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14회 대담 : 고독과 침묵, 그리고 하느님의 고독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3. 22. 12:38


김남희 교수 : 찬미예수님, 가을을 흔히 고독의 계절이라고 얘기 하는데요, 고독이라는 단어를 들으시면 어떠한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대부분 우리는 고독이라는 단어안에 쓸쓸함, 외로움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를 많이 넣고 있습니다. 토마스 머튼 신부님은 이 고독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 좋은 에너지라고 얘기를 하고 계시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고독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함께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부님, 안녕하세요? 오랫만에 다시 뵙습니다. 신부님의 강의를 2주차에 걸쳐서 들으면서 제가 정말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살았나~ 새삼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박재찬 신부 : 직업이 가르치시는 직업인데요~! 말 안할수가 없죠.^^



김남희 교수 : 네, 사실 어쩌다가 갑자기 아, 내가 오늘 얼마나 많은 말을 했지? 라는 생각이 들 때, 저녁에 와서 생각해 보면 거의 하루종일 얘기를 했더라구요. 그래서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그 침묵이 굉장히 반갑고 또 저에게 필요한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마 시청자분들도 마찬가지일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번 강의에서 사실 이 주제가 현대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 같습니다. 사실 현대인들이 가장 어려워하고 직면하기 싫어하는게 침묵이쟎아요. 그래서 오늘은 고독과 침묵이 하느님과 만난다는 그 이야기에 대해서 한 번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부님 돌발질문인데요 당황해하지 마시고 혹시 혼밥해본적 있으세요?



박재찬 신부 : 아, 그럼요! 제가 중학교때 자취하면서 혼자 밥해먹고 했던 기억이 있구요, 또 유학시절에도 혼자 밥을 해먹고  후반부에는 그렇게 혼자 지냈던 적이 많이 있었죠. 특히 제일 힘들었던 시간들은 아마 중학교때 혼자 밥을 해먹고 했던, 그때 뭐 14, 15살 이럴때였죠.


김남희 교수 : 그러면 학교갔다와서 저녁에 혼자 밥해서 혼밥을 이미 20년 30년전에 하셨는데요. 네 맞습니다. 워낙 힘든 상황에서 혼밥, 혼술이 이젠 낯선 문화가 되지 않았거든요. 예전에는 식당에서 혼자 밥먹으면 아, 저 사람은 왜 혼자 밥먹지, 친구는 없나! 이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했는데 요즘은 혼자앉는 테이블도 많아지고 학생들 같은 경우에는 이제 혼술까지 해보겠다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실제로 혼자 있는 시간을 현대인들을 그렇게 낯설어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지난 강의에서 신부님께서 혼자있는 시간 가운데 우리가 물리적으로 어쩔수 없이 혼자 있는 것을 외적인 조건에서 따른 고독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사실 현대사회에서 외적으로 혼자있는 가구, 그러니까 소위 말해서 1인 가구가 요즘 가구 유형중에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걸 생각해보면 오히려 내적인 고독보다는 외적으로 고독으로 홀로 지내고 있는 외로움을 많이 갖고 계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토마스 머튼의 어떤 내적인 고독을 향한 갈망과 영적인 의미는 현대인들에게 어떤 그 토마스 머튼이 말하는 '홀로있음' 여기에다 어떤 한 단계를 소위 저희가 말해서 업그레이드를 시켜줄 수 있을거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 토마스 머튼 영성이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움이 될까요?  



