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성모님을 통하여 성부 아버지께로~16회 머튼의 성모마리아 영성 2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3. 25. 11:53


+ 찬미예수님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의 박재찬 안셀모 신부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번 시간에는 성모님의, 토마스 머튼의 성모님 영성에 대해서 계속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토마스 머튼이 성모님께 바쳤던 기도를 우리도 함께 바치면서 이 나눔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리 구세주 하느님의 어머니시며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여,

저는 사랑 넘치는 당신의 중재와 보살핌에 저 자신을 온전히 맡깁니다.

당신은 저의 어머니시고, 저는 당신의 소중한 아들,

그러나 근심, 갈등, 실수, 혼란 투성이인데다 자칫하면 죄를 짓곤 하는

당신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온 삶이 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저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므로

제가 필요로 하고 근심하는 모든 것과 함께 제 삶을 당신께 맡깁니다.

저를 당신의 순수한 두 손으로 거룩하게 하신 아드님께 바치소서.

제가 자신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그분의 참된 제자가 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도해 주소서.

그리하여 저 자신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그분의 왕국과 진리를 사랑하며

그분이 오셔서 거룩한 십자가로 구원하신 모든 이들을 사랑하게 해주소서.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모님께서 토마스 머튼 신부님을, 이런 기도를 듣고 돌봐주시고 또 아드님 예수님과 더 하나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성모님께 기도드리며 예수님과 더욱 일치할 수 있도록 간구하며 살아온 수도 여정이었습니다.


이렇게 토마스 머튼 역시 자신의 약함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부족함을 성모님께 드러내 보이고, 죄많고 불쌍한 영혼이오니 아드님께로 갈 수 있도록 전구해 달라고 청합니다. 우리도 성모님의 영성을 통해서, 토마스 머튼의 이러한 영성을 통해서 성모님의 겸손하고 자신을 비우셨던 것처럼 토마스 머튼도 그렇게 성모님을 따라서 아드님 예수님께로, 성모님의 아드님 예수님께로 갈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 나눔을 계속해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강조했던 것중에 하나는 토마스 머튼이 처음에는 그냥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성모님은 우리의 전구자요 중재자로서의 모습이었는데 점점 갈수록 어떤 이미지를 강조했죠? 네, 기억나시죠. 주님의 종이라고 했죠. 이 주님의 종이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토마스 머튼은 더 깊이 성모님을 이해하게 되었고, 성모님이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 아드님과 일치한 분이셨고 그래서 온전히 더, 그 어떤 분보다도 관상의 가장 탁월하고 완벽한 모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것을 제가 어떤 비유를 통해 설명했는데 기억나시죠? 네, 창문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해드렸죠. 아주 온전히 맑고 깨끗한 창문이 바로 성모님이셨다고.


그동안 살아오면서 내 마음의 창문이 어떠한지. 어, 저 사람을 바라보면 정말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같애, 혹은 저 사람을 바라보면 너무 이기적이야 너무 자기 자신만 생각해, 저 사람한테는 예수님의 향기가 나지 않아. 라고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느낀다면은 좀 더 마음을 비워내고 성모님과 같이 맑고 깨끗한 창문이 되어 갈 수 있는 우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그것마저도 토마스 머튼은 그렇게 내 마음의 창문을 닦는 것마저도 내 힘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성모님을 통해서 하느님께 간구하고 은총을 구했던거죠.


아무도 하느님 앞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성모님은 그 완벽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은총을 입었을 때, 어떻게 얼만큼 완벽한 그리고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모델이셨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모님의 영성을 통해서,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조금 더, 몇 가지 제가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통해서 간추린 내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들 다섯 가지를 함께 이 시간에 나눠보고 싶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합리적인 생각을 넘어, 

두 번째는 관상적인 그러니까 영적인 삶의 어떤 모델로서의 성모님, 

세 번째는 자기 비움과  Letting Go영성, 

그리고 네 번째는 일치와 친교의 영성,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는 신비로운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는 영성

