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31 p.157-161 제 2편 제 5장 천주께 대한 사랑 ①

은가루리나 2018. 6. 1. 23:22


제2편 거룩한 위탁과 기초


제1장 이탈

제2장 섭리에 대한 신앙 ②③④

제3장 섭리에 대한 신뢰 

제4장 신뢰 계속 - 難問에 대한 해답

제5장 천주께 대한 사랑 

제6장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제7장 聖主에 대한 모범



p.157



제二편 거룩한 위탁(委託)의 기초(基礎)


제五장 천주께 대한 사랑 




거룩한 위탁은 

사랑과、어린이와 같은 신뢰에 충만한 성지(聖旨)에의 완전한 적합이며、

사랑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그것은 사랑의 당연한 결실(結實)이므로 

영혼이 사랑에 살게 된다면、

또한 동시에 위탁에도 살게 된다。


실제、

사람을 천주에게、인간의 의지를 천주의 의지에 긴밀하게 일치시키는 것은 

사랑의 특징이다。


그리고 이 적합(適合)의 완전성(完全性)은 

온전한 이탈과 신앙과 신뢰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오직 거룩한 사랑만이、우리를 거기에까지 높이는 것인데、

더구나 거의 본능처럼 우리를 거기에 이끈다。



사랑은 완전한 이탈에 의하여 마음을 위탁에 준비시킨다。


위탁의 실행이 습관적으로 되기 위하여、

자아의 참된 사멸(死滅)이 요구된다。


이 자아의 사멸은 다른 각가지 원인에게서도 시작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러한 원인은 

이 사멸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섬세함과 힘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에는「죽음처럼 강한 사랑」이 필요하다。

참으로 사랑이야말로 훌륭하게 거기에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사랑은 모든 것을 잊고 남김 없이 자신을 주며、

그리고 분할(分割)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그 성질이기 때문이다。


즉、사랑은 가장 사랑하는 분에게만 시선(視線)을 돌리기를 바라며、

가장 사랑하는 분만을 찾고、

가장 사랑하는 분이 기뻐하시는 것만을 전부 사랑한다。




성「알퐁소」는 말한다。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은、

우리를 온전한 무관심상태(無關心 狀態)에 둔다。


단 것도 쓴 것도 무차별(無差別)하게 되며、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은 조금도 바라지 않고、

천주의 뜻에 맞는 것은 모두 자기도 원하게 된다。


사소한 일이나 큰 일도、유쾌한 일이나 불쾌한 일도 

같은 만족으로써 수행하며、

천주를 기쁘게만 해드리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모든 것을 좋게 여긴다。


이것이야말로 완전에 도달한 사랑의 강함이라고 

성녀데레사』는 말하고 있다。


사랑은 사람이 그 사랑하는 분을 만족시키려는 일념에서 

자신의 모든 이익과 즐거움을 잊게한다。」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사랑」九장)



p.158


그리고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는 미려한 말로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만일 내가 사랑하는 분이 나의 구세주 뿐이시라면、

어찌 나는『다볼』산과 마찬가지로갈바리아』산도 사랑하지 않겠는가。


왜냐 하면、실제 구세주께서는 그쪽에도 이쪽에도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에집트』를 사랑하지 않드라도、

에집트에 있어서의 구세주를 사랑한다。


어떻게 나는 축연(祝宴)을 사랑하지 않고서、

나병자시몬』의 축연에 있어서의 주를 사랑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만일 내가 

모독(冒漬)을 사랑하지 않고서 모독을 당하시는 주를 사랑한다면、

어째서 향유(香油)와 그 향기를 사랑하지 않고서 

막달레나』의 값비싼 향유로 도유(塗油)되시는 주를 사랑하지 않겠는가」

라고. (「성인전」五장) 

