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장
죽음과 장례
p.176
전쟁의 종결이 코라토의 루이사에게는 이렇다 할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의심의 눈초리들이 이루는 구름이 아직 걷히지 않았으나
그녀는 사제와 평신도 친구들의 사랑 안에서
안전하게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맡긴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시련기에 놓인 루이사의 성덕을 높이 평가하는 사제들이 많았는데,
특히 ‘카푸친회’ 의 여러 사제들과 수사들은
아직 세상에 살아 있는 루이사를 성인으로 공경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트리쟈노의 카푸친회 공동체의 역사가인 다니엘 신부,
전(前) 카푸친회 장상 테렌치오 신부, 트리니타폴리 교구의 목자인 존 데 벨리스 신부,
신학 교수이며 전 카푸친회 관구장 굴리엘모 다 바르레타 신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니엘 신부는 “위대한 성인” 루이사에 대하여 자주 말하였고,
테렌치오 신부는 신앙 위기를 겪던 시기에 루이사의 조언을 구하러 가서
다시는 의심에 빠지지 않을 만큼 심오한 해답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신학자 바르레타 신부는 그녀를 “위대하고 놀라운 영혼” 이라고 불렀다.
이 세 사제들 외에도 루이사를 존경한 카푸친회 사제들은,
두 사람 다 전 관구장이었던 자카리아스 신부와 비오 신부,
그리고 기적적인 일을 행하는 산죠반니로톤도의 성 비오 신부가 있었다.
이들은 루이사를 존경하며 그녀의 조언을 구한 사제들
- 그녀의 죽음 전에도 후에도
드러나게 그녀를 공경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던 사제들 중 일부였다.
물론 루이사의 성덕에 가장 탄복한 사제는 그녀의 고해 사제 베네데토 칼비 신부였다.
21년 동안 그 영혼의 내적 비밀을 들었던 그는
그녀의 침대를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놀라운 지혜의 자리” 라고 말하였다.
"(그 자리에서) 루이사는 말로써 영혼들을 내적으로 변화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일 정도로 변화되고 놀라움과 감동에 젖어
선하고 경건한 고백으로 자신들을 깨끗이 하겠다는 각오를 한 채 그녀의 방을 떠났다.
그녀는,
너무나 많은 죄로 하느님을 모독해 온 인간의 뜻 때문에 이미 격분한
하느님 정의의 벼락에서 우리를 지켜 주는 피뢰침이었다 ”
p.177
1947년 2월, 나이 여든두 살인 루이사는 폐렴으로 쓰러졌는데,
두 주간에 걸쳐 증세가 점점 더 악화되었다.
육십여 년 동안 날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그분과 함께했으며,
육십 년 동안 매일
“저에게 온전히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뜻 안에서 죽는 은총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했던 그녀는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자 더욱더 열심히 「수난의 시간들」 묵상을 거듭하였다.
마침내 1947년 3월 4일 새벽 다섯 시,
그 자리에 와 있었던 고해 사제 베네데토 칼비 신부에게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저는 이제 더 기뻐하며 죽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제 생의 이 마지막 순간에 신부님의 현존으로
평소보다 더 큰 위로를 주시니 말입니다.
이제 무한하고 찬란한 태양들로 빛나는, 길고 아름답고 넓은 길이 보입니다…
아, 그렇습니다. 이 태양들을 알아보겠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 행한 저의 행위들입니다...
이것이 제가 지금 따라가야 할 길입니다.
하느님 뜻의 무한한 행복 안에 하나 되게 하시려고
그분의 뜻이 저를 위해 마련 하신 길이고,
제 승리의 길이며, 제 영광의 길이니 말입니다.
친애하는 신부님, 이는 저의 길이지만,
또한 제가 신부님을 위해 마련할 길이요,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마련할 길이기도 합니다.”
칼비 신부는 더없이 힘든 역경에 처해 있었던 루이사를 지켜본 사람이었다.
비웃음과 의심쩍어 하는 눈길들과 고해 사제의 박탈을 참고 견디는 그녀를,
거룩한 미사에 참례할 수 없게 된 고통과
‘하느님 뜻의 집’ 에서 추방된 일과
예수님께서 친히 주신 말씀들을 기록한 책들이 금서 처분을 받게 된 굴욕
-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의 수난 고통과 함께 끊임없이 겪고 있는 그녀를!
