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신부님 강론

연중 제5주일(2012, 2, 5) ▣ 주일강론

은가루리나 2018. 5. 24. 16:50

moowee 등급변경▼ 조회 285 추천 0 2012.02.03. 21:37

 

 

< 연중 제5주일 > 2012,2,5

 

 

옛날에 우리 신자들 사이에 많이 읽혀지던 

루이제 린저의 책 제목이 생각난다.

"왜 사느냐 묻거든" 이다.

 

여러분,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한 분 씩 돌아가면서 마이크를 드리면서

"자매님은 왜 사세요? 형제님은 왜 사세요?" 라고 질문을 드리면

여러분은 모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질문에 대한 대답이 즉시 빨리 나오는 분은 삶의 목적이 뚜렷하신 분이고,

반대로 그렇지 못하신 분들은 그 반대일 것이 분명하다.

 

어떤 일이든지 목적이 뚜렷하면 그 일에 활기가 생기며

그 일을 하는 자체가 즐겁고 기쁘고 행복으로 느껴진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잠시 우리 각자가 자신에게 물어보는 시간을 갖겠다.

"나는 왜 사는가?",,,,,,,,,,,,,,,,,,,,,,,,,,,,,,,,

 

저는 강론을 통해서나 제 카페의 글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저의 삶의 목적을 말씀드린 적이 있다.

 

제가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은

"많은 영혼들을 구원시키는 것" 이 제 삶의 목적이고,

그것이 저의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씀드렸었다.

 

그래서, 가끔가끔 제 자신에게 질문해 보게 된다.

제가 병을 얻지 않고 그저 건강히 평범한 삶을 사는 사제였다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해 드릴 수 있었을까?

 

 

절대 아닐 것이 분명하다.

제가 웃 어른들로부터 일을 잘하는 신부로 인정받고

많은 교우들로부터 강론을 잘하는 신부로 인정을 받는 사제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수단이 될 수 있었을까?

 

절대 아닐 것이 분명하다.

강론을 잘하고 강의를 잘하고 일을 잘해도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잠시 고양시켜 줄 수 있었을 뿐이지 

시간이 지나가면 다 도루묵이 되는 것이다.

 

좋은 강론이나 강의에 감화되어 완전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벌써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뿐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저는 분명히 달라졌다.

이제 저는 절대 과거의 이해욱 신부가 아니다.

과거의 이해욱 신부는 이미 병으로 죽었다.

 

이제 오늘의 이해욱 신부는 새 인간으로 갈아입은 이해욱 신부이다.

새사람 이해욱 신부는 그가 스스로의 피나는 기도와 수행으로

새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었는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가 그 스스로의 노력으로 새 인간, 새 사제로 태어날 수 있다면,

백 년이 흘러도 천년이 흘러도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새 인간, 새 사제로 태어날 수 있었는가?

어느분이 한 번 저 대신 대답해 주시기 바란다.

 

 

그렇다!

그는 부족하고 허물 많고 죄스런 자기 자신을 

전능하신 하느님께 내맡겼기 때문이다.

그 이유 한 가지밖에 없는 것이다.

 

현재도 엄청나게 부족하고 허물 많고 죄스러워도

그의 모든 일을 하느님이 다 해 주시기 때문에 

그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말 과거의 이해욱 신부는 모든 일을 자기가 해야 했고 해왔다.

그러나 지금의 이해욱 신부는 거의 자기가 스스로 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시키는 일만 한다.

하느님이 저에게 시키는 일은 단 한 가지, "내맡김의 영성을 전하는 것" 이다.

 

저는 사람들에게 내맡기는 방법만을 전할 뿐이고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뒤에서 다 해 주신다.

 

곰은 재주를 부리고 돈은 주인이 벌듯이

재주는 이해욱 신부가 부리고 영혼은 하느님이 구원하신다.

 

 

곰과 주인은 한 패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일이 이신부 일이 되고 

이신부 일이 하느님의  일이 되는 것이다.

 

지금의 이신부는 하느님께 그냥 자신의 몸만 빌려드릴 뿐이다, 

정말이다!

세상에 어디 이런 일이 다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진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나 다 가능하다.

 

하느님께 내맡기기만 하면 누구나 그렇게 살 수가 있는 것이다.

