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신학

힐데가르트의 생애 -2.영성

은가루리나 2016. 9. 10. 22:20


II. 영성



세계화라는 문화자본주의의 물결을 타고 거대한 다국적 시장의 형성에도 불구하고 

한쪽(20%)은 호황을 누리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한쪽(80%)의 빈곤이나 기근은 날로 심해지고 있다. 

유전자 조작(GMO) 식품, DNA 칩이나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같은 

기술발전과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가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할 것 같다. 

너지나 식량문제 그리고 세계 기상이변과 역병이 

날이 갈수록 지구촌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지구 생태계의 위기가 나타나면서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영적으로 새로운 방향과 창조적 비전을 찾으려는 노력이 일어나고 있다. 

긍정적인 점은 이 지구가 정보 하이웨이 인터넷을 통해서 

지구 전체를 '외적으로' 신경화하면 할수록 떼이야르 샤르뎅 신부님의 비전처럼 

사람들은 더욱 더 '내적으로' 영성화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사회와 생태와 인간의 삶을 연결시킬 수 있는 

전일적인 영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시대적 징표나 변화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그다지 중요하게 보지 않았던 시대, 

중세에 대한 관심 특히 12세기 힐데가르트의 영성에 대한 관심이 

오늘날 상당히 높아졌다.


힐데가르트가 살았던 그 당시 중세는 

시대를 가르는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감겨 있었고, 

힐데가르트의 영성은 그 이후의 주된 흐름에서 밀려있었을 뿐만 아니라 

힐데가르트의 많은 글과 노래와 그림이 거의 9세기 동안 응달에 묻혀 있었다. 

늦게나마 다양하고 풍부하게 

오늘날 그녀의 영성을 우리의 실제 삶에 끌어 당겨 보려 한다. 

물론 많은 부분이 21세기의 현대인에겐 낯선 12세기의 세계와 가치관을 담고 있고, 

또 그와 결합된 상징과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 영성과 접근법이 현대의 

문제들을 치유할 수 있는 관건이 되고 있다.

현재에 시사하는 영성적인 틀과 내용들을 살펴본다.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통합


힐데가르트 영성의 바탕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신학적으로 초월성과 내재성의 문제를  모든 것을 주재하는 초월적인 하느님, 

그러나 창조 안에서  세상의 모든 것 안에서 

서로 연대하여 이어가도록 일깨우는 잠재력, 사랑으로 작용함을 전하는 사랑의 영성, 

사랑의 신학으로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를 위하여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온 하느님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면서 

그 분이 이 세상 삶에서 겪은 고통과 수난을 강조하게 되고, 

그것이 우선적으로 이 세상을 죄악시하였던 경향, 

그리고 인간의 죄과 때문에 그 구원을 위하여 수난을 당했다는 것이 

또한 경건한 신앙생활에서 '개인적인 죄과'를 몰아치는 경향에 대비해서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한 분이 창조에 담아준 사랑을 강조한다.


삼위일체의 신앙에 근거해서 영과 초월적인 것만이 아니라 

창조의 모든 것, 온 우주 안에  당신의 숨결, 신성이 잠재해 있음을 전한다. 

삼위가 하나이듯이 모든 것이 홀로 떨어져 머물지 않고 

서로 일치하여 작용하기를 열정적으로 바라는 사랑, 

한 처음에 창조의 근원이었고 또 육화의 원인으로 사랑을 구현하였던 이 사랑은 

또한 다양한 형태로 만물 안에서 작용하며 

전체 안에서 개별 창조물이, 또한 창조 전체가  완성에 이르도록 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창조의 완성을 향하는 것이 

도덕적인 의무나 보속이 아니라  대화이며 기쁨이다. 

그리고 어떤 상태에서도 사랑으로 다시 일깨워지는 것, 

이성으로만이 아니라 

감각으로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다양한 형태로 

이렇게 잠재되어 있는 신성을 깨닫고 작용하도록 일깨워지는 것이 곧 은총이다.




창조의 내적 연대성


이 사랑의 영성은 그러므로 창조의 세계에 대한 경외감과 긍정을 포함하며 

창조의 세계가, 모든 창조물이 하나로 규정된 질서 안에서 

서로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우주적인 연대성을 일깨운다. 

