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영성생활과 애덕(정무웅 신부님) Ⅲ. 애덕과 정화 ★영 성

은가루리나 2018. 5. 3. 00:54


moowee 등급변경▼ 조회 521 추천 0 2013.11.05. 17:43



영성생활과 애덕


정 무 웅



I. 들어가는 말


Ⅱ. 합일과의 애덕

 1. 사랑의 본질

 2. 애덕과 자연덕

 3. 애덕의 이중성

 4. 애덕과 계명 그리고 복음적 권고


Ⅲ. 애덕과 정화

 1. 정화의 기도

 2. 정화의 수덕적인 면 1) 감각의 능동적 정화  2) 영혼의 능동적 정화

 3. 정화의 신비적인 면 1) 감각의 수동적 정화 2) 주부적 관상 3) 영의 수동적 정화

 4. 하느님 안에서의 변모


Ⅳ. 결 어



---------------------------------------------




Ⅲ. 애덕과 정화




하느님과의 합일은 

우리 안에서 하느님 당신의 주도권에 의해 수동적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합일이 성장되고 완성에 이르는 데는 

우리의 몫인 애덕이 함께 성장되어야 하는데 

이 애덕의 성장은 정화와 기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집중하기 위해서는 

그 반대되는 피조물에 대한 이탈포기가 이루어져야 하고 

이탈과 포기인 정화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충만하게 하는 기도를 통해 완성되므로 

정화와 기도는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이와 같이 정화와 기도는 동전의 양면성과 같아서 

정화 없이 애덕이 없고, 애덕 없이 정화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애덕의 증가는 정화에 의해 시작되고, 

애덕의 완성은 관상 기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1. 정화와 기도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내 정신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라”

(마르 12,30). 

이러한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사랑은 

우리를 유혹하는 감각적인 피조물에 대한 집착과 애착으로부터 

이탈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느님과 피조물(주인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기 때문에 

주인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재물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재물 자체가 아니라 재물에 대한 애착으로부터의 이탈이다. 


이것이 곧 정화이다.


따라서 이 말씀을 지키려면 자연히 이탈의 고통이 따르게 마련인데, 

이때 나타나는 고통은 애덕 실천 요구 계명 자체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계명 실천을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믿음의 부족 때문이며, 

인간의 오만과 세상 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오는 갈등이며 고통이다.




십자가 성 요한은 

사랑에 대한 가치적인 측면에서 분명한 차별성을 두면서 결단을 요구한다. 


사랑의 대상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피조물에 대한 사랑으로 구분한다. 


피조물에 대한 사랑이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기 사랑,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형제적 사랑, 

인간 외의 존재를 사랑하는 사물에 대한 사랑이 있는데 

하느님의 완전성(Todo)에 비추어 볼 때 

피조물은 무(無, Nada)일 뿐이므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만이 참된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사랑해야지  피조물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피조물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의 뜻과 일치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일치하지 않을 경우 

이를 사랑이라 부르지 않고 피조물에 대한 무질서한 집착이라 하며, 

그 피조물이 사랑이든, 물건이든, 일이든, 

이것들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이탈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는 것은 

질서가 아니라 무질서이다. 

사랑하지 말아야 할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 뜻에 위배되는 무질서이다. 


[그러나 성인이 

피조물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결코 피조물 자체를 부정 하는 것이 아니라 ]

하느님과는 관계없이 

우리 마음에 남겨 둔 피조물에 대한 애착과 집착을 버리라는 말이다.


피조물이 아니라  피조물에 대한 맛과 그에 대한 애착을 끊음으로써 

우리는 모든 욕에서 해방되고 마음이 고요해지며, 

이렇게 비워진 마음 안에 비로소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느님 자신이  

우리 안에서 당신의 뜻에 따라 피조물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애덕에 바탕을 둔 하느님 사랑으로써 

피조물인 사람과 사물과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의 주체와 대상에 따라 애덕이 될 수도 있고 집착이 될 수도 있다.



성인에 의하면 

우리 영혼의 능력에는 지성과 기억과 의지가 있는데 

영혼을 정화시킨다는 것은 이 능력들을 정화시키는 것이며, 

이때 인간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인 의지는 애덕에 의해 정화된다.


영혼이 하느님을 사랑愛德〕하는데 집중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피조물에 집착한다면 

합일에 도달할 수 없다. 


새가 노끈으로 묶여 있다고 하자. 

그 노끈이 아주 가늘더라도 그 새는 하늘로 날 수 없다(산길Ⅰ,11,4). 


마찬가지로 

마음이 피조물에 대한 유혹과 집착에 묶여 있는 사람은, 

비록 그 노끈이 가늘더라도 

그것을 끊어 버리지 않는 한 하느님께 날아오를 수 없다. 


그러나 끊어 버려야 할 노끈은 ‘피조물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피조물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과 집착‘이다. 