이 다섯 가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 합리적인 생각을 넘어! 우리 흔히들 생각하면 합리적인 생각을 왜 넘어가야돼? 합리적인 생각은 좋은거지. 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또 항상 합리적으로 생각하며 살아라고 이제 교육을 받았을 겁니다. 근데 왜 제가 합리적인 생각을 넘어가라고 말씀드리는지 이제 이해하실 수 있게 될 겁니다. 우선 질문을 하나 드릴께요. 성모님에 관한 4대 교리가 뭘까요? 네, 평생동정, 그리고 원죄없이 잉태되신 분, 그리고 또 하느님의 어머니 천주의 모친,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모승천이죠.



이 4가지 교리를 한 번 살펴보십시오. 과연 합리적인가요? 모든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근데 성모님은 원죄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믿어야 됩니다. 합리적이지 않죠. 그리고 또 평생 동생이셨다! 여기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순 없겠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도 있을 수 있을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모님께서는 결혼을 했지만 평생 동정으로 사셨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느님의 어머니다. 천주의 모친,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요? 인간이 어떻게? 여기에는 물론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라는걸 강조하기 위한 그런 교리와 아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성과 신성을 지닌 분이셨기 때문에,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성모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시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어머니시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게 인간의 이성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죠? 그래서 우리는 믿을교리라고 이야기하죠.


마지막으로 성모승천! 인간이 하늘로 올라갔다. 물론 우리 성경에도 보면 엘리야도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죠. 여러가지 뭐 이제 하늘로 올라갔다는 표현을 쓸 수 있겠지만 이 하늘은 다른 차원도있을 수 있겠지만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근데 우리는 이런 인간의 합리적인, 어떤 이성적인 것들을 넘어서서 우리는 그 성모님의 4대 교리를 믿고 있고 또 성모님의 4대 교리를 통해서 우리가 또 성모님의 그 신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고, 또 성모님을 통해서 우리가 더 깊이 하느님의 어떤 그런 계시라든지, 또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는 체험하고 또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4대 교리는 성모님을(은) 사라집니다. 결국은 4대 교리는 당신 아드님 때문에 생긴 겁니다. 뭐 천주의 성모도 마찬가지고 그죠! 그리고 이 모든 교리는 성모님 자신 때문이 아니라, 성모님께서 그만큼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되어갈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으로써 성모님에 대한 교리가 생겨난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기본적인, 그런 어떤 합리적인 이성적인 생각을 넘어갈 때 우리는 초월할 때 하느님께로 더 나아갈 수 있게 되고, 그래서 그 믿음을 통해서 더 성숙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여러가지 우리 삶 가운데도, 사실 우리 삶 가운데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 납득이 안가는 경우도 참 많이 체험합니다 그죠! 모든 것이 우리가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생각을 하고 하지만, 사실 뭐 때때로는 우리 이성을 넘어서서 납득하기 힘든 경우도 많이 생깁니다. 예를 들면 뭐 우리 흔히들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사람들은 그 속에 막 빠져듭니다. 근데 사실 그건 현실이 아닌데도 그죠! 마치 그것이 현실인양 생각하며 사는 분도 계십니다.


예를 들면 어떤 하나의 다른 예로 모 영화사가 어떤 다른 우주관을 만들어냅니다. 다른 우주의 여러가지, 그래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면서 그 우주관에 빠져서 심취합니다. 근데 사실 생각해보면 논리적이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습니다. 근데 그들 나름대로의 어떤 논리속으로 이제 그들이 우리를 초대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또 거기에 이제 합류해서 같이 생각하는거죠. 그렇지만  현실로 돌아오면은 현실과 다른 어떤 괴리에 상상해 놓은거 있죠. 하지만 현대인들이 합리적이라고 하면서도 그 상상해 놓은 것이 마치 현실인양 그 속에 또 빠져들기도 합니다. 


