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성모신심
최경선 박사
서론
I. 성모 공경의 역사
II. 성모 마리아에 관한 교의
III. 성모에 관계된 대표적 기도와 성월
IV. 잘못된 성모 공경
V. 올바른 성모 공경
결론
서론
성모 마리아상이다.
성모 공경은 가톨릭의 귀중한 전통이자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공경과 신심이 지나쳐서
한때 가톨릭교회는 ‘마리아교’라고 불리거나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다.
사실 일부 신자들이 지나치게 마리아를 찾거나 극단적인 입장에 서기도 했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성모 공경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특히 교회 내외적으로 마리아를 본받아
진정한 봉사를 하는 레지오마리애 단원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에, 기본적으로 꼭 알아야 할 교회의 가르침을 알아야겠다.
더불어 성모에 관계된 대표적 기도나 성월의 의미를 되새기고,
잘못된 성모 공경의 예를 들어
어떤 것이 올바른 성모 공경인지를 설명해 나갈 것이다.
I. 성모 공경의 역사
가톨릭교회의 성모 공경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역사는 그리스도교 제자 공동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제자 요한 사이에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맺어주신 사건을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7)는 표현을 통해 전한다.
사도행전 1장 14절의 “그들(사도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라는
문장을 통해서도 마리아가 사도들과 함께 지내시며 공경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로마 교회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활동 무대였던 카타콤바에는
200년경에 그려진 성모 마리아의 그림들이 남아있는데,
이를 통해 그들이 성모를 공경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성모 공경은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은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셨으며 함께 기도생활을 하였다(요한 19,27; 사도 1,14 참조).
1. 우리나라 가톨릭교회의 성모 공경
- 1기: 서학 연구와 교회 창설시기(1777-1835)
우리나라 가톨릭교회 역시 그 시작부터 성모님에 대한 강한 신심을 보였다.
특히 1811년 조선 교회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성모님의 전구를 통해서 조선 교회가 재건될 수 있기를 간청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11년 권기인 등 8명의 평신도 지도자들은 조선 교회의 재건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로마 교황청에 주교의 파견을 요청함으로써 교구 설정을 위한 노력을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북경 주교는 교황에게 조선 신자들의 청원을 상소했다.
이 청원서는 1827년에 로마 포교성성에 접수되었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1년 9월 9일 조선을 독립 대목구로 설정하고
초대 대목구장에 브뤼기에르(B. Bruguiere) 주교를 임명하였다.
그러나 조선 입국을 서둘렀던 그는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 하였다.
이 당시 신자들은 조선 교회가 성모를 그 주보로 모시기 전인데도
이미 생활 속이나 어려움 중에 자신들을 도와주는 존재이자 본받을 모범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기에 순교의 순간에도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허다하였다.
이에는 윤지충․권상연(+1801)을 비롯하여 수많은 순교자들의 예가 있다.
원야고보(+1799)는 잡혀가면서 그의 가족들에게
“우리는 기쁨 가운데에 천주와 착하신 동정 마리아 곁에서 서로 만나게 되네”라는 말을 했고,
같은 시대의 이종국이라는 사람도
“나는 천주의 무한하신 자비와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이제 천당 복을 누리러 가오”라는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광옥 안드레아는 사형선고에 서명을 하라고 하자 ‘기쁨으로 얼굴을 빛내며’
자기의 행복을 천주와 동정 마리아께 감사 드렸다고 한다.
그는 또 형장으로 운반되어 갈 때에 큰 소리로 묵주 신공을 했다.
신자들은 일상생활에서 주의 기도와 성모송을 수없이 바치는 동안
어디서나 자연스럽게 습관적으로 ‘예수 마리아’를 불렀다.
예수․마리아를부르는 자체가 기도였던 것이다.
감옥에 있을 때
“성모님이 나를 십자가 위에 두셨으니 내가 그것을 먹으면 부당하오”라고 하며
아내가 가져온 음식을 거절했던 이도기 바오로는
“성모 마리아여,네게 하례 하나이다”라고 말하며 쓰러졌다고 한다.
윤점혜는 죽은 어머니가 성모 곁에서 시중을 드는 꿈을 꾸고,
묵상 중에 성모를 보는 일도 있었다.
선교사들이 숨어서 전교를 하던 당시, 공소가 열리기로 된 집에는
어김없이 방에 십자가와 동정성모의 상본이 있을 정도로
신자들이 항상 마음 안에 동정 성모에 대한 신심을 지니고 살았던 것이다.
- 2기: 박해시기(1836-1866)
1836년에는 성모님을 특별히 공경하고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기 위해서
묵주기도를 바치는 ‘매괴회’(玫瑰‘붉은 옥구슬’會)가 설립되었으며,
교우들이 자신들을 성모님의 종으로 바치고 특별한 보호를 구하고자 하는
‘성의회’(聖衣會)도 이 무렵에 설립되었다.
목자 없는 시기를 지나
1836년 초에 최초로 입국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모방(P. Maubant) 신부는
3명의 신학생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을 준비하기 위해
이미 들어와 있던 중국인 유방제 신부)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시켰고,
뒤이어 같은 회 소속 샤스탕(J. Chastan) 신부가 그 해 12월 입국하였다.
제 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L. Imbert) 주교의 입국 후
조선 대목구는 주교와 사제들을 모시고 기쁨에 젖어 선교를 시작하였으나,
1839년 기해박해․1846년 병오박해․1866년 병인박해를 겪어야 했다.
이 박해는 1882년 한미 조약과 1886년의 한불조약이 체결되면서 서서히 약화되었다.
* 앵베르 주교:
1837년 12월에 조선에 입국한 앵베르 주교는
조선 대목구의 주보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로 정하여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1841년 8월 22일자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그의 청을 허락하였다.
이때는 아직
성모의 무염 시태에 관한 교리가 교회의 공식 신앙 교리로 선포되지 않았을 때였다
(1854년에 선포됨).
* 성모 성심회:
1845년 10월 12일 제 3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페레올(J. Ferreol) 주교는
같은 해 8월 17일 金家巷에서
자신이 사제로 서품한 김대건 신부와 다블뤼(A. Daveluy) 신부를 동행하고
강경 黃山浦에 도착했다.
다블뤼 신부는 김대건 신부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그가 자신에게 보여준 성모 신심에 감화를 받아 한국에 성모신심 단체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프랑스 파리의
‘승리의 성모 성당(N.D. des Victories) 주임 데쥬네트(Desgenettes) 신부가
1836년에 12월 6일에 창설한 ‘성모 성심회’를 한국에 도입하였다.
