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섭리에내맡김

거룩한내맡김의 영성은 주부적(注賦的) 영성 ▣ 보조교사방

은가루리나 2017. 2. 2. 23:18

 

 

거룩한내맡김의 영성은 주부적(注賦的) 영성  ▣ 보조교사방

 

moowee  등급변경▼  조회 369  추천 0 2013.09.26. 17:12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10) 영성이란 무엇인가 (10)

 

‘변화’ 체험하려면 하느님께로 초점 맞춰야

주부적 영성은 영성생활의 최고 형태

단순하게 하느님의 이끄심에 응답을

 

발행일 : 2011-08-21 [제2759호, 10면]

 

 

 

주부적 차원의 영성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 

주부적 영성은 영성생활의 최고 형태이다.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탑이다.

 

인간 노력에 의한 기술적, 전문적 접근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러한 노력들이 낮은 단계의 성취를 보장해 준다면,

주부적 영성은 최고 단계의 성취에 이르게 한다.

 

이 단계에서는 자동(automatic)으로 움직인다.

하느님께서 자동으로 직접 인도해 주신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뛰어난 영성가라고 해도, 주부적 영성을 체험했다고 해도

이러한 자동의 관계가 24시간 풀가동 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여기서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을 갈고 닦아서 은총의 터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 터 위에 엄청난 은총의 비를 내리신다.

 

 

둘째, 

주부적 영성은 일체의 특수하고 개인적인 표현 형태들을 뛰어넘어서

궁극적인 단순함에 이르는 것이다.

 

‘궁극적인 단순함’. 이 말이 중요하다.

성인 성녀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단순함’이다.

그 분들은 복잡하지 않았다.

 

하느님의 뜻을 복잡하게 따지면 갈등이 일어나고, 고민만 쌓인다.

따지지 않고 그냥 알아들으면 된다.

 

예비신자에서 성인으로 나아가는 단계는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나아가는 단계다.

 

똑똑하고 계산적이고, 분석적인 태도는 

영성생활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이는 단순함에서 오는 행복, 단순함에서 오는 충만함을 만끽하는데 

방해물이다.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긴 하지만,

보통 사회적 지위와 성취를 중요시하는 남성은

그 논리적인 태도 때문에 하느님과 가까워지기가 힘들다.

 

하지만 여성은 감성적이고, 모성애적 사랑의 토대를 가지고 있다.

베드로에게 “장애물” “사탄”이라고 말했던 예수는 

여성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지극한 단순함의 경지를 이룬 분들이 바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소화 데레사, 프란치스코 등과 같은 분들이다.

 

이분들은 공부를 많이 한 분들이 아니다.

이런 분들은 하느님과 직통라인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초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부적 영성의 초점은 바로 하느님 자체다.

 

‘나’는 교육에 의해, 환경에 의해, 주관에 의해 수시로 변한다.

인간은 각자의 교육과 환경, 주관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다른 입장을 드러낼 수 있다.

초점이 흐리다.

 

변하지 않는 초점, 핵심은 하느님이다.

 

신비신학, 관상, 주부적 영성을 체험하게 되면 

하느님이 초점이라는 걸 깨닫게 되고,

하느님에 의해 ‘변화되는 나’를 체험하게 된다.

초점만 확실하면 된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초점)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하느님을 알고 보면 ‘나를 위한 하느님’일 경우가 많다.

 

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다른 가족을 무너뜨리고,

내 성취를 위해 다른 이의 성취를 깎아내리고, 

내 명예를 위해 다른 이의 명예를 더럽힌다.

 

그러면서 “나는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한다.

교회 내에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이 많다.

 

 

그렇다면 이렇게 타인에게 고통 주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방법’으로 해선 곤란하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냅둬(내버려 둬) 영성’이다.

 

하느님에게 초점이 맞춰진 사람은 ‘냅둬 영성’이 가능하다.

내가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 하시게 해야 한다.

 

나는 하는 데까지 하고 

계속해서 겸손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뿐이다.