소우주-대우주의 원리에서처럼 모든 창조물이 공통의 기본요소로 이루어졌고 

인간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우주와 결합되어 있다. 

유사성을 지녔다는 것을 넘어서서 상호의존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영혼과 육체의 조화로운 합일


인간의 몸과 영혼의 관계에서 볼 때 이는 창조의 세계를 경외하듯 

영혼만이 아니라을 경외하고 긍정하도록 한다. 

힐데가르트는 특히 하느님 육화의 신비로부터 연결하여 몸의 귀함을 더욱 강조한다. 

하느님의 육화가 인간의 원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영원으로부터 정해진 것이며 

하느님의 사랑이 그 살을 뜨겁게 사랑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몸과 영혼 또한 서로 받쳐주고 조화되는 관계이며 

이렇게 조화롭게 일치할 때에 창조의 완성을 향하여 기쁨으로 최상의 녹을 받는다.



창조의 뜻, 소우주-대우주 대화의 통로, 조화로 이끄는 공동의 안내자: 

이성과 감각


창조를 통해서 창조주를 볼 수 있고, 

영혼, 이성만이 아니라 몸의 감각을 통해서 창조주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을 

힐데가르트는 실제로 색과 소리와 상징으로 통찰하고 설명했다.


인간과 우주, 이 모든 세계에 공통되게 맥이 뛰게 하는 것이 녹색의 생명력이다.

태양으로부터 생성되는 푸르름이 

태양빛과 수분을 담아 색을 바꾸어가며 열매를 맺듯이 

하느님의 사랑의 힘이 배어있는 이 푸르름은 

자연과 인간의 몸과 영혼 모두에서 생명을 낳고 키우고 열매맺게 한다. 

이것은 곧 

창조주의 사랑으로 정해 준 전체 질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보고 인정하며 

전체와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힐데가르트에게선 덕(德)도 푸르다. 

덕은 단순히 도덕적인 면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를 넘어서서 전체와의 연결, 전체 창조를 완성하는 구원과 관련된다. 

그래서 이렇게 전체 질서와 내적인 질서를 연결하고 균형 있게 유지하도록 하도록 

세고 재고 달아서 적당한 정도를 찾는 것과 

이를 지혜롭게 구분하는 식별이 가장 중요한 덕이다. 

그리고 이렇게 구분하고 적당한 정도를 찾아 푸른 생명력에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 

건강이다. 

     

창조는 '조화의 교향곡'이라는 것이 

모든 창조물이 원 음향인 창조주의 숨길을 나누어 받았고 

교향곡을 이루는 하나의 음으로써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여서 각자 고유의 음을 알아내고 스스로 울려 

전체 화음에 자리잡도록 하는 것, 

음악은 이 원래의 근원을 기억해서 영혼을 울려 

이 전체 안에서 자신을 쇄신하도록 함으로써 영혼을 치유하고 몸을 치유한다.



건강, 전체 창조질서 안에서의 조화


힐데가르트가 건강에 많은 관심을 쏟았던 것도 

이런 영성적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전체 질서 안에서의 흐름에 개방적이고 깨어 있으면 귀 기울이는 것이 

건강함의 특징이다. 

건강한 이는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고 깨어 준비하면서 기다린다. 

힐데가르트에게서 병은 정도를 잃은 생활방식으로 

전체 창조물을 하나의 생명 질서로 연결해 준 전체 질서에 

내적인 질서가 균형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증상의 치료만이 아니라 전체 질서와의 관련하에서 

몸과 영혼이 이 전체 질서에 있는 녹색 생명력, 

viriditas에 다시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1. 사랑: 창조의 힘, 창조를 이어가고 완성하도록 하는 근원


사랑이

모든 것에 넘쳐 흐른다-:

저 깊은 바닥에서 샘솟아

별들의 세계위로 덮어 흐르며:


사랑은

모두에게 기꺼이 함께 한다.

우리 왕, 가장 높으신 주에게

평화의 입맞춤을 하였기에.


힐데가르트에게 있어서 

세상을 창조하고 또 그 창조의 뜻을 완성하도록 이어가고 구원하는 원리, 

근원은 사랑이다.


사랑의 근본은 삼위일체의 신비로 규정된다 : 

아버지이신 원음향(原音響) 안에, 아들이신 말씀의 음(音) 안에, 

그리고 불타는 이성이신 하느님의 숨결 안에서. 