달레는 1846년 11월 2일에 이 단체가 공주의 ‘수리치골’에 처음으로 세워졌다고
그의 교회사에 기록하였다.
* 사목구에 성모 축일 명칭 부여:
1861년 험난한 해로를 통해 조선에 입국하여 서울에 도착한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랑드르(J.M. Landre) 신부가 기록한 서간에는
제 4대 교구장 베르뇌(S.F. Berneux) 주교가 선교사들에게 사목구를 정해 주면서
구역 명을 성모 축일의 이름으로 명명했다고 전한다.
* <텬쥬셩교공과> 목판본 간행:
이 책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개정된 <가톨릭 기도서>가 출간된
1972년 10월 30일까지 100여 년 동안 한국 교회의 공식 기도서로
신자들의 신앙과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이 기도서를 앵베르 주교가 목판본으로 간행하게 하였다.
이 기도서에 성모 축일과 성모 기도문들이 들어있다.
**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제였던 김대건(1821-1846)과 최양업(1821-1861) 신부 역시
강한 성모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김대건 신부는 변문에서 조선의 밀사들을 기다리며 ‘묵주신공’을 드렸고,
배를 구하여 페레올 주교를 모시러 갈 때 심한 폭풍우가 일자
‘천주 다음으로 유일한 희망이신 동정 성모’의 상본을 보이며
교우들을 안심시켰던 적이 있다.
최양업 신부는 신학생 때부터
마리아 공경을 위한 신심 단체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실천했으며,
숨을 거둘 때에도 예수 마리아를 불렀다고 한다.
- 3기: 국난의 시기(1867-1950)
이 시기에는 병인박해 후 한미 통상조약(1882)과 한불수호조약(1886)으로
종교 탄압이 진정 기미를 보이는 듯 했으나,
일본의 대륙 거점 확보를 위한 침략으로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 통치에서 해방되었으나
북위 38도선을 기점으로 한 신탁 통치와 정부 수립 그로 인한 분단 상황이 시작되었다.
1950년 6․25 한국 전쟁과 정권은 성직자․수도자․신자들을 투옥하고 처형하였다.
1942년에는 서울 교구장직을 한국인 노기남 주교가 맡음으로써
처음으로 한국인 교구장 주교가 탄생하였다.
이 시기의 성모 신심은 성모 신심서,
단체 활동(성모성심회, 매괴회, 성의회, 성가회), 성가집 등을 통하여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1883년에 교황 레오 13세는 10월을 ‘로사리오 성월’로 선포했는데,
한국에서는 1914년에 로사리오 성월을 위한 책이
<매괴 성월>이란 표제로 홍콩에서 한글로 간행되었다.
- 4기: 성장과 변화의 시기(1951-현재)
교황 비오 12세는 1950년 정기 성년을 성대하게 거행한 지 3년 후에
회칙 <빛나는 면류관>(Fulgens Corona, 1953년 9월 8일)을 발표하면서
1953년 12월 8일부터 1954년 12월 8일까지
교회 역사상 최초의 제 1차 마리아의 해, 일명 성모성년을 선포하였다.
이 성년은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가 선포한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 발표 100주년을 기념하는 성년이었는데,
“형언할 수 없으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이시며
"지극히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기 위함이었다.
분단 상황에서 원죄 없으신 성모를 주보로 모신 한국 교회에는
역사적이고 전국적인 해였다.
그래서 한국 주교 회의에서는 성모 호칭 기도 안에
‘원죄 없이 모태에 배이신 모후여’와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모후여’를 삽입하여
성모를 공경하도록 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1962년 3월 24일 서울․대구․광주의 대목구를 대주교구로 승격하고
동 교구장들을 대주교로 승품하였으며,
같은 해 6월 29일을 교계 제도 설정 선포일로 삼았다.
그리고 10월 11일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교회의 현대화(Aggiornamento)를 부르짖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와 더불어
한국 교회는 당시까지의 전례와 신심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 전쟁 중에 바친 무수한 묵주기도와 성모께 의지한 신심.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제 2차 마리아의 해(성모 성년) 선포:
1987년 6월 7일 성령 강림 대축일부터1988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까지
14개월간의 성년이었다.
- 작년 10월 16일에는 그의 교황직 25번째 임기를 시작하면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교서를 반포. 이때 ‘로사리오의 해’(2002년 10월-2003년 10월) 선포.
- 한국전쟁 이후 한국에 도입 마리아 신심 단체
. 레지오 마리애(Legio Mariae, 성모군단): 1953년 5월
. 푸른 군단(Blue Army): 1953년
. 마리아 사제 운동(The Marian Movement of Priests): 1976년
. 성모 기사회(Militia Immaculatae): 1975년 3월
II. 성모 마리아에 관한 교의
1.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라는 것은
그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신성 때문이라는 사실이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DS 111).
그런 이유로 교부들은 거룩한 동정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라는 것은
마리아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낳으셨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무엇보다 신앙의 여인이시다.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탄생 예고’(루가 1,26-38)에서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는 마리아의 신앙 고백을
황금자료로 간주한다.
교부들은 이 신앙의 응답으로 말미암아 하와의 불순종이 극복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마리아를 ‘새 하와’로 일컬었다.
이 신앙의 응답은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뜻에 기꺼이 열정적으로 응답해야 하는 피조물 인간의 전형적 모범이 되게 한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믿고 따르셨던 첫 번째 사람이다.
이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잘 드러난다.
가나에서의 기적은 전적으로 마리아의 믿음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잔치에 있었던 제자들은 오히려 그 기적을 보고서야 비로소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신학자들은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라고 지시하신 성모님의 말씀을
시나이 산의 계약에서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우리가 실천하겠습니다.”(탈출 19,8; 24,3.7)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응답과 비교하면서,
성모 마리아를 기적의 협력자 이상으로
세상 종말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고백해야 할 신앙을 앞서 고백하는 역할에 비유하기도 한다.
성경은 엘리사벳 성녀가 한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가 1,45)이라는 말을 통해
마리아의 믿음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성모 마리아께서 단지 자신을 육체적으로 낳으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머니이심을 명확히 선언하셨다.
(마태 12,48-50: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낳으셨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셨던 믿음으로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다.
