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15회 머튼의 성모마리아 영성 1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3. 24. 03:27



+ 찬미예수님.

교우 여러분, 또 시청자 여러분! 지난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어요? 지난시간에 우리는 고독과 침묵에 대해서 토마스 머튼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성모 마리아의 영성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토마스 머튼이 성모마리아를 어떻게 생각하셨고, 또 어떤 영성을 가지셨고, 또 어떻게 그 영성이 변화되어 갔는지에 대해서 다루고자 합니다. 성모님은 앞서 제가 말씀드린 고독과 침묵의 내용에서처럼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에 함께 참여하신 분이셨고, 또 기다림의 영성, 침묵의 영성을 지닌 분이시기도 하셨습니다. 이 성모님에 대한 영성이 토마스 머튼에겐 아주 큰 영향을 미치고 그에게 부족했던 그런 여성성, 모성애를 더욱더 키워내는데 성모님이 큰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먼저 이 나눔을 시작하기전에 같이 토마스 머튼과 함께 기도하면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저의 뜻은 창문과 같기에 그리고 태초의 탄생이 교만이 아님을 알기에

저의 삶은 빛에 의해 창문과도 같이 사라짐입니다.

저는 신랑의 태양의 강렬한 빛 안에서 온전히 사라졌습니다.

저의 사랑은 창문과 같기에 그리고 태초의 먼지와 같은 탄생이 수치가 아님을 알기에

저는 저의 죽음의 새벽까지 온 밤을 기다렸습니다.

제가 저의 성령과 혼인하던 날, 그리고 거룩한 변모에 의해 빛 안으로 온전히 사라졌습니다.


주님, 겸손과 순종으로 온전히 당신 자신을 비우신 맑고 깨끗한 창문과도 같은 성모님의 마음을

저희에게 주시어 토마스 머튼의 가르침을 통해 성모님처럼 비움과 인내와 기다림으로 당신과

하나되어 당신처럼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아멘.


네, 방금 앞 부분에 읽었던 기도문 내용은 토마스 머튼의 "The blessed Virgin Mary Compared to a Window"라는 시의 일부분입니다.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내용은 토마스 머튼이 '저의 뜻은 창문과도 같기에', 또 두 번째 구절에서는 '저의 사랑은 창문과도 같기에' 여기서 말하는 저는 성모마리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모마리아를 왜 토마스 머튼은  창문에 비유했을까요? 왜 유리에 비유했을까요? 

이 창문, Window, 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오늘 제가 나누는 부분을 전부 다 이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토마스 머튼이 왜 성모님을 창문에 비유하게 되었는지 

오늘 이 나눔을 통해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성모님하면 어떤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뭐 여러가지 이미지들이 떠오를겁니다. 뭐 하늘의 여왕, 원죄없이 잉태되신 분, 동정녀이셨고 또 하늘로 승천하신 분, 그리고 미혼모였죠. 그리고 과부이기도 했고, 일찍 요셉을 남편을 세상을 떠나보냈기 때문에, 동정녀였고 또 예수님의 어머니셨고 또 여러가지 발현과 기적을 떠올리시는 분들도 계실겁니다. 우리의 전구자이시고 뭐 레지오 이름에는 바다의 별, 그리고 평화의 모후, 천사의 모후, 이렇게 성모님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미지들을 떠올릴겁니다.


