으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을 위해 

살았기에 그의 삶은 이러한, 어떤 종교간의 대화뿐만 아니라 이런 삶의 방식에 

큰 좋은 사례가 되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의 고독을 사랑으로 이끌기 위해서 세상을 향해서 투신했다는 겁니다. 

이 투신은 직접적인 투신이라기 보다는 많은 글로써 혹은 기도로서의 투신일 수도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또 이러한 토마스 머튼의 모습에서 제가 앞에도 잠깐 언급드린바와 같이 

토마스 머튼은 다른 종교의 고독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깊이 연결시켜서 그들과도 함께 

나누면서 더 깊은 고독을 통해서 만난 그들의 하느님의 체험, 또 그들의 성령의 체험, 

또 그들의 어떤 영적인 체험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고자 했다는 것도 종교간 대화를 

이해하는데 굉장히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래서 뭐 여러 불교의 선사들, 라마들, 또 린포체, 인도의 수행자들 이런 분들도 

고독 속에서 어떤 영적인 갈망을 통해서 하느님, 혹은 참자아를 찾고자 하는 그런 분들이시죠. 

그래서 그런 분들과의 머튼은 대화를 하기를 즐겨했고 또 갈망했습니다. 


사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고 고독 속에 깊이 들어가서 영적으로 깨어난 이들의 

첫 번째 표시는 바로 개방성에 있습니다. 

아까 제가 토마스 머튼이 영적으로 고독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과 만나면서 

깨어났다는 것처럼 열려져 있는 사람, 손쉬운 사람의 모습을 간직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아직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열려있지 않거나 혹은 다른 종교에서 열려있지 않다면 

어쩌면 아직 내가 개방성, 예수 그리스도의 개방성,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그 개방성에 조금 더 부족하지 않은가, 영적으로 미숙한 건 아닌가 

하는 그런 자기진단도 해볼 수 있을 겁니다.


요약하자면 토마스 머튼은 진정으로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을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 이렇게 나옵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고독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렀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났습니다. 그게 바로 토마스 머튼이였습니다. 


고독은 하느님 앞에 홀로 있는 나, 그리고 삶의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있는 나를 미리 체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체험은 더 큰 사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요약하자면 토마스 머튼은 이제 요한복음 15장의 말씀,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고독 가운데 토마스 머튼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했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면서 더 깊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나아갔던거죠. 

자기초월에 이르렀던 겁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고독을 통해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고독을 통해서 진정으로 하느님과 일치하는 법을 깨달았던거죠. 


그런데 이제 이 고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 중에 정말 절대적인 요소중의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침묵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좀 더 고독을 깊이 살펴보기 위해서 토마스 머튼이 이해한 침묵에 대한 

설명을 여러분들과 좀 더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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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제가 신학생 시절에 제 책상앞에  양면으로 코팅 되어진 기도문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J.갈로가 쓴 '말없이 사랑하라' 는 그런 기도문이었구요 

그 반대편에는 토마스 머튼이 쓴 '침묵의 귀중함' 에 대한 거였습니다. 


그 때 그 토마스 머튼이 쓴 침묵에 대한 내용이, 토마스 머튼이 썼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했을 뿐더러 그 때 그 토마스 머튼이 쓴 침묵의 귀중함에 대해서 

제가 많이 느끼고 체험했지만 지금 이렇게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강의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근데 이 토마스 머튼이 침묵의 귀중함에 대해서 이야기 한 이 내용은 너무 

제 삶에서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미 알고 계신 분들도 많을 겁니다.


<침묵의 귀중함>


침묵은 양선함(양보)입니다.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을 하지 않을 때, 

내 권리를 주장하지 않을 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온전히 하느님께 맡길 때 

바로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침묵은 자비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할 때, 

판단하지 않고 마음 속 깊이 변호해줄 때, 

바로 침묵은 자비입니다. 


침묵은 인내입니다. 

불평없이 고통 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바로 침묵은 인내입니다. 


침묵은 겸손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 때, 

하느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춰졌을 때도,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는 어떻든 내버려둘 때에, 

바로 침묵은 겸손입니다. 


침묵은 신앙(믿음)입니다. 

그 분이 행하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에 있기 위해 세상 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 분이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바로 침묵은 신앙입니다. 


침묵은 흠숭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옹할 때, 

바로 침묵은 흠숭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기도문을 책상 앞에 놓고 잠시 묵상하면서 진정으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침묵, 또 예수 그리스도의 말없음, 그 안으로 들어가서 

진정으로 더 큰 자비와 사랑과 인내와 겸손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사실 오늘날 정말 말많은 세상에 살고있죠. 