이런 점에서 ‘하느님의 어머니 되심’은 모든 믿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걸어가야 할 여정의 모범임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마리아를 어머니로 부르며 그분께 기도드린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간구해 주실 것을 마리아께 부탁하는 것이다.
2.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
마리아께 ‘동정녀’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은 이미 복음서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사야 예언을 전하면서
마리아께서 명확하게 ‘동정녀’(ΠαρΘένοϛ)이심을 밝히고 있다(마태1,23 참조).
그리스도인이 믿어야 할 신앙 내용을 요약한 신경은
성모 마리아께 ‘동정녀’라는 칭호를 빠뜨리지 않고 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동정으로 아이를 잉태한다는 것은 인간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였다.
따라서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라는 이사야의 예언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가 1,37)는 하느님의 위업을 드러내는 징표였다.
동정 잉태는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던 만큼
마리아 자신에게도(루가 1,26-38 참조), 그의 약혼자 요셉에게도(마태 1,18-25 참조)
천사를 통하여 계시하셔야 했다.
성모 마리아의 동정에 관하여 오랫동안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자연 과학적 입장, 종교학적 입장, 그리고 성경의 해석학적 입장에서
이의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동정 잉태는 자연적 현상을 초월한다.
결국 마리아의 동정은 하느님의 전능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신비이며,
하느님이신 말씀이 인간이 되신 강생의 신비의 표징이다.
‘동정’이 지시하는 더욱 중요한 의미는
한 인간이 온전히 자신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느님께만 전적으로 봉헌한 사실이다.
이처럼 마리아의 동정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된 순결한 인간의 신비를 드러낸다.
3.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1854년 12월 8일 비오 9세 교황은
회칙 「형언할 수 없으신 하느님」(Ineffabilis Deus)을 통하여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를 선포하셨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서는 잉태되신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
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보존되셨다”(DS 2803).
물론 성경은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 신앙 교의의 출발점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육(肉)을 취하시고,
하느님의 성령께서 거주하시는 그 태중은 무죄하고 흠 없이 깨끗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는 마리아의 원죄의 면제가
그리스도의 구원의 보편적 중개 능력을 삭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분명 마리아의 무죄성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신에서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결코 한 순간도 원죄에 지배받지 않게 하실 수 있었고,
그렇게 원하셨으며, 또 그렇게 하셨다(potuit, voluit, fecit)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과 더불어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점차 ‘마리아 신심 시대’라고 할 만큼
마리아 공경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교황 비오 9세로 하여금 회칙을 통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를 교의로 선포하는 데에도
이런 대중적 신심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과 신학적 사유는
마리아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이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 타당하고 설득력 있다.
첫째,하느님의 전능성과 은총의 무한함, 둘째, 하느님 선택의 정당성,
셋째, 예수 그리스도 강생의 적합성, 넷째, 예수 그리스도 구원 중개 능력의위대성,
다섯째, 하느님 은총을 보존한 성실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영광,
여섯째, 은총을 받는 인간, 구원받는 인간의 미래 모습의 선취적(先取的) 성취이다.
이 교의는 마리아께서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재확인하는 한 가지 표현이고,
우리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기인하며,
인간의 죄와 탓은 하느님 구원에 결코 영향을 줄 수 없음을 가르친다.
4.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마리아
비오 12세 교황은 1950년 11월 1일 모든 성인 축일에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을 통하여
성모 승천을 교의로 선포하였다.
“원죄 없으신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께서는
지상생애의 여정이 끝난 다음
그 영혼과 육신이 천상의 영광 안에 받아들여지셨다.”(MD 44, DS 3903)
사실 성경에서 그 내용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다가 에피파니오를 비롯한 여러 교부들이 이에 대한 언급을 했으며,
6세기 전례에서는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의 어머니 기념일’,
‘마리아의 잠드심’, ‘마리아의 하늘에 오르심’ 축일이 거행되었다.
이후 많은 신학자들도 성모 승천에 관한 전승을 이어받았다.
마리아의 무죄성에 근거한 육체의 승천,
예구 그리스도께 육(肉)을 주신 어머니로서 예수님의 육체와 유사성에 근거한 승천,
우리를 위한 천상에서의 중재를 위하여 하늘에 계셔야 하는 이유,
또는 예수님의 승천과 장래에 있을 우리의 승천 중간 단계로서의 필요성 때문에
마리아의 승천을 수용하였다.
이러한 성모 승천에 관하여 호의적인 신학적 분위기와 마리아 신심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교의 선포에 힘입어
‘성모 승천’ 교의를 선포하도록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성모 승천은 예수님 승천과 라틴 말 용어상 구별된다.
우리나라는 과거 성모 승천을 ‘몽소승천’(夢꿈몽召부를소昇오를승天)으로 표현하였다.
교회는 예수님의 승천을 능동적(Ascensio, 올라감)으로 표현하고,
마리아의 승천은 수동적(Assumptio, 올림을 받음)으로 표현하고 있다.
곧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하늘에 불러올리셨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승천은 마리아께서 구세사의 목표, 곧 구원에 이르게 되셨다는 것이다.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맡기신 성모 마리아께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에 참여하셨음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잉태되시는 순간부터 마지막에 이르시기까지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으신 분이심을 드러낸다.
그러나 성모 승천 교의는 마리아를 위해서만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다.
성모 마리아의 근원적인 구원은
모든 사람의 구원과 그 충만함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리스도인들이 ‘신경’을 통하여 고백하는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이라는 희망이
마리아에게서 구체적으로 드러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III. 성모에 관계된 대표적 기도와 성월
1. 성모송
성모송은 주님의 기도와 함께 가톨릭 신자들이 많이 드리는 기도이다.
성모송의 전반부는 복음이 전하는 천사의 인사(루가 1,28: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와
엘리사벳의 인사말
(루가 1,42: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두 가지 인사말이 합쳐진 것은 6세기경이다.
그리고 13세기에 이르러 루가 복음의 ‘주님의 어머니’(1,43)라는 표현과 함께
성모송에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라는 문구가 합쳐졌다.
2. 삼종기도
삼종기도는 하루 세 번, 아침, 점심, 저녁에 드리는 기도로서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께 드린 인사(루가 1,28)를 기억하면서
강생의 신비를 묵상하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중세 시대 이후 그리스도인들에게 생활과 가장 밀접한 기도로 자리 잡았다.
하루 세 번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는 신자들의 하루 생활 리듬을 이끌어주었다.