그러므로 의지의 정화를 통해 피조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기에게 부과된 일이나 

자기 생활에 필요한 사물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피조물에 관심을 갖는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마음으로 피조물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피조물에 대한 무질서한 욕구와 

하느님 뜻 안에서의 피조물에 대한 사랑은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ㆍ욕구ㆍ뜻을 정화시킨다는 것은 

피조물을 사랑하기를 중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인 의지를 오롯이 하느님께만 집중시킴으로 

순수하게 피조물을 사랑할 수 있도록 

피조물 자체에 대한 모든 애착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말한다.



자원 봉사자가 환자를 돌본다고 하자. 

환자가 조금이라도 편하도록 침구 정리나 청소 등 

여러 가지를 돌보아 줄 수 있다. 

이때 봉사자는 그 환자가 지니고 있는 인간적인 품성에 따라 

그 환자에게 더 잘 해줄 수도 있고  못 해줄 소도 있다. 


그러나

만약 봉사자가 마음을 다해 오롯이 하느님께만 집중한다면(愛德) 

그는 환자 안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고, 

환자의 품성이나 미모에 관계없이  

그 사람 안에서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나환우를 씻어 줄 때 나는 자주 그가 예수라는 사실을 느낍니다.”라는 

마더 데레사의 말처럼

피조물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하느님 안에서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이처럼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면 

우리의 행동은 상대의 품성이나  또는 자신의 보람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유로 상대를 사랑하고 인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애덕을 지닌 영혼은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그 무엇에도 흔들림 없이 

오직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하느님의 뜻을 행하며, 

피조물 자체에 집착함 없이  내적인 고요와 평정 속에 그 뜻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사물과의 관계에서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그것들을 유익하게 이용할 뿐이다.




기도는 정화를 완성시킨다. 


의지의 정화는  우리를 하느님과 합일시키는 데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도를 통해 완성되지 못한다면  부족하다. 


새가 하늘로 오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땅에 묶어 두는 노끈을 끊어 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날개를 움직이고 높이 날아올라야 한다.

기도란 하느님께로 향한 영혼의 날아오름이고,

영혼의 의지를 하느님의 의지에 밀착시키는 행위이다.



기도를 통화여 인간은 대신덕을,  특히 애덕을 최대한으로 실천하게 된다. 


신덕으로 기도할 때 

그 영혼은 하느님에 대한 인식과  

그분의 뜻에 대한 깨달음과 

그분에 대한 존경이 점점 커지며, 

피조물의 하찮음과 자신에 대한 겸손이 더욱 커진다. 


망덕은 그분만이 유일한 가치임을 발견하고서 

영혼의 모든 힘을 그분에게 향하게 하고, 

애덕은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원하지 않을 때까지 

우리를 하느님께 더욱 밀착시킨다.



이와 같이 애덕으로 충동받은 영혼은 하느님과 합일이 되어 

거기에는 두 의지가 존재하지 않고 하나의 의지만이 존재하니, 

하느님의 의지가 바로 영혼의 의지가 된다(산길Ⅰ,11,3)


이런 이유로 복음은 우리에게 

예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 외딴 곳으로 가셨다”

“밤새도록 기도 하셨다(루가 6,12)는 말씀을 전해 준다.


기도할 때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덕과 망덕과 애덕을 지니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영혼 안에 내재되어 있다면 

그의 의지와 하느님의 의지는 하나이고, 

일상 생활에서도 하느님의 마음처럼 그렇게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기도해야 한다(루가18,1).




2. 정화의 수덕적인 면



정화의 수덕적인 면이란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영혼 자신이 주도적으로 

피조물에 대한 모든 애착과 집착으로부터 이탈을 실천하는 능동적 정화를 말하며, 

이런 비움은 하느님과 합일을 목적으로 한다.




1) 감각의 능동적 정화



감각의 정화란 감각에 들어오는 모든 맛과 자기 만족에 대한 거절을 말한다. 


영혼의 진보를 방해하고 해를 끼치는 것은  이 세상의 사물이 아니라 

오히려 피조물들에 대한 욕망과 그 애착이기 때문이다. (산길Ⅰ, 1,4).


그렇다면 

감각적인 맛, 지상 사물의 쾌락에 대한 애착에서 어떻게 이탈할 것인가? 


성인은 거룩한 사물의 맛을 임시적 대체 수단으로 사용하라고 권한다. 

술이나 도박, 미색 등 악습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의무 수행ㆍ애덕 실천ㆍ영적 독서 등 

고상하고 감각적인 것을 대체 수단으로 하여 

무질서한 감각적인 맛, 욕구를 끊도록 권한다.



“그처럼 

영혼들은 거룩한 일들 안에서 자신이 찾아낸 맛의 덕분으로 

다른 모든 맛들을 쉽게 포기한다. 

이는 마치 우리가 어린이들에게 하는 것과 비슷한데, 

우리가 어린이들에게서 무엇을 빼앗으려면 

그 어린이들이 빈손으로 울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무엇을 준다”(산길Ⅲ, 39,1).


이로써 그는 영적 보화들의 맛을 통해 

물질적인 보화인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는 데에도 

성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불꽃 3,32).



