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영성생활과 애덕(정무웅 신부님) Ⅳ. 결 어 ★영 성

은가루리나 2018. 5. 3. 02:10


moowee 등급변경▼ 조회 521 추천 0 2013.11.05. 17:43



영성생활과 애덕


정 무 웅



I. 들어가는 말


Ⅱ. 합일과의 애덕

 1. 사랑의 본질

 2. 애덕과 자연덕

 3. 애덕의 이중성

 4. 애덕과 계명 그리고 복음적 권고


Ⅲ. 애덕과 정화

 1. 정화의 기도

 2. 정화의 수덕적인 면 1) 감각의 능동적 정화  2) 영혼의 능동적 정화

 3. 정화의 신비적인 면 1) 감각의 수동적 정화 2) 주부적 관상 3) 영의 수동적 정화

 4. 하느님 안에서의 변모


Ⅳ. 결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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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결어




가톨릭에서 Nada처럼 불교에서도 공(空)이나 무(無)를 말한다. 


가톨릭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자 되어라”처럼 

불교에서도 완전한 자가 되는 것이 보편적인 소명인 듯하다. 


열반은 그들의 목적이다 


열반이란 산스크리트어로 Nirvana로서 

‘불꽃이 소멸되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불이 꺼진 상태  연소의 소멸을 가리킨다.


즉 열반은 소위 ‘3독심’이라는 탐․진․치(貪䐜癡)의 소멸로서 

쾌락이나 명예나 축재 같은 욕망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더 이상 마음을 구속하고  이성을 방해하는 일이 없이 

완전히 자유롭고 광활한 심경을 주는 상태로서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말한다.


이처럼 불교의 이론과 실천은 열반의 설명이고 열반의 실천이다. 

열반에 이르는 길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즉  공(空), 무아(無我)이고 무상(無相)으로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생활 태도를 말한다.


이런 측면에서는 가톨릭과 같다. 

그러나 가톨릭이 무(無)나 공(空)을 강조하지만 

불교와 다른 점은 공(空)을 위한 공(空)이 아니라 

(Pleroma)을 위한 공(空)인 것이다.


채움이 목적이라면 비움은 수단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비움이 목적이라면 

가톨릭은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비움을 말한다. 


즉  갈라디아서 2장 20절처럼 

(Ego)의 비움(Xenosis)은 

그리스도의 채움(Pleroma) 위한 것이다.


완전한 하느님과의 합일을 위해서는 

자신 안에  한 점의 티끌이나 애착도 없이  오직 그리스도로 채워야 한다. 

그 때 우리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 성 요한이 말하는 정화란 

비움과 함께 동시에 애덕이 증가하는 장소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열망은 

그만큼 피조물에 대한 애착으로부터의 비움을 전제로 함으로써 

비움과 애덕은 동시에 일어나는  정화 안에서의 현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정화를  끊음과 비움으로만 잘못 인식한다면 

불교에서의 무(無)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애덕은  정화의 과정 안에서 형성되는 본질적인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과의 합일을 목표로 하지만, 

애덕을 추구하지 않는 정화는 열반을 목표로 할 뿐이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 즉 애덕에 대한 교의 신학적 측면과 실천적인 측면을 

십자가의 성 요한의 체험 안에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성삼위 내 주인 하느님 사랑이 우리 안에 가득 찬 합일적 삶일 때, 

이 세상의 모든 악은 사라질 것이다. 

악의 원인은 하느님과의 분열이고  

하느님을 잊은 상태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천주교서울대교구 사제연수원 은총의집 자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