13세기 피사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은 신자들이
성모송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하루 세 번 종을 울렸다.
이러한 영향이 유럽 여러 지역에 미쳤다.
1318년 요한 22세 교황은
저녁 종이 울릴 때 세 번의 성모송을 외우는 신자들에게 은사를 베풀었다.
15세기에는 아침에 세 번 성모송을 하도록 종을 울렸고,
16-17세기에는 한낮에도 바치도록 하였다.
1724년 베네딕트 13세 교황은 은사를 베풀면서
종이 울리면 무릎을 꿇고 삼종기도를 바칠 것을 권고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비오 12세 교황은,
모든 신자들이 삼종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성당의종을 하루에 세 번 타종하게 하였던 갈리스토 3세 교황의 회칙(1456년)을 상기시키며,
삼종기도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친히 로마 성지 순례자들과 함께 한낮에 삼종기도를 바쳤다.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교황은 로마를 찾는 순례자들을 위해
매주 수요일 바티칸 광장에서 삼종기도를 함께 바치고 교황 강복을 베풀고 있다.
3. 묵주기도
묵주기도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기도이며,
실제로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많이 바치는 기도이다.
이 기도의 형태가 50번 또는 150번의 성모송으로 구성된 것은 시편 150편에서 유래하며
아일랜드 수도원에서 시작되었다.
묵주기도는 반복하는 특성을 지닌 기도이며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도록 이끄는 기도이다. 요한 23세 교황은 묵주기도야말로
신자들에게 영적 양식을 제공하고 삶의 중요한 기본 요소를 강화시켜 주며,
신자들의 기도와 생각에 방향을 제시해준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바오로 6세 교황은
교황 권고 「마리아 공경」(1974년)에서 묵주기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1) 성경에 바탕에 둔 기도이다.
2) 구원 역사 안에서 하는 기도이다.
3)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기도이다.
4) 묵상의 성격을 띠는 기도이다.
5) 전례와 연관성이 있는 기도이다.
이와 유사하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2002년)를 통하여
묵주기도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기도이며, ‘복음의 요약’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아울러 묵주기도가 완전한 복음의 요약이 되기 위하여
‘빛의 신비’를 추가할 것을 제안하였다(19.21항 참조).
교황의 이러한 제안에 따라 한국 주교회의는
2002년 12월 ‘빛의 신비’ 다섯 가지 기도문을 다음과 같이 확정하였다.
1)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2) 예수님께서 가나에서 첫 기적을 행하심을 묵상합시다.
3)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선포하심을 묵상합시다.
4)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심을 묵상합시다.
5)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심을 묵상합시다.
4. 성모 호칭기도
이 기도의 기원과 발전에 관하여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성인 호칭 기도에서 발전한 것으로 추측된다.
7-8세기부터 있었던 성인 호칭 기도에 성모님의 호칭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12세기경부터 성모님의 호칭들이 독자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성모 호칭기도는 성모님께 드리는 찬미를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기도는 발생지역에 따라
베네치아 성모 호칭기도’,
이탈리아의 성지 로레토(Loreto)의 이름을 딴 ‘라우레타노 성모 호칭기도’(Litaniae Lauretanae),
또는 탄원의 성격이 강한 ‘탄원 성모 호칭기도’ 등이 있다.
성모 호칭기도에 들어있는 다양한 칭호들 가운데 가장 최근에 새로 삽입된 것은
‘교회의 어머니’라는 칭호이다.
이 칭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마리아를 교회론과 연관하여 숙고한 결과
바오로 6세 교황이 결정한 것이다.
성모님의 다양한 칭호들은
순례의 길에서 갖가지 상황에 처해 있는 신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칭호들로서
매 순간 부르며 다가갈 수 있는 어머니의 이름이다.
오늘날 레지오 단원들은
자신들의 쁘레시디움이나 꾸리아, 꼬미시움, 레지아, 또는 세나뚜스의 명칭으로
성모 호칭기도에 나타나는 성모님의 호칭을 선택하고 있다.
5. 마리아의 노래(성모의 노래)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성무일도 저녁기도에서
항상 ‘마리아의 노래’(루가 1,46-55, Magnificat)를 바친다.
레지오 단원들은 ‘까떼나’에서 이 노래로 기도한다.
이 노래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미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언해 주는 자료이다.
이 노래는마리아에게 이루신 하느님의 업적에 대한 찬양과,
인간 역사 안에 행하신 하느님의 업적 찬양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노래는 ‘주님의 가난한 자들’(anawim)을 돌보시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다.
여기서 구원은 상황의 반전(反轉)으로 묘사된다.
교만한 자, 권세 있는 자들이 내쳐지고, 보잘것없는 자가 높여지며,
배고픈 사람은 배부르게 되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아가게 된다.
곧 하느님께서는 뒤집으시고, 들어 높이시고, 모아들이시며,
다시 보내시는 활동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분으로 찬양받으신다.
또한 구원 역사 안에서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특히 마리아 자신에게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구원 업적이 찬양되고 있다.
'주님의 종’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끊임없이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온전히 성실하게 실현되고 있음이
‘주님의 여종’ 마리아를 통하여 다시 확인되는 노래이다.
6. 성모 성월
로마 가톨릭교회가 성모 성월을 지내기 시작한 것은 중세 때부터였다.
성모 성월을 5월로 정한 것은 로마와 게르만 민족의 세속적인 봄의 축제가
그리스도교화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5월이 주는 자연의 신선한 풍요로움을 영적으로 마리아와 연결시키면서 발전한 것이다.
좋은 날씨와 풍년을 기원하면서
사용하던 푸른 잎은 성모님과 연관되면서 장미꽃으로 소재를 바꾸게 되었다.
성모 성월에 신자들은 촛불을 들고 공원 같은 곳에서 행렬하면서
성모님께 다양한 기도와 찬미를 드린다.
우리나라 역시 교회 초창기부터 성모 성월 신심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성모 성월의 절정은 성모의 밤 행사이다.
이 행사에서 성모 신심에 관한 강론과 성가, 묵상,
그리고 성모님을 찬미하는 시와 노래,기도와 꽃다발 등이 봉헌된다.
성모 성월 신심이 지향하는 바는,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겨
신앙과 사랑의 모범이 되신 마리아의 중재로 구원의 은총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참된 성모 공경이란 촛불이나 꽃다발 봉헌이라는 외적 행위보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순종,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하느님 계명에 대한 성실한 준수, 겸손, 고통을 묵묵히 감수하는 인내,
성실하고 항구한 기도의 자세 등 마리아의 삶을 본받는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리아 공경은 결코 하느님 흠숭(欽崇:높이 공경함)을 방해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 흠숭을 위해 도움이 된다.