그래도 안 되는 사람들은 ‘냅둬야 한다’.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희생도 필요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고, 평화다.

 

나는 내 할 일이 많다.

왜 다른 사람한테만 신경 쓰고 시간 다 바치고 허비하는가.

내 할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할 일을 해야지 주부된 영성의 단순함에 들어간다.

다른 생각하며 복잡하게 살 필요 없다.

 

안타까운 사람에게는 

해 줄 수 있는 데까지 좋은 방법과 기도와 희생을 바쳐주고,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기면 된다.

 

 

‘초점’ 하느님은 ‘나’에게 계속 다른 일을 주신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해야 한다.

다른 데 신경 쓸 틈이 없다.

 

주부적 영성은 모든 초점을 ‘하느님’께 맞추고, 

나를 그쪽으로 정향시키게 한다.

 

우리는 번뇌를 가질 필요가 없다.

하는 데까지 하고 

안 되면 그분께 맡겨 드리면 되는 거다.

맡겨 드리면 그분께서 나한테 일 주신다.

 

그 일 하는 거다.

자유스럽게 평화스럽게 행복하게…. 기분 좋게, 웃으면서….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이해욱프란치스코62 17.12.03. 05:13


첫째, 
주부적 영성은 영성생활의 최고 형태이다.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탑이다. 

인간 노력에 의한 기술적, 전문적 접근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러한 노력들이 낮은 단계의 성취를 보장해 준다면
주부적 영성은 최고 단계의 성취에 이르게 한다. 

이 단계에서는 자동(automatic)으로 움직인다. 
하느님께서 자동으로 직접 인도해 주신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뛰어난 영성가라고 해도, 주부적 영성을 체험했다고 해도 
이러한 자동의 관계가 24시간 풀가동 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여기서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끊임없는 화살기도의 중요성★)
자신을 갈고 닦아서 은총의 터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 터 위에 엄청난 은총의 비를 내리신다.


둘째, 
주부적 영성은 
일체의 특수하고 개인적인 표현 형태들을 뛰어넘어서 궁극적인 단순함에 이르는 것이다.
‘궁극적인 단순함’. 이 말이 중요하다. 
 
<주부적(注賦的) 영성 
주부 (注賦) [주ː부] [명사] 부어 넣어 줌. 물댈注,구실賦 >


<영혼을 하느님 바로 아래에만 두>는 것, 그것이 바로 ★ 거룩한 내맡김 ★ 이다.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면,
하느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것을 다 즉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내영>을 ★ 주부적 영성 ★ 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바로 아래서 입만 크게 벌리고 있으면,
하느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것을 다 받아 마실 수 있습니다, 돈 없이 값없이!★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이사 55,1)


賦 : 펴다, 베풀다, 주다, 매기다, 부과하다 등의 뜻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저 반항의 집안처럼 반항하는 자가 되지 마라. 

그리고 입을 벌려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받아먹어라.” (에제 2, 8)]
 
 
 
 
 

< 13-43 (1921년 12월 22일)

은총은 순수한 사랑으로 활동하는 영혼들 속으로 흘러든다. 

1
언제나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눈부신 빛에 싸여 계신 모습을 보여 주셨는데,
이 빛이 빗물처럼 영혼들 위에 줄줄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굳게 닫힌 문처럼
그 빛줄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빛줄기는,
받아들이려고 열려 있는 영혼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쏟아져 내렸다.


2 "딸아,
내 은총은 순수한 사랑으로 활동하는 영혼들 속으로 흘러든다.

목표가 오직 나를 사랑하는 것에 있는 영혼들만이
모든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열린 마음이 된다. >

 
 
 
--------------------------------------------------------
 
 

< 注賦的(주부적) 靈性 >

 

 

주부적 차원의 영성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주부적 영성은 영성생활의 최고 형태이다.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탑이다.

 

인간 노력에 의한 기술적, 전문적 접근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러한 노력들이 낮은 단계의 성취를 보장해 준다면,

주부적 영성은 최고 단계의 성취에 이르게 한다.

