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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생활과 애덕(정무웅 신부님) Ⅱ. 합일과의 애덕 ★영 성

은가루리나 2018. 5. 3. 00:21


moowee 등급변경▼ 조회 521 추천 0 2013.11.05. 17:43



영성생활과 애덕


정 무 웅



I. 들어가는 말


Ⅱ. 합일과의 애덕

 1. 사랑의 본질

 2. 애덕과 자연덕

 3. 애덕의 이중성

 4. 애덕과 계명 그리고 복음적 권고


Ⅲ. 애덕과 정화

 1. 정화의 기도

 2. 정화의 수덕적인 면 1) 감각의 능동적 정화  2) 영혼의 능동적 정화

 3. 정화의 신비적인 면 1) 감각의 수동적 정화 2) 주부적 관상 3) 영의 수동적 정화

 4. 하느님 안에서의 변모


Ⅳ. 결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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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합일과 애덕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과 합일을 

향주덕에 의한 계명 준수와  

부차적으로 복음적 권고로 보조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완덕에 있어  

애덕은 본질적 요소이며  초자연적 완성의 척도라는 뜻이다.


애덕은 광의로는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고  사랑 속에 머무르는 상태이며 

협의로는 대신덕의 하나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  또는 그분을 사랑하는 습관적 성향으로,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이다.(요한 14,15~16).


애덕이 행위로 드러날 때는  사랑 받기보다 사랑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행위는 하느님과 이웃을 대상으로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과 일치를 목적으로 삼고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므로 

그분과 일치하면  선의 근원인 하느님의 사랑으로써 사랑할 수 있기에 

사실상 이런 자를 ‘완덕에 나간다’라고 할 수 있다.


애덕은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며 

그분을 사랑하는 습관적 성향이며  

완덕에 나아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애덕은 모든 덕행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이다.(1고린 13,13).




1. 사랑의 본질



사랑은 그 본질상 ‘사랑이신 하느님’(1요한 48)을 뜻한다. 

하느님은 인간이 의식하든 못하든 간에 

끊임없이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사랑을 베푸시는데 

이 신적 사랑에 대한 응답이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 

즉 애덕이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이에 응답하는 인간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 

이 모두의 주도권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 


전자는  하느님 자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고, 

후자는  하느님이 인간을 움직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그 본성상 근원을 하느님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신적 특성을 지닌다.

사랑의 본질은 하느님의 선성에 있다.



하느님이 먼저 인간을 무한히 사랑하시고(1요한 4,9)

죽기까지 사랑하셨다(로마5,8~10).

이에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인식하고 깨달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하느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사랑에 대해  인간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애덕이라 한다. 


따라서 애덕은  먼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인 것이다. 


세례 때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성화 은총에는 애덕이 함께 주어지는데 

이 애덕은 궁극적으로 하느님과의 합일을 목적으로 한다.




2. 애덕과 자연덕



일반적으로 사랑에는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 

형제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사랑의 주체를 기준으로 볼 때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하느님이 행위자이고  후자는 인간이 행위자이다. 


인간이 행위자로 행하는 사랑을  자연적 사랑이라 하는데 

이것은 감정적이며 매력적인 사랑을 느끼고 

자신이 갖지 못한 자질이나 능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서, 

또 특별한 개인의 취향이나 선호도와 연관되어 생긴다.


이런 식의 사랑은 

청소년기에 일반적이며, 또한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특히 감성적이고 성적인 요소가 지배적으로 작용하여 

상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과 질투를 드러내며 

감정의 상태가 매우 불안정하게 나타난다. 


이는 그 본성상 자기 중심적이다. 

이것을 절제하여 인간적인 행위로 이끌어 주는 덕이 자연 윤리덕이다.



한편 애덕은 모든 덕의 형상으로서 

그 자연덕들의 행위를 명령하고  그들을 궁극적 초자연적 목적에로 이끌어 가며 

그 행위자는 하느님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덕 사이의 문제에서  자연 윤리덕과 대덕을 비교하면서 

자연덕으로서의 윤리덕은  애덕과 아무런 관련 없이 존재할 수 있으나 

주부덕으로서의 윤리덕은 애덕 없이는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애덕과 윤리덕과의 관계는 꽃과 뿌리의 관계와 같다. 

자연덕이 애덕과 함께 있을 때   절덕ㆍ용덕․의덕․지덕은 초자연적 덕이 된다.