박재찬 신부 : 우리시대에 꼭 필요한 영성중의 하나가 이제 홀로 어떻게 잘 있을 수 있는가? 그런 것 같애요. 많은 사람들이 홀로 살고 있고 근데 많은 경우 어쩔수 없이 홀로있는 경우도 있고 또 스스로 함께 살지 못해서 그죠. 뭐 부부지간에도 마찬가지. 이혼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이 늘어나고 있쟎아요 그죠. 그래서 가정이 파괴가 오고, 또 결혼하기 힘들어서 홀로 사는 분들도 계시고 또 결혼하는 것들을 포기하고 홀로 사는 분들도 계시고 한데 토마스 머튼은 그런 외적인 홀로 지내는 우리 현대인들 안에서 이 홀로사는 것을 더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그런, 영적인 의미를 부여해줄 수 있는 그런 영성을 우리에게 준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그 홀로 있으면서도 엄밀히 따지면 홀로 있으면서 홀로 있지 않습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뭔가를 합니다. 뭐 게임을 한다든지, TV 를 본다든지, 뭐 운동을 한다든지 뭔가 혼자서 뭔가를 하고 있죠. 근데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하고 있는 이 홀로있음의 영성은 단순히 혼자 있으면서 남과의 마찰로 인해서 생기는 그런 충돌에서 오는 아픔을 도피하기 위해서, 혹은 또 그런 기회가 없기 때문에 홀로 있는게 아니라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 홀로 있으면서, 지난시간에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나를 넘어서 자기초월의 경지에, 나를 넘어서 하느님의 어떤 그런 고독을 만남으로 인해가지고 진정으로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을 체득하기 위한 도구이고 방법으로써 고독을 이야기하고 침묵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침묵이나 고독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게 아니죠.



그러니까 이제 현대인들이 홀로 있다는 그 현상자체만으로 어떤 고독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는 좀 부족한 부분이 있구요, 진정으로 고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정말 말하지 않고 또 실제로도 하느님을 향해서, 고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기자신을 향한다면은 아직 진정한 어떤 내적인 고독, 영적인 고독으로 나아가지 못한거죠. 고독은 하느님을 향해서 나를 내려놓는거죠. 그 시간을 또 그 많은 나의 것들을, 그래서 하느님을 바라보기 위해서, 그래서 많은 현대인들이 외적으로 홀로 있지만 실제로는 자기자신을 보고 있고 또 실제론 자기자신을 보는게 힘들어서 여러가지 뭐 매체들을 보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TV나 게임이라든지 뭐 여러가지 것들을 통해서 그걸로 채울려고 하는데 결국은 홀로있는 시간이 뭔가 채워줄 수 없는 공허감으로 생기게 되죠.


특히 이제 40대, 50대 요즘은 60대에 접어들면서 갱년기가 오고 남자들은 그때 굉장히 많은 어떤 종교심이란게 일어난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막 가정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열심히 뛰어다녔어요, 쫓아다녔어요 근데 명퇴를 했거나 혹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어느정도 자기위치에는 있는데 갑자기 어느날 자기자신을 바라보는거죠. 아,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살아왔던가? 그래서 그동안은 어떤 영적인 신앙생활을 해 온 사람이라면 그 종교심이 영적인 공허감이 어떤 종교적인 신앙을 통해서 더욱 더 성장해나가고 또 채워질 수 있고 그래서 더 깊은 하느님과의 어떤 일치에로 나아가서 우아한 노년 소위말해서 그런 영적인 노년을 보낼 수 있겠지만 사실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아요. 알코올에 빠진다든지 뭐 또 다른 방법으로 그 공허감을 채울려고 하는거죠.


마찬가지로 진정 고독속에서 하느님을 갈망하지 않는다면은 그 고독은 끊임없이 또 다른 뭔가를 채울려고 하는, 나에게 부족한 부분들을 채울려고 하는 그런 것으로 나아가는데 사실 진정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혹은 내적으로 충만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밖으로부터 오는게 아닌것 같애요. 그러니까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금 진정으로 깨어날때, 우리가 진정으로 그 안에서 새로운 뭔가를 만나고 또 체험하고 그 안에서 진정으로 하느님의 고독안에서 사랑을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현대인들한테 꼭 필요한 것 중에 하나는 외적인 고독뿐만 아니라 내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할 수 있는 것! 뭐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좀 더 이제 내 마음을 영적인 것으로 향할 수 있는 그런 기회로 삼을 수 있다면 이런 주변에 있는 외적인 고독이 하나의 또 내적인 깊은 고독으로 나아가는 어떤 방법이 될 수도 있겠죠.



