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루이사 피카레타의 생애와 사명 〔제10장-박 해 (1)〕(p.145-159)

은가루리나 2015. 12. 10. 10:51


10


박 해 (1)



1 (p.145)

 

  루이사에게 1928년부터 1938년까지의 십 년은 1928년 10월 7일에

‘거룩한 열성의 딸 수도원’ (거룩한 열정의 수녀회)에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특별한 사건이었다. 

그 전에 딱 한 번 이런 예가 있었는데, 

안니발레 신부가 수도원 밖의 한 사람을 초빙하여 그의 수도자들과 함께 살게 하면서

수도자들의 영성 생활을 향상시키고자 했던 것으로,1987년의 일이었다.

 


 * 코라토의 ‘거룩한 열성의 딸 수도원’ 의 공식 문서를 보면, 

 성 안니발레가, 기도 수도회 (로가찌오니스티 수도회) 총장으로 

 자신을 계승하도록 선정한 판탈레오 네 팔마 신부가 

 1927년 10월 7일에 개원한 수도원에 “하느님 뜻 의 집” 이란 명칭도 붙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이 공식 문서에 “한 선택된 영혼” 이라고 명기되어 있는 루이사가 

 수녀들과 함께 살면서 자신의 영성으로 그들을 가르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문서에 또한 팔마 신부가 

 교황 비오 11세로부터 새로 개원한 수도원에 대한 축복 전문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팔마 신부는 그러나 하느님 뜻의 집을 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더 파라클레테라는 

 「거룩한 열성의 딸 수도원」의 원장 수녀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유로 

 고발되어 체포되었고, 

 로마의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 지하 감옥에 미결수로 수감된 채 조사를 받았다. 

 그가 그런 고발을 받을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던 수녀들은 

 감옥에 있는 그를 계속 방문하였다. 

 과연 그 수녀들의 기대대로 공식 조사관은 그들의 영적 아버지의 모든 혐의를 풀어 주었다. 

 그러나 팔마 신부는 자기의 무죄 평결이 공표된 바로 그날 숨을 거두었다. 

 루이사는 팔마 신부의 죽음으로 자기 저술의 중요성을 깨닫고 인정한 한 사제를, 

 그녀의 훌륭한 옹호자들 중의 한사람을 잃었다. 

 팔마 신부도 

 앞서 떠난 브라칼레 신부와 몬테무로 신부와 같이 박해의 희생자가 되어 무덤에 묻혔던 것이다. 

 그러나 고무적인 일은, 

 루이사를 사랑하고 인정했던 그 박해 받은 사제들의 시복 소송이 각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 당시 메시나의 '거룩한 열성의 딸' 공동체는 내부, 분규와 역경으로 인해 

지역 주교가 폐원 조처를 내리려고 하는 처지에 있었다. 

주교는 친구 사제의 중개로 

안니발레 신부에게 일 년의 말미를 주면서 공동체를 쇄신하라고 하였고, 

창설자 안니발레 신부는 필요한 개혁을 이루려고 멜라니 칼바를 초빙하였다. 

멜라니는 프랑스 라살레트의 성모님 발현(1846)을 본 두 선견자 중의 한 사람으로 

이탈리아에서 혼자 살고 있다가  이 쇄신 작업을 돕기 위해 메시나로 왔다. 

그녀는 15개월 동안 수녀들과 함께 살면서 말과 모범으로 그들을 고무 (鼓舞)하여 

더욱 열성적으로 수도 생활을 할 마음이 내키게 하였다.



2 (p.146)


  안니발레 신부는 코라토에서 가까운 트라니에 이 공동체가 이미 있었는데도

코라토에 또 하나를 세워, 

멜라니가 30년 전 메시나의 수녀들을 위하여 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루이사도  코라토의 수녀들을 위하여 해 주기를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섭리로,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10월 7일 

루이사는 안니발레 신부의 공동체에 들어갔고, 

안니발레 신부는 1990년 이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이처럼 그는 

하늘에서도 루이사에 대한 자신의 계획이 실현 되도록 힘쓰는 것 같았으니, 

수녀들이 그들 가운데 있는 루이사의 현존에 열렬한 응답을 보냈던 것이다. 

루이사의 책들은 그녀가 코라토의 이 하느님 뜻의 집에 들어간 시점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시점까지 꾸준히 퍼져 나가고 있었고,

이는 코라토의 ‘산타 마리아 그레카 성당’ 의 목자이며 루이사의 고해 사제였던 

베네데토 칼비 신부의 성원에 크게 힘입은 일이었다. 

칼비 신부는 1926년 루이사에게 「유년 시절 회상기」를 쓰라고 하였고, 

1930년에는 20년대 말기에 

성모님께서 루이사와 대화를 나누시며 일련의 가르침을 주신 내용을 담고 있는 

「하느님 뜻의 나라의 동정 마리아」를 쓰게 하였다.

칼비 신부는 1930년에서 1938년 사이에 이 「동정 마리아」 를 제3판까지 출판하였다. 

루이사도 이 책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으므로 

직접 찾아오거나 우편으로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권하였다. 

한 편지에서 그녀는 이렇게 썼다.