그러나 진정한 감각의 능동적 정화는, 

물질적 보화인 세상의 쾌락들로부터  

영적인 보화인 영적 독서나 의무 수행으로 바뀐 삶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영적 보화로부터 오는 성취감이나 기쁨에 머물러 그것을 즐기기만 한다면 

그 역시 아직 정화가 덜 된 것이다. 

이 상태는 악습에서 자연 덕으로의 전이일 뿐이다. 

물질적 보화이든 영적 보화이든  그것을 즐기려는 애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따라서 맛에 대한 전적인 이탈과 포기가 필요하다. 

영적 독서나 애덕 실천, 이런 것에서 오는 기쁨이나 성취감 등의 

맛과 위안, 즐거움에 끌리거나 머물려는 유혹에서조차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위안이 주는 기쁨에서조차 벗어나야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순수한 사랑이 된다.


이것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성인은 다음과 같은 규범으로써 정화를 실천하라고 권한다.



그리스도를 따름(산길 1, 13,3)


예수의 지상 생활 중  그의 최대 관심사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의 음식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 했을 때 

“나를 보는 것이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요한 14,8).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

(요한 14,10)라고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아버지의 뜻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을 통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수 당신 자신을 내어 드린 것이었다.


이처럼 아버지 뜻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인해 

예수께서는 자연히 아버지의 바람과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고, 

그것 때문에 자주 밤을 세워 기도하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소망이라면 

어떤 어려움과 고난도 마다 않고 기쁘게 받아들였다. 

비록 그것이 받아들이기 힘든 고난의 쓴잔이었어도 

아버지에 대한 애정은 그 모두를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게 하였다. 

예수님은 그 만큼 아버지를 사랑하셨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닮으려면  

예수가 그렇게 했듯이 

우리도 아버지께 대한 깊은 사랑을 지니고 자신의 뜻을 포기해야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따름은 

곧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뜻을 포기하는 삶이며, 

그러기에 대덕은 정화의 원천이 된다.



감각들의 정화


우리의 영혼이 오로지 하느님만을 사랑하려면 

모든 피조물에 대한 맛에서 이탈해야 하는데, 

맛에 대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감각을 통해 감지되면서부터 

피조물에 대한 애착이 생기므로, 

피조물들의 즐거움을 피하도록 하기 위해 

우선 쾌락의 원인이 되는 것들을 감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것을 감각의 정화라 한다.


예수께 대한 사랑은 

우리의 의지로 하여금  모든 감각적인 즐거움에 대한 포기를 요구한다

(산길Ⅰ,13,4). 


그러므로 감성에 들어오는 어떤 맛이든 

순수 하느님의 존영과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해 모든 맛을 끊고 빈 몸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무엇이든 하느님의 영광과 당신을 섬기는 데 도움되지 않는다면 

좋아하지도, 듣지도, 보지도 말아야 한다(산길Ⅰ,13,4). 


만약 피할 수 없다면 느낌이 든다 해도  누릴 마음을 갖지 말라. 

그렇게 한다면  단시일 내에 크게 진보하리라(산길Ⅰ,13,4)고 하신 

말씀이 있다.



자연욕들에 대한 정화


육체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본능을 지녔다. 

그러기에 감각에 들어오는 것들의 부류에 따라 

(慾)은 강하게, 혹은 약하게 반응한다.


욕은 감각에 이는 정(tendences sensitives)을 뜻하는데 

감각에 느낌이 좋은 것들(좋은 향기나 아름다운 음악 등)에는 끌리고 

나쁜 느낌들(나쁜 냄새나 시끄러운 소음 등)에는 반발하게 된다. 


욕이란 

이처럼 우리에게 좋은 인상이나 나쁜 인상이 감각을 통해 받아들여질 때 

그에 따라 반응하게 되는 정(情)이다.



십자가 성 요한은 4가지 욕을 말한다. 


기쁨ㆍ바람ㆍ무서움ㆍ아픔의 정이 있는데 

이를 끊고 가라 앉혀서 그 차분한 조화로 가지가지 보화를 얻으려면 

이를 통제해야 한다. 


육체의 본능이 요구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기쁨과 바람을 유발시키는 것은 거부하거나 피하고, 

오히려 무서움과 아픔을 동반하는 것들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은 이렇게 말한다.


보다 쉬운 것보다 보다 어려운 것을.

보다 맛있는 것보다 보다 맛없는 것을

쉬는 일보다도 고된 일을

위로되는 일보다도 위로 없는 일을

보다 큰 것보다도 보다 작은 것을

보다 높고 값진 것보다 낮고 값없는 것을

무엇을 바라기보다 그 무엇도 바라지 않기를

세상의 보다 나은 것을 찾기보다. 보다 못한 것을 찾아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온전히 벗고, 비고 없는 몸 되기를 바라라.

(산길Ⅰ,13,6)


이렇게 

영혼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본성이 가장 싫어하는 것에로 정향케 함으로써 

욕을 정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런 훈련을 통해 

영혼은 맛에 대한 집착과 정에 대한 애착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자애심으로부터 정화 (산길Ⅰ,13,9)


하느님과의 합일은 

자신을 위해 어느 하나도 남김이 없는 완전한 포기를 요구한다. 


