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나를 당신께 맡기나이다

아버지 나를 당신께 맡기나이다

은가루리나 2016. 5. 30. 09:10



제1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느님은 나의 아버지시다.





나의 아버지




해결의 열쇠는 성령이시다.

성령, 하느님의 사랑은 바람과 같으시다.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오순절, 예루살렘의 문이라는 문은 모조리 뒤흔들고 뒤짚어 엎은 그 바람이다.

성령은 물과 같으시다. 

메마른 땅에 스며들어 그것을 비옥하게 만드는 물이시다.

성령은 태양과도 같으시다. 

얼어붙은 가지를 따뜻이 녹여 새 움을 틔워주신다.


바로 그 성령께서, 하느님의 사랑이, 하느님의 풍요가, 하느님의 창조력이 나를 찾아주시고

"하느님은 그대의 아버지시다." 라고 말씀해 주신다.

당초에는 이 말씀을 넌지시 비추시다가 갈수록 큰 소리로 들려주시고, 

우리가 절대 승복하기까지 고막이 터지도록 크게 외쳐대신다.


성령은 하느님의 공증인과 같으시다.

그이의 현존은 온유하면서도 강직하게 일을 꾸미신다. 

진리의 광명으로 나를 비추시면서 

"형언키 어려운 탄식으로"  내 대신 기도를 올리신다. 

아직 입을 뗄 줄 모르는 나 대신에 아버지 하느님께 "아버지!"라고 말씀드리신다.


그렇다. 내게 현존하시는 이는 공증인이신 성령이시다. 

그이는 왔다 갔다 하신다. 되오셨다가 되가신다. 

쉴새 없이 오가신다.

그이는 사랑이시고, 사랑은 잠자코 있지 못하는 연고이다.

그대는 큰 소리로 한 마디 내뱉고도 싶을 것이다. 

거짓말이라고, 가당치 않다고, 

하느님은 아버지가 아니시라고. 

그대가 발광을 하면 성령은 잠자코 그대에게서 떠나시어 마냥 그대로 두신다.

그대가 제풀에 꺾여 잠잠해지면 어느새 돌아오신다.


노아의 홍수 때의 비둘기처럼 그대의 폐허로, 그대의 권태의 방주로 돌아오신다.

그리고 같은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은 그대의 아버지시다. 그리고 그대는 아들이다."


사실 우리 안목으로는 하느님이 아버지시라는 말이 도시 믿어지지 않는다.

허나 이토록 초조해 하시는 공증인에게 꼼짝없이 붙들려 있다가는 '안 믿기'가 더 힘들게 된다. 

이제든 저제든 결국 믿지 않고는 못배길 것이다.


더더구나...그이는 사랑이시다. 무릇 사랑은 이겨내지 못하는 법이다.

사랑은 모든 증거를 능가하는 증거이기에. 성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당신 아들의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갈라4,6)

 

우리 대신에 그이는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고 계신다.

그이의 음성이 하도 쟁쟁하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 말씀을 반박할 논리를 생각해낼 정신이 없다. 

또 눈 딱 감고 그이의 말씀을 부정했다가는 성령을 거스리는 죄를 범하기 십상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있다.(마르 3,29참조)

그래서 나는 어려운 시간이 닥칠 때마다 차라리 바울로의 다음 말씀을 속으로 되뇌이곤 한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주십니다. 

또 우리의 마음속에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자녀과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로마 8,16-17)

    

 

"아버지!"

이 말씀에 모든 계시가 요약되어 있고 성서 전편이 응어리져 있다.

이거이 '기쁜 소식'의 알맹이다. 여기서 모든 두려움은 끝장이 나는 것이다.

하느님은 나의 아버지시다. 참되고 깊은, 말 뜻 그대로 아버지시다.

하느님은 나의 아버지시고 나를 지켜보신다. 

하느님은 나의 아버지시고 나를 사랑하신다.

하느님은 나의 아버지시고 나를 늘 곁에 두고 싶어하신다.

하느님이 아버지이라면 나는 어둠을 무서워 않을 테다. 

그 어른은 어둠 속에도 계시며, 좋은 때가 오면 거기에도 빛을 끌어오실 것이기에(시편139 참조)

 

하느님이 아버지시라면 나는 그 어른과 말이 통할 것이고, 얘기를 나눌 수 있으며, 

그 어른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나의 아버지, 나의 하느님!"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다.

이것은 정녕 불가사의한 일이요 내게 오는 모든 선물의 바탕이다.

그 어른을 모시니 생명이 선물로 온다.

그 어른을 모시니 진리가 선물로 온다.

그 어른을 모시니 사랑이 선물로 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어른을 모시니 내게는 '집'이 생긴다.

내가 이승에서 품는 모든 희망이 '집'이라는 하나의 꿈으로 영글고 있다.

집을 갖는다. 집에서 산다.



내가 지금껏 전전하며 살아온 여러 채의 집들은 우리 인생들이 언젠가 한집에 모여 살기로,

혼자 살지 않기로 정해져 있다는 생각을 내게 깨우치고 숙성시키고 행여 잊을세라 들쑤시는

노릇을 해왔다.

우리 인생들은 타인들과 관계맺어진 채 태어났다. 

사랑하고 온정을 쏟고 자기를 내주고, 그리고 서로 주고받으며 살라고 태어났다.

큰집으로 가라고 태어났다. 

큰집에서는 한아버지 슬하에 누구나 형제간이다.

아무도 따돌려지지 않는다. 한집에 모이게 되어 있다.

거기는 정말 안정감과 영속감이 있다. 휴식이 있다.


참말이다. 우리 인생들은 하느님이 아버지되시고 만인이 형제가 되어 한집에서 살기로 되어 있다.

구세사와 그 여정,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서 비롯하여

 '우리와 함께 사시는 하느님의 처소'에 이르기까지, 

사막의 천막에 내리시던 '야훼의 현존'에서부터 '말씀의 강생'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흐름은 사랑의 차원에서 인생들이 절대자 하느님께 맺어지는 절차였다고 하겠다.

그것은 '현존'이라고도 했고, '친교'라고도 하고, '동참'이라고도 할 것이다.


요한 사도는 묵시록에서 세상 종말을 한눈으로 내다보았을 때, 

곧 그리스도의 개선이 있고 난 후

메시아 시대의 모든 현실을 한마디로 간추려야 했을 때, 

'집'이라는 영상을 빌려 이를 표현하였다.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맞을 신부가 단장한 것처럼 차리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나는 옥좌로부터 울려나오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묵시 21,2-4)


그렇다. 

하느님이 당신 '집'에서 사람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 

그때 그 어른의 현존은, 지성소의 현존을 위시해서 

이전의 모든 현존을 거두실 만큼 삼라만상에 두루 뻗치는 현존일 것이다.

 

“나는 그 도성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바로 그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묵시 21,22)

 

그곳에 떠오르는 광채는 이미 지상의 광채가 아닐 것이다. 

하느님의 광채가 덮을 것이다.

 

“그 도성에는 태양이나 달이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밝혀주며 어린양이 그 도성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묵시2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