또 가장 납득하기 힘든 건 바로 십자가의 논리죠.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된다. 이것도 사실은 고통스러운건 우리 피하고 싶어 하는데 왜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되는지 이것도 합리적인 생각을 넘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모님의 교의, 4대 교리뿐만 아니라 성모님의 그런 삶의 여정을 통해서 우리 인간의 이성을 넘어서는 또다른 뭔가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인간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서 정말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체험하고 또 하느님을 느끼고, 또 하느님 안에서 진정으로 우리가 변화될 때, 또다른 차원의 그런 세상이 있다는거, 또다른 차원의 어떤 영적인 그런 것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체험하게 되고 또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더 현실을 더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열매를 맺게 되는 거겠죠. 그래서 우선 성모님의 영성을 통해서 합리적인 생각을 넘어서자. 그 이상의 더 너머에 뭔가가 더 있다는 것을 깨우치시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로 이제 제가 성모님의 영성을 통해서 강조해드리고 싶은 것중에 하나는 성모님이 가신 이 신앙의 여정, 관상의 여정이 우리에게 큰 모델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처음 드러난 것은 바로 '예'라는 응답을 통해서였죠. 성모님께서 "예'라는 이 응답을 통해서 처음으로 하느님 체험을 했고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물론 이 전에는 하느님 중심의 어떤 교리라든지, 유대교의 그런 것들을 배웠겠죠. 그래서 이 '예'라는 여종으로서의 삶이 시작된거죠. 이 "예'라는 응답을 통해서!


그리고 그때 뭐라고 그랬죠? 처녀가 잉태해서 이제 아이를 낳을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래서 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죠.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 받아들임을 통해서 성모님은 이제 잉태를 하게 되었고,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이 있었죠. 금방 아기가 태어나는 건 아니죠 그죠! 열 달, 성모님은 아홉 달이었죠. 아홉 달의  기다림을 통해서 이제 탄생이 이루어졌죠. 탄생 그죠! 그래서 예수님이 태어났고, 이집트로 피난가고 그 다음에 다시 돌아오고 하는 그런 고난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죠! 사실 여기서 보면 이 받아들임 안에는, 남편없이 낳았기 때문에 미혼모가 되셨죠 그죠? 그래서 요셉 성인과 갈등이 막 일어나고 그랬지만 결국 요셉 성인의 믿음을 통해서 이제 받아들였고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피난도 가고, 이집트로 피난 갔죠 그죠? 그러면서 이제 난민이 되었습니다. 다른 나라로 갔기 때문에, 난민의 체험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자렛에 돌아와 가지고 예수님을 돌봤죠. 돌보고 예수님과 함께 성가정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또 얼마 후에 요셉 성인이 먼저 세상을 빨리 떠났죠. 요셉 성인이 그 당시에는 나이가 많았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 성인이 죽고 난 다음에는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아들을 돌보면서 과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또 성모님께서는 공생활을 예수님께서 보통 30살가량 되어서  시작했다고 그러시는데, 과부가 되셔가지고 그 이후에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는 성모님이 예수님을 찾아가는 그 대목이 있죠.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 그러셨어요?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요 내 자매다. 마치 문전박대하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그죠! 그래서 이 때 공생활 하는 중에는 성모님은 지켜봐주는, 이 때(탄생)는 직접 돌봐주고 케어해 주는 그런 사랑을 했다면 이 때(공생활)는 저 멀리서 바라만 봐야되는 그런 사랑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그러는 중에 3년 후에 어떻게 되었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죠 그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그 영화같은거 보면 성모님이 이 아들을 먼저 세상을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슬픔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의 그 통곡하는 그 장면들도 영화에 많이 보게되죠. 그래서 성모님께서 정말 아들을 십자가에, 사형수의 어머니가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제 교회의 어머니가 되는데, 이렇게 해서 모든 우리의 어머니가 되어갑니다. 네.