김남희 교수 : 그렇게 생각한다면 지난번에 말씀하셨듯이 기도를 하고, 기도와 명상과 관상을  하기위한 사실 첫 번째 조건이 고독인것 같아요. 네, 그렇죠. 그렇게 생각한다면 사실 뭐 부부사이에  아니면 식구들과 북적북적 이렇게 지낸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스스로 홀로 있음을 느끼는 것, 자각하는게 정말 중요할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박재찬 신부 : 네네, 좋은 지적인것 같애요. 함께 막 살아가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이 함께 잘 살수 있도록 만들어주는건, 내가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는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세 가지 아주 중요한 관계가 있어요. 나와 이웃과의 관계, 또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 내 안에 또다른 내가 있어요 그죠,  그리고 더 중요한것 중에 하나가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혹은 또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가 흐트러지고 불편할 때는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보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더 올바르게 정립되어 있고 또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고독속에서 혹은 또 기도속에서 하느님을 제대로 만난다면은 그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또 자기자신을 돌보기 때문에 더 새로운 차원에서의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거죠.


그래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 깊고 더 친밀하게 하기 위해서 토마스 머튼은 고독이나 침묵을 강조한거죠. 그래서 이 수도원이라는 울타리도 사실은 초기 이제 수도자들이 도시에서 사막으로 떠나는 것도 일부러 의도적으로 외딴곳으로 간 것도, 그곳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곳에서 하느님을 체험해서 그 깊은 영적인 친밀감 또 천국에서의 어떤 미리 맛보는 체험을 통해서 그 체험을 이웃들과 나누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거죠. 토마스 머튼이 살았던 그런 겟세마니 수도원도 외딴곳에 울타리를 치고 살아가고 있지만은 분리된 세상이지만은 세상과 다른 세상같지만 그 수도원안이 진정한 하느님과의 고독을 만나서 그 타오르는 사랑, 퍼져가는 사랑 , 한송이 꽃이 피면 그 향기가 세상에 퍼지쟎아요. 

그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어떤 고독속에서의 만남을 통해서 그 향기가 세상에 퍼져나가고 

또 그 열매가 씨앗이 되어서 세상에 흘러갈 수 있도록, 그 씨앗이 싹트기 위해서 

제가 강조한 것중에 하나는 땅속에 묻혀야 되고 또 홀로 있어야 되고  죽어야 되쟎아요. 

그게 바로 고독이고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하는 고독이라고 볼 수 있겠죠.



김남희 교수 : 네, 다 전적으로 옳은 말씀인데요 그래도 제가 일반 신자 입장에서 조금 아직도 좀 추상적으로 느끼거든요. 그러면 혹시 이런거는 될까요. 홀로있음을 깨닫는다라고 한다면 신부님께서 지난번에 기도할 수 있는 시간들, 명상할 수 있는 시간들 20분만이라도 할애를 해라 이렇게 하기도 했는데 사실 그것조차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러면 내가 설거지 할때라도 아니면 내가 일을 할때라도 거기에 어떤 한번씩이라도 이렇게 화살처럼 스쳐지나가는 그 홀로있음이나 고독과 침묵을 할려고 하는 그 갈망? 그것만 있어도 혹시 기도의 출발점이 되면 안될까요?



박재찬 신부 : 아, 그럼요! 아주 좋은 겁니다. 그 지향을 먼저 하느님께로 두는 거구요, 


또 그리고 이제 문득문득 아, 내가 외롭다, 홀로 있는 것이 불편하다 이런 느낌이 들때가 있어요. 왜냐하면 뭔가 사랑에 대한 갈망 때문에. 아, 정말 이렇게 살아서 뭐해, 정말 나는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내 남편은 나를 몰라주고 자녀들도 이제는 컸다고 내 말 듣지도 않고, 정말 나는 외로워, 홀로있어 라고 생각이 들때는 오히려 그 마음, 그 감정 있쟎아요, 불편한 감정, 불편해요 그죠 홀로있는게, 이제 그 감정을 하늘로 올리는거죠. 주님, 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지만 제 삶 속에서 그동안 정말 당신을 찾지 못했고 당신의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아 제가 힘들고 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공간을 제 안에 많이 열라는, 또 마련하라는 표시로써 이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라고 기도올릴때 오히려 불편한 감정, 순간순간 떠오르는 감정이 기도로 올라갈 수 있을거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까 설거지할 때라든지 뭐 심지어 전철타고 눈감고 있을때도 음악을 듣는다든지, 뭐 요즘은 게임도 많이 하고 하쟎아요. 근데 그것도 그냥 조금 눈을 감고 가만히 하느님 현존을 의식하는거, 이것도 도움이 될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주님, 이 시간 지금 제가 전철을 타고 가고 있지만 당신께서 저와 함께 오늘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서 당신과 함께 당신의 현존가운데 살아가기 위해서 당신이 저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라고 짧게 기도바칠때도 그 기도가 내 고독을 넘어서 군중속에서 홀로있지만 군중속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내가 될 수 있는거죠.