이처럼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선행과 기도로써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데 성모 성월의 참뜻이 있다.
7. 묵주기도 성월
10월은 묵주기도 성월이고 10월 7일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이다.
이 축일은1572년 비오 5세 교황이 선포하였다.
이는 1571년 10월 7일에 있었던 터키와 치른 전쟁(레판토 해전)에서
성모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것을 기념하여
15주 동안 매주 토요일마다 묵주기도를 드리던 것을
한 달 동안 매일 바친 데에서 유래한다.
비오 5세 교황은 1569년 묵주기도의 기도문과 형식을 표준화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묵주기도의 교황’으로 불리는 레오 13세 교황은
1883년 9월에 회칙 「최상의 사도적 직무」에서,
묵주기도 성월에 성당에서 공동으로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권고하였다.
바오로 6세 교황 역시 교황 권고 「마리아 공경」을 통하여
묵주기도야말로 성무일도 다음으로
신자가정의 ‘공동 기도’로 가장 효과적이고 훌륭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적극 권장하였다(54항 참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002년 묵주기도 성월에 성년을 선포하고
이때 반포한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에서
지난날 실천해 오던 ‘15주간 토요 묵주기도’를 상기시키며(8항),
묵주기도는 평화를 위한 기도임을 강조하였다(6항).
또한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묵주기도는
구원에 도움이 되는 관상 기도임을 밝혔다(13항).
IV. 잘못된 성모 공경
1. 교부시대
일찍이 교수시대에도
한편으로 성모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을 부인하는 ‘성모 공경 반대자들’이 있었으며,
그와 반대로 성모 마리아를 여신으로 모시는 ‘성모 흠숭자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살라미스의 주교 에피파니오는 이 두 가지 이단들과 대항하여
성모 마리아를 변호하는데 전력하였다.
그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과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강조하면서도,
마리아께서는 여신이 아니시라는 점을 지적하며
하느님께 드려야 할 흠숭과 혼동하지 말 것을 경고하였다.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성 치릴로 주교가 항변하면서 대립이 치열해지자 에페소 공의회가 열렸다.
이 에페소 공의회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인간이신 동시에 온전한 하느님이시라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이후 교부들은 ‘하느님의 어머니’ 칭호를 사용하였다.
2. 중세
이 시대 신학은 주로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과 승천,
그리고 마리아의 구원 중재 능력과 그 권위를 논쟁의 주제로 삼았다.
성모의 동정성이나 신적 모성에 관해서는 이의가 없었으나
중세 후기에 들어서서
일부 신심가들은 온갖 상상을 통하여 마리아 덕성을 과장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마리아를 ‘정의의 여사제’(Sacerdotessa), ‘여구원자’(Salvatrix)로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마리아께서 이 세상 삶에서 삼위일체 신비를 완전히 아셨고
하느님의 본질을 직관 하셨다거나, 태어나실 때 울지 않으셨으며,
천사와 함께 노래하셨고,
수사학, 논리학, 형이상학, 물리학 등 모든 지식을 갖추고 계셨으며,
세 살 때 이미 서른 살의 여인들처럼 지혜로우셨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예는
성모님에 대하여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과장되었던 신심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3. 근대
근대에 출현한 인본주의자들은 교회의 신앙에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마리아나 성인들에 대한 신심을 반대하였다.
또 한편으로 종교 개혁자들도 가톨릭교회를 반대하여 마리아 공경을 거부하였다.
이런 종교 개혁자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반이성주의와 초자연적 신비주의에 매력을 느끼며
마리아 신심을 더욱 옹호하였다.
또한 성모 발현이라는 기적 현상은 이러한 대중 신심을 더욱 자극시켰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교의가 1854년에 선포되었다.
여기에 존 헨리 뉴먼(J. H. Newman)을 주축으로 전개된 영국의 옥스퍼드 운동이
마리아 신심을 고취시키는 데 가세하였다.
이 시기에는 마리아 왕국이 하느님 나라나 그리스도 왕국에 못지않고,
그분께 드리는 공경이 그리스도께 드리는 공경과 유사해야 한다든가,
또는 마리아께서는 권능이나 지혜, 그리고 신성에 있어서 ‘하느님의 동료’로서
하느님과 거의 같은 차원에 계시다라든가,
마리아의 법정은 자비의 법정이고 그리스도의 법정은 정의의 법정이라는 등의
신학자들의 입장도 난무하였다.
또한 낭만주의의 출현으로 성모 신심이 감상주의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
낭만주의 경향 아래 과장된 마리아론의 책들이 발간되었다.
이와 같은 과장된 마리아 신심의 심각성은 다음과 같은 뉴먼의 비판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마리아의 자비가 무한하다느니,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을 마리아의 손에 쥐어주셨다느니,
그분의 아드님 성자보다 마리아를 찾는 것이 더 안전하다느니,
우리의 주님께서 그분의 명령에 복종하게 되어 있다느니,
하느님께서 화를 내실 때 그 사람에게는 마리아께서 유일한 피난처라느니......”
이와 같이 종교적 감흥에서 비롯된 과장된 표현으로 마리아를 묘사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를 비롯한 반 마리아주의자들에게 비난할 구실을 제공해 주었다.
4. 우리나라 가톨릭교회 안에서 빗나간 성모 신심들
1) 상주의 사적 계시를 중심으로 한 성모 신심
탈혼 상태에서 천주 성삼과 성모님과 천사들과 천당, 연옥, 지옥을 보았고,
여러 가지 이상한 일을 겪었다는 주장과
그러한 일들을 자신의 여러 책을 통하여 성모 신심을 잘못 이끌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주장은 상주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이에 관하여 교회는 일찍이 대구교구장 서정길 주교의 교령으로
그 초자연성을 인정하지 않은 바 있다.
서정길 주교는 교회법 제1261조 1항에 의거하여 5명의 조사위원으로 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사에 요구되는 필요한 모든 조건에 관하여 조사하였다.
이렇게 1957년 1월 15일부터 21일까지 조사한 결과,
그의 묵시, 발현, 계시 예언 등의 모든 사건들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님을 선언하였다.
