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장
교회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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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 7일에 거행된 성 안니발레 디 프란치아 신부의 시복식은
루이사의 생애와 사명을 새로이 평가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기도 수도회 (로가찌오니스티 수도회)의 창설자인
이 신부를 모범 사제로 추앙하도록 결정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루이사의 삶과 저술에 최대의 경의를 표한 것이다.
성 안니발레는 루이사의 특별 고해 사제이며
그녀의 저술을 검열하는 역할을 하도록 트라니 교구 대주교의 임명을 받았으니,
그녀의 저술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일을 그보다 더 분명하게 위임받은 사제는 없었다.
이 임무 덕분에 그는 루이사를 경애한
베다 신부, 첸토 추기경, 성 비오 신부 및 다른 저명한 신부나 고위 성직자들과는 달리,
그녀의 저술을 분별하는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
시복식에 즈음하여 성 안니발레의 공적 전기는
루이사와의 관계로 인한 그의 영적 성숙을 강조하고 있었다.
하느님의 섭리로
성 안니발레는 삼십여 년 동안 영적 지도자로서의 체험을 쌓은 후에
비로소 루이사를 알게 되었다.
루이사와 처음 만나기 전,
영적 지도자로 있었던 그 시기에 쓴 편지들이 간행되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그가 이미 여러 신비가들을 알고 있었고
그들이 쓴 글을 분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지역 주교가 그를 이 분야의 전문가로 여긴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성 안니발레가 루이사와 17년간 친교를 맺은 사실은
현대 교회 역사상 이채를 띠는 유일한 사건이다.
교회 인가를 받은 현대의 사적 계시 집필자 가운데서 루이사만큼
성인으로 추앙된 영적 지도자와 친교를 나눈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거룩한 사제라고 하더라도
- 예를 들면 아르스의 주임사제(성 요한 비안네 - 역주)가
라살레트의 성모 발현을 본 막시멩과의 짧은 면담 끝에 했던 것과 같이 -
어떤 신비가를 평가함에 있어서 일시적인 실수를 할 수 있다고 주장 하는 것은
이 경우와 별개의 문제이다.
공식적으로 교구장을 대리하여 하나의 특수한 경우를 책임지게 된 성숙한 사제가
17년간 그것을 면밀히 검토한 뒤 최종 평가에서 실수를 범할 수 있었겠는가?
1991년 1월 23일, 루이사의 교구장 쥬세페 카라타 대주교는 강론을 통하여
“교회는 안니발레 디 프란치아 신부의 시복과 아울러,
루이사의 책들에 붙인 서문들을 포함해서 그가 쓴 글들도 인가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성 안니발레는 루이사의 책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 주님께서는… 루이사를
다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숭고한 사명을 위한 도구로 양성하셨습니다.
그 사명은 과연 그분께서 ‘주님의 기도’ 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고 하신 대로,
하느님의 뜻이 온 누리에 개선하시는 것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 안니발레는 루이사의 저술에 대해 완전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일으키는 반대에 놀라거나 격분하지 않았다.
그는 루이사를 만나기 삼 년 전 압보트 콤베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서 행하시는 사적인 일은
그분을 대리하는 이들의 판단에 맡겨져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세우신 이 질서를 중히 여기시며
아무도 신앙상의 이 규정을 변경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성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 사적 계시나 작품을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며 큰 겸손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들의 인정과 교회 당국의 인가를 받으려면
겸손하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말 입니다.”
이 정신으로
성 안니발레는 루이사의 일기를 연구하고 정밀히 조사하며 분별하였다.
루이사의 저술들을 알리며 권장한 이들이
그녀의 시복 소송을 제기한 것도 같은 정신으로써였다.
더욱이 진정한 신비에는 늘 열린 마음으로 있었던 성 안니발레가
루이사 피카레타 외에는
동시대의 다른 어떤 신비가의 저술에도 헌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적이 감동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성 안니발레의 시복은 따라서 반박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지혜롭고 거룩한 한 사제에게 루이사의 저술을 맡기신 하느님의 지혜를
강조하는 역할도 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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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가 금서 목록을 폐지하였다.
그러자 곧 이탈리아 밀라노 시에 있는 ‘하느님의 뜻 협회’ 가
「수난의 시간들」과 루이사의 일기 열아홉 권을 이탈리아어로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루이사의 저술들이 퍼져 나감에 따라
하느님의 뜻에 대한 가르침을 연구하고 실천하며 촉진시키는 일에 전념하는
사제들과 평신도들의 수가 증가하였다.