자, 이 때를 조금 더 설명할까요? 성모님께서 아들이 세상을 떠났고, 그 다음에 사흘만에 부활하셨고 그때 떠나기전에 사도요한한테 십자가에서 뭐라고 그러죠?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 라고 하면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고, 그래서 이제 승천하신 다음에는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가 되셨죠. 그래서 이 다음에는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는 보편적!  자, 이렇게 성모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보면 정말 순탄치 않았죠. 여러가지 뭐 고통의 시간, 어려움의 시간, 그래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성모칠고라는 그런 이야기도 있을만큼 성모님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모님을 뭐라고 그러죠?  모든 관상의 모델이고 삶의 모델이면서 우리도 성모님이 가신 그 길을 함께 걸어가야 된다고 그럽니다. 노래도 있죠 그죠!  근데 저는 이 성모님의 여정을 보면서 우리의 관상적인 여정, 우리가 신앙으로써 걸어가야 할 여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우리도 관상의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가 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은총으로써 하느님께서 다가왔을 때, 

우리가 관상의 체험으로써 성모님처럼 하느님 중심으로 살았을 때, 

제가 지난 시간 관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기름 이야기했죠 그죠. 

기름을 가지고 늘 준비하고 깨어있을 때, 이 하느님이 찾아왔을 때 '네'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받아들임! 그렇지만 이 받아들임은 또다른 새로운 시작은 위한 고난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받아들임 다음에 뭔가 또 큰 하느님의 어떤 은총을 위해서는 기다림의 시간도 필요합니다. 마치 흔히들 말하는, 저도 옛날에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한 번에 하느님의 은총이 탁 주어지면 한 순간에 뭔가 확 변하는걸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관상에도 계속 하느님 체험에도 레벨이 있다고 그랬죠. 계속해서 끊임없는 우리 하느님의 체험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다음 시간에 제가 영적성장에 대해서 다룰 때 좀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영적인 어떤 새로운 탄생을 체험하고, 그렇지만 이 탄생의 체험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또 새로운 여러가지 다음 단계로 가기위한 고난의 시간들이 또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사람들안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기다려야 되는 때, 또 직접 돌보아야 되는 때, 또 때때로는 멀리서 지켜봐줘야 하는 그런 때도 있습니다. 사랑에 여러가지 방법을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성모님의 이 예를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자녀들에 대한 어떤 어머니의 사랑을 어떻게 해야되는지에 대해서 조금 더 나누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많은 어머니들이 제가 북미에서 공부할 때 보면, 대학에 딱 들어가면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케어하는 것을 그만 둡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혼자 스스로 살아가야 됩니다. 그래서 대학생인데도 부모님 밑에 있으면 친구들이 놀립니다. 아직도 부모님 밑에 있냐고.


그래서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그런 문화와 조금 다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국은 결혼할 때까지, 혹은 결혼 이후에도 돌봐주고 계속해서 끊임없이 부모는 자녀를 계속해서 케어하는 경우를, 돌봐주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성모님을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이 공생활을 하는 동안에 멀리서 지켜봐 주셨습니다. 


이 때(탄생)는 하나하나 다 돌보아주고 했지만 이 때(공생활)부터는 그냥 멀리서 인내하고 기다려주고  또 아들이 잘할 수 있도록 그냥 뒤에서 서포트(support) 해주는 그런 역활을 했죠! 그래서 우리 이 프로를 보고 계시는 많은 어머니들도 만약에 내 아들이 대학교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는걸 준비하고 있는 중이라면, 또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면 너무 지나치게 자녀들을 돌봐주는 것, 이것만이 사랑이 아니라 이제는 지켜봐주는 사랑도 사랑이라는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이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너무 잔소리하기 보다는 아이들이 나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지켜봐주고 또 기도해주고 대신 좋은 삶의 모범을 보여주는거, 기도해 주시면서 또 어머니나 아버님께서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시고 또 선하게 살아가시고,  또 열심히 공부도 하시고 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줄 때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어머니가 믿고 있는 하느님께 갈 수 있을거고 또 자연스럽게 스스로 나의 하느님을 만나가고 또 독립해 나갈 수 있을겁니다. 그래서 사랑도 다양한 방법으로 해야 된다는 것을 성모님을 통해서 배우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모님이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중에 하나는 나중에 다음시간에도 이야기하겠지만 성모님은 처음에는 그냥 가난한 시골의 소녀였습니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모든 인류의 어머니가 됩니다. 그러니까 한 명에서 이제 보편성을 가지게 됩니다. 보편성! 토마스 머튼의 영성에 있어서 이 보편성, 영어로는  universal !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이 보편성을 가지는 것, 가톨릭도 보편적이라는 뜻이죠 그죠. 그래서 이 보편성을 가지는게 성모님의 영성에서 굉장히 중요한 마지막 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 이런 여정을 쭉 걸어가신 것, 이런 여정도 바로 우리의 신앙의 여정이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걸 본 거죠. 그래서 성모님의 영성, 이 여정의 영성을 강조한 겁니다. 이해되셨죠? 네.