 

  “ ‘천상 여왕님’ 책을 권장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뜻을 한층 더 잘 알리는 일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 다른 편지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 ‘천상 여왕님’ 책을 힘써 권장하십시오, 

그 위대한 여왕님께서 

하느님 뜻 나라의 백성을 기르시려고 여기저기를 방문 하고자 하십니다.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십시오.”

시대의 표징이 새롭고 더욱 가공할 전쟁을 가리키고 있었을 무렵, 

루이사의 책들은 성모님을 죄인들의 마지막 피난처로 확인시켜 주고 있었으니, 

1935년 예수님께서도 루이사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 ‘사람은 내 은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내 말에 귀를 막으며 내 사랑을 비웃다가도 

타고난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잃게 되면 매우 겸손해진다. 

악하고 완악한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아버지 품에 안기는 아이들처럼 내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내가 때때로 사람들을 치지 않을 수 없을 때에도 

내 엄마의 손에 맡겨 다치지 않게 할 만큼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랑하올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고 내게 천상 여왕님을 보여 주셨다. 

그분은 형언할 수 없도록 엄위와 모성애가 넘치는 모습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모든 민족들 사이를 두루 다니시며 징벌의 타격을 받지 않도록 

자녀들의 이마에 특별한 인장을 찍으셨다..... 

다정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니에게 특권을 주셔서 

어머니의 인장을 받은 이는 

누구나 해를 입지 않고 구원되게 하셨던 것이다...” {천상의 책 33권 40장}



3 (p.149)  



  칼비 신부는 하느님 뜻의 열렬한 사도가 되어, 

루이사의 저술 신판들을 내면서 영적 일기를 계속 쓰도록 그녀에게 지시하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녀의 작품을 알렸다. 

30년대 초기에 

토리노의 마리아 데 루지부스라는 이름의 여성이 칼비 신부에게 요청하기를, 

저명한 독일 베네딕토 수도회 학자 베다 루트비히 신부에게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와「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시간들」을 

보내 주라고 하였다. 

베다 신부는 이미 여러 권의 책을 낸 바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한 주간의 성화에 대한 책도 있었고, 

이는 4개 국어로 번역되어 제6판까지 도합 48,000부를 찍어낸 책이었다. 

루이사의 책을 처음으로 접했을 무렵 

베다 신부는 가톨릭교회 안에서 오상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에 몰두해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를 읽은 지 두 달 만에  그는 칼비 신부에게 

이 글은 “이 주제에 대해 일찍이 쓰인 논문 중 가장 위대한 것” 이라고 하면서 

독일어로 번역할 허락을 청하였다

 

  베다 신부는 루이사의 저술을 처음으로 읽은 지 여섯 달 만에 다른 작업을 제쳐 두고 

주로 하느님의 뜻에 대한 가르침에 몰두하였다. 

그는 마리아 데 루지부스에게

“이(루이사)와 같은 영혼과 관련을 맺는 것은 

온 세상 절반을 소유하는 것보다 내게 더 값진 일입니다. 

신적인 것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전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상자들에 대한 방대한 연구 작업을 제쳐 놓았으니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더 이상은 출판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출판업자는 책을 내고 싶어 하지만 

하느님 뜻의 나라를 제쳐 놓도록 나 자신을 설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보시려고 시험에 붙이고자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뜻의 나라는 다른 모든 것 위에 있습니다. 

나는 자신을 바치기로 서약한 이 일에 충실히 머무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에 이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시간들」을 번역한 그는, 

루이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주일을 제외하고 

날마다 오전과 오후와 밤에 "끊임없이” 수난의 시간들을 묵상해 왔다고 하였다. 

베다 신부는 이「수난의 시간들」독일어판을 

1936년과 1937년 두 번에 걸쳐 총 55,000부를 발간했고, 

루이사의 일기에서 발췌한 본문을 함께 실은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도 

제1판과 제2판을 햡해 50,000부를 발행했다. 

이 두 책을 출판한 결과 그는 루이사의 책들을 

영어, 폴란드어, 프랑스어로도 번역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 루트비히신부와 디 프란치아 신부로 하여금  루이사의 책들을 출판하게 몰아댄 추진력은 

하느님의 뜻에 대한 가르침을 연구하며 실천한 그들의 노력에서 나온 열매였다. 

베다 신부가 루이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점을 확인 할 수 있다.

 

  하느님 뜻의 나라가 밤낮으로 나를 바쁘게 합니다.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즉, 

이 하느님의 뜻이 나 자신의 생명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논문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신적인 것을 더욱더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를 흡수하면서 너무나 부드럽고 감미롭게 우리 안에 스며드는 바람에 

이를 따르며 사는 것이 (삶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4 (p.151)


  따라서 1926년에서 1938년까지 루트비히 신부와 디 프란치아 신부의 노력으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루이사의 저술을 알게 되었다. 

이 두 사제는 루이사의 저술에서 숭고한 가르침을 알아 보았을 뿐만 아니라 

교회와 세상에 드러나게 권유하기도 한 셈 이었다. 

루이사의 고해 사제 베네데토 칼비 신부도 

이 책들을 대량으로 퍼뜨리기를 원했던 안니발레 신부의 계획을 강력히 지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구 사제였으므로 책 출판에 충당할 자력(資力)이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안니발레 신부의 죽음 이후  

루이사의 저술에 대한 그의 계획은 그의 수도회에 달려 있었다. 