이 초자연덕은  

웃을 사랑함에 있어, 

감성과 자연적 매력 때문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으로써 이웃을 제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루가 10,27)

이 사랑의 특성은 

무조건적이며,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보편적이고, 상대를 자유롭게 해준다.


이러한 행위는 바로 애덕에서 우러난 사랑이다. 

애덕은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자 하는 행위이며, 

모든 덕행의 형상으로서  모든 덕의 행위를 명령하는데 

이 모든 덕들이 애덕의 명령을 받으면  초자연적 목적으로 향하게 된다.


따라서  애덕이 존재하는 곳에는 언제나 하느님이 우선적 행위자이다. 

애덕이 크면 클수록 사랑은 고귀하고 희생적이 되고, 

애덕이 완전하게 되면  그 사랑은 곧 하느님의 사랑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한 동안은 자신의 의지로 어떤 덕을 닦을 수 있지만 

뿌리가 뽑힌 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애덕 없이는 덕을 완성시키지 못한다. 


한동안은 좋은 일을 할 수 있으나  오랫동안 가지 못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애덕을 말한다. 


이와 같이 초자연적 사랑은 자연적 사랑을 포함하며 

하느님이 부어 주신 애덕으로 행하는 사랑을 말한다.



이웃에 대한 겸손 역시, 겸손의 동기를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누구로부터 호감을 사기 위해서라거나, 칭찬 받기 위해서라거나 

또는 그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라면 

이것은 동기가 이기적이며 

인간이 행위자로 수행하는 인간의 자연적 사랑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겸손의 덕을 행한다면 

그것은 곧 하느님 자신이 행위자로  우리를 통해 하시는 하느님의 행위가 되며 

이때의 겸손은 초자연적 겸손은 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자연덕에 애덕이 첨가되면  초자연적 덕이 되고, 

자연적 사랑에 애덕이 첨가되면 초자연적 사랑이 된다. 


그러므로  애덕은 모든 덕의 형상적 원리이며 

이 애덕의 동기는 하느님의 무한한 선성이다.




3. 애덕의 이중성



애덕에는 정(情)의 사랑과 실천적 사랑이 있다.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하다 보면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생각은 섬김으로 나타난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먼저 뜻이 있고 다음에 섬김이 있다. 

첫째가 정의 사랑(Primario caritas affectiva)이고 

다음이 섬김의 사랑(Caritas effectiva)이다. 

마음이 열려야 행동으로 드러난다. 

마음만 있고 행위로 드러나지 않으면  불완전한 사랑이다.


그러나 마음에서 우러나와 행동으로 이어질 때  사랑은 완성된다. 

따라서 행동을 통해 그의 마음을 볼 수 있다. 

그 사람의 사랑이 얼마나 불타고 있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태 7,15~17; 루가 6,43~44).



그러므로 애덕의 완성은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情)

그리고 그 사랑의 충동에 의해 실천으로 나타난다. 

계명을 지키되  먼저 향주덕의 충동을 받아 

하느님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명을 실천해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하여  실천적 사랑으로 열매 맺는 애덕 행위는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이 따른다. 

이러한 사실은 성서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가르침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된다

(마태 22,35~40; 12,28~31).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합니다.”(1고린 3,14)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 13,10).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1고린 13,13). 

“애덕 없는 특은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1고린 13,1~3).



여기서의 특은은 성령의 특별한 은혜로서 

받는 당사자의 혜택일 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선익을 위해 

즉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기 위해’(에페 4,12)하느님이 주신 것이다. 

하느님과 일치시키기 위해 공동체에 주신 것이다. 


따라서

애덕 없는 특은(Cariama)의 사용은  일치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거나 

자신의 이익과 영광을 위해 쓰일 수 있기에 

애덕 없는 특은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애덕은 모든 덕과 특은을 완성시킨다. 


세례 때 받은 이런 애덕은  인간 안에서 무한히 증가될 수 있다. 

왜냐하면 애덕의 동인(動因) 또는 작인(作因)이 하느님 자신이므로 

애덕에는 제한성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십자가 성 요한에게서 잘 볼 수 있다.


“초심자가 스스로 제아무리 자신의 행동과 욕정을 절제한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밤의 정화를 통해  영혼을 수동적으로 억제하지 않으시면 

그는 결코 자신의 행동과 욕정을 완전히 제어 할 수 없다.”(밤, 1권 7장). 


