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나를 당신께 맡기나이다

아버지 나를 당신께 맡기나이다 - C. 카레토 지음

은가루리나 2016. 6. 13. 14:11


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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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나의 아버지시다.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견책하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당신의 자녀로 여기고 하시는 것이니 잘 참아 내십시오. 

자기 아들을 견책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히브12,7)

 

하지만 여기 현실에 비추어 매우 어려운 문제가 생긴다.

더구나 아직 믿음이 굳세지 못한 사람, 

옹글고도 온전한 분을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으로 아는 사람에게는  

문제가 아닐수 없다.

하느님 말씀에서 선포된 예언과  내 눈에 비쳐진 현실간에는 너무도 사이가 넓다.

끊임없는 모순, 철저한 부정이 그 허방을 메우고 있다.



그러나 눈 앞에 비치는 저 허방은 누군가가, 아니면 무엇인가가 

그 예언을 부도낼 양으로 꾸며 만든 것이려니 하기도 한다.

아브라함에게 예언이 내렸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이 불어날 것이다.”(창세15,5)

그러나 현실은 그의 귀에 속삭였다.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대는 나이 백 살이요

그대의 아내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인데,  달거리가 끊긴 지도 오래다.”


빵과 포도주를 드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나의 피다”(마르14,22.24)

그러나 듣는 이의 이성은 이렇게 따진다.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요한6,60)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닥쳐오는 운명을 두고 말씀하셨다.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살아나겠다”(요한2,19참조).

 

살아나신 분을 뵈었다는 말에 토마는 내뱉듯이 한마디 했다.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20,25)

우주여, 내 눈에 비쳐진 저 모순을 향해서 내가

하느님은 아버지이시다라고 예언할라치면  당장 "!"하고 소리들을 지를 것이다.

“뭐라고? 무슨 가당찮은 소리냐? 

불의를 보라! 굶주린 군상을 보라! 생지옥 같은 인생을 보라!

어찌 하느님을 아버지라 하겠는가? 내 어린 것이 죽었어. 

그런데로 하느님이 아버지라고?“

자동차가 덮쳐와 내 목숨을 끊어놓았지. 왜 그걸 못 막으셨는가?”

“평생 뼈빠지게 일해서 집 한 칸 마련하고 오붓이 살고 있었지.

그런데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됐단 말야. 왜 날 돕지 않으셨는가?“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자식들과 단란한 살림을 꾸려 오면서 

고생 고생하던 끝에 만사가 슬슬 풀리기 시작했지. 

그런데 지금 백혈병에 걸려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단

말야. 나에게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소리를 감히 해?“

    

 

그렇다. 이 모순들을 한마디로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느님의 말씀에 기인한 예언이라지만 당장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뿐이랴! 내 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고생이 있다면 그것은 "믿는 일"이라고 나는

서슴없이 말하련다.

아마 여러분에게도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믿는다는 것은 본성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있다는 신적인 차원에 속하는 일이다.

성체 안의 그리스도의 현존이나,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심을 인정하기는 

이성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믿음으로만 된다.

그리고 믿음은 하느님이 심어주시는 대신덕(對神德)이다.

그 어른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모양으로 심어주시는 것이다.



보이는 사물은  보이지 않는 사물과 서로 어긋나 보인다는 것을 나도 안다.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안목에서는 

현세에 일어나는 사건들이 

도무지 불가해하고 끊임없이 충돌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도 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이 영원하다고, 예언은 이루어지리라고 

일단 '믿고' 전심전력하여 수긍할때에 대이변이 일어난다.

    

 

현실이 전혀 달라 보이게 되고, 

그 힘겨운 중력을 벗어나 빛의 궤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즉 신적 피조물로 살며, 내 안에 하늘 나라를 실현하고, 

나를 에워싸고 짓부수려는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알며 또 무수히 경험해왔다.

"일단 믿으면, 나는 그저 인간에서 그치지 않고 이미 하느님의 아들이다."


나는 우주의 주님이신 하느님, 현세에서 국민을 모집하는 그런 나라를 다스리시는 하느님,

국민이 모집되면  이승과는 다른 신비로운 타계로 인솔하시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왕이냐고 묻는 자에게 그분은 힘주어 말씀하신 바 있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요한18,36)

 

이 진리는 잊기 쉽다.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자꾸만 잊게 만든다.

'이 세상'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이 도시 믿기지 않게 만든다.

거기다가 우리는 자꾸 놀라고 심지어는 스캔들까지 일으킨다.

철없는 아기가 죽으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분께 비통한 소리로 "왜?"고 여쭙는다.


집 한 채 마련하여 가정을 이루고 아들 딸을 보며 살아왔는데

지금은 양로원에 갇혀 외로이 세월을 보낸다.

우리 눈 앞에서 허물어져내리는 우리의 과거에 섬뜩 놀라고, 

우리 손아귀에 아직 남아 있는 것들을 꼭 움켜쥐고서 

우리는 남은 시간을 일순이라도 늘리려고 발버둥친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우리를 빨아들여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 

현세 사물에서 우리를 데려가야 한다는 것은 거의 생각지 않고서 

그저 발버둥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