안니발레 신부의 후계자 비탈레 신부는 루이사의 저술을 잘 몰랐으므로 

기도 공동체를 통해 그것의 보급을 촉진하는 것을 깨름칙한 일로 여겼다. 

그러나 창설자의 유지(邊旨)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되었으니, 

그는 트라니 대교구 대주교와 함께, 

매우 존경 받는 신학자이며 수도회의 친구인 도메니코 프란체 O. F. M 신부에게 

루이사의 저술을 보냈다.


  이 프란체 신부는 

디 프란치아 신부의 한 편지에 의하면 

“프란치스코회의 경건한 선교사이며… 

비신자들 사이에, 선교할 목적으로 의학 공부를 한 의사” 였다. 

사실 프란체 신부는 외과 의사요 생리학 및 선교 의학교수인데다가 

로마 교황청 선교 협회 명예 회원, 시성성 조사 위원이기도 하였다.  

그는 비탈레 신부에게 답신을 보냈는데, 

여기에 안니발레 신부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출판한 

루이사의 발췌문에 대한 평가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그 글을 철저히 검토했을 뿐만 아니라 

유능한 다른 신학자 한사람에게도 검토하게 했으며 

보다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 위하여 루이사를 몸소 방문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의 평가는 전적으로 긍정적인 것이었다.

 

5 (p.153)


  “사실, 

이 책 전체를 읽을 시간이 없거나 그럴 뜻이 없는 사람들도 내용 목차를 일별하면, 

완덕으로 나아가도록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 영혼이 

(모든 집착으로부터의) 이탈과 자기 소멸의 길을 통하여, 

또 유혹과 시련들 

- 이 시련들 중 가장 혹독한 한 가지는 현재까지 45년 이상이나 지속되고 있습니다. - 

을 통하여, 얼마나 점진적으로 향상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우선 의사로서, 

그토록 오랜 기간 꼼짝없이 침상에서만 지내야 했던 환자에게서 

욕창이나 피부 염증을 보지 못했으니 단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또 저는 신앙 문제를 심사하는 (시성성의 한 조사 위원)으로서 

매우 큰 위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의사들과 고해 사제들과 대주교들이 여러 해에 걸쳐 철저한 조사를 했지만 

그 누구도 아무런 속임수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확신을 얻었으니 말입니다.

끝으로 저는 사제로서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환자에게서 그리스도교적 덕행의 모든 고결함뿐만 아니라, 

특별한 은총의 비추임을 받아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영혼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영혼을 정화하시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자비의 도구가 되게 하시려고 

그녀 안에서 행하고 계신 듯한 모든 것과 함께, 

저는 이 저술 안에서 그녀의 존재 의의라고 할 수 있는 중심 주제를 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 가련한 환자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 자신의 뜻은 악이라것과, 

모든 인간의 뜻에 공통적인 악이 죄인 것처럼 

모든 죄인들에게 보편적인 치유제가 

바로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인간 뜻의 생명이 되는 것임을 깨닫도록 호소합니다.

 

  이 책이 독자에게 하느님과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의 권리를 일깨우면서 

그분의 지고한 권능이 

모든 인간의 뜻과 이 하찮은 세상의 권세나 나라들  위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면, 

영혼들의 선익을 위해 이미 큰 공헌을 한 것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신부님, 사제이며 의사인 저의 판단으로는, 

오직 그런 고통을 감수한 영만이, 아직도 계속 감수하고 있는 영만이, 

그리고 하느님의 뜻 안에 녹아든 인간의 뜻만이, 

이 영혼이 드러내는 것과 같은 중요하고 근본적인 개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학교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채 

홀로 그 숱한 고통을 겪으며 침상에만 붙들려 있는 이 사람이, 

따라서 문학이나 신학, 또는 수덕에 관한 지식이 극도로 제한된 상태에 있는 사람이, 

이해하기에 극히 까다로운 주제에 관해서 참된 능력을 가지고 말하고 있고, 

극히 난해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으며,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의 영혼을 

더없이 향기로운 덕행의 영역으로 데려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이 환자에게 실행한 

신체적, 정신물리학적, 윤리적 테스트에 대해 상술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내심으로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세속적인 쾌락이나 무절제와 절연하고  65년을 살아 온 끝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제가 재천명하는 확신입니다. 

그것은 신부님께서 저에게 주신 이 책이 사람들에게 보급되기만 하면 

크나큰 선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확신입니다. 

올곧고 유덕한 영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잊지 못할 기회를 주신 신부님께 감사드리며 

신부님의 힘있는 기도를 간청합니다.”

 


  프란체 신부는 자신의 이 편지에 콘살보 발스 O. F. M. 신부의 증언도 동봉하였다. 

발스 신부는 로마 교황청 관할 안토니오 대학교의 교의 신학 교수이며

 ‘작은 형제 수도회’ 의 도서 교열 심사 위원장이었다. 

그는 1936년 6월 18일자 편지에서

 루이사의 저술에 대한 연구의 결론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검토와 비교 작업을 거친 이 모든 관찰에 비추어 볼 때, 

저는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과 

이 영혼 안에 이루어지고 있는 일은 하느님의 일이라는 

깊은 확신을 품게 되었습니다.”