김남희 교수 : 그게 바로 머튼이 말하는 사랑의 결실인가요?


박재찬 신부 : 그렇죠.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한거죠. 거기에서 내가 홀로 있는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군중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는거죠. 그래서 사랑으로 이제 이어지는 겁니다.


김남희 교수 : 네, 그런면에서 사실 방해요소가 엄청 많아요. 지금 현대인들에게 방해요소가 엄청 많은데 그 가운데가 이제 핸드폰이거든요. 신부님은 몇 개의  SNS에 가입이 되어 있습니까?


박재찬 신부 : 저는 SNS는 하지 않습니다. 그냥 명상의 집 블로그 운영하고 거기에 소식도 알리고 그 이외에는 없습니다.


김남희 교수 : 아, 그러면 메세지로만 전달하시고 카나 뭐 인스타 이런건 전혀 없으신거예요, 부럽습니다. 신부님!


박재찬 신부 : 그게 저한테 도움이 되는거보다는 방해요소가 더 많은 것 같아서 오히려 그것보다는 하느님과 SNS를 하고 있습니다. 매일!


김남희 교수 : 그게 가장 좋을 것 같아요. 근데 사실 저희는 사회적인 입장에서 저도 안했었는데 어쩔수 없이 하게 되는 경우도 많고, 소리를 무음으로 해놓는 경우도 있고 하는데요. 사실 현대인들은 정말 많은  SNS를 하고 있고, 뭐 예를 들어서 유투브같은 경우에는 학생들 같은 경우에 몇 개를 가입했냐, 예를 들어 중고등학생 같은 경우에는 제한이 3,000개라고 하더라구요. 그러면 그만큼을 볼 수 있는 시간, 다 밖으로 향해있거든요. 그런것들을 생각했을 때, 사실 그러면서 왜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하는 경우들이 있어서 그게 바로 신부님이 말씀하신 군중속의 고독인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머튼이 바로 이런 고독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는, 그러니까 조금 전에는 물리적으로 외적으로 어쩔 수 없이 있는 고독이고, 이번 같은 경우에는 사람들과 참여한다라고 하는데 그게 아마 착각하고 있는 고독일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마 우리가 SNS를 하면서도 늘 공허함을 느끼고 사람들의 좋아요를 확인받고 싶어하고 이런 것들을 토마스 머튼에 대입해 본다면 거짓 고독에 해당이 될까요? 위장된 고독 그렇게 볼 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 혼자있기를 정말 두려워하는데요 수도원에 가서 처음에 입회하셨을 때 방에 혼자 있어야되고 하셨을텐데 고독이 밀려오지 않으셨나요, 어떠셨나요?



박재찬 신부 : 네, 아주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우선 앞의 부분을 잠깐 설명해드리면요 제가 좀 보충해드리고 싶은 것중에 하나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SNS를 통해가지고 이렇게 서로들 대화를 하면서 함께 하고 있지만 실제로 토마스 머튼은 어쩌면 보다 더 사람들을 잘 만나고, 보다 더 소통을 잘 하고, 보다 더 영적으로 그 사람들에게 좀 더 충만함을 주기 위해서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그 이야기를 한 것 같애요.