사랑은 모든 것에 넘쳐 흐른다.

사랑은 '아버지의 심장을 호흡하는 가장 내적인 힘'이며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오시는 구원의 열매로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랑의 물줄기는 모든 존재에 넘쳐 흐른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 모든 자연에 사랑의 불, 

불과 같은 정신이 부어진다.

'저 깊은 심연으로부터 가장 밝은 별에까지' 

사랑이 서로 조화롭게 일치되도록 끓어 오르게 한다.


사랑은 이렇게 물이고 불이고 또한 입김이다. 

모든 것이 치유되고 구원되길 바라는 창조주의 사랑이 

온 세상에 불어 넣어준 '성스러운 영의 입김'이고, 

창조의 세계, 각 창조물의 중심에서 세고 달고 지어서 

전체를 질서지운 창조주, 지혜를 전달하는 이성이며 

또한 관계를 이루고, 조화로운 일치를 이루고 생명을 배태하도록 이끄는 

원초적인 힘이다.


사랑은 창조와 구원의 원리이다. 

사랑이 바로 창조작업의 첫 번째 근원이며 육화의 근원이다. 

이 원초적인 사랑의 힘으로만 창조가, 

모든 관계를 이루고 생명(존재)을 배태하는 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 

사랑은 홀로 머물지 않는다. 사랑은 날개를 얻는다. 

사랑은 거룩한 생명(vita integra)으로부터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구원하도록 몰아쳐져서

조화롭게 규정된 세상의 노래에 흘러 들어가는 불타는 이성이 되었다. 

불타는 이성의 근원에서 정신이 꽃피고 세상이 변화한다.


이렇게 사랑은 한 처음에 창조의 근원이었다.

사랑은 우리를 효과적으로 구원하였다.

사랑이 세상을 완성한다.

세상의 한 중심에 밝은 초록빛으로 사랑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이 우주를 내적으로 연대하게 하는 근원이고 힘이다.




2. 우주론 : 모든 창조의 내적 연대성 :


현대에 크게 중요하게 부각되는 부분이 모든 창조에 배어 있고 

완성으로 이끄는 사랑의 영성에 수반하는 우주론적인 시각이다.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창조 전체로 확대되는 사랑의 관계가 

전체 창조 질서 안에서 세계 모든 것이, 

인간과 세계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힐데가르트는 강조한다.



a. 소우주-대우주


우주, 세계의 생성이 인간 신체와 유기적인 연관 하에서, 

그리고 시간(달)과의 유기적인 연관 하에서 인간 삶의 단계가 전개된다.

'창조를 이루는 세상의 힘들과 영향력 안에 창조주의 역사하심'을 볼 수 있는데 

우주를 이루는 기본 요소들은 같다. 

힐데가르트는 우주를 이루는 거대한 전체생태를 인간의 안에서도 보았다. '              

이 요소들은 인간이 그것을 체화하듯이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을 마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들과 함께 살고 그들은 인간과 함께 산다. 

그래서 인간의 혈액에도 이와 상응해서 같은 것이 흐른다.' (Phys. 69)

대우주는 인간 안에 작은 우주와 상응한다. 

우주와 사람은 같은 질서 안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사람을 알므로써만 세상을 알 수 있고 

사람은 자신이 우주와 연계되어 있음을 생각할 수 있어야 

자신 내면의 신비를 엿볼 수 있다.


달이 태양으로부터 빛과 광채를 받아 빛을 비추듯이 

인간 또한 자신을 펼쳐가기 위해 태양빛이 필요하다.


'태양은 뇌를 강하게 함으로써 인간 유기체 조직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가장 깊은 곳까지 힘과 척도를 준다. ... 

그리고 이 광채가 인간 발꿈치도 비춘다. 

뇌가 몸을 지배하듯이 발꿈치가 온 몸을 받쳐주기 때문이다.' (LDO 53)


이 소우주-대우주의 사고에 따르면 

인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주와 결합되어 있다. 

유사성을 지녔다는 것을 넘어서서 상호의존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모든 창조물은 서로 다른 것들과 연계되어 있다. 

모든 존재는 서로 다른 존재를 통해 유지된다.' (LDO 53)

어느 것도 고립해서 존재하지 않고 다른 것과 연결해서 작용한다. 