이제는 자신을 위해 한 점의 ―즐거움의 원천이 되는―

존심이나 자기 만족에서조차 떠나기를 요구하면서 

3가지 규범을 존다. 


즉 

욕의 욕정과  눈의 욕정과  재산의 자랑(1요한 2,16)을 끊도록 가르치는 

수련 방법이다. 

성 요한은 이 3가지가 세상을 지배하고 여기에서 온갖 욕이 생긴다고 하였다

(산길 Ⅰ, 13,8).


“첫째, 

스스로 자기 자신을 없이 보도록, 남이 모두 자기를 업신여기도록 힘쓸 것”

(이것은 육의 욕에 맞섬이다.)


“둘째,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낮추어 말하도록, 남이 모두 낮추어 말해 주기를 바랄 것”

(이것은 눈의 욕에 맞섬이다.)


“셋째, 

본디 없는 몸, 

자기 자신을 낮추어 생각하고, 남이 모두 낮추어 생각해 주기를 바랄 것”

(이것은 생활의 오만에 맞섬이다.)(산길 Ⅰ, 13,9).


이렇게 할 때 영혼은 모든 감각적인 즐거움과 정에 벗어나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러 진정한 자유를 누릴 것이다.




2) 영혼의 능동적 정화



감각의 정화가 목상을 통하여 

영혼 안에서 피조물에 대한 맛과 정으로부터 이탈을 추구한 시기라면, 

영의 능동적인 정화는 사랑의 적극적인 면으로 

능동적 관상을 통하여 

영혼 안에서 하느님을 집중적으로 사랑하고자 하는 노력이 따르는 시기이다.


성인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에는 3가지 기능이 있는데 

그것은 지성과 기억과 의지이다. 


영혼을 정화한다는 것은 이 기능들로 하여금 

피조물에 대한 집착에서 관심을 돌려 

이제는 온통 하느님께 집중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정화는 신덕․망덕․애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지성은 신덕을 통해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고, 

기억은 망덕을 통해 하느님만을 원하게 되며, 

의지는 애덕을 통해 하느님만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므로 영혼의 정화는 신망애 3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지성의 정화


지성의 정화는 지성이 하느님을 인식하기 위해 

지금까지 습득한 모든 것들을 제쳐두고, 

오로지 신덕이 하느님께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에만 집중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신덕은, 존재하시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보여 준다. 

하느님께서 무한하시다면, 

믿음은 그분을 무한하신 그대로 우리에게 알려 준다. 

하느님께서 삼위일체라면 

믿음은 삼위일체이신 그대로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산길Ⅱ,9,1).



이처럼 신덕만이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확실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법을 완전히 지키면서 

성 교회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신앙의 현의와 진리를 

단순 솔직하게 받아들이도록 해야 하며 

다른 기이한 것에 대하여는 조심을 해야한다.(산길Ⅱ,29,12). 


이는 단순성과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의 신비와 진리를 알아듣고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산길Ⅱ,29,12). 


이렇게 믿음만이 인간의 논리적 인식의 한계를 초월하여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만나게 해준다.



신덕의 발전은 특히 기도 중에 이루어지는데 

이때의 기도는 

능동적 관상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순수하고 철저해진다. 


이와 같이 깊은 신덕 안에 머물러 있는 영혼은 

만물 안에서도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감지한다. 


신앙 안에 머물러 있던 성인의, 사랑하는 하느님에 대한 찬가를 들어보자.


"내 님은 산과 산들

외딸고 숲 우거진 골짜구니들

묘하디 묘한 섬들과 섬

소리내며 흐르는 시냇물들

사랑을 싣고 오는 휘파람 소리

이슥 조용한 밤

동녘 새벽의 여명

소리 없는 맑은 고요

즐거웁고 황홀스런 저녁잔치“(노래 14,15)


이와 같이 신덕 안에 있는 영혼은

자연 사물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 사랑을 감지한다. 


이 뿐 아니라 이런 영혼은 

인생의 온갖 고통 속에서조차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사랑을 발견하고, 

욥 성인처럼 “주여 감사합니다.”라고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지성은 신덕을 통해 정화되어 하느님을 직관하게 된다.



기억의 밤 


기억의 정화는 망덕의 훈련을 통해서 완성된다. 


이는 다른 모든 인식에 대한 기억을 비우고 

무한히 사랑스럽고도 행복한 하느님께 대한 기억을 

우리 영혼에 채움으로써 

우리 안에 하느님을 향한 강력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하느님께 대한 기대와 바람을 기억 안에 가득 채우려면 

잡다한 모든 기억들을 비워야 한다.


기억의 비움은 완전해야 한다. 

비록 우리의 의무나 책임 등으로 인하여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기도하는 동안만은  하느님을 대면 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영혼은 그가 듣고, 보고, 느끼고, 만지는 모든 일을 

기억 속에 넣어 두지도, 간직하지도 말라는 것. 