근데 토마스 머튼에게서 가장 중요한 이미지는 바로 '주님의 종'이라는 이미지입니다. 토마스 머튼이 여러가지 성모님에 대한 그런 영성가운데 왜 주님의 종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했을까요? 주님의 종,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나타났을 때,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났을 때, 성모님께서 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 라고 고백하면서 구약과 신약이 연결되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주님의 종의 이미지는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성모님을 더 깊은 관상의 차원으로 이해하는데 아주 큰 밑거름이 된 그런 이미지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종에 대한 그런 이미지를 이번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우선 토마스 머튼이 성모님에 대한 영성이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지 그 과정을 한 번 살펴보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지금 내가 성모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그런 이미지하고 비교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지금 나는 토마스 머튼의 초기 단계에 있는지 아니면 토마스 머튼의 후기 단계에 성모님에 대한 이미지에 있는지 한 번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우선 토마스 머튼이 언제 세례받았죠? 네, 그렇죠. 1938년 11월에 세례를 받았죠. 세례를 받고 난 다음에 그때 당시를 회고하는 <칠층산>에 살펴보면 토마스 머튼은 성모님에 대한 영성이 그렇게 깊지 않았습니다. 그때 당시를 이렇게 토마스 머튼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 내 영성 생활 첫 해에 또 한가지 큰 결함은 하느님의 모친에 대한 신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교회에서 성모님에 관하여 가르치는 교리를 믿었고 기도할 때면 성모송을 외웠다. 사람들은 성모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기 때문에 복되신 동정녀의 엄청난 힘을 깨닫지 못한다. 하느님께서 성모님이 인류 구원사업에 참여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모든 은총이 성모님의 손을 통하여 온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당시 나는 성모님을 믿기는 하였으나 그분은 내 삶에서 아름다운 신화보다 약간 더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성모님은 이 당시에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아직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상황에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성모님의 신심에 대해서 이 당시에는 깊은 영성을 갖지 못했다고, 그래서 그것이 나에게 결함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토마스 머튼이 이제 2년 후에 쿠바에 있는 하바나를 방문하셔서 그때  방문목적이 뭐였냐하면 성모성지를 순례하기 위해서 그곳에 갔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성모성지 여러곳을 둘러보는 가운데 다양한 결심도 하고 다짐도 하고 또 성모님의 영성이 점점 깊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특별히 1940년 4월 쿠바 성지순례에서 고독의 성모성당에서 성모님께 자기자신을 봉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사제가 되면 첫 미사를 성모님께 봉헌하겠다고 고백을 하죠. 그때 당시를 이렇게 칠층산에서 회고합니다.


"성모님, 제 마음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저에게 이 사제직을 얻어주신다면 저는 당신이 사랑으로써 제게 이 큰 은총을 주신 성삼위께 감사하는 뜻으로 첫 미사가 당신의 손을 통해 당신을 위해 봉헌되도록 하겠습니다."  이 성모성지를 둘러보는 가운데 토마스 머튼은 자기자신을 성모님께 봉헌하게 되고 첫 미사를 성모님을 위해서 바치겠다고 성모님과 함께 성모님을 통해서 거행하겠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이 고백이 있은후에 토마스 머튼은 바로 이어서 하바나에 있는 성프란치스코 성당에서 더 깊은 하느님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미사하는 중에 천국을 성당에서 체험을 하게 되죠.


제가 지난 번 초반 강의 때 이때에 이 하느님 체험을 구약의 하느님을 체험했다고 제가 설명을 드렸던 기억이 나시죠. 그래서 하바나 성당에서 'heaven is in front of me', 이렇게 천국에 대한 체험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이 하느님 체험과 어떤 성모님께 자기를 봉헌하는 것이 깊은 연관을 갖게 되었고, 이 이후로부터해서 성모님은 토마스 머튼의 인생에 있어서 계속해서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깊은 그 마음의 바닥에는 항상 성모님에 대한 갈망, 어떤 사랑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토마스 머튼이 수도원에 입회하고 난 다음에 지속적으로 자기자신을 성모님께 봉헌하는 그런 구절들을 읽어볼 수 있을 겁니다. 1947년 성모방문 축일에 토마스 머튼은, 5월 31일이죠. 토마스 머튼은 축복받은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오늘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자신을 방문했다 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때 수도생활을 할 수 있도록 건강과 빛을 자기자신에게 주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49년에 부제로 서품되었을때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 성모님께서 제 마음을 모두 가지셨습니다. 세상에 그리스도께서 주셨던 복음서를 성모님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부제때 부제가 되면 복음서를 낭독하고 설교를 할 수 있는, 강론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죠. 그런데 토마스 머튼은 성모님께서 이 복음서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라고, 그리스도께서 주셨던 그 복음서를 성모님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만큼 토마스 머튼은 점점 더 성모신심이 깊어지고 있다는 그런 뜻일 겁니다.


그리고 1959년 12월에는 반복되는 여러가지 성소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특히 1950년대에 토마스 머튼이 여러가지 성소의 위기, 뭐 카르투시오회라든지, 가말돌리회로 이동하고 싶어하는 그런 열망이 있었었고, 또 관상가가 될 것인가 또 글쓰기 작가가 될 것인가 하는 여러가지 갈등도 있었죠. 그런 성소의 위기가운데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성모님안에 희망을 둡니다. 오늘 미사에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만약 제가 당신을 가졌다면 다른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독을 향한 이 갈망이 당신을 향한 저의 사랑의 부분이고 저를 향한 당신의 의지라면 문제가 됩니다." 고독을 향한 이 갈망이 당신을 향한 저의 사랑의 일부분이고, 일부분이 아니라 전부라는 뜻이죠. 그래서 일부분이라는게 아니라 더 온전히  자기자신을 봉헌하면서 미사를 통해서 그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성모님을 통해서  하느님께 당신 자신을 봉헌하면서 토마스 머튼은 성소의 위기를 또한번 더 극복해 나갑니다.