산죠반니로톤도의 성 비오 신부는
페데리코 아브레스크의 기도회에 속한 아드리안나 팔로티와 다른 회원들을 몸소 격려하며
루이사의 저술들을 인쇄 보급하게 하였다.*
"팔로티: 한번은 제가 비오 신부님에게
'신부님, 루이사 피카레타의 글을 공부하고 복사하여 인쇄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까?' 하고 물었어요.
신부님은
'암! 질문을 다시 해 보구려.'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또 물었지요.
'신부님, 제가 안드레아 마니피코에게 돈을 주어 루이사의 책들을 인쇄할 장비를 사게 할까요?'
신부님은 다시 '암!' 하셨어요.
저는 그 책들을 인쇄하게 하는 것이 정말 하느님의 뜻임을 깨달았고...
우리는 그 일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p.190
1970년대 초기, 루이사의 영적 가르침을 알리는 일에 박차를 가한 이는
멕시코의 구스타보 모레로스 신부였다,
그 외 미국의 토마스 페히, 멕시코의 호세 아쿠나와 같은 평신도들도
이 영성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루이사의 저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제들 중에는
미국 출신 마이클 애덤스 신부와 이후의 존 브라운 신부,
멕시코 출신 카를로스 마씨에우 신부가 있었다.
이들의 열성과 교회에 대한 순종이
트라니 대교구에서도 로마에서도 교계의 지지를 얻어 내는 일에 도움이 되었다.
1987년 3월 4일 루이사의 40주기를 맞아
트라니의 쥬세페 카라타 대주교와 아순타 마리글리아노 수녀는
하느님 뜻의 통치에 관한 루이사의 저술들 간행을 촉진하기 위하여
‘루이사 피카레타회’ 를 설립하였다.
카라타 대주교는 이 회의 설립을 알리는 공지문에 이렇게 썼다.
“본인은 시대의 표징들을 통하여,
또 이 신봉자들의 열성과 사도적 활동 분야에서 거두는 유익한 열매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이 분명히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하느님의 뜻에 대한 전적인 일치와 순종으로,
이들 모두가 계속 성덕을 추구하며 교회 직무를 수행하기를
격려하며 권고하는 바입니다”
‘루이사 피카레타회’ 의 공식적인 설립으로 말미암아
루이사의 생애와 사명에 대한 정보를 찾는 일이 체계적으로 촉진되었다.
여기에 증언들이 제출되었으므로
이 회는 루이사가 동시대인들에게 미친 영향의 정도를 증언하는 회보를 발간하였다.
많은 증언들이 루이사의 전구 능력을 알려 주기도 했는데,
이를테면 루이사의 산 사람 같은 시신을 소녀 시절에 본 기억이 있는
코라토 출신 쟈친다 캄피오네의 증언이 있었다.
그녀는 여러 친지들이 루이사의 전구로 받은 많은 은혜들을 기억했을뿐더러,
그녀 자신이 루이사의 기도로 기적적인 치유를 체험한 이야기도 하였다.
1982년 3월 캄피오네는 내출혈과 위통으로 괴로워하였다.
심각한 질환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
그녀는 예수님께 루이사의 전구로 치유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그날 밤 생생한 꿈을 꾸었는데,
루이사가 덮게가 달린 자기 침대에서 캄피오네의 양손을 꼭 붙잡고
그녀에게 입맞춤을 주는 꿈이었다.
그 이튿날 아무런 처치도 받지 않았건만 몸 상태가 한결 좋아진 느낌이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조직 검사를 통하여
쟈친다가 십이지장에 생긴 작은 종양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고 했던 방사선 기사는
그 종양이 깨끗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였다.
루이사의 전구로 은혜를 받았다는 증언들이 ‘루이사 피카레타회’ 사무실에 쌓이게 되자,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루이사 사건의 전말을 재검토하였다.
시성성 장관 펠리치 추기경이
루이사의 저술에 대해 일어났던 일을 면밀히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마침내 1994년 1월, 트라니-나자렛 대교구의 카르멜로 카싸티 대주교에게
루이사의 시복 소송 재판을 열어도 좋다는 통보를 보냈다.
이 재검토 작업으로 교황청이 분명하게 한 것은,
그녀의 세 작품에 대한 이른바 “단죄” 는 매우 가벼운 징계로서
루이사의 저술 전체와 그 세 작품의 내용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상당수의 구체적인 세목이
루이사의 원본과 다르게 편집된 세 판에 대한 조처였다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카싸티 대 주교는 1994년 11월 20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루이사의 시복 소송 재판을 열기로 결정했고,
루이사의 삶을 장차 성취될 예수 성심의 사회 통치와 결부시켰다.