인간만이 아니라 식물, 심지어 광물까지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식물은 서로 자기 꽃의 향기를 전하고 은 다른 존재의 광채를 비추어 낸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서로 사랑으로 감싸 안으려는 원의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창조는 서로 의존하고 연결하며 각각의 요구에 따라 응답하듯 

대화하며 살아 있는 전체이다. '

하느님의 질서 안에 있는 것들은 모두 서로 응답한다.'(LDO 94)



b. 세상에 대한 긍정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저술에서 이 모티브, 

'세상에의 긍정'을 아주 집중적으로 강하게 언급한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세상은 그 분의 광채로 빛난다.


'하느님의 권좌는 바로 그 분의 영원함이다. 그 분 홀로 그 영원함에 자리한다. 

모든 생명체들 또한 

태양의 빛줄기처럼 퍼져 뻗어 가는 그 분의 빛줄기의 작은 빛으로 반짝인다.

 ... 그러므로 그 분은 살아 반짝이고 불타는 모든 작은 빛들을 

당신의 모습을 비추는 빛으로 만드셨다.'(LDO 83)


어떤 창조물에나 하느님의 광채가 담겨 있고 창조를 통해 그 분을 볼 수 있다. 

세상을 보고 땅을 관찰하고 모든 창조물을 사랑하면서 

하느님의 신비를 보는 눈이 열린다.


'어떤 형태의 광채라도 담고 있지 않은 창조물은 없기 때문이다.

초록이든 꽃이든 열매나 씨이든, 또는 그 어떤 아름다움이라도...

이런 아름다움은 담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창조, 그 분이 바라는 창조가 아니다' (LDO 84)

'하느님은 모든 창조물과 함께 있고, 모든 창조물 또한 하느님과 함께 있다' (L 91)


육체를 지니고 인간은 땅위에, 눈에 보이는 세계에 살며 거기에 뿌리내리고 있다. 

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땅이 사람의 살을 이루기 때문이다. 

땅은 마치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듯이 자신의 즙으로 사람을 먹인다. 

(창조주의) 입김이 불꽃을 불어넣으시자 땅이 살아있는 사람으로 일어섰다' (Sci. 150)


그러므로 전심으로 이 세상을 긍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힐데가르트는 이 생각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표현한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이 존립하고 있다는 것도 공경하게 된다. 

태양과 달의 운행, 바람과 공기, 땅과 물, 

그리고 하느님이 인간을 존중하고 보호하기 위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다른 머물 곳이 인간에겐 없다. 

만일 인간이 이 세상을 포기한다면 

처사의 보호를 떠나 악마에게 스러지고 말 것이다.'(LDO 49)


인간은 세상에 주어졌다. 세상에서 떼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세상을 경시해서는 안된다. 

세상을 멀리하고 돌보지 않아서도 안된다. 

이런 것들을 통해 

인간은 삶의 발판을 얻고 하느님의 선함과 치유의 손길, 가까움을 경험할 수 있다. 

만일 인간이 세상을 멀리하고 돌보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는 창조주 앞에서 멀리하는 것이다.

중세에 이렇게 분명하고 단호하게 '인간이 땅에 주어졌음'을 말한 사람은 거의 없다

인간에게 육체와 세상에 대해 긍정할 것을 촉구한다. 

이것이 인간의 특별한 생존을 구성하며 

이를 부정하거나 경시하면 벌받지 않을 수 없다.




3. 몸의 영성:


인간이 되신 하느님, 하느님의 육화가 

육체에 대한 힐데가르트의 사상을 결정적으로 규정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달리 

힐데가르트는 하느님의 육화를 인간 원죄의 결과로 보지 않고 

영원으로부터 결정된 것이라고 본다.


'이미 영원으로부터 

그는 자신이 두르리라 생각한 살(육체)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를 뜨겁게 사랑하였다.'(LDO 183)


인간이 되신 분이 자신의 육체를 그렇게 사랑하였듯이 

인간의 영혼 또한 자신의 육체를 그렇게 사랑하며 그린다. 

창조의 세계 모든 것에 하느님의 숨결이 닿아 있어 하느님의 모습을 비추어 주듯이 

육체는 영혼을 비추어 준다.