이 선언으로 인하여 당연한 귀결로 그에 관계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곧 계시, 경문, 기록, 그림, 예언, 전파, 집회, 토론, 영성 지도들을 금지하였다.
이에 관한 기사를 당시 『가톨릭신문』(1957년 3월 14일자)이 실은 바 있다.
판정선언:
본 주교는 교회법 제1261조 제1항에 의하여 5명 성직자로 구성된 조사위원회의 협력으로
황 데레사 사건에 대하여 1957년 1월 15일부터 동년 21일까지 심사한바
소위 계시, 현시, 발현,예언, 기적 기타 등이 “천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판정하여”
이에 선언함과 동시에 다음 사항을 금지 공포함. 금지사항:
1) 모든 신자, 수도자, 성직자들에게 다음 사항을 금지함.
ㄱ) 소위 ‘성삼 은혜’ 건에 대한 황 데레사와의 서로의 연락, 서로의 방문, 서로의 서신,
ㄴ) 성삼 기도문, 기타 서책, 선전문, 글, 그림, 선전, 집회, 논의, 영신 지도,
ㄷ) 위의 사항과 관련된 일체의 언어 행동.
2)각 고해 신부는 위의 사항을 거역하는 자에게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거절할 것.
이 신문 기사는 1954년 3월 15일자로
서정길 주교와 서울교구 노기남 주교가 금지를 명한 바와
1955년 2월 27일자로 당시 대구교구장 서리 서 베르나르도 부주교의 명의로
재차 엄중한 경고의 단을 내린 바 있음을 아울러 지적하고 있다.
안동교구가 대구대교구에서 분리되자(1969년)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도 그러한 활동을 금하였다.
또한 1997년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는
『건전한 신앙생활을 해치는 운동과 흐름』이란 책자를 통하여
성모 신심 운동에 기생하여 전파되고 있는 잘못된 사적 계시를
그리스도의 신앙과 교리를 해치는 운동으로 단정하였다.
물론 이 문헌에서는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지만,
신앙교리위원회는 1997견 1월 9일 주교회의에 제출한 건의서에서
그의 책을 신앙과 교리를 해치는 서적으로 꼽았다.
그리고 이미 『평화신문』과 정의구현사제단이 내는 회보 『빛두레』,
그리고 광주가톨릭대학 편집부의 『신학전망』을 통하여
그의 사적 계시에 대한 비판이 게재된 바 있다.
특히 1998년 3월 29일자 『평화신문』과 『가톨릭신문』은 당시 주교회의 결정을 전해주고 있다.
당시 주교회의 의장 정진석 주교는 3월 20일 기자 회견에서
“이 문제는
이미 오래 전의 일로 관할 교구장들(고 서정길 대주교와 두봉 주교)이 내린 금령이 있고
아직 틀리지 않았다”고 밝혔으며,
이 문제를 사적 계시로 인정하는 듯한 인상을 대외적으로 주었다면 유감이라고 밝혔다.
교황청 신앙교리성 공문(1995년)에서도
“그의 묵시로 시작된 수도회가 교황청 인가를 받았다 해서 그 묵시가 인정된 것은 아니다”
라고 밝히고 있다.
상주 데레사에 의해 나온 책들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고생을 하며 살다가 입교하게 되면서 체험하게 된
묵시, 발현, 예언, 기적적 사건 등을 기록한 자전적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가 체험한 천당, 지옥, 연옥의 모습들은 과거에 가르쳤던 교리서들의 설명과 다르지 않다.
예컨대 지옥은 불타고 있고, 뿔 달린 마귀들이 삼지창을 들고 괴롭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성모 발현의 경우 파티마와 루르드 성모 발현을 상당히 모방하고 있다.
이는 당시 지도 신부로부터 교리 공부, 강론, 영적 상담에서 얻은 지식으로
충분히 구상할 수 있는 내용으로 여겨진다.
무엇보다 사적 계시는 공적 계시와 그 관계와 의미가 명확하게 주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적 계시도 공적 계시를 보충하거나 대체할 수 없으며,
공적 계시와 어긋나는 사적 계시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기준에 맞는 사적 계시라 할지라도 지역과 시기의 한계를 지닌다.
또한 교회의 공적 가르침과 부합되어야 한다.
교회가 가르치는 신앙의 진리나 도덕성에 상반된다면 잘못된 것으로 여겨야 한다.
또한 사적 계시를 받는 자가
균형 잡힌 인격체인지 아니면 병리적 경향을 지니고 있는지 조사되어야 한다.
여기서 요구되는 주요한 세 가지 적성은
참된 겸손, 자신의 관심거리만을 찾지 않는 순종,
시련과 모험에도 강한 영적 능력의 소유를 들 수 있다.
주체 자신이나 그 주변 인물들에게서 드러나는 영적 결실들로서
기쁨, 평화, 사랑, 거룩함 등이 기준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영적 결실을 거스르는 말이나 행위들은 계시의 정당성을 입증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가르침에 비추어
그러한 묵시와 예언과 기적 현상에 대하여 몇 가지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런 사적 계시의 내용들은
당시 그가 받은 교리 공부, 강론, 영적 상담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그의 풍부한 감수성으로 꾸며진 임의적인 환상과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지옥이나 연옥에 관한 조악(粗惡거칠고 추악한)하고 상상적인 묘사들이
단적으로 그것을 말해 준다.
교황청 신앙교리성 문헌도
“성경도 신학도 사후의 생명에 관하여 충분한 빛을 비추어 주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예수님과 그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어떻게 밥상을 같이 하셨고,
또 이들의 침대가 어떻게 배치되었는지를 알려 주는 계시란 참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40일 엄재수난 숨은 행적』이라는 제목의 책은
그가 이제껏 듣고 알아 왔던 예수님과 성모님의 수난을
자신의 삶과 지식에 비추어 본 묵상이라 여겨진다.
그림으로 보여 주는 환시의 내용이나 모습들,
지구의(地球儀)를 중심으로 천주 성삼을 묘사하는 방식,
비둘기의 모습으로 성령을 드러내는 방식, 천사나 마귀를 그려 내는 것들은
당시 『요리강령』(要理綱領)이나 교리서의 설명 이상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둘째, 당시 교회의 대중적 신심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듯이
고통이 찬미되고 고통을 인내함으로써 공로를 쌓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신앙의 소극적인 측면이다.
무엇보다 여러 가지 기적적 현상들을 언급함으로써
신앙 중심이 아니라 기적 중심의 인상이 짙다.