그 다음에 또 성모님에게서 중요한 것중에 하나는  성모님은 자신의 뜻보다는 늘 하느님의 뜻을 항상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그래서 여러분들도 내 뜻과 하느님의 뜻이 부딪힐 때 항상 이제는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고 '네'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은총을 간구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또 관상의 여정은 여기서도 보는 것처럼 한 번에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끊임없이 성모님도 계속해서 여러가지 과정들을 거치고 고통을 거치셨던 것처럼 지속적이고 또 계속되는 어떤 성장의 여정이라는 것을 깨달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속적이고 다이나믹한 그런 여정, 역동성 있는 여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 끊임없이 자기자신에 대해서 죽고 새롭게 태어나실려고 했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그런, 또 저를 포함해서 여러분들 모두가 성모님에 대한 삶의 여정을 본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약간 반복되는듯 하지만 자기비움과 Letting Go의 영성을 다시 한번 더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성모님은 무엇보다도 '예'라는 응답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우셨고, 자기 자신의 뜻을 포기하셨습니다. 물론 자기 뜻을 포기한다는 것은 무력한 존재가 된다는게 아닙니다. 항상 네네네 하면서 그냥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물론 다른 사람들이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할 때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내야겠죠. 그게 바로 정의를 실천하는거죠. 정의를 부르짖는거고. 그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내 뜻을 포기하는 것이지 무조건 내 뜻을 포기하라는 그런 뜻은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정말 진정으로 하느님과 하나되어갈 때 하느님의 자유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내 뜻을 포기했지만 그 안에서 오히려 더 큰 자유로움, 또 큰 사랑과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안에 숨겨져서 그리스도의 뜻이 내 뜻이 되어갈 때, 진정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는 아무것도 중요한게 없고 그리스도만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성모님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거죠그래서 비움과, 나를 비움으로써 오히려 하느님의 자유, 예수님의 자유로 건너갈 수 있다는 것을 배우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또 Letting Go의 영성, 흘러갈 것은 이걸 한국말로 번역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냥 흘러갈 것은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것, 그러니까 하느님이 하실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 이런 것들이 성모님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하는 영성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온전히 하느님께서 로마서 8장 28장에 나오는 것처럼 부르심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작용해서 선한 결과를 이룬다는 그 말씀처럼 그렇게 하느님께서 좋은 것으로 이끌어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집착하지 않고 흘러갈 것은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것, 이것을 성모님의 영성을 통해서 배우면 좋겠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런 부분들을 강조를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집착으로부터의 자유, 뭔가 붙잡고 있는 것, 내가 그걸 붙잡고 있을 때 다른 것을 잡지 못하게 되는거죠! 손을 펴야지만이 주님이 내미는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자아에 대한 집착, 혹은 또 재물에 대한 집착 혹은 또 여러가지 자기자신의 자리에 대한 집착 이런 것들을 많이 갖고 살아가고 있죠. 근데 가장 비우기 힘든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 수도원 들어와서는 뭔가 부질없는 것들에 많은 집착을 하면서 살았던 것 같은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많이 하면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뭐 예를 들면 착하게 살아야 된다는 집착, 그리고 또 잘 살아야 된다는 것에 대한 집착, 좋은 수도승이 되어야된다는 것에 대한 집착, 그러다보니까 많이 모르면서 아는 척, 뭐 착하지 않으면서도 착한 척, 척척하면서 이렇게 살았던 시간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되돌아보면은. 그리고 아주 작은 것들에 실수했을 때도 굉장히 그거에 대해서 혼자서 많이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뭐 전례하면서 조금 실수한 걸 가지고 스스로 완벽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던 그런 시간도 있었습니다. 아마 저 자신에 대한 집착이었겠죠.