그래서 만약에 정말 진정으로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원한다면 하느님과 먼저 소통하십시오. 하느님과 소통이 이루어질때 하느님과의 소위 말해서 SNS를 하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안에 있을 때 그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때, 아까 말하는 거짓 고독, 거짓 자아로부터 벗어나서 정말 진정으로 하느님이 주신 그 자아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되는거죠. 그럴 때 모든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하는 불평이나 혹은 또 뭐 항상 좋은 글만 올라오는게 아니쟎아요 그죠. 악플 뭐 이런 것들도 많이 올라와서 상처받고 그로인해서 어떤 사회적인 또 가정적인 문제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것들로부터 좀 자유로워질 수 있는, 소위 말해서 내공을 키워나가는 그러기 위해서라도 어떤 내적인 고독 또 하느님과 홀로있는 시간, 침묵하는 시간, 듣는 시간 이런 시간들을 여러분들에게 많이 갖기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저 자신도 수도원에 들어와서 여러가지 수도원 자체가 이미 그런 외적인 공간이죠. 처음에 들어오면 휴대폰 이런거 상상도 못하죠. 지금은 가지고 있지만! 처음 들어오면  TV도 볼 수 없고 그 다음에 외적으로 단절을 시킵니다. 그런 단절은 어떤 영적인 수행이죠. 이런 단절을 통해가지고 오롯이 하느님께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집중하는 시간을 갖고 또 그래서 홀로있는 시간을 잘 살기 위해서 함께 살게합니다. 참 아이러니하죠.


처음 들어가면 독방을 안줘요. 처음 들어가면 큰 방에, 제가 입회할 때 8명이 입회를 했는데 그 앞에 선배들도 같이 살고 있었고, 이제 커텐만 쳐서 서로 아주 기본적인 프라이버시만 제공될 뿐, 그 큰 방에 같이 잡니다. 자고 있으면 옆 사람의 코고는 소리도 들리고 정말 불편하죠. 샤워실이나 여러가지 화장실도 다 같이 공동으로 쓰고 해야되니까. 근데 그 속에서 나를 깎아내고 남을 배려하고 또 내가 있음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찾게 만들고 그런 훈련을 하는거죠. 공동체 훈련을. 그리고 저같은 경우에는 군대도 갔다오고 하는 바람에 수도원에 입회해서 6년째 되는 해에 독방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저는 홀로 있고 싶었어요. 독방을 받는 순간 얼마나 기뻤던지! 물론 그 방에 화장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세면대 하나 놓여져있는 작은 방이죠. 그런데도 그 혼자 있는 방에 들어갔을 때 굉장히 저한테는 작은 설레임이었고 작은 기쁨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근데 사실 그 함께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홀로 있기를 힘들어해요. 진정으로 홀로있기 위해서는 함께 사는 훈련을 해야됩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 남을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또 진정으로 홀로 진짜 홀로 있기 위해서는 하느님과 둘이서 홀로 있는 훈련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랜 수행생활을 통해서 그런 훈련이 이루어졌을때에는 함께 살거나, 혹은 홀로 있거나 항상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이제 깨우치게 되는거죠.



김남희 교수 : 네, 말씀을 들으니까 그 생각이 났어요. 그러니까 토마스 머튼이 침묵을 위해서 우리가 하고 있는 일상들을 억제하거나 배제라는게 아니라 그 일상을 할 때, 무엇에 지향점을 먼저 두고 있느냐 그걸 한번 먼저 성찰해보라 이 얘기인 것 같아서요 SNS는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러면 신부님 또 궁금한 점이 있었는데요, 지난 강의에선 고독에 대해서만 얘기하는게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진정한 고독에 대한 또다른 출발점은 이제 한 아이가 방으로도 들어가는, 본격적으로 침묵을 해야하는건데 보통 침묵이라고 하면 말을 안하는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아마 시청자분들께서도 수도원이 가장 말을 안하는 곳이기도 하고 또 제가 독일에 있었을 때 들었던 이야기중에 하나는 젊은 사람들이 어떤 수도원에 대한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막상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 가장 힘들어하는게 뭐 추위라든가, 아니면 자기가 먹고 싶은거를 먹지 못하는 이런 식욕에 관한 문제라든가 이런 것도 있지만, 가장 힘들어 하는게 이 침묵이다 라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그래서 신부님께서는 수도생활에서 침묵이 어떻게 다가왔었는지, 그리고 또 실제 수도원 안에서 침묵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하거든요?