 

이 단계에서는 자동(automatic)으로 움직인다.

하느님께서 자동으로 직접 인도해 주신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뛰어난 영성가라고 해도, 주부적 영성을 체험했다고 해도

이러한 자동의 관계가 24시간 풀가동 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여기서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을 갈고 닦아서 은총의 터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 터 위에 엄청난 은총의 비를 내리신다.

 

 

둘째, 주부적 영성은 일체의 특수하고 개인적인 표현 형태들을 뛰어넘어서

궁극적인 단순함에 이르는 것이다.

 

‘궁극적인 단순함’. 이 말이 중요하다.

성인 성녀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단순함’이다.

그 분들은 복잡하지 않았다.

 

하느님의 뜻을 복잡하게 따지면 갈등이 일어나고, 고민만 쌓인다.

따지지 않고 그냥 알아들으면 된다.

 

예비신자에서 성인으로 나아가는 단계는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나아가는 단계다.

 

똑똑하고 계산적이고, 분석적인 태도는 영성생활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이는 단순함에서 오는 행복, 단순함에서 오는 충만함을 만끽하는데 방해물이다.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긴 하지만,

보통 사회적 지위와 성취를 중요시하는 남성은

그 논리적인 태도 때문에 하느님과 가까워지기가 힘들다.

 

하지만 여성은 감성적이고, 모성애적 사랑의 토대를 가지고 있다.

베드로에게 “장애물” “사탄”이라고 말했던 예수는 여성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지극한 단순함의 경지를 이룬 분들이 바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소화 데레사, 프란치스코 등과 같은 분들이다.

 

이분들은 공부를 많이 한 분들이 아니다.

이런 분들은 하느님과 직통라인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초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부적 영성의 초점은 바로 하느님 자체다.

 

‘나’는 교육에 의해, 환경에 의해, 주관에 의해 수시로 변한다.

인간은 각자의 교육과 환경, 주관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다른 입장을 드러낼 수 있다.

초점이 흐리다.

 

변하지 않는 초점, 핵심은 하느님이다.

 

신비신학, 관상, 주부적 영성을 체험하게 되면 하느님이 초점이라는 걸 깨닫게 되고,

하느님에 의해 ‘변화되는 나’를 체험하게 된다.

초점만 확실하면 된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초점)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하느님을 알고 보면 ‘나를 위한 하느님’일 경우가 많다.

 

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다른 가족을 무너뜨리고,

내 성취를 위해 다른 이의 성취를 깎아내리고, 내 명예를 위해 다른 이의 명예를 더럽힌다.

 

그러면서 “나는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한다.

교회 내에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이 많다.

 

 

그렇다면 이렇게 타인에게 고통 주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방법’으로 해선 곤란하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냅둬(내버려 둬) 영성’이다.

 

하느님에게 초점이 맞춰진 사람은 ‘냅둬 영성’이 가능하다.

내가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 하시게 해야 한다.

 

나는 하는 데까지 하고 계속해서 겸손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뿐이다.

그래도 안 되는 사람들은 ‘냅둬야 한다’.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희생도 필요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고, 평화다.

 

나는 내 할 일이 많다.

왜 다른 사람한테만 신경 쓰고 시간 다 바치고 허비하는가.

내 할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할 일을 해야지 주부된 영성의 단순함에 들어간다.

다른 생각하며 복잡하게 살 필요 없다.

 

안타까운 사람에게는 해 줄 수 있는 데까지 좋은 방법과 기도와 희생을 바쳐주고,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기면 된다.

 

 

‘초점’ 하느님은 ‘나’에게 계속 다른 일을 주신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해야 한다.

다른 데 신경 쓸 틈이 없다.

 

주부적 영성은 모든 초점을 ‘하느님’께 맞추고, 나를 그쪽으로 정향시키게 한다.

 

우리는 번뇌를 가질 필요가 없다.

하는 데까지 하고 안 되면 그분께 맡겨 드리면 되는 거다.

맡겨 드리면 그분께서 나한테 일 주신다.

 

그 일 하는 거다.

