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29 p.144-148 제 2편 제 4장 신뢰 계속 - 難問에 대한 해답 ①

은가루리나 2018. 5. 4. 22:34


제2편 거룩한 위탁과 기초


제1장 이탈

제2장 섭리에 대한 신앙 ②③④

제3장 섭리에 대한 신뢰 

제4장 신뢰 계속 - 難問에 대한 해답 

제5장 천주께 대한 사랑

제6장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제7장 聖主에 대한 모범



p.144



제二편 거룩한 위탁(委託)의 기초(基礎)


제四장 신뢰(信賴) -계속。난문(難問)에 대한 해답(解答) 




「너희의 생각들은 나의 생각들과 다르고、....

실상 하늘이 땅에서 드높으니라。


그렇게 나의 길들은 너희의 길들보다、

나의 생각들은 너희의 생각들보다 드높으니라」(이사야55.8-9) 



신앙이나 자아포기의 정신에 희박한 인간과 천주의 섭리와의 사이에 

허다한 오해가 생기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제 그 중 네가지에 관하여 말하겠다。



1. 천주의 섭리는 그늘속에 감추어져 있지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기를 원한다。


주께서는 제 二 원인에 숨어 계시지만、

그러나 이 원인이 표면에 나타난 그만큼 

더욱 숨어 계신다。


천주 없이는 

제 二 원인은 무력(無力)하며、존재할 수도 없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천주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대신에 

유쾌한 또는 불쾌한、다소 신비에 싸여 있는 

외적사실(外的事實)에 머문다는 과오에 떨어진다。


천주께서는 특히 목표로 삼으시는 목적、

우리를 이 목적에 이끄시는 수단、

이미 밟아온 길을 우리에게 알리지 않으신다。


그런데 우리는 천주께 맹목적(盲目的)인 신뢰를 두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그 섭리를 알려고 바라며、

감히 그 설명까지도 요구하려 든다。



유아(幼兒)는 어머니가 자신을 어디에 데리고 가는가、

어째서 다른 길이 아니고、이 길을 택하는가 따위를 알기 위하여 

마음을 괴롭히겠는가


환자는 자신의 건강도 생명도、온통 의사에게 맡겨버리지 않는가。

의사는 단지 인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헌신적 노력(獻身的努力)과 학식(學識)과 그 기술 때문에 

사람은 그룰 신뢰한다. 


더구나 

전능하신 의사、비할 바 없으신 구세주 천주에게는 

그보다 무한히 신뢰하여야 되지 않겠는가。


적어도 우리의 주위가 온통 암담하게 되어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까지도 이미 알지 못하게 된 경우에、

겨우 한 줄기의 빛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아、만일 그러한 때에、

은총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만사가 좋은 결과가 된다는 것을 깨닫기만 한다면!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사람은 그것이  완성된 때가 아니면、

거룩한 기술자의 기능을 이해하지 않는다」(「현대의 한 신비자」二三七) 


천주께서는 사람이 

순수한 신앙에 만족하고、

암흑의 한 복판에 있어서도 평온한 마음으로 당신께 온전히 신뢰하기를 

바라신다。


이래서 고통의 제 一 원인은、위에 말한 바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p.145


2. 천주의 섭리의 목표는 우리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추구해야 할 목적과 것에 이르기 위한 수단에 관해서도 그러하다。


세속적 정신을 온전히 벗어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지상에 천국을 찾아내려고 하든지、

또는 적어도 장미의 꽃밭 길을 통하여 거기에 가려고 한다。


사람이 적도 (適度)를 벗어나서、

선인(善人) 의 존경、근친 (近親) 의 애정 (愛情)、

신심 (信心)의 위안 (慰安)、내적평화(內的平和)등에 애착하여 

그래서 굴욕(屈辱)、당황、질병、각가지 형태의 시련 등을 

너무나도 좋아하지 않는 것은 거기에 유래하고 있다。


위안이나 성공은、

우리의 눈에 많거나 적거나 선덕(善德)의 보수와 같이 보이고、

내적건조 (內的乾燥)와 역경(逆境)은 

악덕(惡德)의. 벌과 같이 여겨지며、

이 세상에서 악인이 부귀영화를 누리고、선인이 고통을 겪는 것을 가끔 보고는 

우리는 의아심을 품는다。



이에 반하여、

천주의 뜻은 지상에 있어 우리에게 낙원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받기에 맞갖도록、

그리고 가급적 아름다운 천국을 얻어 누리는데 맞갖은 공로를 

우리에게 쌓게하는 것이다。


만일 죄인이 완고하게도 멸망의 길에 머물러 있으려 한다면. 

그가 행한 사소한 선업(善業)의 보수를 

현세에서 받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p.146)



그러나 간선된 이는 그 보수를 천국에서 받는다。


그 때까지는、

그들이 자신을 정화(淨化)하고、성화(聖化)하며、

커다란 공로를 쌓는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시련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극히 유익하다。


그래서 천주께서는 당신의 엄격한 

그리고 가장 현명한 애정의 속삭임에만 귀를 기울여、

우리로 하여금 영광의 예수와 더불어 지배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 안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의 모습을 재현(再現)시키려고 

활동하신다。



주께서 권장하신 「진복팔단」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가 과연 있겠는가. 