'그러므로 

창조는 지혜(곧 하느님)의 겉옷이고 ... 육체는 ... 영혼의 겉옷이다.'(LDO 278)


중세에 빈번히 인용되던 성 아오스딩의 위계적인 이분법. 

곧 '육체-지상(현세)적인 원리'와 '영적-천상의 원리'를 구분하고 

후자를 우위에 두면서 현대엔 입증할 수 없는 근거로 

이를 성에까지 적용해서 남성을 여성의 우위에 두었던 내용:

'태초에 하느님의 뜻이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시고 

영적인 창조물을 육적인 창조물보다, 

이성적인 것을 비이성적인 것보다, 천상의 것을 지상의 것보다, 

남성을 여성보다, 부유한 이들을 필요한 이들보다 우위에 두셨다'


힐데가르트도 이 흐름에 따라 영혼을 우위에 두기는 하였지만 

힐데가르트에게선 몸과 영혼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영혼은 수분이 온 나무에 젖어 흐르듯이 온 몸에 젖어 흐른다. 

수액(樹液)이 나무를 푸르게 하고 꽃피우게 하고 열매맺게 하듯이...'(Sci. 133)


'영혼은 육체를 생기있게 하지만 육체는 영혼을 생기있게 하므로 

영혼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또한 육체를 필요로 한다. ... 

전반적으로 영혼은 자신과 함께 일하는 육체를 사랑하여 품어 안는다'(LDO 168)


그리고 

힐데가르트는 최후의 심판 때에 육신이 부활한다는 것에서도 

육신의 귀함을 인정하는 표현을 본다. 

영혼이 육신을 그리워한다는 표현으로. 

'영혼이 자기가 사랑했던 옷, 육신의 옷을 벗기웠기 때문이다' 

이 결합에 상응해서 질서 지워진 생활의 지침하에서도 육신이 멍에를 지지 않는다. 

영혼과 조화있는 관계이다.

'영혼과 육신이 진정 서로 일치하여 지내면 

그들은 단결된 기쁨 안에서 최고의 삯을 받는다.'(LDO 80) 

             

영혼과 육신이 하나라는 힐데가르트의 강조는 

실제로 자신이 이전에 겪은 심리적 신체질환에서 새겨져서 

더 나아가 근대적인 그리스도교의 틀 안에서 

육체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도록 하는 연결점으로서 기여한다.


인간의 육체에는 성(性)도 포함된다. 

생식행위를 통해 원죄가 이어진다는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이 

힐데가르트에게 부담이 되었지만 

힐데가르트에게선 하느님께서 이성의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것이 

몸 전체에도 관련이 된다. 

성기에서도 이성의 선물이 꽃핌으로써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성행위에서 기쁨도 느낄 수 있다.'(LDO 63) 

전체 우주는 생명을 주는 '녹색 생명력'으로 맥이 뛴다. 

힐데가르트는 이로부터 유추해서 '생식행위에 있어서의 녹색 생명력' 또한 알았다.


인간의 고유한 특성과 소명은 몸에서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면에서 포괄적인 인간의 위대함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몸을 잘 관찰하여야 한다.




4. 녹색 생명력(viriditas)


'오, 고귀한 초록이여,

태양에 뿌리 내리고

맑고 쾌활함 속에서,

세속의 영광이 알 수 없는

둥글게 돌아가는 바퀴의 원에서 빛나는 도다:

천상 신비에 담긴 마음, 사랑의 힘에 안겨

새벽동처럼 얼굴 붉히고

작열하는 태양처럼 타오르도다.

초록, 그대는

사랑으로 둘러싸여 있도다.' (Scivias III, 13. 357: 쉬퍼게스 역, 치료법, 306에서)


녹색 생명력은 대우주 자연과 소우주 인간에게 함께 작용하여 생명을 주는 단일한 힘, 

우주 전체의 맥을 뛰게 하는 것이다. 

힐데가르트가 이 말을 사용하는 경우를 몇 들어보면 알 수 있듯이 

이 녹색 생명력은 원래 식물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인간의 몸과 영에도 작용한다.

'오, 푸른 물오르는 새싹이여'

성 디지보트를 기리는 노래에 있는 

'오, 푸르름이여, 하느님 손길에서 나온 녹색의 생명력이여!', 

그리고 이와 같이 모든 것에 작용하는 '하느님의 녹색 손가락'.