박재찬 신부 : 네, 굉장히 좋은 질문을 하셨는데요, 아마 이 가운데에 아마 성소에 대해서 관심이 있거나 또는 수녀원 가고 싶거나 또 수도원 가고 싶어하는 분들, 또는 신학교에 입학하시는 분들, 하고자 하는 분들한테도 공동생활을 해야되고 침묵을 강조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되기 때문에 아마 제 체험이나 나눔이 도움이 될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은 저는 주로 어릴 때 중고등학교 다니고 할 때 혼자 많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자취하고 큰 집에서 살고 하면서 홀로 많이지내고 그러다보니까 굉장히 저 자신의 내면을 많이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어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면서 수도원에 어느날 방문을 했는데 그 책상에 조그만한 책자가 하나 놓여있었는데 그 책 제목이 이거였어요. <침묵중에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  혹시 그 저자가 누군지 아세요? 그 저자가 토마스 머튼이었어요. 저는 그때 당시에는 그 책을 쓴 분이 토마스 머튼인지 몰랐어요. 저는 그 책을 굉장히 탐독했다 그래야 되나요. 그 책은 수도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있는데 사진도 이렇게 있고 한데 그 사진 한 컷, 한 컷, 글 하나 하나가 저한테는 굉장히 수도생활에 대한 매력이 느껴졌어요. 그 가운데 하나가 토마스 머튼은 아브라함에 비유를 들면서 창세기에 보면 나오쟎아요. 소돔과 고모라를 멸할 때 10명의 의인이라도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지 않겠다. 이런 약속을 하십니다. 그 때 토마스 머튼은 이 10명의 의인이 바로 수도자들이다.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근데 저도 그 당시에는 수도원에 살면서 침묵을 지키고 고독하게 살고, 공동체가 함께 사는 이 삶이 세상의 어떤 의인으로써 이 세상이 멸하지 않는 그 가운데에 유지하기 위한 의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게 바로 수도승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고 굉장히 수도원에 입회하는 기초가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실제로 수도원에서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이 침묵을 지킨다는게 정말 쉽지 않습니다. 우선 외적으로 말 안하는 것, 그건 사실 쉽습니다. 제가 살아보니까. 왜 그런말도 있쟎아요. 침묵은 자기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이다.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부부싸움하거나 화가나면 일단 말을 안하쟎아요. 언어의 단절이 이루어지고. 그래서 말 안하는 거, 이건 사실 뭐 쉽습니다.


그런데 내 어떤 생각의 침묵, 제가 지난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내 생각의 침묵, 내 상상력의 침묵, 그리고 내 갈망의 침묵. 여기까지 가기는 굉장히 어려운거고 또 사람마다 어떤 침묵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또 외향적인 사람들은 말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행동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또 그런 사람들이 더러 이제 말하지 않고 그냥 홀로 있는 시간이 굉장히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겁니다.


각 사람마다 수도원의 삶 안에 어떤 걸림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침묵, 또 어떤 사람은 순명하는 거. 순명도 침묵과 연관이 되어있죠. 내 뜻의 침묵인거죠 사실 다르게 말하면. 내가 이걸 하고 싶은데 장상은 이걸 하라고 그래요. 그러면 거기에 따라서 순명한다는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계속 내 속에서 불평이 막 일어나는거죠. 생각의 침묵을 못 지키는거죠. 계속해서 불평, 불만이 솟아납니다.


그리고 뭔가 내 안에 어떤 하고 싶은 것, 이런 것들이 처음에는 안 생겨요. 자꾸 갈수록 내 뜻대로 뭔가 하고 싶고, 내가 사실 수도원 안에 있으면 내가 가고 싶은데 맘대로 못가고 항상 어디를 갈 때도 허락을 맡아야 되고, 또 내가 갖고 싶은게 있을 때도 허락을 맡아야 가질 수 있고, 또 항상 뭔가 절제된 삶, 또 어떤 규율에 맞는 삶을 살아야 되는데 그런 삶을 왜 살아야 하는가? 이걸 생각하지 못할때는 성소를 잃어버리게 되요. 이런 삶이 진정으로 영적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내가 나 자신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그리고 또 내가 어떤 외적으로 다니고 움직이고 하는 걸 넘어서 진정으로 하느님 안에서의 영적인 자유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이런 모든 것들을 끊어내는 훈련을 하기 위한 도구인거죠.