 

6 (p.155)


  루이사와 그녀의 저술에 대한 이들의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비탈레 신부는 안니발레 신부의 출판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창설자의 유지를 받들 결심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모른다. 

그 결정은  어쩌면,

루이사의 글은 기도 수도회 (로가찌오니스티 수도회) 의 사명과 관계가 없다, 

좋은 일을 하고 있지만 

사제들을 위한 기도 사명을 분명히 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좀 더 깊이 연구해 보면 하느님의 뜻에 대한 저술과 성직자의 쇄신, 

곧 ‘기도수도회’ 의 핵심 사명 사이에 긴밀한 연관이 있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이지만 말이다. 

하기야 루이사의 저술을 혹평하며 몇 년뒤에 심한 박해를 하게 될 자들이 

다른 이들도 그녀에 대해 비뜰어진 편견을 갖도록 벌써 공작을 시작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안니발레 신부가 살아 있었다면 이 점을 과히 놀라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루이사의 책들이 널리 보급되는 것은 나중으로 유보되어 있다는 것올 알고 있었던 듯 

몇 번이나 그녀에게 “훗날을” 위하여 작품들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1930년대에 루이사의 적대자들은 

비공식적인 운동을 획책하여 교황청 검사성성이 루이사에게 의혹을 품게 하였다. 

이를 선동한 자들과 이름과 그 동기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 

그들이 꾀한 운동의 성공으로 판단하건대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루이사의 대주교인 레오 대주교와 고해 사제 칼비 신부 및 다른 많은 사제들은 

그녀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으나, 

일부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그녀를 거짓 신비가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거짓 신비주의가 만연한 시기였기 때문에 검사성성이 특히 그 문제에 예민했으니, 

그녀의 적들이 기회를 잡은 셈이 되었다. 

그들의 간교한 준비로 루이사는 결국 굴욕적인 탄핵을 받았다. 

그것은 1938년의 일이었다.


  루이사의 삶에서 가장 큰 시련이 나치의 기습처럼 전격적으로 그녀에게 들이닥쳤으니, 

5월 11일 검사성성을 대표하는 한 사제가 코라토에 도착하였다. 

그는 루이사를 찾아와서 그녀의 글에 의거하여 출간된 세 가지 책을 넘겨달라고 명령하였다. 

이는 그녀의 고해 신부 베네데토 칼비가 의미심장하게 편집하고 수정한 책들이었다. 

그런데 검사성성에서 온 그 사제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아직 간행되지 않은 루이사의 일기장 서른네 권도 압수하였다. 

1938년 7월 18일 오늘날의 신앙교리성인 검사성성은 

루이사의 글에 의거하여 펴낸 세 가지 책을 단죄하는 교령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수난의 시간들」 한 판(版)과 루이사의 일기 발췌문 한 판, 

「하느님 뜻의 나라의 동정 마리아」 한 판에 대해서였다. 

그러나 성 안니발레 디 프란치아 신부가 교회 인가를 받아 발행한 

「수난의 시간들」네 판과 단죄된 판 다음에 나온 판들은 교령의 영향권 안에 들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뜻의 나라의 동정 마리아」도  

단죄된 한 판 전후에 간행된 판들은 교령과 무관한 것이었다.

(참고로, 칼비 신부가 편집 발행한 그 발췌문 한 판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7 (p.158)


  다음은 그 교령의 내용이다.

  “신앙과 윤리 문제에 있어서 가르침을 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추기경들은 

신앙교리성의 동의와 성성 고문들의 동의를 얻어,

루이사 피카레타가 집필하고 다른 이들이 편집해서 

여러 시기에 걸쳐 다양한 장소에서 출판한 다음의 책들을 단죄하여 

금서 목록에 넣도록 명하는 바이다.


1)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가 함께 실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시간들」

2) 「하느님 뜻의 나라에서」

3) 「하느님 뜻의 나라의 천상 여왕」”



  같은 해 같은 달 14일 목요일인 그 이튿날, 교황 비오 11세 성하는 하느님의 섭리로, 

검사성성 사정관들이 통상적인 알현석상에서 제출한 결정서를 승인,재가(裁可)하고 

공표하도록 명하였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압수 사건과 단죄 교령의 발표는 

루이사의 교구장 레오 대주교도 고해 사제 돈 칼비 신부도 모르게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므로 

루이사가 7월 13일의 교령에 복종하겠다는 뜻을 적은 글을 레오 대주교에게 보냈을 때, 

대주교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로 그녀에게 대답했던 것이다. 

사실 압수 그녀의 일기장 서른 네 권은 단죄되지 않았다. 

그것은 「천상의 책」으로 알려진 루이사의 일기로서 

이 안에 그녀의 영적 가르침 대부분이 들어 있는 것이다.



  루이사의 편지에 의하면, 

그녀를 반대하는 운동의 선동자들은 그들의 신원을 밝히거나 그녀와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루이사는 교령이 공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즉시, 

교회의 교도권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과 복종을 고백하는 다음의 서한을 썼다.



  “ …이에 본인은 

성교회의 판단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즉각적이며 전적이고 절대적인 순종으로, 

자진해서 신속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겸손의 의무를 다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하여 본인은 신앙교리성이 위의 책들에서 부정하고 단죄하는 점을 

동 성성의 취지대로 무제한 부정하고 단죄하는 바입니다. 