그러니 루이사라는 인물에게서 결점을 발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바로 칼비 신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마구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 그녀가 보인 행동의 증거는
칼비 신부의 견해를,
즉, 그녀가 성녀라는 견해를 더욱 굳히기만 했을 뿐이다!
루이사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 죽는 순간에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친밀을 증명해 보였다.
‘거룩한 열성의 수도회’ 수녀들이 운영하는 메시나의 한 고아원에서
죠반닌나 수녀 - 이전의 프란체스카 카포차 - 는
3월 4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자기가 돌보던 아이들 중 하나를 화장실에 데리고 갔다.
침대로 돌아온 순간,
루이사가 흰옷을 입고 자기를 부르며 무언가를 몸짓으로 알려 주는 것을 보았다.
그 즉시 루이사가 숨을 거두었다는 생각이 뇌리를 쳤고,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다.
원장 수녀는 죠반닌나 수녀가 낮 동안 슬퍼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므로 까닭을 물었다.
수녀는 마지못해 새벽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이야기가 미처 끝나기 전에 “루이사 별세” 라고 쓰인 전보가 코라토에서 도착하였다.
코라토에서는 칼비 신부가 확신을 가지고 루이사가 천국에 들어갔음을 알렸다.
3월 12일자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루이사는 이제 우리와 함께 있지 않습니다.
성인들의 영광으로 찬란하게 개선하여,
하느님 뜻의 무한한 빛에 싸인 채 천국에 있습니다.
저는 마지막 순간에 루이사와 함께 있었습니다…
제가 마지막 사죄경을,
그녀에게는 불필요한 사죄경을 외는 동안, 내 팔에 안겨 숨을 거두었습니다.
루이사는 성인들처럼 죽음으로써
하느님 뜻 안에서 산 그 생애의 마지막 행위를 완성한 것입니다.
저는 그녀의 마지막 숨에서 체험한 극히 고통스럽고 숭고한 인상을,
거기에서 받은 이 큰 타격의 영향을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가실 정도로 제게 퍼붓는 질문들에 대해 저로서는
‘성인 한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라는 답변 외에는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루이사를 잃었지만,
천국에 있는 위대한 보호자를 얻었습니다 ”
p.181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있어서도 루이사는 모든 예상을 뛰어넘었다.
숨을 거둔 뒤에도 앉은 자세로 있었고,
아무도 그 시신을 펴서 눕힐 수 없었음에도 사후 경직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으니,
며칠 동안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유연하게 앉아 있었던 것이다.
칼비 신부는 그 모습을 이렇게 전하였다.
“그녀의 몸은 침대 위에 앉은 자세로 굳어 있었지만
팔다리는 사후 경직 현상이 전혀 일어나지 않아서
누구든지 이리저리로 들어 올리거나 굽힐 수 있었다.
심지어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도 있었고,
그러면 루이사의 빛나는 눈동자가 그대로 보였다.
이 때문에 정말 죽은 것인지 의심이 들어
전문 의료진에게 그녀를 보이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부패의 기미를 조금도 보이지 않고 꼬박 나흘 동안 그대로 있었다.
온 코라토와 외지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이 깊은 신심으로 조문하며 놀라음에 잠겼고,
그 부드러운 손에 입을 맞추며 그녀가 지니고 있는 성물들을 어루만졌다.
보통 관들과 완전히 다른 관을 제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앉아 있는 그 자세를 1센티미터도 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루이사는 살아 있는 사람처럼 관 속에 앉아 있었다.
관계 당국의 허락을 얻어 특별히 제작된 유리관이어서,
밖에서도 환히 들여다보였던 것이다.”
루이사의 그 자세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성인들의 역사에 그와 같은 일은 없지 않았던가?
주님께서 이 현상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이었건 간에,
루이사의 산 사람 같은 모습과 곧추 앉은 자세는
1947년 3월 7일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잊지 못할 인상을 남겼다.
합당하게도 장례 미사는 루이사가 1874년에 견진 성사로 성령을 선물로 받은,
코라토의 모(母)교회인 승천 성당에서 거행 되었다.
이 장례 미사에는 지역 사제단 외에도 40명 이상의 사제들이 참여하였고,
많은 수녀들이 루이사의 관을 성당으로 옮기고 또 성당에서 묘지로 옮기는 일을 도왔으며,
온 코라토 주민들이 그 행렬에 참여하였다.
칼비 신부는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장례식? 오히려 진정한 개선식이었다.