도리어 곧 잊도록 하고  필요하다면  

차라리 생각을 다른 데로 돌려서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이다. 

마치 이 세상에 없는 것처럼 잊어버림으로써  자유로워야 한다. 


자연의 것은 무엇이거나 

초자연에 쓰이기에는 도움보다 차라리 장애가 되는 것이다”(산길Ⅲ,2,14).


이렇게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기억의 정화를 통해 

하느님께 대한 거룩한 열망이 생긴다.



의지의 정화


의지는 지성에 의해 인식된 좋은 것을 선택하는 능력이다. 

이것과 저것 중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다른 것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이다. 


의지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의지를 정화시키는 것은 

하느님과 피조물 중 

피조물을 포기하고 하느님을 선택하여 사랑하는 것이며, 

정화된 의지는 신앙으로 조명된 지성에 의해 인식된 좋은 것을 

인간적인 위안이나 만족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의지가 정화되어 

세상의 그 어떤 복락도 거부하고  하느님만을 오로지 사랑하게 되는 영혼은 

그의 사랑이 극에 달하여 

형제 안에 계신 하느님을 사랑 할 수 있고, 

하느님께서 태초에 우리를 사랑하셨던  

바로 그 선성으로 하느님을 사랑 할 수 있고, 

우리의 행복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당신이 자체로 존경과 사랑을 받으실 분이기에  당신을 사랑 할 수 있고, 

모든 사물 안에서 하느님의 뜻, 의지를 실천함으로써 당신을 사랑할 수 있다.


애덕에 의한 의지의 훈련은 

지속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묶어 두는 피조물에 대한 집착과 유혹에서 벗어나 

오직 하느님께만 우리의 마음을 집중하게 하여, 

하느님 안에서 피조물조차 사랑 할 수 있게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하느님의 뜻대로 피조물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애덕에 의해 정화된 영혼은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들 안에서 

오로지 하느님의 기쁨과 그분의 영광만을 찾게 되고 

이로써 하느님과 합일에 이르게 한다. 





3. 정화의 신비적인 면



정화의 면이란 

영혼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느님 자신이 주도적으로 손수 영혼 안에서 영혼을 정화시키는 

수동적 정화로,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베푸는 주부적 관상과 더불어 이뤄지는 

무미건조 상태를 말한다.




1) 감각의 수동적 정화



감각의 수동적 정화란, 

영혼이 피조물에 대한 모든 애착을 스스로 정화시키고 

오로지 믿음 안에서만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실천할 때, 

하느님께서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당신 친히 영혼을 정회시키러 오시어, 

영혼을 매우 고통스런 상태에 빠뜨려  인내력을 가혹하게 시험하는 

깊고 집요한, 무미건조한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하느님은 영혼으로 하여금 

깊고 무미건조한 심연 속으로 빠져들도록 그것을 내던지시고, 

모든 피조물에 대한 맛을 거두어 가신다. 



이 무미건조함의 특징은 이러하다.


첫째, 특징은 

하느님과 관련된 사물에서나, 어떠한 피조물에서나 

영혼이 기쁨이나 위안을 찾지 못함이다.


둘째, 특징은 

일반적으로 기억이 조심스레 하느님께 집중되지만, 

영혼은 하느님의 일에 맛들임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섬긴다기보다는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셋째, 특징은 

이전처럼 상상력을 매개로 하여 묵상을 하거나  추리력을 사용할 수 없음이다. 

이러한 무력증은 최초의 주입 관상에 기인한다(어둔 밤 1,9장).



그러면 이 고통스런 수동적 정화는 왜 필요한가?


하느님은 영혼이 합일에 이르도록 

영혼으로 하여금 피조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고, 

오히려 당신께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메마름과 무미건조함을 주시는 것이다. 



성인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재미와 맛의 젖을 떼게 하시고 

온전한 메마름과 내적 암흑 속에다 그들을 두시어, 

아주 다른 방법으로 덕을 닦도록 마련하신다. 


왜냐하면  초심자가 

제 아무리 스스로를 절제하는 일, 당하는 일을 바로잡아 나간다 해도, 

하느님이 이 밤의 정화를 통하여 

수동적으로 그 사람을 붙들어 주시지 않는 이상 

조금도 무엇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어둔 밤 1Ⅰ,7,5).


이러한 정화는 

하느님에 의해 기도 중에 무미건조함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시련이나 유혹, 무수한 저주, 병고, 소유물의 상실 등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것은  영혼으로 하여금 현세 사물로부터 완전히 이탈시키기 위해 

하느님이 허용하시는 방법이다(어둔 밤Ⅰ,14,1).


“이러한 은  일반적으로 오랫동안 계속되는데 

대단한 고생과 감각적인 시련을 수반한다. 

어떤 이는 간음과 신이 덮쳐서 

지겹고 사나운 유혹을 가지고 감각을 매질하며 

환상을 가지고 영혼을 못 견디게 하고, 

또 어떤 이는 사람의 감성을 아주 깜깜하게 만들어서 

세심과 의혹으로 꽉 채워 놓는다. 