정보의 홍수 또 수 많은 이야기들, 매체들, 뭐 이 가운데 제가 하는 말도 포함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문득 듭니다. 홀로 있다하더라도 사람들은 아니 홀로 있을 줄 몰라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대화를 한다든지, 또 전화를 한다든지, 뭐 한 시간 통화하고 자세한건 

만나서 이야기하자 하는 이런 분들도 계시던데 그런 인터넷 관계된 여러 가지, 우리는 

수없이 말을 하고 또 글을 읽고 또 정보를 취하고 있습니다.

 

정말 가만히 있는 시간, 침묵하는 시간에 대해서 우리는 좀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사실 그래서 "가만히 성당에 앉아서 조배를 하십시오. 혹은 관상적인 기도를 하십시오"하면 

뭘 해야할지 또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는 경우도 참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 생각에는 첫 번째는 우리가 홀로 있을 때 자신의 무의식이나 자신의 자아를 직면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홀로 있을 때 과거의 아픔이나 상처들, 

또 내가 피하고 싶은 내 안에 어둠들을 만나기 때문에 그 어둠들을 만나고 싶지 않은거죠. 

회피하고 싶은 겁니다.

 

내가 드라마를 보거나 축구를 볼때는 적어도 그 시간들이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그죠? 

그래서 그 시간에 직면하고 싶지 않은데 그 시간에 직면하게 되면 아프고 힘들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직면할 때 그때 나의 부서짐이 생기고 내가 부서질때 나의 성장이 

이루어지고 치유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현대인들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자기 자신의 자아를 그 때, 홀로 있을 때, 침묵할 때 직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두 번째로는 현대인들은 그 외적인 침묵을 넘어서 외적인 침묵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이 모순과 불편함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분석할려고 듭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많은 문제들은 침묵하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분석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기도를 검토하고 또 어떤 때는 심리적인 과정에 지나지 않는 

어떤 평화로운 상태가 기도의 결실이라고 착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와 관상생활을 망치게 되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계속 분석할려는 경향, 이성적으로 기도할려는 경향이 우리의 외적인 

침묵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내적인 침묵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하죠. 

사실 우리가 기도나 관상에서 추구해야 할 대상은 하느님인데, 

우리는 머리로써 하느님을 헤아리려고 할 때 깊은 하느님의 침묵과 만나지 못하게 되는 거겠죠.


그러면 우리가 왜 침묵을 지켜야 할까요?  

토마스 머튼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침묵과 하나되기 위함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침묵은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침묵이다." 


저는 이 말씀을 참 이해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냈다. 

이런 표현을 쓰는데 왜 하느님은 침묵이라고 했을까요? 사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부분, 또 모를 수 있는 부분, 그러니까 'Nothingness' 라고 그러죠.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초월적인 그 분을 마지막까지 알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안다고 이제 계시된 것들을 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내가 아는 것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은 침묵이다 라고 말씀하는 그 이유 중의 하나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침묵이라는 그 말없음을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전할 때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없음이 사랑의 표현일 때가 있습니다. 그냥 기다려줌이 사랑의 표현일 때가 있습니다. 


집 나간 둘째 아들을 아버지께서는 침묵으로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게 사랑의 표현이었던거죠. 

성모님께서 침묵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활 하는 동안 지켜 바라보았죠. 

그게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말을 통해서 사랑한다고 생각할 때  

하느님의 침묵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왜 침묵해야 하냐하면 내 안에서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끊임없이 말할 때 끊임없이 뭔가를 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의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나아가서 세 번째로 그분의 소리를 들을 수도 없게 됩니다. 

계속해서 말하고 있을 때 우리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죠. 

우리가 사람들끼리 대화할 때도 서로 말을 하면 또 그 말을 듣고 난 다음에 거기에 

반응해서 또 다른 말을 합니다.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 그건 바로 연설이라든지 강의 정도 되겠죠.

그러나 우리가 대화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소리를 들어야하는데 

우리는 많은 경우 하느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내 이야기를 끊임없이 할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기도할 때조차도 주님께 뭔가 끊임없이 말하고 끊임없이 청하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듣기 위해서 침묵이 필요한 것이겠죠.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삶은 듣는 것이고 그분이 말씀하신다. 

나의 구원은 듣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의 삶은 침묵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의 침묵이 곧 나의 구원이다." 