이처럼  애덕 

하느님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수동적 정화를 통해 무한히 발전하게 된다.




4. 애덕과 계명 그리고 복음적 권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완덕은  대신덕에 의한 계명 준수와  

윤리덕에 의한 복음적 권고로서 고찰되어야 한다.”고 한다. 


완덕은 계명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반드시 애덕으로 계명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서에서도  애덕에 의한 계명 준수의 중요성을 

“하느님을 사랑하라”(신명 6,5)는 말씀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레위19,18)는 말씀을 합쳐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글은 이 두 계명에 달렸다”(미래 22,40)고 말씀하심으로써 

이웃 사랑을 하되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이 기뻐하시도록.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완덕에 있어서  애덕의 중요성은 토마스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 신자의 완성은 항상 완덕의 조건인 애덕에 달렸다고 하였다. 

완덕에 나아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애덕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애덕만이  우리를 하느님과 온전하게 결합시킨다. 

그리고 애덕은 모든 덕의 형상적 원리이자 감독자로서  완덕의 본질을 이룬다.


그리스도의 완덕이 사랑의 계명, 

즉 애덕에 의한 계명 준수로써 이뤄진다는 이 말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애덕 없는 계명 준수는  인간에게 짐을 지우는 것이며 

오히려 인간을 율법의 노예로 만든다는 것이다.


율법의 노예에서 구원되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으로써 이루어지는데

(로마 4,24). 

세례를 통해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 할 수 있는 애덕의 힘을 갖게 되어 

이제는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도  억지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나 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는 상태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이 주신 애덕으로 계명을 지키면 

자연히 자발적이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수계 생활을 할 수 있기에 

내적으로 기쁨과 평화가 충만할 수밖에 없다. 


물론 초기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약하여 

의지적으로 실천하는 인간적 노력이 요구되지만, 

차츰 애덕이 성장하면서  자발적이며 기쁜 마음으로 이를 지키게 된다. 

이런 모습은 많은 성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한편  완덕은 도구적으로는 복음적 권(청빈․정결․순명)에 있다. 

권고는 애덕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제거해 준다. 


즉 대신덕에 의한 계명 준수를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들을 피하게 해주는 

도구로서 궁극적으로는 애덕을 지향한다.


그러나

“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신명 6,5) 

마음을 지니고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을 실천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보인다. 


그러나 현세 생활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계명 준수는 가능하다. 


여기에서 복음적 권고의 필요성이 나온다. 


완덕은  이차적으로는 

애덕에 확실하게 장애가 되는 것의 제거를 목적으로 하는 

복음적 권고의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


가난은 계명 준수를 방해하는 무질서한 소유욕에서 해방시켜 주는 도구이며, 

순명은 무질서한 지배욕에서 해방시켜 주며, 

정결은 무질서한 성욕에서 해방시켜 준다.


여기서 무질서한 욕망이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뜻만을 무작정 고집하려는 경향성을 말한다.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권고를 따라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장애물 제거는 자기 자신을 끊는 이탈포기의 행위로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끊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

(마태 16,24) 는 말씀과 같이 

애덕에 의한 계명과 함께 권고가 , 완덕에 나아가는 길임을 

분명히 말해 준다.


예수는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끊어 버리고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다. 


피조물로부터의 이탈인 권고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고 집중하게 하는데 필요한 도구적 요소이며 

계명을 지키는 데 방해되는 것을 제거해 준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는 합일에의 훌륭한 길인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적 완덕은  

본질적으로는 애덕에 의한 계명 준수와  

도구적으로는 복음적 권고의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



완덕에로의 길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자 되어라”

(마태 5,48)와 같이 

세례 때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보편적인 부르심이며 의무이다.


이와 같은 대신덕에 의한 계명 준수와 권고를 강하게 실천할수록 

성령의 은혜가 영혼에게 더욱 많이 전달되며 

이때 성령은 애덕을 더욱 활발히 완성시켜 나간다. 


왜냐하면 성령은 

애덕으로 하여금 더욱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는  하느님의 은사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향주덕으로 닦여져 맑을수록 그만치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많이 지닐수록  

그만치 하느님께서 비춰 주시는 성령의 은혜를 내리시는 까닭이니 

사랑이야말로 은혜가 오게 하는 길이요 원인이다”(산길Ⅱ2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