'아버지의 사랑, 그 마음의 녹색 빛의 근원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에서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행하신 것들은 녹색 생명력이라고 표현한다. 

성령은 영성적인 녹색 생명력의 담지자이시며 행위자이라 하고 

세계의 원 안에 초록의 겉옷을 입고 있는 하느님의 여성적인 형상, 

지혜와 사랑을 표현하기도 한다. 

초록중의 초록인 동정녀 마리아, 

그로부터 연한 녹색, 곧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나오셨다 하고 

모든 창조력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서도녹색 생명력이 활동했다고 한다.


이처럼 '천상 신비에 담긴 마음, 사랑의 힘', 

하느님이 만드시고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힘, 

생명을 낳고 키우고 열매맺게 하는 모든 힘이 여기에 있다. 

비유적으로 식물과 동물, 모든 남성과 여성의 합일에 작용한다.


건강은 녹색 생명력 곧 초록에 다시 연결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은 육체적으로 자연과, 곧 땅과 우주와 대화하고 

이를 지키고 완성하도록 하는 소우주이고 

자연은 자신의 대우주 창조를 완성하도록 인간과 함께 연대하며 작용한다

소우주 인간이 전체 질서와 내적인 질서의 조화를 이루어 

내적으로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건강이므로 

이를 위해 적당한 정도를 찾을 수 있게 판단하고 구분할 수 있는 덕이 필요하다.




5. 조화의 교향곡


'모든 요소들은 하나의 음향을 지니고 있다.

하느님 정하신 질서로부터의 원음향을.

이 모든 음들이 모여 하나로 어울린다.

하-프와 치터의 협주처럼...'


세계는 음향으로 이루어졌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기 고유의 음을 지니고 있고 

삶은 무엇보다도 그 음이 끊임없이 진동하며 울리는 것으로 이해된다. 

누구나 각자 자신의 내부에서 울리는 소리에 귀기울여 

자신의 특별한 음, 자기 고유의 '기본음'을 알아내야 한다.


귀기울여 자기 고유한 음의 형태를 알게 되면 

이들이 각자 일정 자리에 배치되어 울리는 전체 협주, 

더 큰 전체의 질서에 자리잡을 수 있다. 

어떤 음이나 고립해서 홀로 머물지 않고 

다른 음들과 조화롭게 함께 울리는 화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힐데가르트는 우주를 형성하는 근본요소들의 '기본음악'을 깊이 생각했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귀기울여 들었다. 

세계가 소리를 지닌 창조, 음을 울리는 창조라는 것을 자주 언급했다. 

힐데가르트의 시각적인 비전의 선물이 

이렇게 분명하게 청각적인 능력으로 보충되었다.

힐데가르트에 따르면 창조된 것들은 

모두 각자 웅장한 창조의 교향곡을 울리게 하는데 기여하는

자기 고유의 음을 지니고 있다. 

이로써 구원은 눈으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귀로 들을 수도 있게 된다. 

이런 요소들만이 자신의 특정한 소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인간도 자기 고유의 음향을 지닌다.


'인간의 영혼은 내부에 듣기 좋은 음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소리는 스스로 울린다.'


하느님의 소리가 전하기를 

'나는 모든 창조물에 찬미하며 울리는 하모니(조화)로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고 세계는 생동하는 균형을 유지한다. 

상호보완적인 긴장으로서 함께 울릴 수 있기 때문이다.


힐데가르트의 이해에 따르면 

이렇게 세상은 조화를 이루는, 하모니를 이루는 전체이다. 

어떤 소리도 홀로 자신만을 위해 머물지 않는다. 

다른 소리와의 합일을 깊이 바라고 메아리, 반향이 있기를 바란다. 

서로 대화하는 이런 기본구조와 법칙은 태초에 하느님이 이 세상에 부여한 것이다.


'나는 천둥소리와 같은 소리를 지녔다. 

이 소리로 온 세상이 모든 창조물의 살아있는 소리로, 

살아있는 음으로 

움직이게 하였다.'(LDO 169)


게다가 인간에겐 특히 음악적인 과제가 주어져 있다.


'인간의 심장은 교향곡처럼 정해져 있다. 

교향곡처럼 울리는 인간 정신의 소리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엔 달고 아름답다.'