1996년 1월 신앙교리성은 시복 소송 중인 교구 법원에
루이사의 원래 일기장 첫 권부터 삼십사 권까지 전체를 복사하여 사용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 후 1997년 7월 9일
‘로세르바토 레 로마노’ 지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서한이 실렸는데,
이는 성 안니발레 디 프란치아가 창설한
‘기도 수도회’ (로가찌오니스티 수도회) 창립 1백 주년을 맞아
이 수도회 사제들에게 보낸 메시지였고,
여기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루이사의 영성의 의미를 간접적으로 인정하며 이렇게 언급하였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사도직에 적용하려고 애쓰는 현대적 수단들은
인간의 과학과 최신 기술이 제공하는 수단들이지만,
이것이 효과적인 수단이 되려면
복된 창설자가 받은 독특한 카리스마에 의해 유지되고 인도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창설자는 ‘기도하여라.’ (마태 9,38; 루카 10,2 참조) 하는 말씀 안에서
하느님께서 친히 주신 수단을 보았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의 심장이 되게’ 하시고자
제3천년기 벽두에
‘새롭고 거룩한’ 성덕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풍요롭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성 안니발레의 글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 메시지의 “새롭고 거룩한 성덕” 은 루이사의 저술에 대한 성 안니발레의 해설을
부분적으로나마 암시한다는 것을 즉각 알아볼 수 있다.
사실 성 안니발레는 간행된 한 편지에서
하느님의 뜻에 대한 루이사의 글을 “새로운 학문” 이라고 하였고,
이 학문이 “과거의 모든 성인들을 능가하는 성인들” 을 기를 것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2004년 5월 1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기도수도회’ (로가찌오니스티 수도회) 창설자를
성 안니발레 디 프란치아를 시성함으로써
루이사의 주된 편집 발행인이요 특별 고해 사제였던 그에게
교회 최고의 영예를 수여하였다.
이와 같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트라니-나자렛의 대주교들의 공적인 언행으로 하여
오십 년 넘게 루이사의 이름에 붙어 있었던 여러 의혹이 불식되었다.
그러므로 제3천년기가 동 틀 무렵
그녀의 삶과 저술을 새로이 평가하기 위한 장(場)이 마련된 것이다.
*성 비오신부는 1968년 선종하기 얼마 전에
루이사의 저술이 미칠 영향에 관해 주목할 만한 예언을 한 바 있다.
40년 동안 루이사의 지킴이였던 로사리아 붓치가
루이사의 생애와 사명이 외관상 빛을 잃고 있음을 보고 낙심하여
성 비오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받은 후, 그 상황에 대해 한탄하자
“이야기를 계속하시오! 계속하시오!” 하더니 매우 힘차게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이 루이사로 가득 찰 것이오.
3천년기는 그녀의 빛을 볼 것이오." (베르나르 디노 붓치 신부의 회고록 2000)
맺 음 말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루이사 피카레타의 생애는 그녀의 진정성에 대한 삼중의 시험을 내포한다.
즉, 그녀의 성덕과 시대의 표징 및
그녀의 메시지와 교회의 가르침 사이의 일치 여부가 삼중으로 확정된 과정이다.
루이사의 성덕이라는 기적은 거의 무자비할 정도로 엄밀한 조사를 받으면서
끊임 없는 고통과 교회에 대한 완전한 순종 속에서 살아간 그 삶에서 발하는 빛이다.
시대의 표징들과 교황들의 공식 성명(聲明)을 포함한 성전(聖傳)의 개발,
그리고 그리스도 왕 대축일 전례의 제정과 같은 장엄한 행위들이
루이사의 생전에 서로 연합하여
그녀의 사명이 긴급하고 중대한 것임을 역설한 것이다.
성인들의 전기 가운데에는
성인들과 보통 사람인 독자 사이에 큰 거리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 많다.
그러나 루이사 피카레타의 삶과 저술은 그렇지 않다.
그녀의 삶이, 지극히 높은 성화의 길을 함께 가자고 우리를 초대한다.
루이사는 우리의 자비로우신 구원자의 사랑의 호소를 전하면서
20세기라는 광야에서 이렇게 외치는 소리인 것이다.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마태 3,3; 이사 40,3 참조)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
제12장
트라니의 카라타 대주교 아순타 마리글리아노 수녀
‘루이사 피카레타’ 교구 시복조사 종결
피치에리 대주교 - 베르나르디노 붓치 신부 - 잔노티 총대리
맺 음 말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마태 3,3; 이사 40,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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