이것이 이 의 가장 큰 충격과 공포의 하나로서 

영의 밤에 일어나는 일이다”(어둔 밤Ⅰ,14,1.3).


그러나 하느님은 언제나 

영혼에게 이 모든 어려움을 이길 만큼의 필요한 은총과 힘을 주시니 

무서워 할 것은 없다. (어둔 밤Ⅰ,14,5).


정화 중 무미건조함은 주로 주부적 관상 중에 나타난다. 

전에는  

영혼이 기쁨 중에 묵상을 잘 할 수 있었고 감동을 얻을 수 있었으나, 

지금은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재미도 없을 뿐 아니라 

그와는 엉뚱하게 그런 일들에서 맛없음과 쓰거움을 맛볼 따름이다

(어둠 밤Ⅰ,8장).



이런 시련 앞에서 영혼이 주의해야 할 일은,


① 길을 잃은 듯한 걱정 때문에, 

좋은 일에 맛이나 멋을 느끼지 못하는 데서 

맛과 위로를 찾아 되돌아가려 하지 말고 (어둔 밤Ⅰ,10,1).


② 맛과 위로를 느끼지 못할 때 

결코 걱정 말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스스로 위로하고, 

하느님은 결코 버리지 않으시니  신뢰하는 마음을 지녀라 (어둔 밤Ⅰ,10,3).


③ 묵상을 함에 있어 추리를 할 수 없어 시간만 낭비하는 것 같고, 

게으름으로 기도가 안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해도  계속 기도하되 

‘무엇을 생각하고 묵상할까’에 대해 염려를 놓고, 

다만 하느님 안에서의 고요하고 사랑 겨운 지견(智見)에 만족하고, 

그러면서도 하느님을 맛보고 느끼려는 의지도 욕망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 

일체의 집착은 영혼을 어지럽힐 뿐이다.(어둔 밤Ⅰ,10,4).



그러므로 제 힘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한다면 

하느님께서 

영혼의 무위와 화평을 통하여 그 안에 박아 주시고 굳혀 주시는 보화를 

막거나 잃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어둔 밤Ⅰ,10,5).





2) 주부적 관상



주부적 관상은 

하느님께서 무미건조함을 통해 영혼을 인도하시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위에 말한 능동적 정화 때의 능동적 관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능동적 관상은 묵상의 완성과 같은 것으로 

각자의 합당한 노력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것이었고 

결코 무미건조함이 동반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주부적 관상은 묵상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일어나며, 

특히 어떤 감각적 위로도 전혀 없는 가장 심각한 무미건조함을 동반한다. 

이때의 중요한 표징은



첫째, 기도함에 있어서 상상력을 가지고 묵상이나 추리를 도저히 할 수 없고, 

그 전과 같은 맛이 통 없어진다. 

전 같으면  기도에서 단물이 흐르던 것이, 아무런 맛을 느끼지 못한다. 

만약 아직도 재미가 있고 추리도 할 수 있으면 

그 동안은 묵상을 놓을 때가 아니다(산길Ⅱ,13,2).


둘째, 마음의 안팎을 가릴 것 없이 

개별적인 어느 일에 대해 생각을 하거나 감정을 두기가 딱 싫어진다. 

상상을 하거나 마음을 둘 수는 있으나 

다만 그런 일에 일부러 재미를 붙이지 못 한다는 것이다(산길Ⅱ,13,3).


셋째, 영혼은 하느님을 사랑으로 우러러보면서 혼자 있기가 좋아진다. 

이런저런 생각도 없이 

그윽한 평화와 고요와 안식 속에서 

기억, 이성, 의지의 작용이나 이리저리 오가는 추리의 움직임도 없이, 

오직 하나 우리가 사랑 겹다 일컫는 공번된 지견이 있을 따름, 

고요와 안식 속에 하느님과 머무르는 맛을 경험한다(산길Ⅱ,13,4).



여기서 하느님과 함께 머무르는 맛이란 

감각적인 맛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감각은 이미 무미건조함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보편적인 인식(지견)이 영혼 안에서 성장되고, 

이 안에서 영혼은 다른 모든 사물 안에서보다 더 큰 즐거움을 찾게 된다. 


왜냐하면 이 지견이 그에게 평화와 안식과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 묵상과 감성의 자리를 떠나 

관상과 영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적어도 위의 3가지 표징이 자기 안에 있는지 살펴야 한다.


이런 영혼이 가져야 할 태도는 

묵상 중에 추리가 되지 않아 

비록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고요하고 잔잔한 이성을 가지고 

오로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에만 몰두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을 가지기를 마땅히 배워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자시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작용을 방해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느님 사랑에 휩싸인 하느님의 고요와 평화가 

하느님의 오묘하고 숭고한 지견과 함께 

차츰차츰 영혼 안에 내려질 것이다(산길Ⅱ,15,5).




3) 영의 수동적 정화



지금까지 하느님은 감각의 수동적인 밤을 통해 

우리 영혼이 피조물에 대한 정과 맛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감각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무미건조함을 주셨다. 