근데 여기 이 도구들, 이 외적인 내적인 이 침묵의 도구들을 잘 활용하지 못할때는 거기에 얽매이는거죠. 갇히는거죠. 그러면 수도원이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라 감옥이 되는거죠. 네, 그래서 나중에 어느정도 조금 편안해지면 오히려 수도원안에서의 외적인 규율은 오히려 지키기 쉽습니다. 근데 내적으로 진정으로 하느님께 순명하고 또 장상에게 순명하고 또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하느님이 하고 싶은 걸로 이어질 때, 편안한 삶이 되는거죠 수도원 안의 삶이. 뭐 정말 불편하지않죠.


심지어 외적으로 굉장히 수도원의 삶이 밖에 사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불편한게 많아요. 뭐 항상 허락을 맡아야되고, 뭘 해야되지만 그게 이제 나를 지켜주는 하나의 큰 든든한 장치가 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자유이야기 들어보셨어요? 하느님께서 정말 당신께서 자유로우신 분이시고 굉장히 당신께서 뭔가 하고싶은대로 하셔야되요. 그런데 우리는 굉장히 많은 부분에서 하느님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어요. 그게 뭐냐하면 하느님은 이런 분 하고 만들어놔요. 수도원도 마찬가지. 수도원도 이런, 수도자는 이런, 사제는 이런 사람, 뭐 교수님은 이런 사람, 선생님은 이런 분, 이렇게 틀을 만들어놓고 사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거기에 어긋나면 아니, 저 신부님이 왜 저렇게 행동하지? 혹은 하느님이 이런 분이어야되는데, 하느님은 전지 전능한 분이시고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신데 왜 이런 고통이, 왜 이런 힘겨움이, 이렇게 따지게 되는거죠.


근데 사실 하느님은 우리보다 더 자유로운 분이세요. 자유자체이시쟎아요. 하느님 하고싶은 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시쟎아요. 거기에 내가 '네'라고 할 때 진정으로 그 자유안으로 들어가게 되는겁니다. 제가 이걸 깨달았을 때 굉장한 충만함이 느껴졌어요. 그리고 굉장히 자유로워진 느낌도 들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냥 하느님이게 내버려두는 것, 사실 그럴 자격도 없죠. 하느님은 마음대로 하시는 분이신데. 근데 우리는 흔히들 하느님은 이렇게, 이렇게 하셔야돼 라고 뭐 성서에 이렇게 나와있어, 성서에 나와있는 부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선 하느님이시고 우리 인간을 초월해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도원에서의 여러가지 규율이나 뭐 이런 것들도 진정으로 그 하느님의 자유로움, 영적인 자유로움으로 들어가기 위한 도구들인거죠.



김남희 교수 : 지난번에 대침묵과 소침묵을 말씀해주셔서 수도원 안에서의 침묵은 규율로 시작을 했지만 거기서부터 자유로워질 때 진정한 침묵을 누릴수 있다 라고 하셨는데, 일상안에서 저희가 할 수 있는 것들은가 있을까요 신부님?


박재찬 신부 : 네, 사실 일상안에서도 많은 경우에 제가 볼 때는 두 부류로 나누어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쩔수 없이 혼자 있어서 뭐 외롭고 요즘 고독사 이런 것도 많이 나오쟎아요 그죠. 그렇게 혼자 그냥 그렇게 계시는 분들이 계시고 어떤 분들은 너무 바빠서 홀로 있을 시간이 없으신 분, 이 두 부류가 있을수도 있을 겁니다. 근데 진정으로 우리가 하늘의 고독, 하느님의 고독과 만나기 위해서는 두 부류 모두 하느님을 향해야 된다는 거죠. 하늘을 향해서 단순히 이제, 너무 바쁘신 분들은 조금 조용히 멈춰서 홀로 있는 시간을 갖는 것,