내맡김의 화살기도의 위력만 믿고 열심히 노래 부르면 

구나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과 같은 목적을 지니게 된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바라는 가장 큰 목적은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이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었다." 고 코린토인들에게 고백한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밝히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라고 말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많은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

 

제1독서의 욥과 같은 불쌍한 많은 영혼들을 구원해 주어야 한다.

바오로 사도가 고백한 대로 

그것은 우리의 "어쩔 수없는 의무" 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의 영혼만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주어진 능력대로 여러 영혼들을 구원해야 한다.

 

어떤 방법으로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어느 방법이 가장 쉽고 탁월하겠는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사랑하는 식구 여러분!

 

제가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가 <봉사자>였습니다.

과거의 좋지 않은 기억들 때문이었습니다.

 

사제생활 지난 4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이름만 '봉사자'이지 <봉사>라는 이름을 뒤집어 쓰고

그 이름을 통해서 자신의 <에고>를 채우는 모습들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특히 최근에는,

<봉사>라는 이름 위에

삼위(三位)이신 <하느님>의 이름을 통해서

자신의 '욕심'을 이루려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칠 전 저는 특별히 떠오르는 단어가 없어

<*봉사직* 임명 권한 이양>이라는 제목의 게시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봉사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제 마음 한켠에 찜찜한 마음이 자리잡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사랑하는 보조교사 무화님의 댓글 중,

 

<하느님섭리에내맡김(韓) 

제3장 - 01 하느님께 순종함은

모든 덕을 실행하는 것이다>를 발견하게 되었고

저는 거내영의 하느님 일꾼들을 <사도>로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우리 보조교사들을 <사도>라고 부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여기 저기 여러 신심단체에서 '봉사자'들을 '사도'라 칭하는 곳이 많았기에

저는 이미 그 생각을 접어버렸던 것입니다.

 

<하느님께 완전히 자신을 내맡긴 사람들

그들이 그렇게 현존하고 행위하는 모든것은 커다란 힘을 발휘합니다.

 

그들의 삶은 설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들입니다.>(하섭내 3,1)라는 말이,

 

오늘 <끊지기 소개방>이라는 게시판의 이름을

<거내영 사도들>이라는 이름으로 변경케 해 주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식구 여러분!

 

<하느님 이름>으로 모인 '무리'들의 이름이 어떻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반드시 <하느님의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이름의 모임이든!

 

하느님의 이름을 내걸어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는 모임이나 단체는

그 하는 일이 아무리 거룩한? 일이라 하여도 그것은 분명,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그저 <사람의 일>이 될 뿐입니다!

아니, 보통 일반 사회인들의 일보다 더 못한 일?이 될 뿐입니다.

 

그러한 곳에서 드러나는 공통된 모습은

시기, 질투, 험담, 다툼, 갈등, 분열뿐입니다.

 

 

 

사랑하는 식구,

하느님의 뜻을 같은 양식으로 먹고 사는 여러분!

 

이곳의 모든 이는

자신의 뜻을 버리려고 또 이미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 모인 이들의 모임입니다.

 

저는 우리 이 모임이 그리스도교의 많은 신앙단체들 중에서

그 어떤 단체들 보다 참으로 <영성지수>가 높은 단체라고 굳게 믿습니다.

 

영성지수를 어떻게 잴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신앙하는 단체의 영성지수의 척도는 단 하나!

<자신이 신앙하는 하느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는가?>입니다.

 

하느님 신앙의 가장 높은 영성지수는,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2-14)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식구 여러분께서는

가장 친한 친구 하느님(예수님)을 위하여

이미 <여러분의 모가지>를 바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가장 높은 영성지수의 소유자입니다.

우리 모두는 가장 높은 영성지수의 집단(단체)입니다

 

 

사랑하는 식구 여러분!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집단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선배님들은 왜 하느님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바쳤습니까?

 

 