이 피조물에 대한 무미건조함은 

바로 우리 영혼이 하느님만을 사랑하도록 이끄시는 하느님의 방법이었다.


영의 부분에 있어서는 그러나 

아직도 자신이 영 안에서만은 하느님의 사랑을 계속 받고 있다는 

위안적 의식 안에서 평화와 위로를 느끼고 있었다. 


이에 하느님은 그 안에 안주하려는 영혼에게 

하느님 외에는 어떤 것에도 사랑을 두지 못하도록 

일말의 애착조차 모두 끊어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할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의 사랑을 계속 받고 있다는 

그 사실에 대한 의식마저 영혼에게서 빼앗아 버림으로 

그 영혼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위로마저 제거시켜 

순수하게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하게 하기 위한 참기 어려운 고통을 허락한다.


영의 수동적 밤은 주부적(注賦的) 관상 안에서 일어나며, 

감각의 밤을 통해서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정화를 완성시키는 시기이며 

참기 어려운 고통이 동반되는 극히 고통스런 시기이다.



성인은 이렇게 말한다. 

“감각의 밤이 감각에게 있어서 쓰겁고 무섭지만 

그 둘째 밤의 그 무시무시하고 놀라움이야말로 

어디다 비길 수가 없다 (어둔Ⅰ,8,2).


이 두 번째 밤은 

첫 번째 밤 이후에도 감각적인 집착들의 뿌리가 남아 있기에 

이것을 완성시키기 위해 하느님과의 합일에 큰 장애물인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정화시키려는 것이다.


이 시기의 고통은 

자신의 죄스러움에 대한 괴로움과 기도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인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아 

더 이상 구원에 대한 희망도 없고 

하느님을 사랑할 수도 없는 절망적 상태를 맞는다.



그 상태는 이렇다.

하느님은 영혼 안에 주부적 관상을 내리시는데 

이 관상의 빛과 지혜가 매우 밝고 맑은 반면, 

빛을 받는 영혼은 어둡고 불결하여 

영혼이 자기의 불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괴로움으로 인하여 

영혼은 암흑과 절망 속으로 떨어진다.(밤 11.5.4~5).


그 결과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을 느끼고 

자신이 당연히 하느님께로부터 벌을 받는다는 것을 느끼며 

자신이 하느님에 의해 내쫓김을 당해 

영원히 그분을 모실 수 없다는 것을 느끼는 고통은 

지옥의 고통과도 같은 것이다.(어둔 밤Ⅱ, 6장).


이 밤 안에서 영혼을 괴롭히는 또 다른 아픔은 

기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아픔이다.


“이 어둔 밤이 영혼의 능력과 애착을 묶어 놓은 만큼 

정과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올릴 수가 없고 빌 수조차 없는 것이니”, 

“혹시 기도를 드린다 해도 힘도 맛도 나지 않아서 

하느님께서 들으시지 않는 듯 전혀 무관심하신 듯” 하여 희망이 없고 

도대체 기도를 할 수 없게 된다 (어둔 밤Ⅱ,8,1).


“이를테면 영혼은 수동인 채  하느님께서 그 안에서 일을 하시므로 

영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 

기도도 못하고  의식적으로 하느님의 길에 참여하지도 못한다. 


뿐만 아니라 대개의 경우 실신 상태와 기억 상실에 빠져서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자기가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고, 

또 앞으로 무엇을 하려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오랜 시간을 보낼 정도이다”(어둔 밤Ⅱ,8,1)


그럼에도 이 관상은 훌륭한 선물이어서 

이 선물을 통하여 

마치 불이 녹을 태워 없애듯이 영혼을 태워 버리고, 영혼을 비우고 

온갖 집착과 평생 간직해온 불완전한 습성으로부터 영혼을 정화시킨다. 


때문에 하느님은 영혼으로 하여금 연옥의 고통을 지금 겪게 하신다

(어둔 밤Ⅱ,6장). 

이와 같이 고통을 통해 영혼은 더욱 겸손하여진다(어둔 밤Ⅱ, 7장).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이 영혼으로 하여금 모든 집착에서 해방시켜 

당신을 온전히 사랑하게 하는 방법이다.


하느님의 주부적 관상이 영혼 안에서  모든 자존심을 말끔히 걷어 내고 

모든 이기적인 만족으로부터  영혼을 깨끗이 비움에 따라 

하느님은 더욱 영혼 안에 깊숙이 들어오시고 

영혼을 당신 안에서 변모시키신다. 


이때 영혼은 자신의 새로운 상태를 자각하고  

그것을 마음으로 누리기는 하지만,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 수도 없고  표현 할 수도 없다.


이 체험은  감각을 통해서도, 지성을 통해서도 인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 열매들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니 

오로지 자신이 만족한다는 것, 평온하다는 것, 충족되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하느님을 느낀다는 것, 

모든 것이 좋다고 느끼는 것 등이다 (어둔 밤Ⅱ, 17장).