굉장하죠. '나의 침묵이 나의 구원이다.' 

굉장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뭔가 느끼실 겁니다. 

그 분의 소리를 들을 때, 그 안에서 구원이 일어나는거죠.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들을 때 그 안에서 나의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듣기 위해서는 침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세상 만물로부터 떼어놓는 나의 침묵은 

내 영혼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침묵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을까요? 

저는 여러가지 침묵의 레벨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외적으로 혀의 침묵이 있을 수 있겠죠.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혀가 침묵을 지키고 고독 속으로 들어간다면 

말없는 존재들의 침묵이 그들의 휴식을 우리와 나눌 것이다."


분명히 진정 하느님의 침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혀의 침묵, 외적인 침묵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침묵의 종류가 있습니다. 


생각의 침묵입니다. 

상상력의 침묵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우리가 기도할 때 끊임없이 말은 안하는데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게다가 특별히 

이제 미운 사람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되나요? 

정말 속 시끄럽죠. 막 온통 그 사람이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정말 끊임없이 우리 생각들이 침묵을 지키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토마스 머튼이 침묵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중에 하나는 마지막으로 갈망의 침묵입니다. 

이 갈망의 침묵이라는 표현은 굉장히 저한테 깊이 와닿았는데 

토마스 머튼이 <고독 속의 명상>에 이런 표현을 씁니다. 

맨 마지막 부분만 제가 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이 영적생활을 하고 싶다면 삶을 단일화 해야합니다. 

당신의 삶을 단일화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갈망을 단일화해야 합니다. 

당신의 삶을 영성화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갈망을 영성화해야 합니다. 

당신의 갈망을 영성화하기 위해서는 갈망없는 존재가 되기를 갈망하라."

  

'갈망없는 존재가 되기를 갈망하라'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 주시는 걸 압니다. 그리고 이미 모든 것을 해주셨을 때, 

더 이상 바랄 게 없죠. 더 이상 갈망할 게 없습니다. 

'갈망없는 존재!' 하느님의 그 사랑에 충만히 젖어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존재가 되기를 

갈망하라! 


너무도 충만한 그런 말씀이고 또 우리가 진정으로 갈망의 침묵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혀의 침묵(외적인 갈망), 생각(상상력)의 침묵, 그 다음에 갈망의 침묵 

이 세 레벨을 통해서 토마스 머튼은 침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이런 침묵의 궁극적인 목표가 뭘까요? 

그렇죠. 아마 제 강의를 많이 들은 분들은 금방 답을 했을 겁니다. 

바로 하느님과의 어떤 영적인 깊은 일치를 위해서, 그 분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그래서 그분과 온전히 하나되기 위해서 우리는 침묵을 합니다. 


이걸 다르게 표현하면 '영적인 친교' 'Spiritual Communion' 이라고 볼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 그 성체를 영하는 그 순간을 영어로 ' Communion'이라고 합니다. 

'Holy Communion' .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체의 모습으로 그 빵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했을 때 '아멘'이라고 답합니다. 

그것이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구요. 그래서 말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이 

성체라는 걸, 예수님의 몸이라는 걸 압니다. 그래서 그 분과 말없이 온전히 

일치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외적인, 내적인 침묵을 지키는 겁니다.


그래서 침묵을 통해서 진정으로 그 분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집착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내 안에서 목소리를 들려주시고, 그 분이 내 안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 분의 뜻에 순명하게 되고 그 분께서 하시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Letting Go의 영성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단순한 말하지 않음의 침묵을 넘어서서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말하도록 나를 내어맡기는 것도 

토마스 머튼이 말한 침묵의 하나의 방법일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는 세상을 향해서 진정한 침묵에 도달했을 때, 

영적인 침묵에 도달했을 때는 세상을 향해서 말하게 합니다. 근데 그때 이 말하는 것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서 말씀하시는거죠. 


예수 그리스도의 침묵 안에 들어갔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꼭 어떤 언어적인 

표현뿐만 아니라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또 표현(필요)할 때는 언어적인 표현을 통해서 

세상의 부조리를 향해서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내적인 깊은 침묵을 통해서 더 큰 하느님의 소리를 낼 수 있게 되는 거겠죠. 

그래서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하는 이 침묵은 굉장히 영적인 깊이있는 침묵이라는 것을 

다시금 여러분들이 이제 깨달으셨을 겁니다.