자유스럽게 평화스럽게 행복하게…. 기분 좋게, 웃으면서….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moowee 13.09.26. 21:45

 

 

■ 注 : 물 댈 주, 흐를 주, 풀이할 주

 

물 수(水)에 주인 주(主)를 작지운 글자.

원래는 '물 줄기'를 뜻하였으나 나아가 물을 댄다는 뜻으로 사용됨.

 

■ 부(賦) : 구실 부, 부역, 펴다, 베풀다, 주다, 나누어 주다, 받다, 매기다, 부과하다 <비법한자>

 

■ 주부(注賦) : 부어 넣어 줌 <동아 새국어사전>

 

 

■ 주부적 영성 :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물을 대 주 듯이 당신의 은총을 쏟아 부어 넣어주시는 영성.

 

그런데, 인간이라는 그릇이 텅 비어 있어야 한다.

그릇을 비우려면 내 안의 모든 것을 주인이신 하느님께 다 맡겨 드려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이다.(거룩한 내맡김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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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注賦的(주부적) 靈性 >

 

 

주부적 차원의 영성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 주부적 영성은 영성생활의 최고 형태이다.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탑이다.

 

인간 노력에 의한 기술적, 전문적 접근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러한 노력들이 낮은 단계의 성취를 보장해 준다면,

주부적 영성은 최고 단계의 성취에 이르게 한다.

 

이 단계에서는 자동(automatic)으로 움직인다.

하느님께서 자동으로 직접 인도해 주신다.

 

런데 문제는 아무리 뛰어난 영성가라고 해도, 주부적 영성을 체험했다고 해도

이러한 자동의 관계가 24시간 풀가동 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여기서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을 갈고 닦아서 은총의 터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 터 위에 엄청난 은총의 비를 내리신다.


둘째, 주부적 영성은 일체의 특수하고 개인적인 표현 형태들을 뛰어넘어서

궁극적인 단순함에 이르는 것이다.

 

‘궁극적인 단순함’. 이 말이 중요하다.

성인 성녀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단순함’이다.

그 분들은 복잡하지 않았다.

 

하느님의 뜻을 복잡하게 따지면 갈등이 일어나고, 고민만 쌓인다.

따지지 않고 그냥 알아들으면 된다.

 

예비신자에서 성인으로 나아가는 단계는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나아가는 단계다.

 

똑똑하고 계산적이고, 분석적인 태도는 영성생활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이는 단순함에서 오는 행복, 단순함에서 오는 충만함을 만끽하는데 방해물이다.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긴 하지만,

보통 사회적 지위와 성취를 중요시하는 남성은

그 논리적인 태도 때문에 하느님과 가까워지기가 힘들다.

 

하지만 여성은 감성적이고, 모성애적 사랑의 토대를 가지고 있다.

베드로에게 “장애물” “사탄”이라고 말했던 예수는 여성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지극한 단순함의 경지를 이룬 분들이 바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소화 데레사, 프란치스코 등과 같은 분들이다.

 

이분들은 공부를 많이 한 분들이 아니다.

이런 분들은 하느님과 직통라인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초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부적 영성의 초점은 바로 하느님 자체다.

 

‘나’는 교육에 의해, 환경에 의해, 주관에 의해 수시로 변한다.

인간은 각자의 교육과 환경, 주관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다른 입장을 드러낼 수 있다.

초점이 흐리다.

 

변하지 않는 초점, 핵심은 하느님이다.

신비신학, 관상, 주부적 영성을 체험하게 되면 하느님이 초점이라는 걸 깨닫게 되고,

하느님에 의해 ‘변화되는 나’를 체험하게 된다.

초점만 확실하면 된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초점)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하느님을 알고 보면 나를 위한 하느님’일 경우가 많다.

 

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다른 가족을 무너뜨리고,

내 성취를 위해 다른 이의 성취를 깎아내리고, 내 명예를 위해 다른 이의 명예를 더럽힌다.

 

그러면서 “나는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한다.

교회 내에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이 많다.