이는 이른바 ‘유사 영성 운동’ 또는 사이비 영성 운동에서 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
이와 관련해서 가족들의 연옥 영혼을 위한 미사 예물을 강요하는 현상들이 지적되고 있다.
예컨대 “묵주 간주 경문 전파 6만 명이 되면 큰 영광을 준다.”
“묵주 간주경 넣어서 한 꿰미 하는 데 공산주의자 다섯 명 회두하는 은혜를 주신다.”는
내용 자체도 기도를 수량적으로 계산하는 잘못된 신앙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셋째, 교회 교도권에게서 여러 번 금지 명령을 받고도 순명하지 않은 점에서
겸손이 보이지 않는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참된 영에서 온 계시라는 것을 식별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 겸손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데레사 성녀 역시 겸손을 강조하면서
“불확실한 자기 묵시보다 확실한 장상의 뜻에 순종한다.”고 말하였다.
묵주 간주경문: “우리 예수여, 우리 죄를 용서하시며,
우리나라 평화를 위하여 외교인들을 돌보시되,
그중에 천주를 핍박하는 악한 자들의 마음을 바른길로 인도하소서.
세계 평화를 위하여 러시아를 구하소서.
예수 성심이여, 티 없으신 마리아 성심이여, 우리 마음을 주의 마음과 같게 하소서.
이 세상의 악한 자를 없이 하시며, 우리 분심 중의 기도를 용서하소서.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이여,
지극히 티 없으신 마리아 성심이여,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하소서.”
2) 나주의 기적이나 사적 계시를 성역화 하는 성모 신심
나주의 어느 성모상에서 1985년 6월 30일부터 피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는 주장과 함께
‘나주 성모 발현’이라는 사적 계시가 문제 되기 시작하였다.
1991년 5월 16일을 시작으로 이른바 ‘성체의 기적’이 그의 사적 계시의 절정을 이룬다.
미사 중 입속에서 성체의 가장자리부터 차츰 피와 살로 변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2002년까지 21차례의 성체 기적 현상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2003년 2월 8일에는 8번의 기적 현상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또 성모님에게서 수차례의 메시지를 받았다고 전한다.
이에 따라 당시 교구장이었던 윤공희 대주교는
1994년 12월 30일 조사위원회를 결성하여 조사를 의뢰하였다.
이 조사위원회의 중간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윤공희 대주교는
나주 기념행사를 금지하고 관련된 사제에게 더 이상 개입하지 말 것을 경고하였다.
그리고 1998년1월 1일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공지문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사적 계시를 유권적으로 해석할 권한은 해당 교구장에게 있다.
이른바 ‘나주의 성모님 메시지’는 인간적이고 인위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어서
그 순수성과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성체의 기적이라고 주장하는 현상들은
교회의 믿을 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나주에서의 기이한 현상들은
신앙적으로 참된 초자연적 현상이라고 증명할 만한 근거가 없다.
오히려 어떤 초능력에 의한 현상일 수 있다.
따라서 나주에서 일어나는 일과 관련된 제반 홍보물의 발행과 유포를 공식적으로 금지한다.
또한 ‘나주의 성모님 메시지’를 선전하지 못하도록 한 권고가 유효하고,
교도권에 순종할 것을 명한다.
나주성모상과 관련된 사적 장소에서 미사 전례 성사 집전을 금한 이전의 조치가 유효하고,
매주 목요일, 매달 첫 토요일에 이루어지는 기도 모임과 집회를 금지한다.
이후 2001년 후임 교구장 최창무 대주교는 5월 회람 ‘성모 성월을 마치며’를 통해
윤공희 대주교의 공지를 재확인하고 교도권에 순명할 것을 재차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두 차례의 명백한 금지령에도 여전히 많은 신자들이 나주를 찾아가고,
관련 홍보물이 유포되고 있다.
또한 매주 목요일과 매달 첫 토요일에는 정기적인 기도 모임과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부 잡지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교구장의 정당하고 적법한 교도권의 판단을 거부하면서 반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일부 잡지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교구장의
적법한 교도권의 판단을 거부하면서 반박하고 있다.
특히 『가톨릭 다이제스트』1998년 2월 호, 1999년 2월 호에서는 “나주 문제를 생각해 본다.”,
“교회가 외면한 성모님의 호소”라는 특집 기사들이 교구장의 결정을 비난한 바 있다.
대구대교구는 2003년 5월 21일자로 교구 신부들과 수도회 장상에게
‘나주 성모상’과 그와 관련된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며,
윤 대주교, 최 대주교의 입장을 재차 확인하였다.
2005년 5월 5일 최창무 대주교는 바르고 참된 신앙생활을 위하여 교구장 공지문을 발표하였다.
직접 찾아가 세 번이나 면담한 사실과
금전 출납 현황, 부동산 취득 등에 대한 등기 사항, 회계 업무에 대한 투명한 자료 제출 등을
교구가 직접 확인하고 검토할 수 있도록 지시하였지만
여전히 순명하지 않은 사실을 밝히고 있다.
최 대주교는 다시 한 번 순명을 권고하며 다음과 같은 공지문을 발표하였다.
1. 누구든지 교회의 공식 검증과 인준을 받지 않은 일을
‘사적 계시’라든지 ‘기적’이 일어났다고 주장하고 선전하며 광고하는 것은
우리 가톨릭교회와 무관한 일이며 교회를 모독하는 일이 될 것이다.
2. 교회의 공식 인준이 없는 나주의 ‘성모 동산’이나 율리아의 집이나
‘경당’에서 교회 이름으로 집회를 주선하거나 의식을 행하는 것은
건전한 신심 행위도, 합당한 전례 행위도 될 수 없다.
3.1998년 1월 1일, 2001년 5월 5일 발표된 광주대교구 교구장의 공지문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지역 교회 공동체의 합법적인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이며 교도권을 거역하는 행위이다.
4. 나주 율리아가 주장하는 소위 ‘사적 계시’나 ‘기적’을 홍보하거나 숨어서 사람들을 모으고,
‘순례’하려는 행위는 교회의 순명 정신에 어긋나는 행위이며 건전한 신앙생활이라 할 수 없다.
5. 성직자나 수도자들은 그가 어느 교구,
어느 나라에 속하더라도 교회의 공식 신분을 지녔으므로 본
광주대교구 주교의 분명한 허락 없이 ‘성모 동산’이나
나주 윤 율리아가 마련한 ‘경당’에 참배한다거나
그곳에서 종교의식,전례 행위를 하는 것은
보편 교회와 지역 교회의 법과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임을 분명히 밝힌다.