그리고 은둔처에서, 은둔처 언제 시작을 했죠? 홀로 이제 생활하던 그 삶은 1956년에 시작했죠 그죠. 기억나시죠. 그때 은둔처에서 홀로 은둔생활을 시작하면서 토마스 머튼이 이곳은 바로 계시의 장소였고 하나의 혁명이었다. 내 삶에서 새로운 변화였다  라고 고백하죠. 그때 이 은둔처의 이름을 뭐라고 지었는지 기억나십니까? 네, 그 은둔처의 이름은 바로 '가르멜의 성모님'이라고 은둔처의 이름을 짓습니다.  그래서 이때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성모님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곳에, 가르멜의 성모님 이 은둔처에 계십니다. 당신은 이곳에 계십니다." 그래서 그 은둔처에는 성모님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은둔처에서 토마스 머튼은 성모님 당신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성모님은 마치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고, 마치 사랑하는 연인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너무 사랑하는, 토마스 머튼에게 부족했던 그 아니마(anima)적 요소가 채워지는 그런 부분이기도 했죠. 그래서 심지어 토마스 머튼이 M과 사랑에 빠졌을 때도 그 상황을 당신 자신이, 토마스 머튼이 M과의 사랑에 빠진 그 체험들을 성모님께 온전히 고스란히 다 고백하고 그 고백을 통해서 그 사랑은 순수한 무상의 사랑의 체험이었고, 오히려 그 사랑에 대해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단순한 죄의식을 뛰어넘어서 토마스 머튼은 사랑을 통해서, 여인과의 사랑을 통해서 오히려 더 큰 하늘의 사랑을 체험했고, 그 사랑을 성모님께 감사하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으로부터 자비와 어떤 친밀감의 감각을 배웠다 라고 고백합니다. 성모님에 그런 어떤 아들을 향한 그런 친밀한 마음, 또 아들을 기다려주는 마음, 그런 마음을 통해서 더 큰 사랑의 감각을 배웠다 라고 또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또 특별히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는 수도원의 수도자들과 Monk(수도승)들과 함께 살아가는, 함께 사시는 분이셨다 라고 여러곳에서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모든 수도원의 수도승들과 함께 수도승들을 위해서 거하신다 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또 성모님은 모성애로써 모든 수도승들을 돌보아주고 또 함께 해주시고 또 위로해주시고 용기를 북돋아주시는 분이라고 또 여러 책에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성모님과의 어떤 신뢰의 관계, 성모님과의 어떤 사랑의 관계, 또 성모님과의 그런 믿음의 관계를 통해서 예수님과의 하느님과의 그런 깊은 친밀할 관계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또 나중에 제가 후반부에 더 강조하겠지만 성모님은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아주 큰 관상의 모델이 된 그런 분이기도 했습니다. 토마스 머튼이 후기에 갈수록 아까 제가 초반부에 말씀드렸던 '주님의 종' 그 부분이 더 강조되면서 관상의 하나의 큰 모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성모님을 통해서 더 깊이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로인해서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되는 그런 체험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바로 그 큰 역할을 하신분이 바로 성모님의 모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토마스 머튼이 성모님 영성으로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한 번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초기에 토마스 머튼의 영성에 있어서 성모님에 대해서 강조된 부분은 중재자의 역할이었습니다. 아까 제가 조금전에도 방금 성모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렇게 간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성모님은, 물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로 바로 갈수가 있죠. 그렇지만 어머니이신 그분, 또 인간이신 그분의 삶을 통해서, 어머니의 중재를 통해서 어머니의 전구를 통해서 그리스도께로 갈 수 있도록 이어주는 다리역할을 하시는 분, 전구자이신분, 이건 흔히 우리가 교리를 통해서 많이 배웠던거죠. 맞습니다. 그래서 초기에 토마스 머튼의 영성은 그냥 전통적인 성모님에 대한 이해와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후기로 갈수록 토마스 머튼의 삶이 단순해지고 또 토마스 머튼이 더 깊은 관상의 삶을 지향함으로써 성모님의 어떤 관상적인 그런 부분에 대해서 더 깊이 매료되기 시작하는거죠.

그래서 관상적인 삶 중에서 중요한 부분중의 하나는 바로 단순성입니다. 

