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신부님 강의록

카를로스신부님 사제피정 제9강의 2010. 9. 9. 사제 피정

은가루리나 2016. 6. 13. 01:38


 제9강의 지향의 순결, 순수함   (2010. 9. 9. 사제 피정)




   오늘 9월 9일 첫째 강의는 순수한 지향을 위해서 봉헌합니다.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처음으로 가르쳐주신 것들 중의 하나는 지향의 순수성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 있어서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루이사의 글들을 보겠습니다.


   지금 2권에 들어가는데 2권의 첫째 장, 날짜가 있습니다.

제1권은 루이사의 자서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날짜가 없는데 2권부터 날짜가 있습니다. 

그래서 첫째 권은 언제 썼는지 알 수가 없고 

그 책을 완성하는데 얼마나 걸렸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루이사의 책 2권이 시작되는 부분에서는 날짜가 나옵니다. 

   1899년 2월 28일부터 날짜를 적으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장에서 루이사는 

자기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순명으로 이 글을 쓰는데 

순명으로 글 쓰는 일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루이사가 자기 고해 신부님에 대한 비전을 환시로 보게 됩니다. 

루이사가 예수님이 자기 고해 신부님한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8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그분께서 고해사제 옆에 계시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9 "보아라. 네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늘로 들어온다.

그러므로 

너의 모든 걸음과 말과 활동이  내 대전으로 온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이 순수하다면, 다시 말해서 나를 위하여 행해진다면,

나는 그 속에서 더할 수 없이 큰 기쁨을 얻는다.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너를 기억하게 하는 

숱한 전령(傳令)들에게 둘러싸인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 반대로, 그것이 천박하고 속된 것들이라면 내 마음을 언짢게 한다."


10 그리고

고해사제의 두 손을 잡아 하늘 쪽으로 들어올리시며 다시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언제나 위를 향해 눈길을 들어 올려라. 

너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니, 하늘을 위하여 일하여라.” 


11 이와 같이 밀씀하시는 예수님과 고해사제를 보고 있노라니,

만일 (고해사제가 예수님 말씀대로) 행동한다면 

마치 사람이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이사가는 것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는가?

자기 물건들을 먼저 보내고  나중에 그 집으로 가기 마련이다.

우리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처소에 이를 수 있도록 

먼저 우리의 행업들을 보낸 다음,

때가 되었을 때  우리 자신도 그리로 갈 것이다.

오! 그러면 우리의 행업들이 얼마나 멋지게 우리를 호위해 주겠는가?



   주님께서 루이사가 글을 쓰게 하시기 시작하셨는데, 

향의 순수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 일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물론 루이사가 희생 제물로 사는 삶이 첫 권에도 있습니다. 


   첫 권은 성탄 준비 9일 기도를 이야기하면서 시작되는데 

이것이 진짜 36권의 시작 부분입니다. 

성탄에 관한 9개의 묵상으로 된  9일 기도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강생의 신비가 36권의 진짜 시작입니다. 

아주 깊은, 심오한 묵상입니다. 

   그 성탄 준비 9일 기도가 너무나 심오하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그 36권 전체하고 아주 깊은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어제 우리가 공부한  그분의 수난에 관한 것, 

수난의 신비에 관한 것이, 그러니까 루이사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 첫 권의 성탄 준비 9일 기도 안에, 이미 들어 있었습니다.


   그 첫 권은 루이사의 자서전인데, 성탄에 대한 묵상 9일 기도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성탄에 대한 9일 기도 중 2개의 묵상이 첫 부분에 있고, 

나머지 7개 묵상은 책의 끝 부분에 있습니다. 

   루이사의 생애, 루이사의 소명은 

성탄 준비 9일기도를 통해 큰 나무로 자라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묵상들은 씨앗과 같습니다.


   제2권에서 처음으로 날짜를 쓰고, 날짜가 기록 된 장은 이 장입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날짜를 쓰고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 지향의 순수성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날짜 쓰고 처음으로 쓴 것이 지향의 순수성에 대한 말씀으로  아주 긴 장입니다.


   그 다음에는 믿음,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하느님 신성, 그 대단한 신비에 대한 것이 기록됩니다. 

그리고 지향의 순수성이야말로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뜻 안으로 인도하시는 가르침의 시작입니다.


9 “네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늘로 들어온다. 

그러므로 너의 모든 걸음과 말과 활동이  내 대전으로 온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이 순수하다면, 다시 말해서 나를 위하여 행해진다면, 

나는 그 속에서 더할 수 없이 큰 기쁨을 얻는다.” 


   그러면 그 지향의 순수성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향의 순수성의 첫째이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그분의 사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주님만을 위해서 하는 것 이것이 기초가 됩니다. 

성 바오로도 우리에게 같은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1코린 10,31)


   다른 지향이 있으면 절대로 안 되고 이중 지향도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 생활의, 매일의 생활의 모든 것이 아주 단순하게, 

모든 영적인 일들도 순수한 지향으로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의 사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에 주님께서 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셨는데, 

이것은 성경 안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메신저, 전령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행동 하나하나가 다 하늘로 갑니다. 

그런 많은 메시지들이, 전령들이 올라가서, 주님이 우리를 기억하도록 해줍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우리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갈 때, 

우리가 한 모든 행동을 데리고 하늘로 간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이, 

우리가 한 모든 것들이 우리의 동반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하늘로 갈 때, 

우리가 외롭게 혼자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모든 행동들과 같이 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전 생애가 다 하늘에 있게 됩니다.


