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뜻 영성

re.아, 역시 내맡김은 첫걸음(과정)입니다, 거룩한 내맡김(초탈)으로 나아가는| 영성

은가루리나 2018. 1. 5. 15:06

이해욱프란치스코60|등급변경|조회 512|추천 0|2015.03.01. 12:44




최근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초탈(최고의 덕)"에 대한 글을 올리면서,

그분이 말하는 

초탈이 거룩한 내맡김과 같은 최고의 수준(초탈 = 거룩한 내맡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 생각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엑카르트의 글,

<"초탈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쏙 빼닮게 합니다. 

사람은 확고한 초탈에 의해 하느님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초탈에 의해 순수성과 단순성 그리고 불변성을 얻습니다.

피조물이 하느님과 같아질 수 있고, 

그래서 사람이 하느님과 같아져야 한다면, 

그것은 초탈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은 초탈을 통하여 순수성으로 나아가고, 

순수성에서 단순성으로, 단순성에서 불변성으로 나아갑니다. 

초탈은 하느님과 사람을 같게 합니다.">라는 글과,


<"우리의 성모님께서는 온갖 덕을 완벽하게 갖추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완전한 초탈도 갖추셨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초탈이 겸손보다 높은 차원이라면, 

그녀는 왜 초월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의 겸손을 자랑했을까요?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여종의 겸손을 굽어보셨습니다"(루카1,48). 

그녀는 왜 여종의 초탈을 굽어보셨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나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하느님의 덕에 관한한 

하느님 안에는 초탈과 겸손이 모두 자리하고 있습니다.">라는 글을 통하여,

 

예수님(하느님)은 "초탈의 원형"이시며,

성모님은 "겸손"을 통하여 

초탈의 은혜("하지만 이 일은 은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를 입으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엑카르트가 말하는 초탈이

거룩한 내맡김과 같은 수준의 최고의 덕(초탈 = 거룩한 내맡김)이라는

저의 생각이 틀리지 않다는 생각은,

예수님은 "거룩한 내맡김의 원형"이시며,

성모님은 당신의 겸손(피앗)을 통한 하느님의 은혜로

"거룩한 내맡김의 원형적인 삶"을 살아가실 수 있으셨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예수님처럼, 성모님처럼" 살기 위해서

맹세 수준의 굳은 결심으로 "거룩한 내맡김의 봉헌 서약"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삶이 엑카르트가 말하는 "초탈(거룩한 내맡김)"의 상태,

<초탈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참된 초탈은 마음이 돌연한 사랑이나 슬픔, 

영예나 치욕, 비방에도 꿈쩍하지 않는 상태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는 태산이 미풍에도 미동도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 초탈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쏙 빼닮게 합니다.

사람은 확고한 초탈에 의해 하느님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에

도달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 상태를 목표로 살아가고 있는 중일 뿐입니다.

 

저는 이 번에 저에게 일어났던,

아니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제 일생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

일본 도쿄대교구와 서울대교구로부터의 저에 대한 엄한 제재(制裁)를 통하여

제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정말 좋은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영적(거룩한 내맡김)인 상태는

거룩한 내맡김의 삶을 살기 전과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은 확실하지만

"아직도 많이 멀었다"는 체험이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만일 제가 주님께 내맡긴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죽었을 것입니다."

 혈압이 210/120 , 맥박도 110회가 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저의 모든 것을 내맡겼기에,

그래도 저와 제가 하는 일을 거스르고 제재하는 모든 사람들,

그들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은 제 마음속에서 거의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를 가장 크게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일이 바로,

"도쿄-어밴던하우스"였습니다.

 

그 고통이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남아 계속되고 있음을 여러분 앞에 고백합니다.

 

 

언젠가 도쿄-어밴던하우스는 제 생명과 같은 것이라 말씀드렸지만,

도쿄-어밴던하우스는 제 생명이 아니라 "제 자식"과 같은 것입니다.

 

이 번 일로 자녀를 두고 있는 부모들의 심정을 가까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식구들 중에 오랜 동안 자녀문제로 이곳에 글을 올리고 기도를 청하는

어떤 식구가 생각났습니다.

 

제 자신은 주님께 내맡겨 주님의 뜻에 맡길 수 있지만,

제 자식과 같은 도쿄-어밴던하우스와 저 없이 남겨진 그 봉사자들은

제가 아무리 화살기도를 통하여 주님께 내맡겨 드려도 저를 아프게 할뿐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은 성부께 내맡기셨지만,

당신 없이 남겨진 모친과 제자들, 세상 사람들이

당신의 고통에 크게 더해졌을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긴 삶을 사는 것이

<고통에서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증명받게 되었습니다.

 

엑카르트의 말대로,

<"완전한 초탈에 이른 사람은 영원 속으로 옮겨집니다.

그는 더 이상 덕없는 것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육적인 것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그는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 사람입니다.">가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이 분명한 것 같지만,

"덕없는 것"들로부터 찔림을 받았을 때는 육적인 고통을 느꼈습니다.

저의 영육의 상태는 아직 "영원 속으로 옮겨지지" 못했습니다, 

아직 많이 멀었습니다.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겨 드리겠다는 맹세 수준의 굳은 결심의 봉헌은

분명, "거룩한 내맡김"입니다, 또한 분명 "초탈"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더 중요한 것은 또한 분명,

우리의 내맡김의 삶(靈肉)은,

"거룩한 내맡김(초탈)의 과정 중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단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육을 나날이 조금씩, 때로는 엄청,

또 조금씩 때로는 엄청나게 이끌어 주심을 믿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