그날은 아무도 일하러 가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여러 사진사들이 사진을 찍었으므로 관련 사진들이 많이 남아 있다.
고인에 대한 애도가 크게 드러난 날이었지만 또한 큰 기쁨의 날이기도 하였다.
비록 눈을 감고 있었으나 유리관 너머 모두에게 모습이 보인 루이사는
마지막 안식처까지 자신을 동반해 주는 모든 주민들에게 축복을 보내고자 하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독특하고 유일한 사건이었다.
이를 목격할 행운을 잡은 사람들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며,
그 장려한 광경을 다 상술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장례 미사는 코라토에서 가장 오래 된 성당에서 집전 되었지만,
칼비 신부는 루이사의 시신을
시립 묘지에 있는 그 자신의 가족 묘소에 안장하게 하였다.
“나는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사랑하는 루이사를,
내가 미사를 드리는 제대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나 자신의 가족 묘소에 안장하게 하였다...
하느님의 자비에 의하여,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하느님 뜻 안에서 일치하고 죽음으로 묘지에서 일치하여
하느님 뜻의 영광 안에 영원히 일치하는 것이 나의 희망인 까닭이다.”
루이사에 대한 그러한 신심은 비단 칼비 신부만의 것이 아니었다.
루이사의 죽음 직후부터 코라토 사람들과 그녀의 생애와 저술에 친숙한 사람들도
그녀의 전구를 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1948년 10월 11일에는 바리의 총대리 사마텔리 몬시놀의
“오류 없음” (Nihil Obstat)이 날인된 상본이 발행되었다.
상본 앞 면에는 십자고상을 마주하고 손에 펜을 든 루이사가
공책 한 권을 앞에 펼쳐 놓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었고,
뒷면에는 루이사 피카레타의 시복을 비는 기도문이 있었다.
같은 해 11월 27 일에는 루이사가 임종할 당시
트라니-나자렛 대교구의 교구장 이었던 레지날드 앗다치 대주교의
“교회 인가” 가 붙은 또 다른 상본이 발행되었다.
여기에는 루이사의 이차적 유물인 옷 조각이 들어 있었고,
“하느님의 종 루이사 피카레타” 라는 칭호 아래 기도문들이 인쇄되어 있었다.
교황청은 루이사가 별세한 지 15년 뒤에,
칼비 신부와 첸토 추기경 등 및 트라니 대교구 대주교의 요청을 받아들여
루이사의 시신을 코라토 시립 묘지에서 영예로운 곳으로 이장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1962년 6월 3일, 교황청의 정식 승인하에
그녀의 시신은 산타 마리아 그레카 성당의 중앙 신자석 오른편에 안치되었다.
제11장
“저는 이제 더 기뻐하며 죽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제 생의 이 마지막 순간에 신부님의 현존으로 평소보다 더 큰 위로를 주시니 말입니다.
이제 무한하고 찬란한 태양들로 빛나는, 길고 아름답고 넓은 길이 보입니다…아, 그렇습니다. 이 태양들을 알아보겠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 행한 저의 행위들입니다...
코라토에서는 칼비 신부가 확신을 가지고 루이사가 천국에 들어갔음을 알렸다.
3월 12일자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루이사는 이제 우리와 함께 있지 않습니다. 성인들의 영광으로 찬란하게 개선하여, 하느님 뜻의 무한한 빛에 싸인 채 천국에 있습니다.
저는 마지막 순간에 루이사와 함께 있었습니다… 제가 마지막 사죄경을, 그녀에게는 불필요한 사죄경을 외는 동안, 내 팔에 안겨 숨을 거두었습니다.
루이사는 성인들처럼 죽음으로써 하느님 뜻 안에서 산 그 생애의 마지막 행위를 완성한 것입니다.
온 코라토와 외지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이 깊은 신심으로 조문하며 놀라음에 잠겼고, 그 부드러운 손에 입을 맞추며 그녀가 지니고 있는 성물들을 어루만졌다.
이처럼 장례 미사는 코라토에서 가장 오래 된 성당에서 집전 되었지만, 칼비 신부는 루이사의 시신을 시립 묘지에 있는 그 자신의 가족 묘소에 안장하게 하였다.
루이사에 대한 그러한 신심은 비단 칼비 신부만의 것이 아니었다. 루이사의 죽음 직후부터 코라토 사람들과 그녀의 생애와 저술에 친숙한 사람들도 그녀의 전구를 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루이사 피카레타의 부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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