그리고 감추어짐, 그리고 주님의 종으로써 성모님이 자기를 온전히 비워냄, 그래서 이런 비워짐, 감추어짐, 단순함 이런것들이 성모님의 영성에 있어서 굉장히 큰 매력적인 부분이 되었고, 그것들을 통해서 오히려 토마스 머튼은 더 깊은 관상의 차원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마지막에 성모님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가장 훌륭하고 가장 탁월한 관상의 모델이셨다. 라고 평가를 하고 또 그 모델을 따라서 살게 됩니다.


토마스 머튼이 'Disputed Questions', 한국말로 번역하면 논쟁점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책에서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성모님은 인간과 그 모든 일상 안에서 어떤 드라마틱하거나 굉장한 행복감 없이 그녀의 삶의 방식안에서 단순하고 겸손하게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 가까이에 계신다."  어떤 위대하고 굉장한 이벤트 없이 그냥 그녀의 삶의 방식안에서 단순하고 겸손하게 성모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계신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점점점 더 이제 어떤 황홀경이나 이런것들이 아니라 단순하고 소박한 그 삶안에서 성모님과 만나게 되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의 이 관상의 모델의 어떤 주제에 있어서 몇 가지가 방금도 언급되었죠. 


첫 번째는 우리안에 거하시는 어떤 말씀이 되어 오시는 그 성모님에 대한 내용, 

그리고 철저하게 자기비움의 그런 모델로서의 성모님, 주님의 여종으로서의 성모님이죠.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주님과 온전히 일치한, 그래서 여기에서 제가 창문의 비유를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관상의 모델로써 말씀, 자기비움, 그리고 일치의 이야기를 언급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토마스 머튼의 관상에 대한 걸 이해하기 위해, 성모님의 관상에 대한 모델로서의 그런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토마스 머튼은 성모님을 단순한 어떤 하느님의 도구로써 이해하는 것들을 넘어갑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도구 이상이며, 또한 이보다 더 겸손하고 더 완벽한 그런 관상의 모델은 없다성모님은 가장 훌륭한 모델이다 라고 평가를 합니다. 그러면 이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우리안에 거하시는 말씀으로써 성모님을 관상의 모델로써 표현을 합니다. 

처녀 마리아가 성모님이 되게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성모님이 처녀였고 그냥 이스라엘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나자렛에서 살아가는 그냥 평범한 여인이었는데, 그 여인이 어떻게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을까요? 바로 이 단어 때문이었습니다.

 '네'라는 단어였습니다.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의 그런 하느님 메세지를 전해주셨을때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네'라는 대답이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가운데 오시게 하셨고, 이 '네'라는 응답을 통해서 긍정적인 응답을 통해서 구약과 신약이, 이제 구약이 끝나고 새로운 신약이 열리게 되었던거죠. 그래서 이 '네'라는 대답을 통해서 우리의 새로운 구원의 역사, 신약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모님께서 정말 평범한 시골 처녀가 어떻게 이 엄청난 사실을 알고 했을까요? 궁금합니다. 정말 성모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네'라고 했을까요? 제 생각에는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머리로 이해했기 때문에 한 것이 아니라, 이 성모님은 믿으셨으니 복되십니다. 라는 엘리사벳 성녀의 말씀처럼 정말 믿음으로 이 천사의 말에 '네'라고 응답했었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중심으로 사셨기 때문에, 하느님안에 있었기 때문에 '네'라고 대답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하느님 중심으로 사셨던 그 삶이 '네'라고 응답하게끔 만들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모님의 이 '네'라는 말씀을 통해서 말씀이신 예수님과 하나될 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마지막까지 예수님과 일치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성모님의 일생은 끊임없이 '네'라는 대답과 이어졌습니다. 우리 삶속에서도 이제 특별히 관상생활을 하다보면 끊임없는 의문들이 생깁니다. 하느님의 침묵 가운데,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그런 고통, 그 앞에 우리는 끊임없이 왜라고 욥처럼 묻습니다. 왜? 왜 저에게 이런 일이? 그렇지만 성모님은 '왜?'라고 묻지 않으시고 '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우리가 관상적인 삶을 살아갈 때, 또 관상가가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앞에 물론 왜라고 질문할 수 있겠죠. 의심을 갖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더 깊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있을 때, 성모님처럼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왜?' 보다는 '네' 라는 답을 할 수 있게 되고 

그 응답을 통해서 더 깊이 예수님의 고통과 일치하게 되고, 


더 깊이 성모님의 고통, 성모님이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으면 성모님도 성모칠고라는 말이 있을까요 그죠? 그래서 성모님도 많은 고통가운데, 성모님은 왜?라는 표현보다는 '네'라는 말씀 응답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예수님의 고통과 예수님의 순종과 일치하셨고 

그 일치를 통해서 관상을 완성하셨고, 

그분과 온전히 하나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안에 거하시는 말씀을 '네'라는 응답을 통해서 하셨기 때문에 

성모님은 관상의 모델이 되셨다는 겁니다. 