그리고 또 너무 혼자만 계신 분들은 성당엘 간다든지 혹은 다른 어떤 곳에 찾아가셔서 정말 고독한 사람들에게 서로 힘이 되어주는 어떤 친구가 되어준다든지 뭐 그런 부분, 또 아까 말씀드린 여러가지 봉사하는 기회가 주어지신 분들은 또 세상안에서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에 참여함으로써 그 어려운 중에 있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고독을, 고독한 사람들을 돌보아주고 나누어주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또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것도 하나의 진정한 영적인 고독, 영적인 그런 자유로움을 살아가는 방법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남희 교수 : 네, 정말 공감이 되는데 그거야말로 정말 토마스 머튼이 얘기하는 나를 넘어가는 소통이 되고 그 소통이 이제 친교가 되고 이렇게 정리해도 될까요?  그래서 그 친교와 관련해서 머튼이 인도에서 한 강연에 소통의 가장 큰 깊은 레벨은 소통이 아니라 친교다. 이런 말을 넘어간다. 이렇게 했거든요. 그러면 말을 넘어가는 소통, 그 친교를 좀 설명을 해주시면 어떨까요?


 박재찬 신부 : 네, ' Beyond words'라고 하죠. '말을 넘어간다'. 왜냐하면, 쉽게 얘기하면 정말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는 많은 말을 하기도 하지만 때때로는 정말 서로 말이 필요없을 때가 있어요 그죠.  엄마품에 안겨있는 아기같은 경우에는 아기가 아무 말하지 않더라도 엄마는 느낍니다. 그것처럼 하느님께서 우리를 돌봐주시고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굳은 신뢰가 있을때는 굳이 많은 말, 뭐 사랑한다는 말하지 않더라도 느껴집니다. 그런 영적인 어떤 깊은 친교, 토마스 머튼은 communication, 서로 소통하는걸 넘어서서 진정한 소통의 communication의 가장 깊은 레벨은 'communion', 친교라고 그랬습니다. 영적인 친교, 다른 사람들과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언어를 넘어서는 분이시쟎아요. 하느님은 이런분이라고 했을때 그 부분은 아주 부족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그 표현할 수 없는 부분들은 서로 말하지 않더라도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나중에 이제 제가 종교간 대화할때도 이 'spiritual communion'에 대해 얘기할텐데 영적인 깊은 친교를 이루는 이들에게는 언어를 넘어가는 그런 어떤 그 서로가 마음과 마음이, 가슴과 가슴이 통하는 그런 어떤 영적인 깊은 레벨에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단계로.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하고 또 기도안에서 만나고 그 기도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서로 사랑안에 서로 일치되는 그런걸 체험할 수 있습니다. 지난시간에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미사때 예수님과 일치되는걸 커뮤니온이라 그랬쟎아요.


김남희 교수 : 네, 맞습니다. 결국 5주차에 걸쳐서 강의하신 내용이 이제 정리가 되는 것 같아요. 3주차에 걸쳐서 하셨던 기도, 명상, 관상 여기에 대한 출발점이 바로 침묵이고, 그 침묵안에서 진정한 고독을 들음으로써 실존적으로 느끼고 그걸 이제 바깥으로 소통을 해낼 때, 진정한 영적인 친교를 할 때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삶을 사는 것이다.


박재찬 신부 : 네, 관상과 삶이 통합되는거죠. 교수님 아주 좋은 학생입니다.


김남희 교수 : 덕분에 공부 열심히 했습니다. 신부님!  네, 그러면 마무리를 하면서요 저는 그 말을 넘어가는 소통이라고 하는 그 영적인 친교에서 토마스 머튼이 왜 동양종교에 관심을 가졌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로 '염화미소'(拈華微笑)라고 하는 단어가 떠올랐는데요, 사실 이 '염화미소'의 뜻은 석가모니가 명상의 삶에서 연꽃을 들어보이자 팔만대중 가운데 유일한 제자 가섭(迦葉)만이 그 연꽃의 뜻을 알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석가모니와 그 가섭의 미소가 바로 '염화미소'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오늘날에는 이 '염화미소'를 내가 말을 하지않아도 상대방과 교감이 될 때, 뜻이 통할 때 이 말을 비유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아마도 토마스 머튼이 말한 그 영적인 친교, 하느님과 일치, 바로 이 가섭처럼 하나의 미소에서 시작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면서요, 시청자분들도 이 미소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과 내적인 일치를 이루는 진정한 침묵과 대화를 이루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감사드립니다.


박재찬 신부 :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