또한 이 순종의 선언문을 

지극히 사랑하올 대주교님 쥬세페 마리아 레오 몬시놀께 맡겨드리며, 

그분의 부성애로 이를 성성에 송달해 주시기를 간청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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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해 (1)

 

루이사에게 1928년부터 1938년까지의 십 년은 1928년 10월 7일에 거룩한 열성의 딸 수도원’ (거룩한 열정의 수녀회)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그것은 특별한 사건이었다 전에 딱 한 번 이런 예가 있었는데안니발레 신부가 수도원 밖의 한 사람을 초빙하여 그의 수도자들과 함께 살게 하면서 수도자들의 영성 생활을 향상시키고자 했던 것으로1987년의 일이었다.

 

※ 코라토의 거룩한 열성의 딸 수도원’ 의 공식 문서를 보면성 안니발레가기도 수도회 (로가찌오니스티 수도회총장으로 자신을 계승하도록 선정한 판탈레오 네 팔마 신부가 1927년 10월 7일에 개원한 수도원에 하느님 뜻 의 집” 이란 명칭도 붙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는 이 공식 문서에 한 선택된 영혼” 이라고 명기되어 있는 루이사가 수녀들과 함께 살면서 자신의 영성으로 그들을 가르치게 하기 위함이었다.이 문서에 또한 팔마 신부가 교황 비오 11세로부터 새로 개원한 수도원에 대한 축복 전문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팔마 신부는 그러나 하느님 뜻의 집을 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더 파라클레테라는 거룩한 열성의 딸 수도원의 원장 수녀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유로 고발되어 체포되었고로마의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 지하 감옥에 미결수로 수감된 채 조사를 받았다그가 그런 고발을 받을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던 수녀들은 감옥에 있는 그를 계속 방문하였다과연 그 수녀들의 기대대로 공식 조사관은 그들의 영적 아버지의 모든 혐의를 풀어 주었다그러나 팔마 신부는 자기의 무죄 평결이 공표된 바로 그날 숨을 거두었다. 루이사는 팔마 신부의 죽음으로 자기 저술의 중요성을 깨닫고 인정한 한 사제를그녀의 훌륭한 옹호자들 중의 한사람을 잃었다팔마 신부도 앞서 떠난 브라칼레 신부와 몬테무로 신부와 같이 박해의 희생자가 되어 무덤에 묻혔던 것이다그러나 고무적인 일은루이사를 사랑하고 인정했던 그 박해 받은 사제들의 시복 소송이 각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 당시 메시나의 '거룩한 열성의 딸' 공동체는 내부분규와 역경으로 인해 지역 주교가 폐원 조처를 내리려고 하는 처지에 있었다주교는 친구 사제의 중개로 안니발레 신부에게일 년의 말미를 주면서 공동체를 쇄신하라고 하였고창설자 안니발레 신부는 필요한 개혁을 이루려고 멜라니 칼바를 초빙하였다멜라니는 프랑스 라살레트의 성모님 발현(1846)을 본 두 선견자 중의 한 사람으로 이탈리아에서 혼자 살고 있다가 이 쇄신 작업을 돕기 위해 메시나로 왔다그녀는 15개월 동안 수녀들과 함께 살면서 말과 모범으로 그들을 고무 (鼓舞)하여 더욱 열성적으로 수도 생활을 할 마음이 내키게 하였다.

안니발레 신부는 코라토에서 가까운 트라니에 이 공동체가 이미 있었는데도 코라토에 또 하나를 세워멜라니가 30년 전 메시나의 수녀들을 위하여 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루이사도 코라토의 수녀들을 위하여 해 주기를 희망하였다.그리하여 하느님의 섭리로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10월 7일 루이사는 안니발레 신부의 공동체에 들어갔고안니발레 신부는 1990년 이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이처럼 그는 하늘에서도 루이사에 대한 자신의 계획이 실현 되도록 힘쓰는 것 같았으니수녀들이 그들 가운데 있는 루이사의 현존에 열렬한 응답을 보냈던 것이다루이사의 책들은 그녀가 코라토의 이 하느님 뜻의 집에 들어간 시점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시점까지 꾸준히 퍼져 나가고 있었고,

 

 

 

  

이는 코라토의 산타 마리아 그레카 성당’ 의 목자이며 루이사의 고해 사제였던 베네데토 칼비 신부의 성원에 크게 힘입은 일이었다칼비 신부는 1926년 루이사에게 유년 시절 회상기를 쓰라고 하였고, 1930년에는 20년대 말기에 성모님께서 루이사와 대화를 나누시며 일련의 가르침을 주신 내용을 담고 있는 하느님 뜻의 나라의 동정 마리아를 쓰게 하였다.

칼비 신부는 1930년에서 1938년 사이에 이 동정 마리아」 를 제3판까지 출판하였다루이사도 이 책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으므로 직접 찾아오거나 우편으로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권하였다한 편지에서 그녀는 이렇게 썼다.