나주의 사적 계시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첫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왜 마리아께서 발현하셨는지를 묻는 일이다.
발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지이다.
그러나 메시지가 계시 진리나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면 올바른 발현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성모 마리아의 메시지는 그리스도 신앙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마리아 신심에 멈출 수 없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을 중재하시는 분이지만
성모 마리아께서 그리스도보다 우위이실 수 없다.
그리고 발현 목격자가 성모 마리아보다 더 위대하거나 중요할 수 없다.
이러한 기준에서 교회는 발현의 진실성 여부를 판단한다.
무엇보다 그것을 판단하는 책임자는 소속 교구의 교구장이다.
둘째, 공적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되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적 계시는 그와 같은 공적 계시를 보충하거나 보완하는 것일 수 없다.
그들의 모든 사적 계시는 이미 기록된 것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셋째, 입에 모신 성체가 사람의 살과 피가 되었다는 기적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부합하지 않는다.
교회 문헌은 사제의 축성으로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실체 변화’한 후에도
그 형상은 여전히 빵과 포도주이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DS 782.802.1321.1642.1652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사람의 살과 피의 형상이 아니라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셨다(1코린 11,23-27 참조).
2000년 전에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나자렛의 마리아를 통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하셨지만,
이제 주님은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넷째, 하늘에서 성체가 내려왔다고 하는 주장은
유효하게 서품된 사제의 축성에 의해서만 성체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르침에
위배된다(DS 802).
그들은 천사가 하늘에서 성체를 가져왔다고 하고,
또는 죄 많은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에서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이는 가톨릭 교리의 사효성(事效性:ex opere operato,
성사의 예식 자체로 성사의 효력이 생긴다는 것.
한편 人效性, ex opere operantis은 성사를 받는 자의 자세와 마음가짐에 따라
그 은혜가 다르다는 것을 뜻함)을 부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사의 유효성은 성사 집전자의 성덕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하느님을 체험하거나, 신비 현상에 접한 사람이 취해야 할 가장 첫 번째 태도는
겸손이다.
겸손이 결여된 체험이나 현상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여섯째, 나주의 이 모임은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마치 그곳이 성지인 것처럼 순례하려고 찾아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교도권에 순명하지 않는 그릇된 신심 행위에 대한 바른 인식과
사목자들의 적극적인 지도가 필요하다.
V. 올바른 성모 공경
성모 공경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기도를 풍요롭게 한다.
성모 공경의 신학적 기초는 성경 말씀(루가 1,30.42-45; 갈라 4,4)에서 찾을 수 있다.
1.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충만한 은총의 여인이시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가 1,28).
이 특별한 인사는 성모 마리아 자신조차 당황할 만큼 천사의 입을 통해 전해진
축복의 메시지이다.
마리아의 ‘하느님의 어머니 되심’, ‘평생 동정성’,‘무죄한 잉태’,
그리고 ‘승천’ 등의 모든 특권은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2.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에 기꺼이 응답하신 신앙의 여인이시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성모 마리아께서는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셨고(요한 2,1-12 참조), 사랑하셨으며,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당부하셨던 말씀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셨다(요한 19,25-27 참조).
3. 성모 마리아께서는 구세주 예수님의 동반자이시다.
마리아께서는 성령으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잉태하신 순간부터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함께 하셨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있어서 각별히 헌신적인 동반자이셨다.
4. 성모 마리아께서는 탁월한 전구자이시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의 기적은 마리아의 믿음과 청원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리아의 전구의 도움을 받았고, 또 받고 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교황 권고 「마리아 공경」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후에도 마리아께서는 당신께 도움을 청하는 이들은 물론
자신이 당신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 가까이 계시면서
부단하고 효과적인 전구를 해 주십니다.”(56항) “
따라서 하느님 백성은 마리아를 ‘근심하는 이의 위안’,
‘병자의 구원’, ‘죄인의 피난처’라고 일컬으면서 괴로울 때 위로를,
아플 때 새 힘을, 죄 중에서 해방의 힘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죄에서 자유로우신 분으로서 당신 자녀들을 인도하여
죄를 단호히 끊어 버리도록 해주시기 때문입니다.”(57항)
5.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 흠숭을 방해하시기보다는 하느님 흠숭을 진작시키시는 분이시다.
만일 성모 공경이 하느님 흠숭을 가로막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공경임에 틀림없다.
6. 성모 마리아께서는 성덕에 있어서도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범이시다.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당황하지 않고, 화나는 일에도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다면,
또한 억울한 일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곰곰이 생각하며 가슴 깊이 담아둘 수 있다면
대단한 인격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성모 마리아의 성덕의 절정은 겸손이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여종을 자처하셨을 뿐 아니라(루가 1, 48)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언제나 아기 예수님을 중심에 두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에서 마리아께서는 항상 아드님의 뒷전에 조용히 머물러 계셨다.
이와 같은 겸손 역시 모든 그리스도인이 힘을 다하여 추구하여야 할 성덕의 하나이다.
결론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성모 공경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초대교회 박해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온갖 역경에서도
그리스도 신자들은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며 신앙을 지켜왔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가톨릭 신자들도 혹독한 박해 시대를 거치면서 신앙을 지켰다.
특히 성모님께 의탁하며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성모 공경은 분명 정당하고 그리스도 신앙에 큰 도움을 준다.
오늘날에도 우리나라 가톨릭교회 안에서 성모 신심은 그 어느 신심 활동보다도 활발하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순수한 마음에서 성모 신심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병 치유나 기적적 현상에만 집착하여
성모 발현과 메시지만을 신앙생활의 전부로 착각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예를 들어 가족과 이웃을 외면하면서 입으로만
하느님, 성령, 성모를 들먹이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개인 체험을 무조건 하느님의 계시, 성모님의 메시지라고 믿고 퍼뜨리거나,
우리 사회의 죄를 외면하고 개인의 깊은 상처나 죄책감을 건드려
미사 예물과 헌금을 강요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보다 연옥, 지옥, 형벌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불안, 공포를 조장하는 경우와 개인의 고통을 무작정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라고
우기는 경우가 있다.
교회는 성모 공경을 발현이나 기적 현상을 찾아다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공적인 전례 안에서 신앙생활의 힘을 얻도록 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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