이렇게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맛이란 맛을 다 떼고 거두시어 

다시는 그 맛대로 즐길 수 없게 만드시는 까닭이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영혼이 오직 하느님 당신만을 사랑하도록 

일체의 낙을 멀리하고 거두어서 

당신과 힘찬 합일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다(밤Ⅱ,11,3). 


이때 인간 편에서 할 일은 

그저 항주덕으로써 하느님만 믿고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




4. 하느님 안에서의 변모



지금까지 영혼은 자신의 사람을 온전히 하느님께로만 집중하기 위해 

피조물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포기함으로써 

하느님과의 합일을 추구해 왔고 (능동적 밤). 

하느님은 그런 영혼을 힘차게 도와 주셨다 (수동적 밤).


영혼에게 있어서 이 수동적 정화는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유익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정화를 통해 

영혼은 하느님께 집중할 수 있고, 

또한 영혼은 밤낮으로 하느님만을 생각하고, 

그분을 만나고, 그분을 뵙고, 

그분을 행복하게 해 드리려는 욕구에 불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고통과 고통을 잇는 고통의 연속은 

바로 자신을 온전히 비우게 하여 오로지 하느님만을 사랑하게 한다 

그러므로 정화는 애덕을 위한 길이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합일은 

“사랑하는 님 안에서 영혼 자신의 전적인 변모이다”(노래B 22,3). 


전적인 변모란 단순한 의지의 합일을 넘어서 

이제는 감각을 포함한 모든 능력들을 하느님 안에 흡수시키고 일치시키는 

전적인 합일을 말한다. 


이 합일을 가능케 하는 것은 성령이시다. 

왜냐하면 이 성령의 은사에 의해  애덕은 더욱 성장되고, 

그로 인해  

하느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즐겁고 그리고 쉽게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세례 때 받은 애덕의 실천을 통한 합일의 완성은  서서히 진행되지만 

영적 결혼의 합일은  향주덕을 완성시키는 성령에 위해 단번에 이뤄진다. 


“하나는 영혼의 발걸음에 맞추어서 조금씩 조금씩 이뤄지지만 

또 하나는 하느님의 발걸음에 맞추어 한 번에 되는 것이다(노래B 23,6).




이와 간이 애덕을 통해 합일에 이른 영혼의 체험 양식들은.


① 그분이 자신의 정배로서 존재하심을 느낀다. 

영혼은 자기 정배이신 하느님의 품안에서 쉬게 되고 

그분께서 진정한 영적인 포옹으로 당신을 안아 주심을 느끼며, 

이로써 하느님의 생명을 함께 누린다 (노래B 22,6).



② 영혼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정배이신 하느님의 신비들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갖게 된다. 



“신랑은 당신의 충실한 반려인 영혼에게 

당신 자신의 기묘한 비밀들을 아주 쉽게 또는 자주 들어내신다. 


왜냐하면 진실 되고 온전한 사랑은 

자기가 사랑하는 이에게 아무 것도 숨겨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특별히 신랑은 신부에게 당신의 강생의 포근한 신비를 알려 주고,

인류 구원을 위하여 취하신 양식들과 방법들과 

하느님의 가장 숭고한 업적들을 알게 된다”(노래B 23,1).



③ 영혼은 자신이 하느님의 생명을 느낀다. 


“영혼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참여로 

자신의 지성과 인식과 사랑의 활동을 하게 되는데, 

하느님과 함께, 또 하느님처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 안에서 이 활동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노래B 39,4).



④ 영혼은 자신의 감각들을 자연의 이성으로 완전히 지배하게 된다 

(노래B 40,5).



⑤ 천상낙원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영혼과 그리스도와의 합일이 완전히 드러나는 곳은 

그곳이기 때문이다 (노래B 40,7).



이와 같은 무(Nada)와 완전성(Todo)이라는 사랑의 법에 끝까지 충실하여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의 대단히 높은 합일을 누리는 영혼은 많지 않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사랑의 단계에 도달한 영혼은 많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영적 결혼이라는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에 도달한 영혼은 

소수에 불과하다(노래B 26,4).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강생을 천주성의 비움으로 묘사한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을 같이 하셨지만 

억지로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시지 않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모두 버리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이 되셨다”(필립 2,6~7).


그리스도의 강생이 자신의 비움을 통해 완성되셨음을 말한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는 것은 자신의 비움을 통해서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는 데도 비움을 통해서 가능하다.


완덕이란 비움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을 십자가의 성 요한은 무(Nada)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무(Nada)를 통해 인간은 하느님과 합일에 이른다. 


그런데 이 무(Nada)는 하느님을 모셔드리기 위한 비움인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피조물로부터 이탈인 무(Nada)는 

하느님으로 채우기 위한 비움이며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한 비움이다.


자신의 포기는 하느님 사랑의 외적 표출이며 

하느님이 인간 영혼 안에 거주하시기 위한 필연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자연히 애덕을 통해 

그 안에 그리스도의 채움(Pleroma)이 이루어진다. 


즉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무(Nada)를 만들고 

이 비움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충만성을 드러내며 

이 비움에 의해 완전한합일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