우리도 '네'라고 할 때, 

우리 삶안에서 주님과 함께 일치하는 관상의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제가 강조했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철저한 비움의 삶을 성모님은 사셨다는 겁니다. 

비움의 삶을 사셨기 때문에 

그 안에 하느님과 일치하는,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고 채울 수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관상가가 되셨다는 겁니다. 

철저한 자기비움! 이 철저한 자기비움은 바로 성모님의 '주님의 종이오니'

뭐 여러가지 이미지가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자기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표현을 하셨습니다. 

종! 여종이오니, 그래서 성모님은 예수님께서 그 필립비서 2장에 보면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종의 모습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라고 표현을 했던 것처럼 성모님도 가브리엘 천사의 부르심에 '네'라고 응답과 동시에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라고 하셨죠. 여종으로써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셨습니다.


그래서 정말 아무것도 아니 분이 되셨기 때문에 오히려 그분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도 관상의 삶을 통해서 철저한 자기비움, 아무것도 아닌 나의 체험, 말 하느님 앞에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바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보다 더 높이 들어올려주실 것입니다. 


관상가는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자기자신을 비우는 사람, 

자기자신을 하느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기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관상가이고 성모님은 바로 그러한 삶을 사셨던 분이십니다.


토마스 머튼은 <새 관상의 씨>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실 정확하게 말해서 이것이 성모님이 가장 큰 영광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 

자기 자신에게 영광이 될 수 있는 자신의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어떤 모양으로도 하느님의 뜻과 사랑에 거역하지 않는 것, 

그래서 성모님은 그 어떤 성인들보다도 많은 것을 하느님께 받았습니다."  

철저하게 자기자신을 비우셨죠. 

그래서 우리가 "비움을 찾는 것은 성모님을 찾는 것입니다." 같은 책에서 이야기 합니다. 


"비움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은 

성모님이 하느님으로 충만해 있듯 하느님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며 

하느님을 사람들에게 모셔오는 성모님의 사명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비움속에 감춰져 있는 것은 성모님이 하느님으로 충만해져 있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비움속에 감춰져 있는 성모님! 바로 그분은 그렇게 감추어져 계셨기 때문에 

오히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고 관상의 모델이 되셨던 것입니다.


성모님에 대해서 또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토마스 머튼은, 

"성모님이 모든 성인들 중에서 가장 완전하게 가난하셨고 

또 가장 완전하게 감추어진 분이셨으며,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는 어떤 것도 절대 소유하려고 하지 않으신 분이셨습니다.

자신이 드러나지 않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성모님처럼 하느님과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성모님처럼 자기 자신을 감추고 정말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세상을 위해, 또 교회를 위해서 또 고통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많은 수도승들, 많은 관상가들이 우리가 모르는 곳에 있습니다.  마치 열명의 의인처럼 그렇게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살지만 그들은 성모님과 하나되어서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의 충만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성모님께서 숨어계시는 하느님안에 우리도 숨어든다면, 

그러니까 성모님께서 숨어계신 것처럼 우리도 성모님과 같은 모습으로 성모님안에 숨어든다면 

바로 성모님을 통해서 하느님과 만나게 된다라고 표현하십니다. 


성모님의 청빈, 성모님의 겸손, 성모님의 순종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그 성모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겸손과 순종을 만나서 온전히 그분과 일치하는 삶, 관상의 삶을 살게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관상가는 성모님처럼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 

성모님처럼 하느님을 찬미하는 삶, 

그래서 성모님이 성모찬송가를 부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그런데 성모님은 자기 자신을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상가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자신을 찬양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 

하느님을 찬양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성모님이 그러하셨다는거죠. 


그래서 하느님안에 숨어계셨고 

하느님 안에서 겸손과 고독을 사셨기 때문에 오히려 그래서 

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비우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채워지셨던 분이 바로 성모님이셨고 

그렇기 때문에 바로 성모님이 우리에게 관상의 모델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해되셨죠. 첫 번째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이 되셨던 분이고, 두 번째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비우신 분이셨고, 세 번째는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창문의 비유, 철저하게 주님과 완전히 일치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관상가는 누구보다도 예수님과 일치를 이뤄가는 사람이고 바로 성모님은 누구보다도 온전히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신 분이셨습니다.