 

“ 천상 여왕님’ 책을 권장하시기 바랍니다하느님의 뜻을 한층 더 잘 알리는 일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 다른 편지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 ‘천상 여왕님’ 책을 힘써 권장하십시오그 위대한 여왕님께서 하느님 뜻 나라의 백성을 기르시려고 여기저기를 방문 하고자 하십니다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십시오.”

시대의 표징이 새롭고 더욱 가공할 전쟁을 가리키고 있었을 무렵루이사의 책들은 성모님을 죄인들의 마지막 피난처로 확인시켜 주고 있었으니, 1935년 예수님께서도 루이사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 ‘사람은 내 은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내 말에 귀를 막으며 내 사랑을 비웃다가도 타고난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잃게 되면 매우 겸손해진다악하고 완악한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아버이 품에 안기는 아이들처럼 내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다그러니 너는 내가 때때로 사람들을 치지 않을 수 없을 때에도 내 엄마의 손에 맡겨 다치지 않게 할 만큼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랑하올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고 내게 천상 여왕님을 보여 주셨다.그분은 형언할 수 없도록 엄위와 모성애가 넘치는 모습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시어모든 민족들 사이를 두루 다니시며 징벌의 타격을 받지 않도록 자녀들의 이마에 특별한 인장을 찍으셨다..... 다정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니에게 특권을 주셔서 어머니의 인장을 받은 이는 누구나 해를 입지 않고 구원되게 하셨던 것이다...”

 

칼비 신부는 하느님 뜻의 열렬한 사도가 되어루이사의 저술 신판들을 내면서 영적 일기를 계속 쓰도록 그녀에게 지시하였고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녀의 작품을 알렸다. 30년대 초기에 토리노의 마리아 데 루지부스라는 이름의 여성이 칼비 신부에게 요청하기를저명한 독일 베네딕토 수도회 학자 베다 루트비히 신부에게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 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시간들을 보내 주라고 하였다베다 신부는 이미 여러 권의 책을 낸 바 있었는데그 가운데에는 한 주간의 성화에 대한 책도 있었고이는 4개 국어로 번역되어 제6판까지 도합 48,000부를 찍어낸 책이었다루이사의 책을 처음으로 접했을 무렵 베다 신부는 가톨릭교회 안에서 오상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에 몰두해 있었다그러나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를 읽은 지 두 달 만에 그는 칼비 신부에게 이 글은 이 주제에 대해 일찍이 쓰인 논문 중 가장 위대한 것 이라고 하면서 독일어로 번역할 허락을 청하였다

 

베다 신부는 루이사의 저술을 처음으로 읽은 지 여섯 달 만에 다른 작업을 제쳐 두고 주로 하느님의 뜻에 대한 가르침에 몰두하였다그는 마리아 데 루지부스에게 (루이사)와 같은 영혼과 관련을 맺는 것은 온 세상 절반을 소유하는 것보다 내게 더 값진 일입니다신적인 것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전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상자들에 대한 방대한 연구 작업을 제쳐 놓았으니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더 이상은 출판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출판업자는 책을 내고 싶어 하지만 하느님 뜻의 나라를 제쳐 놓도록 나 자신을 설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보시려고 시험에 붙이고자 하시는 것 같습니다그러나 하느님 뜻의 나라는 다른 모든 것 위에 있습니다나는 자신을 바치기로 서약한 이 일에 충실히 머무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 에 이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시간들」 을 번역한 그는루이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주일을 제외하고 날마다 오전과 오후와 밤에 "끊임없이” 수난의 시간들을 묵상해 왔다고 하였다.베다 신부는 이 수난의 시간들」 독일어판을 1936년과 1937년 두 번에 걸쳐 총 55,000부를 발간했고루이사의 일기에서 발췌한 본문을 함께 실은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도 제1판과 제2판을 햡해 50,000부를 발행했다이 두 책을 출판한 결과 그는 루이사의 책들을 영어폴란드어프랑스어로도 번역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 루트비히신부와 디 프란치아 신부로 하여금 루이사의 책들을 출판하게 몰라댄 추진력은 하느님의 뜻에 대한 가르침을 연구하며 실천한 그들의 노력에서 나온 열매였다베다 신부가 루이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점을 확인 할 수 있다.

 

“ 하느님 뜻의 나라가 밤낮으로 나를 바쁘게 합니다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즉이 하느님의 뜻이 나 자신의 생명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이 논문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신적인 것을 더욱더 발견하게 됩니다이것이 우리를 흡수하면서 너무나 부드럽고 감미롭게 우리 안에 스며드는 바람에 이를 따르며 사는 것이 (삶의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1926년에서 1938년까지 루트비히 신부와 디 프란치아 신부의 노력으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루이사의 저술을 알게 되었다이 두 사제는 루이사의 저술에서 숭고한 가르침을 알아 보았을 뿐만 아니라 교회와 세상에 드러나게 권유하기도 한 셈 이었다루이사의 고해 사제 베네데토 칼비 신부도 이 책들을 대량으로 퍼뜨리기를 원했던 안니발레 신부의 계획을 강력히 지원하였다.그러나 그는 교구 사제였으므로 책 출판에 충당할 자력(資力)이 한정되어 있었다그러므로 안니발레 신부의 죽음 이후 루이사의 저술에 대한 그의 계획은 그의 수도회에 달려 있었다안니발레 신부의 후계자 비탈레 신부는 루이사의 저술을 잘 몰랐으므로 기도 공동체를 통해 그것의 보급을 촉진하는 것을 깨름칙한 일로 여겼다그러나 창설자의 유지(邊旨)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되었으니그는 트라니 대교구 대주교와 함께매우 존경 받는 신학자이며 수도회의 친구인 도메니코 프란체 O. F. M 신부에게 루이사의 저술을 보냈다.