 

 

그렇다면 이렇게 타인에게 고통 주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방법’으로 해선 곤란하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냅둬(내버려 둬) 영성’이다.

 

하느님에게 초점이 맞춰진 사람은 ‘냅둬 영성’이 가능하다.

내가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 하시게 해야 한다.

나는 하는 데까지 하고 계속해서 겸손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뿐이다.

그래도 안 되는 사람들은 ‘냅둬야 한다’.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희생도 필요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고, 평화다.

 

나는 내 할 일이 많다.

왜 다른 사람한테만 신경 쓰고 시간 다 바치고 허비하는가.

내 할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할 일을 해야지 주부된 영성의 단순함에 들어간다.

다른 생각하며 복잡하게 살 필요 없다.

 

안타까운 사람에게는 해 줄 수 있는 데까지 좋은 방법과 기도와 희생을 바쳐주고,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기면 된다.

 

 

‘초점’ 하느님은 ‘나’에게 계속 다른 일을 주신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해야 한다.

다른 데 신경 쓸 틈이 없다.

 

주부적 영성은 모든 초점을 ‘하느님’께 맞추고, 나를 그쪽으로 정향시키게 한다.

우리는 번뇌를 가질 필요가 없다.

하는 데까지 하고 안 되면 그분께 맡겨 드리면 되는 거다.

맡겨 드리면 그분께서 나한테 일 주신다.

 

그 일 하는 거다.

자유스럽게 평화스럽게 행복하게…. 기분 좋게, 웃으면서….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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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거내영은 특수한 영성입니다| ▣ 보조교사방
 

이해욱프란치스코62|등급변경▼|조회 376|추천 0|2017.04.21. 09:33

 
 

<13> 영성이란 무엇인가?| ★영 성

 

moowee 조회 195 / 2013.08.31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10) 영성이란 무엇인가 (10)

 

 

‘변화’ 체험하려면 하느님께로 초점 맞춰야
주부적 영성은 영성생활의 최고 형태
단순하게 하느님의 이끄심에 응답을
 


발행일 : 2011-08-21 [제2759호, 10면]

 

 

 

주부적 차원의 영성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

주부적 영성은 영성생활의 최고 형태이다.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탑이다.

 

인간 노력에 의한 기술적, 전문적 접근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러한 노력들이 낮은 단계의 성취를 보장해 준다면,

주부적 영성은 최고 단계의 성취에 이르게 한다.

 

이 단계에서는 자동(automatic)으로 움직인다.

하느님께서 자동으로 직접 인도해 주신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뛰어난 영성가라고 해도, 주부적 영성을 체험했다고 해도

이러한 자동의 관계가 24시간 풀가동 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여기서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끊임없는 화살기도의 중요성)

자신을 갈고 닦아서 은총의 터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 터 위에 엄청난 은총의 비를 내리신다.

 

 

둘째,

주부적 영성은

일체의 특수하고 개인적인 표현 형태들을 뛰어넘어서 궁극적인 단순함에 이르는 것이다.

 ‘궁극적인 단순함’. 이 말이 중요하다.

 

성인 성녀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단순함’이다.

그 분들은 복잡하지 않았다.

 

하느님의 뜻을 복잡하게 따지면 갈등이 일어나고, 고민만 쌓인다.

따지지 않고 그냥 알아들으면 된다.

 

예비신자에서 성인으로 나아가는 단계는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나아가는 단계다.

 

똑똑하고 계산적이고, 분석적인 태도는 영성생활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이는 단순함에서 오는 행복, 단순함에서 오는 충만함을 만끽하는데 방해물이다.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긴 하지만,

보통 사회적 지위와 성취를 중요시하는 남성은

그 논리적인 태도 때문에 하느님과 가까워지기가 힘들다.

하지만 여성은 감성적이고, 모성애적 사랑의 토대를 가지고 있다.

 

베드로에게 “장애물” “사탄”이라고 말했던 예수는 여성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지극한 단순함의 경지를 이룬 분들이 바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소화 데레사, 프란치스코 등과 같은 분들이다.

