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32 p.161-165 제 2편 제 5장 천주께 대한 사랑 ②

은가루리나 2018. 6. 8. 21:33


제2편 거룩한 위탁과 기초


제1장 이탈

제2장 섭리에 대한 신앙 ②③④

제3장 섭리에 대한 신뢰 

제4장 신뢰 계속 - 難問에 대한 해답

제5장 천주께 대한 사랑 

제6장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제7장 聖主에 대한 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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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二편 거룩한 위탁(委託)의 기초(基礎)


제五장 천주께 대한 사랑 




이 마음과 마음과의 일치에서 의지와 의지와의 일치가 생긴다。


우리가 천주께 대한 열렬한 사랑에 불타오르고 

남김 없이 우리 의지까지도 당신의 것으로 하며、

우리는 이미 아무 것도 천주께 거절하지 않게 된다。




천국에 있어서는 조금도 섞임이 없는 행복의 생인 사랑의 환희 안에 

천주와의 일치를 맛본다. 


지상에 있어서는 우리는 천주와의 일치를 

「다볼」산 위에서보다도、오히려 「갈바리아」산 위에 있어 자주 발견한다。


희열(喜悅)에 있어서의 일치는 드물고 순식간이며、

일반적으로 그 전후에 고통이 수반되고 있다。



탈혼(脫魂) 중에 「상달」의 성녀 「요안나」는 


「천주를 즐기는 것은 천국에 있어서의 사랑의 양식인 것과 같이、

천주를 위하여 고통을 겪는 것은 지상에 있어서의 사랑의 양식이다」

 (「보고」주교「성녀전」五장)라는 것을 천주로부터 묵시되었다



주께서는 또한 「젤뜨루다· 마리아」동정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고통이 없이는 일치는 얻을 수 없다。

그대는 이 암흑의『턴낼』을 통과하여 비로소 진실로 나를 사랑하리라. 

나는 고통으로써 나의 감실을 정화(淨化)하느니라」고. 

(「한 신비자」九八、九九、一四三) 



실제 영혼이 정화(淨化)되고、이탈하며、 장식되고、

그로써 천주와의 일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통이 필요하다。 


또한 이 일치를 기르고、해이(解弛)하는 것을 방지하며、

이것을 증진(增進)시키기 위해서도 역시 고통이 필요하며、

사랑의 열렬함만으로는 불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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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사랑은 단지 받는 것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주는 것에 의하여 더욱 살게 되는 것이며、

그 가장 탁월한 양식은 항상 희생이다。


인간적인 일에 관해서도 그러하다. 


가장 어머니의 고통과 눈물의 씨가 된 어린이는 

가장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않겠는가。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천주를 위하여 진력(盡力)하는 정도에 있어 천주와 결합되는 것이다。


희생을 항상 함으로써 굳어질 때에、

마음과 의지의 일치는 반드시 가장 견고한 것、

말하자면 확고부동한 것이 된다。



그러나 사랑의 감미로움에서 나온 일치는 

그 감미로움이 사라진 후에도 아직 계속될 것인가。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여하튼 

이 일치는 시련에 의해서 견고하게 되고、

시련에 의해서 그 진가(眞價)가 발휘되어야 할 것이다。



천주께서 더할나위 없는 부드러운 애정을 우리에게 낌 없이 주시고、

그리고 마치 아버지가 그 사랑하는 아들을 품에 껴안는 것과 같이、

우리를 애무하실 때에는 


우리의 영혼은 감동되고 숨이 가빠지며、

황홀(恍惚)하게 되고 자신을 이탈하며、 

남김 없이 자신을 바치고 

진심으로 자신을 천주께 바친다。




그렇지만、자애심(自愛心)은 아직 온전히 죽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자애심은 이 흥겨운 감미로움 안에서까지도、

가장 맛있는 양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천주의 애무(愛撫)의 사업을 완성하고、

본성(本性)의 패배(敗北)와 거룩한 사랑의 지배를 

견고한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감수(甘受)된 장기간에 걸친 고통스러운 시련의 작용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꺼이 십자가에 못박힌대로 머물러 있자。

왜냐 하면、 우리 영혼이 태어난 것은 「갈바리아」에 있어서이며、

생명을 발견하는 것은 항상 십자가 위에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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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고난은 거룩한 사랑의 불가결한 그리고 매우 양분이 풍부한 양식이다。



「젤뜨루다·마리아」동정은 이것을 주장하고 있다。


즉 오주께서는 그에게 많은 고난을 주시고、굴욕을 허락하셨으며、

그 무력을 깨닫게 하시고、

자신의 무익(無益)함을 통감시키는 은총을 주심에 따라 

그는 주께서 당신을 더욱 더 밀접하게 자기에게 주시고、

자기 마음을 타오르게 하셨음을 인정하였다。



「신적(神的) 사랑은 고뇌 안에서 성장한다。

고뇌가 혹심하면 혹심할수록 거룩한 사랑의 열렬함도 더욱 활발하게 된다. 