이 프란체 신부는 디 프란치아 신부의 한 편지에 의하면 프란치스코회의 경건한 선교사이며… 비신자들 사이에선교할 목적으로 의학 공부를 한 의사였다사실 프란체 신부는 외과 의사요 생리학 및 선교 의학교수인데다가 로마 교황청 선교 협회 명예 회원시성성 조사 위원이기도 하였다.  그는 비탈레 신부에게 답신을 보냈는데여기에 안니발레 신부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출판한 루이사의 발췌문에 대한 평가가 들어 있었다그리고 자기가 그 글을 철저히 검토했을 뿐만 아니라 유능한 다른 신학자 한사람에게도 검토하게 했으며 보다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 위하여 루이사를 몸소 방문했다는 말도 덧붙였다그의 평가는 전적으로 긍정적인 것이었다.

 

사실이 책 전체를 읽을 시간이 없거나 그럴 뜻이 없는 사람들도 내용 목차를 일별하면완덕으로 나아가도록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 영혼 (모든 집착으로부터의이탈과 자기 소멸의 길을 통하여또 유혹과 시련들 이 시련들 중 가장 혹독한 한 가지는 현재까지 45년 이상이나 지속되고 있습니다. - 을 통하여얼마나 점진적으로 향상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우선 의사로서그토록 오랜 기간 꼼짝없이 침상에서만 지내야 했던 환자에게서 욕창이나 피부 염증을 보지 못했으니 단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또 저는 신앙 문제를 심사하는 (시성성의 한 조사 위원)으로서 매우 큰 위안을 느끼고 있습니다의사들과 고해 사제들과 대주교들이 여러 해에 걸쳐 철저한 조사를 했지만 그 누구도 아무런 속임수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확신을 얻었으니 말입니다.

끝으로 저는 사제로서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이 환자에게서 그리스도교적 덕행의 모든 고결함뿐만 아니라특별한 은총의 비추임을 받아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영혼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영혼을 정화하시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자비의 도구가 되게 하시려고 그녀 안에서 행하고 계신 듯한 모든 것과 함께저는 이 저술 안에서 그녀의 존재 의의라고 할 수 있는 중심 주제를 봅니다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 가련한 환자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 자신의 뜻은 악이라것과모든 인간의 뜻에 공통적인 악이 죄인 것처럼 모든 죄인들에게 보편적인 치유제가 바로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인간 뜻의 생명이 되는 것임을 깨닫도록 호소합니다.

이 책이 독자에게 하느님과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의 권리를 일깨우면서 그분의 지고한 권능이 모든 인간의 뜻과 이 하찮은 세상의 권세나 나라들 위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면혼들의 선익을 위해 이미 큰 공헌을 한 것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신부님사제이며 의사인 저의 판단으로는오직 그런 고통을 감수한 영만이아직도 계속 감수하고 있는 영만이그리고 하느님의 뜻 안에 녹아든 인간의 뜻만이이 영혼이 드러내는 것과 같은 중요하고 근본적인 개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봅니다그런데학교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채 홀로 그 숱한 고통을 겪으며 침상에만 붙들려 있는 이 사람이따라서 문학이 나 신학,또는 수덕에 관한 지식이 극도로 제한된 상태에 있는 사람이이해하기에 극히 까다로운 주제에 관해서 참된 능력을 가지고 말하고 있고극히 난해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으며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의 영혼을 더없이 향기로운 덕행의 영역으로 데려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이 환자에게 실행한 신체적정신물리학적윤리적 테스트에 대해 상술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저는 내심으로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이는 세속적인 쾌락이나 무절제와 절연하고 65년을 살아 온 끝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제가 재천명하는 확신입니다그것은 신부님께서 저에게 주신 이 책이 사람들에게 보급되기만 하면 크나큰 선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확신입 니다.올곧고 유덕한 영이 (주님의 말씀을받아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잊지 못할 기회를 주신 신부님께 감사드리며 신부님의 힘있는 기도를 간청합니다.”

 

프란체 신부는 자신의 이 편지에 콘살보 발스 O. F. M. 신부의 증언도 동봉하였다발스 신부는 로마 교황청 관할 안토니오 대학교의 교의 신학 교수이며작은 형제 수도회’ 의 도서 교열 심사 위원장이었다그는 1936년 6월 18일자 편지에서 루이사의 저술에 대한 연구의 결론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검토와 비교 작업을 거친 이 모든 관찰에 비추어 볼 때저는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과 이 영혼 안에 이루어지고 있는 일은 하느님의 일이라는 깊은 확신을 품게 되었습니다.”