   때때로 우리의 심정이, 우리의 마음이 현재에 묶여 있기 때문에 

보통은 이 현재의 ‘나’ 를 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나’ 라고 하면  

나의 모든 인생이 지금의 나와 함께 있는 것이고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만이 내가 아니라  과거가 다 나와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 모든 행위, 나의 모든 것이  나와 함께 하늘에 있게 됩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경험을 보면, 

어떤 종교를 믿던 사람이든지, 무엇을 하고 살던 사람이든지 관계없이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을 한 사람들은 모두, 

그러니까 죽음과 삶 사이의 체험을 한 모든 사람들은 

한 순간에 자신의 전 생애를 봤다고, 

한 순간에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보았다고 말합니다.


   어제 읽었던 장들하고 연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주님 대전에 있습니다.

   어제 우리가 우리 생애의 작은 책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것이 그 책 안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적힌 모든 것들이 살아 있습니다. 

작은 책은 살아있는 책입니다. 

그리고는 루이사가 영감이라고 할까, 직감한 것이 있습니다.


11 “이와 같이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고해사제를 보고 있노라니, 

만일 (고해사제가 예수님 말씀대로) 행동한다면 

마치 사람이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이사 가는 것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 가는 사람은 어떻게 하는가

자기 물건들을 먼저 보내고 나중에 그 집으로 가기 마련이다. 

우리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처소에 이를 수 있도록 

먼저 우리의 행업들을 보낸 다음, 때가 되었을 때  우리 자신도 그리로 갈 것이다. 

오! 그러면 우리의 행업들이 얼마나 멋지게 우리를 호위해 주겠는가! 


   다른 장들에서 보면 우리 일상생활의 모든 행위들은 옷과 같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입게 될 옷과 같은 것입니다. 

더 순결하고, 더 사랑스럽고, 더 애덕을 가지고 또 더 잘했으면 

하느님 앞에서 더 아름다운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우리 옷을 상상해 보십시오. 

리가 하느님 뜻이라는 빛의 옷을 입게 된다는 것을.


   어느날 루이사가 보았습니다. 

자기 행동 하나하나가 다 정도가 아니라 태양인 것을 봤습니다. 

그것은 태양이었습니다.

   루이사의 행위들은 다만 순수한 지향만으로 행한 인간의 행동일 뿐만이 아니라, 

더욱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영원한 하느님의 뜻이 그 루이사의 인간적인 행동들 안에 다 들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2권에서 예수님의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


   주님은 지향의 순수함을 가르치신 다음에 

즉시 ‘믿음은 곧 하느님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믿음이 하느님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가르침에서 

그 하느님의 선물은 두 가지 차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두 번째, 우리가 하느님 당신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열려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못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주시면서 

또 우리가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주십니다. 

이것에 대한 많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


   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할 때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기 위해서는 외부의 빛과 내부의 빛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외부의 어떤 빛의 샘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태양, 촛불, 전등 같은 그런 빛이 필요하고, 

그 빛이 우리가 보는 물건에 형태도 주고 빛깔도 주고, 

그래서 그 빛들 때문에 그 물건이 그렇게 형태와 빛을 가지고 있게 됩니다. 

   그다음에는 내부의 빛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빛입니다. 

그러려면 건강한 눈을 가져야 됩니다.


   이 두 가지, 밖의 빛과 안의 빛 사이에서, 

둘 중에 하나가 부족하거나 없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눈은 건강한데 밖이 아주 캄캄하면, 

해도 없고  촛불도 없고  전등도 없어서  밖이 캄캄하면 

눈이 아무리 건강해도 못 봅니다.

그다음에 이제는 햇빛도 있고  전등도 있고  초도 있습니다. 

그러나 장님이면 혹은 눈을 감고 있으면 못 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보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의 다른 선물입니다. 

이 두 가지가 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믿음의 관계 안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상황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분께서 수난하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성체 안에 계십니다. 

그다음에는 말씀 안에, 성경 안에 계십니다. 

성사들 안에 계십니다. 

   그러니까 복음 안에 예수님이 사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이런 사실들 모두는 밖에 있는 빛입니다. 

태양 빛, 전등, 촛불과 같은 밖의 빛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보기 위해서는 시각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빛이 또 필요합니다. 

다른 시각이, 우리 안에 있는 다른 시각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눈을 가져야만 그런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선물은 하느님 자신입니다. 

그러니까 그다음에는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가 하느님의 모든 선물들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모든 감각, 영적인 감각을 포함해서 우리의 모든 감각이 이런 것입니다. 

그리고 초자연적 차원에서도  언제든지 이 두 가지를 필요로 합니다.

 

   이것은 삼위일체 신비의 반영과 같습니다.

성부와 성자 둘입니다. 

성부와 성자 둘이 있는데, 성령은 이 둘을 하나로 만드는 겁니다. 

눈의 예를 볼 때, 눈은 태양과 같습니다. 하느님 성부는 빛입니다. 

그 다음에 보는 능력, 시각은 성령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는 능력은 이 둘을 하느님께 반사해 주는 성령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그래서 본다는 작용은 삼위일체 신비를 그대로 반영해 주는 것입니다.

 



▒ 질문: 성자는 어떤분입니까? 성부는 빛이고, 시각은 성령이고, 그렇다면 성자는?


답 : 성부는 빛의 샘과 같습니다.

이 예에서는 성부는 빛의 샘으로서 성자를 낳고, 

성자는 낳음을 받는 쪽이고, 

성령은 그 둘을 합쳐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의 삼위일체 작용은 모든 분야에서 반복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삼위일체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겠고, 

우리가 보는 작용도 삼위일체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