 

~~~~~~~~~~~~~~~~~~~~~~~

 

 

 

 

 

[moowee 등급변경▼ 조회 285 추천 0 2012.02.03. 21:37

< 연중 제5주일 > 2012,2,5



옛날에 우리 신자들 사이에 많이 읽혀지던
루이제 린저의 책 제목이 생각난다.
"왜 사느냐 묻거든" 이다.


여러분,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한 분 씩 돌아가면서 마이크를 드리면서
"자매님은 왜 사세요? 형제님은 왜 사세요?" 라고 질문을 드리면
여러분은 모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질문에 대한 대답이 즉시 빨리 나오는 분은 삶의 목적이 뚜렷하신 분이고,
반대로 그렇지 못하신 분들은 그 반대일 것이 분명하다.

어떤 일이든지 목적이 뚜렷하면 그 일에 활기가 생기며
그 일을 하는 자체가 즐겁고 기쁘고 행복으로 느껴진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잠시 우리 각자가 자신에게 물어보는 시간을 갖겠다.
"나는 왜 사는가?",,,,,,,,,,,,,,,,,,,,,,,,,,,,,,,,


저는 강론을 통해서나 제 카페의 글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저의 삶의 목적을 말씀드린 적이 있다.

 

제가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은
"많은 영혼들을 구원시키는 것" 이 제 삶의 목적이고,
그것이 저의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씀드렸었다.

그래서, 가끔가끔 제 자신에게 질문해 보게 된다.
제가 병을 얻지 않고 그저 건강히 평범한 삶을 사는 사제였다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해 드릴 수 있었을까?


절대 아닐 것이 분명하다.
제가 웃 어른들로부터 일을 잘하는 신부로 인정받고
많은 교우들로부터 강론을 잘하는 신부로 인정을 받는 사제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수단이 될 수 있었을까?

절대 아닐 것이 분명하다.
강론을 잘하고 강의를 잘하고 일을 잘해도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잠시 고양시켜 줄 수 있었을 뿐이지
시간이 지나가면 다 도루묵이 되는 것이다.

좋은 강론이나 강의에 감화되어 완전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벌써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뿐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저는 분명히 달라졌다.
이제 저는 절대 과거의 이해욱 신부가 아니다.
과거의 이해욱 신부는 이미 병으로 죽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새 인간, 새 사제로 태어날 수 있었는가?
어느분이 한 번 저 대신 대답해 주시기 바란다.

그렇다!
그는 부족하고 허물 많고 죄스런 자기 자신을
전능하신 하느님께 내맡겼기 때문이다.
그 이유 한 가지밖에 없는 것이다.

현재도 엄청나게 부족하고 허물 많고 죄스러워도
그의 모든 일을 하느님이 다 해 주시기 때문에
그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말 과거의 이해욱 신부는 모든 일을 자기가 해야 했고 해왔다.
그러나 지금의 이해욱 신부는 거의 자기가 스스로 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시키는 일만 한다.
하느님이 저에게 시키는 일은 단 한 가지, "내맡김의 영성을 전하는 것" 이다.

저는 사람들에게 내맡기는 방법만을 전할 뿐이고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뒤에서 다 해 주신다.

곰은 재주를 부리고 돈은 주인이 벌듯이
재주는 이해욱 신부가 부리고 영혼은 하느님이 구원하신다.


곰과 주인은 한 패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일이 이신부 일이 되고
이신부 일이 하느님의 일이 되는 것이다.

지금의 이신부는 하느님께 그냥 자신의 몸만 빌려드릴 뿐이다,
정말이다!
세상에 어디 이런 일이 다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진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나 다 가능하다.

 

하느님께 내맡기기만 하면 누구나 그렇게 살 수가 있는 것이다.
내맡김의 화살기도의 위력만 믿고 열심히 노래 부르면
누구나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과 같은 목적을 지니게 된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바라는 가장 큰 목적은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이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었다." 고 코린토인들에게 고백한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밝히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라고 말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많은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

제1독서의 욥과 같은 불쌍한 많은 영혼들을 구원해 주어야 한다.
바오로 사도가 고백한 대로
그것은 우리의 "어쩔 수없는 의무" 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의 영혼만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주어진 능력대로 여러 영혼들을 구원해야 한다.

 

어떤 방법으로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어느 방법이 가장 쉽고 탁월하겠는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moowee 2016.02.09. 22:01


저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또한, 분명 저를 통한 여러분도 저와 같은 사명을 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받은 같은 사명은,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을 통한 세상구원>입니다, 세상 구원!

.....

거룩한 내맡김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난 우리만 행복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모든 이들도 행복해야 합니다, 다함께 행복해야 합니다,
'참으로 부족한 우리를 통하여' 말입니다.]


 


[moowee 2017.12.09. 11:42



지금 <내가 사는 목적>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하느님 아버지의 가장 소중한 영혼들,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시키는 일이며
그것이 나의 사명이며 내가 사는 목적이다.

나의 사명이며 내가 사는 그 목적을 통하여
<아버지의 완전한 영광>을 이 세상에 크게 드러내 드리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