그럼 왜 토마스 머튼은 성모님을 창문에 비유하셨을까요? 토마스 머튼은 성모님을 아주 깨끗한 이 창문에 비유를 합니다. 이게 창문이라고 칩시다. 창문에 틀도 하나 있어야겠죠. 네, 근데 이 창문이 너무 맑고 깨끗하고 투명해요. 그러면 밖에 있는게 다 깨끗하게 보입니다. 그죠?  근데 이 창문에 때가 끼죠. 때가 끼고 먼지가 묻고 흐려집니다. 그러면 창문은 그 제 구실을 못합니다. 그래서 창문이 더 흐려지면 흐려질수록 밖에 있는 것들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쉽게 이야기하면 창문에 수온이라든지, 뭐 이런 것들을 붙이면 창문이 거울이 되죠. 그러면  이 유리가 거울이 되면 밖에 있는 것들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거울을 통해서 우리는 누구를 보게 되죠? 바로 자기 자신밖에는 못보게 됩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온전히 자기 자신을 정화하고 맑고 깨끗하고 투명한 분이셨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온전히 사라지고, 성모님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성모님은 사라지고 누구? 

예수 그리스도만 보이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모님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기 때문에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비움으로써,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깨끗하고 투명하게 만든 분이셨기 때문에 

우리는 성모님을 통해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속에 때가 끼이고, 우리 마음속에 얼룩이 지고 죄가 쌓이고,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의 자리가 점점 사라지게 될 때, 우리 마음의 창문은 마치 거울이 되어가는거죠.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얼룩이 많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고 누구? 자기 자신만 보게 되는거죠. 


그래서 성모님을 닮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모님처럼 자기를 비워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으로 살게 됩니다. 성모님처럼 하느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만, 자기만 생각하는 그런 삶을 살게 되는거죠.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특별히 이 창문의 비유를 통해서 성모님은 온전히 자기 자신을 비운 맑고 깨끗한 그런 창문이었다고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 성모님은 이런 비유를 씁니다. 토마스 머튼이 1962년에 한 강론에서 "순수함과 겸손의 완전함에 의해 성모 마리아보다 하느님의 빛을 더 완벽하게 소유한 이는 없었습니다.


"빛이 들어오는데 그 빛이 하느님의 빛인거죠. 

그래서 "그녀는 빛이 추어지면 온전히 사라지는듯 보이는 깨끗한 유리창처럼

 진리와 충만히 하나되었습니다."  

그리고 <새 관상의 씨>라는 책에서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이기심이 전혀없고 아무런 죄도 없는 성모님은 

햇빛을 들여보내는 기능 이외에 다른 기능은 전혀 하지않는 맑은 유리창과 같이 깨끗하십니다." 

성모님은 이렇게 유리창과 같이 깨끗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는 

진정으로 우리가 관상가로 나아갈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모델이 된 분이라고 강조를 하셨습니다.



이제 요약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성모님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지혜, 하느님의 사랑을 하느님과 일치를 보여주는 가장 완벽한 모델이었고 가장 완벽한 하느님의 지혜였다고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하느님의 빛을 드러내 보여주시고 또 하느님의 진리를 반영해주고 또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 보여주는 인간으로써 가장 완벽한 분이셨다고 성모님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성모님을 토마스 머튼은 한 시에서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축복받은 성모님은 지혜안에 감추어져 있는 모든 것이 그녀의 삶 안으로 일어나고 보여지는 유일한 창조된 존재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성모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거룩한 지혜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이 성모님을 가장 사랑하셨고 또 성모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토마스 머튼의 성모님의 영성을 통해서 성모마리아를 다시금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으면 좋겠고, 자기 자신의 성모신심에 대해서 다시 한번 더 묵상해 보는 시간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토마스 머튼, 혹은 성모님, 모두 다 누구를 가리키고 계시죠? 네, 그렇습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예수님을 더 가까이,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 성모님의 도움을 받으셨고, 또 성모님의 그 방법, 성모님의 그 모델을 통해서 더 예수님과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의 그런 겸손된 모습, 또 여종으로써 자기 자신을 낮추는 모습, 또  스스로 여종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겸손되이 살아가신 그 성모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도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해 나갈 수 있는 그런 길을 찾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