그러기에 주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그 벗에게 십자가를 보내시는 것이다。



주께서는 성녀 「데레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고난에 완전히 충만되었던 내 생애를 묵상하라。


나의 성부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는 이는、

가장 많은 십자가를 받는 이라는 것을 굳게 믿어라。


성부의 사랑의 정도는 그 보내시는 십자가의 정도와 비례하고 있다。


나의 너에게 대한 특별한 총애는、

내가 자신을 위하여 바라는 것을、너를 위해서도 바란다는 것 이외에 

너에게 증명할 방법이 있겠느냐(성녀 데레사「자서전」부록) 라고. 


참으로 이것은 거룩하고 현명한 말씀이다. 


그러나 이것을 깨달은 자 얼마나 적은가。

그래서 거기에 둘째 오해의 원인이 있다。



p.147


3. 섭리의 손은 엄하게 채찍질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본능은 불평한다。


정욕은 끓어오르고 오만(傲慢)은 유인하며、

의지는 그것에 이끌리고 만다。


죄로써 몹시 상처를 입고 있는 우리는 

지체(肢體)가 탈저(脫疽)에 걸린 병자와도 같다。


그것을 절개(切開)하는 것밖에는 살아날 길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자신이 손을 댈만한 용기가 없다。



사랑에 있어 나약함을 모르시는 천주께서는 

이 고통스러운 수술을 떠맡아 주신다. 


그래서、천주께서는 

우리가 예기치 못하는 곤경、고독、모욕、천대、재산의 손실、

우리를 좀먹는 질병등을 보내신다。


이러한 것은 모두 탈저(脫疽)에 걸린 지체를 잡아 매고、

한 부분에 손을 대어 그것을 절개(切開)하고 

살을 깊이 도려내기 위한 여러 연장(道具)인 것이다。



우리의 본능은 이 때 아우성을 치지만、

천주께서는 조금도 그것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신다。


그것은 

이 가혹한 치료야말로 완쾌와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닥치는 이러한 해악(害惡)은、

우리의 내부에 일어나는 것을 짓누르고、 

미혹(迷惑)에 방황하는 자유의지를 제어하며、

미쳐날뛰는 정욕에 재갈을 먹이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거기에 

천주께서 우리의 계획에 장해가 되는 것이 

사방팔방에서 닥쳐 오는 것을 허락하시는 까닭이 있다。



또한 우리의 일이 그렇게도 고난의 가시에 뒤덮이고、

그렇게도 갈망 (渴望)하는 평온을 결코 맛볼 수 없으며、

장상(長上)이 가끔 

우리의 의지에 전연 상반(相反)되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거기에 

본능이 그렇게도 많은 나약함을 지니며 

직무에는 그렇게도 많은 싫증이 수반하고、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은 불의(不義)에 고민하며、

그 마음에는 그렇게도 많은 번잡스러운 변동이 있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모든 방면으로부터 허다한 상이(相異)한 반대로 공격받는 것은、

너무나도 방종한 우리의 의지가 이렇게 하여 단련되고 압박되며、

도처에서 피로하고、드디어 자신을 이탈하여 

천주의 의지 이외에는 이미 아무 것도 바라지 않게 되기 위해서이다。

(「러. 마르샹」신부 「성 이냐시오의 심령수업」五편 五장) 


그러나 우리의 의지는 끝까지 죽는 것을 거부한다。 


그래서 마음의 알력 (軋轢)의 셋째 원인이 거기에 존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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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섭리는、때때로、외관상 엇나간 방법을 사용하신다。


「저의 판단심의 깨닫기 어려움이여」(로마서11.33)고 있는 것과 같이、

천주의 판단하심의 이유를 깊이 깨닫는 것도、

그것을 실시하시기 위하여 택하시는 길도 알 수 없다。


「천주께서는 누구에게 무슨 역할을 부과시키실 적에는 

우선 그 사람을 무(無) 로 돌아가게 하신다。


죽음은 천주께서 생명에 인도하시는 통상의 길이다。

누구도 천주께서 어떤 길을 밟으시는지 모른다」(「게」주 교「위탁」二) 


그 위에 또한 천주의 활동이 어떻게 하여 신자의 행복에 유익한지、

우리는 그것을 내다볼 수도 없고、

도리어 자주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도 있다。




여하튼 

만사를 완전히 배합(配合)하시는 천주의 예지(數智)를 흠숭하자。


이 천주의 예지는 장애(障碍)까지도、수단으로 사용하시고、

또한 허락하시는 해악(害惡)에서、원하시는 불변의 선(善) 

즉 성부의 영광이 되는 성교희와 사람들의 영혼의 진보발전을 

꼭 항상 거기에서 이끌어 내신다는 것을 

깊이 확신하여야 한다。


따라서、우리가 만일 만사를 천주의 영광에 비추어 바라본다면、

이 세상에서는、

흔히 불행은 불행이 아니며、행복은 행복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실제、

섭리의 타격(打擊)인 불행도 있고 벌(罰)이 되는 성공도 있다。


이제 무수한 보기 가운데서 몇을 들어、

이러한 진리를 될 수 있는대로 명백히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