그러나 이것을 혼자서만 누려선 안 된다.


'다른 모든 창조된 존재들과 함께 웅장한 울림이 되도록 불어가게 해야 한다.'


사람이 노래하고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그러므로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라 '천상 화음의 반향'이다. 

인간 영혼은 하나 하나를 천상 하모니 전체 안에서, 

전체에 연관해서 세운 창조 계획 안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이 음악의 일부를 스스로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울려 노래해야 한다.


한편 음악은 치료효과도 갖는다.


'노래는 완고한 마음을 부드럽게 해 준다. 

회한의 눈물이 흘러나오도록 하고 성령이 옆에 오시도록 부른다.'(Sci. 356)


원래의 근원을 기억해서 영혼을 울려 이 전체 안에서 자신을 쇄신하도록 함으로써, 

'자기 집의 닫힌 문 앞에서 헛되이 문을 두드리고 있던 영혼 안에서 

정신이 작용할 수 있도록 그의 뒤엉킨 상태를 정리해준다. 

이제 음악이 강제로 힘을 가하지 않고도 아주 조용하게 영혼의 문을 연다.'




6. 식별, 정당한 정도 -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조력자


'덕'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책임있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신적인 힘, 

인간에게 주어진 은총의 선물이다. 

곧 하느님의 선물이자 인간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건조한 덕의 체계가 아니라 

인간의 삶 안에서 인간과 하느님의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지는 생동하는 형태이다.


힐데가르트에게 있어서 식별(diskretio)이 전체 질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보고 

내적인 창조의 질서를 찾는 '모든 덕의 어머니'(서한집 99, Sci. 252)이다. 

베네딕도 수녀회 규율에서 깊이 새겨진 부분이기도 하다.

식별의 기능은 알갱이와 쭉정이를 세세하게 철저히 살펴서 

알찬 것은 고르고 속 빈 것은 버리도록 하는 것과 같은 기능인데 

그러나 이것은 인간적으로 현명한 판단, 태도로서만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식별은 하느님 자비의 밝게 빛나는 구름으로부터 인간 정신으로 불어가 

그 안에서 식별하도록 하고 밝혀주는 하느님 선하심의 밝은 불꽃'(Sci. 261)이다.


이 식별을 통하여 삶에서 과도함을 피하고 전체 질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보고 

내적인 창조의 질서를 찾는 적당한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 

'하느님이 수없이 다양한 창조물간의 관계를 바르게 고려하며 일하듯이 

인간도 식별의 힘으로 자신의 모든 행위를 충분히 잘 재어야 한다'(Sci. 262) 

여기서 적당한 '정도'는 이론적으로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생활세계에서 읽어 알아내도록 한다는 점이 특별하다.


'하느님의 질서 안에 있는 것들은 모두 서로에게 응답한다. 

별빛은 달빛으로 반짝이고 달빛은 태양의 불꽃으로 비추인다. 

모든 것이 더 높은 것을 섬기고 자신의 정도를 넘지 않는다.'(LVM 94)


누구나 내면을 귀담아 듣고 더 큰 전체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인지함으로써 

'자신의 정도'를 알 수 있다.


힐데가르트는 몸과 영혼의 치료를 동일하게 보았기 때문에,

식별은 당연히 육체적인 욕구를 제대로 충족하도록 돌보기도 한다.

'인간이 자신의 몸에 적절히 영양을 주면 

그 행동도 밝아지고 다른 이들과 잘 교류한다. ...

자신의 몸을 분별없이 과도한 금욕으로 해치게 되면 그는 늘 분노를 보인다.

이 모든 것에서 너는 '좋은 땅'이어라.' (HK 280)


힐데가르트의 저작과 또한 서신에서도 

식별이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구체적인 예가 늘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음식은 심신이 상쾌해질 정도로 적당히 섭취해야 한다. 

그로써 영혼이 기쁨을 잃지 않도록'(HK 280) 

그리고 먹고 마실 때에 어떻게 식별이 관리하도록 하는가, 

그래서 다른 이와의 친교에서도 이 덕이 필요하다. 

'일상생활의 틀 안에서 모든 경우에서처럼 

서로의 대화에서 친절하고 정감 있게 말함으로써 

이웃에게 인간적인 것을 줄 수 있다.'(HK 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