그리고 이 깊은 침묵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또 다시 강조하게 됩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침묵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말없지만 

그 말없음을 통해서 오히려 더 깊은 그리스도의 내면의 깊이, 어떤 영적인 사랑의 마음, 

말없이 사랑하는 그 마음들을 이제 배우게 되는 거겠죠. 


그래서 우리가 실제로 정말 침묵의 어떤 시간들, 외적인 침묵의 시간들, 내적인 침묵의 시간들을 

여러분들이 좀 일상 안에서 가졌으면 좋겠다는 것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토마스 머튼도 트라피스트 수도원 안에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소침묵이고 또 끝기도 후에는 대침묵을 지킵니다. 저희 베네딕도 수도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항상 건물내에서는 소침묵을 지키고 또 대침묵을 통해서 끝기도 후부터 

다음날 아침까지는 대침묵의 시간을 통해서 하느님과 둘 만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외적인 침묵의 시간들을 여러분들께 가지시기를 권고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런 침묵의 시간을 통해서 지금 나에게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또 굉장히 주변의 다른 사람들 때문에 막 속시끄럽다 그러죠. 

그래서 내 마음 속에 침묵을 지키기 어려운 경우가 생긴다면 내 마음의 속시끄러운 그 마음의

상태마저도 하느님께 말씀 드리면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시간을 먼저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주님, 오늘 저 사람 때문에 굉장히, 저 사람이 한 말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고 힘듭니다. 제 안에 어떤 내면의 침묵의 시간, 내면의 평화를 주십시오.' 

또 '제 안에 이런 불편한 마음들 당신이 가져가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드린 다음에 

조용히 그 분의 소리를 듣는 시간을 가질 때, 우리가 그 미운 사람을 통해 혹은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을 통해서 또 새로운 하느님의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홀로 있는 시간,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 주님께 여쭙는 시간들을 많이 

가지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또 때때로 내 안에 정말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 또 하느님께 온전히 신뢰하는 마음, 

이런 마음이 없을 때는 자꾸 인간적인 방법으로 뭔가 해결하려들고 또 기다릴 줄 모르는

그런 마음들이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침묵은 진정으로 내가 하느님께 온전히 나를 의탁하고 하느님께 맡기고 

인내하는 그런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내 마음을 열어 보여드리고 인내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소리를 깊이 들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오늘 첫 시간에 시작할 때 성모님의 영성에 대해서 이야기할 거라고 했는데 

제가 침묵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말하는 바람에 성모님에 대해서는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아마 다음 시간에 성모님에 대해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전체적인 토마스 머튼의 침묵과 고독에 대해서 다시금 요약해드리는 시간을 갖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로 

토마스 머튼이 침묵과 고독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침묵과 고독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침묵과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방법,도구로써 토마스 머튼은 침묵과 고독이라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처음에는 토마스 머튼도 우리처럼 외적인 그런 방법으로, 공간적인 방법으로 

혹은 시간의 방법으로 실제로 침묵과 고독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점점 나아갈수록 침묵과 고독이 어떤 시대적(지리적) 27:33 이거나 공간적인 것 혹은 

시간적인 개념을 넘어서서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과 침묵과 만날때는

때때로는 홀로 있지만 홀로 있지 않고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고, 

또 다른 사람들의 외로움, 고독에 마음을 쓰고 사랑으로 나아가기까지 했구요.


또 두 번째는 그 침묵을 통해서 더 깊은 하느님의 소리를 듣게 되고, 

그 들은 소리를 세상을 향해서 외치는 그런 토마스 머튼의 모습도 보게 됩니다. 

토마스 머튼이 후반부에 쓴 많은 저술들은 세상을 향한 외침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세상을 향한 외침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려고 많이 노력을 했죠.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구조나 어떤 제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 

그게 토마스 머튼에게서 중요한 특징이고 또 그것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많은 저술과 또 많은 실질적인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고독을 나누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또 그 안에서 

진정으로 하느님 사랑에 젖어들었던거고 더 충만한 그런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침묵과 또 고독에 참여한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 토마스 머튼 신부님께서 실제로 고독과 침묵속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여러분들께도 실제로 일상의 삶 가운데 조용히 내 입을 닫고 내 생각을 닫고 또 뭐요? 

내 갈망을 닫고 오직 그분 앞에 조용히 홀로 있는 시간들을 가져보시는 것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홀로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께 또 새로운 하느님의 사랑의 메세지를 

전해주실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그 메세지를 성모님을 통해서 함께 또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