슬픔이 그 영혼을 누르면 누를수록 

그는 치열하게 신적(神的) 사랑의 불꽃을 느끼며、

그 마음에서는 스스로 불과 같은 말이 솟아나는 것이었다。」



주께서는 자주 병으로써 그에게서 영성체의 기쁨을 앗으셨지만、

그러나 이 성체의 빵의 결핍을 보충하시어 

고난의 빵을 보다 풍부하게 주셨다。


요컨대、

「고뇌는 예수께서 그를 기르려고 하신 가장 양분이 풍부한 빵이었다」

그는 이것을 이해하여 이 하늘의 양식에 결코 흡족하지 않도록만 바랐다。

(「한신비자 一三, 一○九、一三一)






이것은 모든 위대한 영혼의 태도이다。


즉、그처럼 열망하고 있는 천주와의 일치에 도달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러한 영혼은 수화(水火)를 불사(不辭)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결코 고통에 대하여 무감각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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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랑은 고통을 부드럽게 하고 더구나 고통을 바라게 하여、

이것을 추구시킨다. 



「젤뜨루다· 마리아」동정은 말했다.


「얼마나 나는 매일 허다한 작은 십자가에 부딪치는가。

그러한 십자가가 아무리 나를 몹시 괴롭혀도 이를 사랑합니다. 


나는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사랑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읍니다。


내가 천주님께 대하여 치열한 열애를 느끼고 있으므로、

만일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면 나는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악마의 장난감이 되어 있다고 생각 될 것입니다。」(동서 一三 ) 




성녀「마리아·막달레나·보스텔」은 한걸음 나아가 말하고 있다。


「사람이 사랑할 때에는 고통을 느끼는 일은 하나도 없읍니다。

그처럼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을 

행복으로 생각합니다。」(동 성녀전 二권 二七장)




성 「프란치스꼬·살레시오」도 역시 

그러한 영웅주의(英雄主義)의 비결을 우리에게 명시하고 있다。


「고난 그 자체를 본다면、

그것은 실로 두려운 것임이 틀림 없다。


그러나 천주의 의지에 비추어 본다면

그것은 사랑스럽고、또한 유쾌한 것이다。


우리가 만일 천주의 의지를 제쳐놓고 고통을 본다면、

것은 그 자연적인 쓴맛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이것을 천주의 영원한 성지(聖旨) 안에서 고찰해 본다면、

그것은 모두 황금(黃金)이며、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럽고 귀중한 것이리라。


사랑은 혐오(嫌惡)를 정복하는 것이어서、

사랑하는 분의 손으로부터 주어지는 쓰디쓴 약을 기꺼이 받는다。


주의 손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실 때에도、

위안으로 충만시키실 때에도、

항상 변함없는 사랑스러운 것이다。


참으로 사랑에 충만한 마음은 고통과 노고와 십자가에 있어、

천주의 뜻을 더욱 사랑한다。


왜냐 하면、

사랑하는 분을 사랑하고 있는 분을 위하여 고통을 당하게 하는 것이 

사랑의 주요한 효능(効能)이기 때문이다。」(「신애론」 九편 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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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사랑은 섭리의 올바름을 증명하고、

그것을 모든 길에 있어 시인하는 것이다. 


천주의 사랑하올 아드님은 

당신의 성부를 믿으시고、흠숭하시며、신뢰하시지만、

각별히 성부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비록 외관상、그 섭리가 가혹하고、엄격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늘의 성부로부터 오는 만사를 좋아하신다. 


그러므로 그 효애심 (孝愛心)은 

하늘로부터 보내지는 모든 것을 전전긍긍하여 공경하기에까지 이른다。



성 「프란치스꼬·살레시오」는 천후(天候)에 관하여 

「일기가 나쁘다든가、지나치게 출다든가、덥다」라는 

불평을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한 말투는、항상 하늘에 계신 성부의 손을 찬미해야 할 

「섭리의 아들에게 알맞지 않는다」라고 말하였다。

(「드.슈르몽」신부 「섭리」 三편 三、五장)


거룩한 사랑은 제二 여러 원인과 인간의 악의(惡意)가 간섭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즉、사랑은 인간과 사건 위에、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분、자신의 마음의 천주를 뵈오는 것이다


그리고 천주의 손이 자기를 치시는 동안은 

그 손에 항상 변하지 않는 효애(孝愛)와 경외(敬畏)로써 

맞아드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