그리고 성인은 그 말대로 실천하였다。




사랑은 신앙을 한층 생생한 것으로 하고、

신뢰를 견고한 것으로 함으로써 위탁을 준비한다。 


물론 정욕의 안개가 가시고、선덕(善德)이 성장함에 따라、

신앙은 뚜렷하게 되고 마음은 희망에 열린다。


그러나,

사람은 일치(一致)의 길에 이르렀을 때에는 

그 확신은 더욱 더 찬란한 것이 되며、

천주와의 친교(親交)는 

신뢰와 친밀에 충만한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이 된다。


특히 어떤 영혼은、

자신이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과、

또한 더욱 깊이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경험했을 적에、

그리고 만일 천주께서 이 영혼을 고통스러운、

그러나 은혜가 풍부한 수동적 정화의 도가니 안에서 세련(洗練)하신다면、

더욱 그러하다。


마치、유아는 

어머니가 자기에게 그 마음의 전부를 주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으므로、

불안 없이 어머니의 품에 안기며、

신뢰하고 자신을 맡기고 있는 것과 같이、


영혼은 

「나의 생명도、나의 죽음도 나의 영원도 그 손 안에 쥐시는 것은、

나의 마음의 천주、열애하는 천상정배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며、

그리고 천주께서 바라시는 것만이 나에게 이루어지고、

그리고 바라시는 바는 내세를 위하여、

현세를 위해서까지도 나의 최대의 선익(善益)이 되는 것뿐이다라고 

스스로 말 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


영혼은 비로소 정신의 온전한 평화를 맛보면서、

자신을 천주의 섭리에 맡긴다。



이렇게 하여, 거룩한 사랑은 모든 정(情)을 끊어버리고、

우리의 신뢰와 신앙에 마지막 손질을 하여 위탁에의 준비를 완료한다。


거기에 남는 것은、

사랑이 어떻게 직접으로 위탁을 자아내는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p.159


완전한 사랑은 완전한 위탁의 어머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사랑을 받는 이에게 결합시켜、

양자를 하나로 하는 쇠사슬이다. 


이에 반하여、

증오(憎惡) 는 우정(友情)이 맺은 사람들을 서로 예어놓는 것이다。


사랑이 자아내는 일치는 각별히 의지(意志)의 일치이다。



사랑은 서로 사랑하는 이로 하여금 

어떤 일에 관해서도 선덕(善德)이 손상되지 않는 한、

같은 원의(願意)와 같은 혐오(嫌惡)를 품게 한다。


마찬가지로、증오는 

그 혐오하는 상대방의 그것과는 정반대(正反對)의 감정과 애정을 

마음에 넘치게 한다。


따라서、의지에의 일치와 적합(適合)과는 사랑으로써 측량되고、

사랑이 적을 때에는 적합(適合)도 적고、

사랑이 평범(平凡)하면 일치(一致)도 평범하며、

사랑이 전체적(全ft的)이면 적합 역시 전체적이라고 결론을 지어야 하리라。

 (성「쥬르」 신부 「오 주 예수,그리스도의 인식과 사랑」三편 八장)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초심자(初心者)는  단지 체념(諦念)과 순종에 머무르며、

진보의 단계에 있는 이는  보다 탁월한 적합(適合)에까지 오른다。


완전한 사랑이 없으면 완전한 적합에 도달할 수 없는데、

그러나 완전한 사랑으로써는 확실히 거기에 도달한다。


내 생각이 보다 잘 이해되도록 더 자세히 말해보자。


p.160


성 「요왕」의 말에、

「사랑에 머무르는 이는 천주 안에 머무르며、

천주 또한 저안에 머무시느니라」(요안 一서 4.16) 고 하심과 같이、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이 향하는 종점 (終點)이 일치라는 것은 누구나가 아는 바이다。

경험은 신앙과 마찬가지로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사랑의 고유한 움직임은 

피조물을 천주에게 그리고 천주를 피조물에게 넘겨주는데 있으며、

그것은 양자를 서로 융합시킨다。


이 일치에의 움직임이 없는 곳에는、

이미 천주와의 참된 우정(友情)은 없다。


천주께서 사랑의 포옹으로써 그 품에 우리를 힘있게 안으실 때、

우리는 전력을 기울여、천주와 일치하며、 

천주 안에 온전히 녹아 들어가、

천주와 하나로 될 때까지、

아직도 한없이 힘있게 천주를 포옹하려 한다。



천주께서 보다 열렬하게 당신을 찾도록 하시기 위하여、

사랑의 기교 (技巧)로써 자신을 감추실 때、

천주를 잃었다고 근심하는 가련한 영혼은 

사랑에 충만된 불안을 지니고 도처에 천주를 찾아간다。


이것은 실로 

하나의 괴로운 요구、충족되지 못하는 굶주림、풀수 없는 갈증이다。


천주는 그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될 분이시며、

이미 그는 천주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자신은 흠숭하여야 할 천주의 성의를 수행하여、

천주께서 어여삐 여기신다는 생각과、

후일 천주를 더욱 완전히 찾아낸다는 희망 외에는 

천주를 잃은 이 영혼의 외로움을 위안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영혼은 내세에 있어 

마음껏 천주를 사랑하고、찬미하며、천주와 일치하기 위하여 

말하자면 천주를 무한히 소유하려고 바란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이 세상에 있어 끊임 없이 천주를 찾고、

항상 보다 밀접한 사랑의 일치를 동경한다。


이 일치는 천주께서、원하실 때에、

천주를 소유할 수 있다는 감미로운 감정을 맛보게 하시는데、

거의 항상 이 일치에 있어 

욕구(愁求)와 원망(願望)과 거센 노력이 지배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영혼은 천주와 일치하고、

다른 경우에는 천주와 일치하려고 하지만、

어떤 경우에 있어서나 같은 사랑의 움직임이 

천주를 소유하려는 열렬한 원의(願意)에 의해서 

우리를 자신 밖에 끌어내어  천주 안에 던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