이분들은 공부를 많이 한 분들이 아니다.

이런 분들은 하느님과 직통라인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초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부적 영성의 초점은 바로 하느님 자체다.

 

‘나’는 교육에 의해, 환경에 의해, 주관에 의해 수시로 변한다.

인간은 각자의 교육과 환경, 주관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다른 입장을 드러낼 수 있다.

초점이 흐리다.

 

변하지 않는 초점, 핵심은 하느님이다.

 

 

신비신학, 관상, 주부적 영성을 체험하게 되면 하느님이 초점이라는 걸 깨닫게 되고,

하느님에 의해 ‘변화되는 나’를 체험하게 된다. 초점만 확실하면 된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초점)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하느님을 알고 보면 ‘나를 위한 하느님’일 경우가 많다.

 

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다른 가족을 무너뜨리고,

내 성취를 위해 다른 이의 성취를 깎아내리고, 내 명예를 위해 다른 이의 명예를 더럽힌다.

그러면서 “나는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한다.

 

교회 내에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이 많다.

그렇다면 이렇게 타인에게 고통 주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방법’으로 해선 곤란하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냅둬(내버려 둬) 영성’ 이다.

 

하느님에게 초점이 맞춰진 사람은 ‘냅둬 영성’이 가능하다.

내가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 하시게 해야 한다.

 

 

나는 하는 데까지 하고 계속해서 겸손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뿐이다.

그래도 안 되는 사람들은 ‘냅둬야 한다’.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희생도 필요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고, 평화다.

나는 내 할 일이 많다.

 

왜 다른 사람한테만 신경 쓰고 시간 다 바치고 허비하는가.

내 할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할 일을 해야지 주부된 영성의 단순함에 들어간다.

다른 생각하며 복잡하게 살 필요 없다.

 

안타까운 사람에게는 해 줄 수 있는 데까지 좋은 방법과 기도와 희생을 바쳐주고,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기면 된다.

 

‘초점’ 하느님은 ‘나’에게 계속 다른 일을 주신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해야 한다.

다른 데 신경 쓸 틈이 없다.

 

주부적 영성은 모든 초점을 ‘하느님’께 맞추고, 나를 그쪽으로 정향시키게 한다.

 

우리는 번뇌를 가질 필요가 없다.

하는 데까지 하고 안 되면 그분께 맡겨 드리면 되는 거다.

맡겨 드리면 그분께서 나한테 일 주신다. 그 일 하는 거다.

 

자유스럽게 평화스럽게 행복하게…. 기분 좋게, 웃으면서….

 


 

정영식 신부 (효명고등학교 교장)

 
 

 

< 천 13-43 (1921년 12월 22일)
은총은 순수한 사랑으로 활동하는 영혼들 속으로 흘러든다.

1
언제나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눈부신 빛에 싸여 계신 모습을 보여 주셨는데,
★이 빛이 빗물처럼 영혼들 위에 줄줄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굳게 닫힌 문처럼
그 빛줄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빛줄기는,
받아들이려고 열려 있는 영혼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쏟아져 내렸다.★


2 "딸아,
내 은총은 순수한 사랑으로 활동하는 영혼들 속으로 흘러든다.

♥목표가 오직 나를 사랑하는 것에 있는 영혼들♥만이
모든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열린 마음이 된다. >

 
 
 

<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뜻대로 살지 않는다.
사랑을 위해 자기 뜻을 기꺼이 희생할 줄 안다.
서로 진실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인 것이다.

★‘거룩한 내맡김 영성이 왜 탁월한 영성인가?’에 대한 답은
‘사랑’에 있다.★

하느님과 일치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사랑’뿐이다.
다른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내게 가르쳐 주면 정말로 감사하겠다.
사랑만이 답이다. 정답이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똑똑하고 지혜롭고 유능하고 특별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단순하고 평범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더 유리하다.
♥하느님을 ‘선택’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기면,
당신의 뜻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살아 주신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삶이 기도가 되고, 기도가 삶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다. > 창 화살 제2부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