그런데 어느 날 왜 이렇게 아주 작은 사소한 것들에 많이 집착하고, 또 자기 자신이 실수했을 때, 저 자신이 실수했을 때 왜 그렇게 혼자 그렇게 괴로워하고 혼자 힘들어하는가! 이런 것들을 묵상하는 중에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그동안 살아오면서 아버지께서 저한테 항상 교육할 때 어릴 때 '네 인생은 네거니까 네가 알아서 살아라' 라고 이렇게 교육을 시키셨고, 그러다보니까 저 안에서는 책임감이 굉장히 많이 크고 있었던 같아요. 그러다보니가 아버지를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 아버지가 나로 인해서 실망했을 때 나는 너무 힘들거다. 그래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더 열심히 살아야 되고, 더 열심히 공부해야 되고, 더 착하게 살아야 되고, 성당도 더 열심히 가야 되고, 부모님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 이런 마음이 은연중에 제 안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애요.


그러다보니까 작은 실수를 했을 때, 그 실수가 아버지에 대한,  실망에 대한 그런 강박관념이 다른 수사님들, 다른 신자들한테 이제 투사가 된 거겠죠. 그러다보니까  제 실수나 제 잘못으로 다른 사람들이 실망할까봐, 또 실망했을 때 굉장히 혼자서 괴로워하는 겁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그래서 이것을 깨닫고 난 이후에는 혼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안셀모야! 실수해도 된다. 실수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나한테 실망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내가 실수했더라도 아버지께서 나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는 것처럼 또 나를 끝까지 사랑하는 것처럼 실망시켜도 된다. 괜찮다.' 그런 생각을 스스로에게 계속 했습니다.


래서 그러다보니까 어느 틈엔가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제 자신한테 자유로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망시켜도 된다 라는 그 말씀이 저를 자유롭게 해주었던 것처럼 어쩌면 그 이후로도 점점 내적으로 자유로움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그런 저 안에 깨달음이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들 삶속에서도 어쩌면 집착하게 되는 어떤 배경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아에 대한 집착, 어떤 사람은 재물에 대한 집착, 뭐 돈에 대한 집착, 사람들에 대한 집착도 있죠. 어떤 관계에 대한 집착, 저 사람은 끊임없이 내 것이 되어야 된다고 소유할 때, 소유할려고 할 때 우리는 진정한 하느님의 사랑을 깨우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 자유롭게 해 줄수록, 더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게 되고, 또 더 자유롭게 그 사람을 놓아 줄수록 더 큰 사랑을 하게 되고, 그래서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또 느끼게 되는거죠.


그래서 집착이 아닌 진정한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은총도 우리는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배우면서 흘러갈 것은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것,  Letting Go의 영성을 통해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랑, 성모님의 그 자유로운 사랑을 배워나가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토마스 머튼이 끊임없이 이  Letting Go의 영성을 강조한 이유중에 하나도 토마스 머튼 역시도 끊임없이 자아에 대한 집착, 또 자기 자신에 대한 그런 애착들이 많이 있었던거죠. 그래서 거짓 자아로부터 참된 자아를 찾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했던 것입니다.




이제 네 번째로 우리가 또 토마스 머튼의 성모님의 영성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중에 하나는 바로 일치의 영성입니다. 

일치로부터의 친교의 영성, 이 부분은 나중에 제가 영적성장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다룰텐데 무엇보다도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모님은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은 아드님과 하나였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과 분리될 수 없는 분이셨기 때문에 성모님은 예수님의 교회, 교회와도 분리될 수 없는 분이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교회와 성모님이 분리될 수 없는 교회의 어머니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와도 분리될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온전히 성모님께서 일치의 영성을 사셨기 때문에 우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분이고, 우리가 성모님을 닮을려하고 성모님의 그런 영적인 여정을 함께 걸어갈 때 우리는 예수님과도 하나되어 갈 수 있다는 것을 토마스 머튼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제가 맨 마지막에 universal 을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그런 보편적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역시 보편적인 사랑!  편협된 사랑, 보수적이고 이기적인 영성이 아니라 모든 것들을 예수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도 필요할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러가지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토마스 머튼도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뭐 다른 성인도 마찬가지죠. 베드로 성인, 바오로 성인도 실수하고 잘못하고 그랬습니다. 하지만 다시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사셨고, 나중에는 예수님께서 보편적인 사랑을 했던 것처럼, 성모님께서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셨던 것처럼 토마스 머튼도 그런 영성을 사셨던거죠. 그래서 우리도 그런 영성을 지향해 나가야 되는 겁니다. 우리 것만, 내 것만이 아니라 더 보편적인, 예수님을 통해서 더 큰 사랑을 하는 우리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신비로운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성모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인간이면서도 신비로운 예수님, 하느님의 아들을 낳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면서 예수님과 온전히 일치하셔서 하느님이신 그분의 어머니가 되셨던 겁니다. 우리도 성모님의 이 영성을 통해서 우리가 인간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히 일치해서, 지난 번에 제가 자기초월 이야기 했었죠?  사진 보여드리면서. 그래서 나를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히 일치할 수 있는 모델이 되셨던 겁니다.


성모님이 마지막에는 어떻게 하셨죠? 네, 8월 15일날 우리가 기념하는 것처럼 하늘로 올라가셨죠.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이, 뭐 눈에 보이는 그런 구름을 타고 가셨다는 그런 이미지보다는 이제는 하느님이 거하시는 곳,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오른편에 앉으셨던 것처럼 그렇게 우리도 성모님처럼 마지막 날에 하느님 오른편에서 하느님과 함께 천국의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셨다는 겁니다. 하느님과 일치의 관계, 그것을 미리 보여주신 분이 바로 성모님인 겁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하느님 사랑,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완성이요, 또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바로 이것이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겁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이 점을 강조하면서 우리도 역시 토마스 머튼이 설명한 것처럼 우리도 역시 성모님을 통해서 완전한 삶을 통해서, 사랑의 완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었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통해서 나를 넘어서 어떻게 하느님化 되어가는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우리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삶을 살았지만 성모님과 아주 가까이에서 날마다 성모님께 기도드리고, 날마다 성모님께 자기자신을 봉헌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힘들 때, 특별히 어려울 때는 성모님께 기도하면서 그 모든 시간들을 이겨내고 또 성모님안에서 자기 자신의 앞으로의 일들을 나도 역시 부족하지만, 이 죄많은 내가 성모님처럼 그렇게 다시 하느님과 일치해서, 온전히 예수님과 일치해서 온전히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그 사랑의 완성의 길을 미리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았고 또 그것을 갈망했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누구보다도 더 성모님을 사랑했고, 성모님이 가신 그 길을 걷고자 했습니다. 이제는 토마스 머튼을 통해서 우리가 그 길을 가야하는 때입니다. 성모님께서 가신 그 영광의 길은 바로 자기 비움을 통해서, 여종으로 낮춤을 통해서, 어떤 인간의 이성을 넘어서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는 삶을 통해서, 믿음을 통해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관상의 첫 단계는 바로 믿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해 나아가는 이 여정에서 성모님처럼 

오늘도 하느님의 뜻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네'라고 응답하는 삶, 그

래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실 수 있도록 우리를 온전히 내어드리고 봉헌하는 삶을, 

그래서 그분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어가는, 사랑의 열매를 맺어가는 

그런 삶을 사실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럴 때 우리도 성모님처럼 이렇게 대답합시다. 


" 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