 

루이사와 그녀의 저술에 대한 이들의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비탈레 신부는 안니발레 신부의 출판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않기로 결정하였다이 점에 대해서는 창설자의 유지를 받들 결심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무엇 때문이었을까우리는 그 이유를 모른다그 결정은 어쩌면루이사의 글은 기도 수도회 (로가찌오니스티 수도회의 사명과 관계가 없다좋은 일을 하고 있지만 사제들을 위한 기도 사명을 분명히 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는지 모른다좀 더 깊이 연구해 보면 하느님의 뜻에 대한 저술과 성직자의 쇄신곧 기도수도회’ 의 핵심 사명 사이에 긴밀한 연관이 있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이지만 말이다하기야 루이사의 저술을 혹평하며 몇 년뒤에 심한 박해를 하게 될 자들이 다른 이들도 그녀에 대해 비뜰어진 편견을 갖도록 벌써 공작을 시작했을는지 모른다그러나 안니발레 신부가 살아 있었다면 이 점을 과히 놀라워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루이사의 책들이 널리 보급되는 것은 나중으로 유보되어 있다는 것올 알고 있었던 듯 몇 번이나 그녀에게 훗날을” 위하여 작품들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1930년대에 루이사의 적대자들은 비공식적인 운동을 획책하여 교황청 검사성성이 루이사에게 의혹을 품게 하였다이를 선동한 자들과 이름과 그 동기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그들이 꾀한 운동의 성공으로 판단하건대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들어 있음에 틀림없다루이사의 대주교인 레오 대주교와 고해 사제 칼비 신부 및 다른 많은 사제들은 그녀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으나일부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그녀를 거짓 신비가로 여기고 있었다그런데 거짓 신비주의가 만연한 시기였기 때문에 검사성성이 특히 그 문제에 예민했으니그녀의 적들이 기회를 잡은 셈이 되었다그들의 간교한 준비로 루이사는 결국 굴욕적인 탄핵을 받았다그것은 1938년의 일이었다.

 

루이사의 삶에서 가장 큰 시련이 나치의 기습처럼 전격적으로 그녀에게 들이닥쳤으니, 5월 11일 검사성성을 대표하는 한 사제가 코라토에 도착하였다그는 루이사를 찾아와서 그녀의 글에 의거하여 출간된 세 가지 책을 넘겨달라고 명령하였다이는 그녀의 고해 신부 베네데토 칼비가 의미심장하게 편집하고 수정한 책들이었다그런데 검사성성에서 온 그 사제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아직 간행되지 않은 루이사의 일기장 서른네 권도 압수하였다. 1938년 7월 18일 오늘날의 신앙교리성인 검사성성은 루이사의 글에 의거하여 펴 낸 세 가지 책을 단죄하는 교령을 발표하였다그것은 수난의 시간들 한 판()과 루이사의 일기 발췌문 한 판하느님 뜻의 나라의 동정 마리아」 한 판에 대해서였다그러나 성 안니발레 디 프란치아 신부가 교회 인가를 받아 발행한 수난의 시간들 네 판과 단죄된 판 다음에 나온 판들은 교령의 영향권 안에 들지 않았다마찬가지로 하느님 뜻의 나라의 동정 마리아」 도 단죄된 한 판 전후에 간행된 판들은 교령과 무관한 것이었다.

(참고로칼비 신부가 편집 발행한 그 발췌문 한 판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다음은 그 교령의 내용이다.

신앙과 윤리 문제에 있어서 가르침을 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추기경들은 신앙교리성의 동의와 성성 고문들의 동의를 얻어루이사 피카레타가 집필하고 다른 이들이 편집해서 여러 시기에 걸쳐 다양한 장소에서 출판한 다음의 책들을 단죄하여 금서 목록에 넣도록 명하는 바이다.

 

1)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가 함께 실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시간들

2) 하느님 뜻의 나라에서

3) 하느님 뜻의 나라의 천상 여왕

 

같은 해 같은 달 14일 목요일인 그 이튿날교황 비오 11세 성하는 하느님의 섭리로검사성성 사정관들이 통상적인 알현석상에서 제출한 결정서를 승인,재가(裁可)하고 공표하도록 명하였다.

이상한 일이지만그 압수 사건과 단죄 교령의 발표는 루이사의 교구장 레오 대주교도 고해 사제 돈 칼비 신부도 모르게 일어난 일이었다그러므로 루이사가 7월 13일의 교령에 복종하겠다는 뜻을 적은 글을 레오 대주교에게 보냈을 때대주교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로 그녀에게 대답했던 것이다사실 압수 그녀의 일기장 서른 네 권은 단죄되지 않았다그것은 천상의 책 으로 알려진 루이사의 일기로서 이 안에 그녀의 영적 가르침 대부분이 들어 있는 것이다.

루이사의 편지에 의하면그녀를 반대하는 운동의 선동자들은 그들의 신원을 밝히거나 그녀와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그럼에도 루이사는 교령이 공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즉시교회의 교도권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과 복종을 고백하는 다음의 서한을 썼다.

        

   

 

“ 이에 본인은 성교회의 판단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즉각적이며 전적이고 절대적인 순종으로자진해서 신속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겸손의 의무를 다하고자 합니다이를 통하여 본인은 신앙교리성이 위의 책들에서 부정하고 단죄하는 점을 동 성성의 취지대로 무제한 부정하고 단죄하는 바입니다또한 이 순종의 선언문을 지극히 사랑하올 대주교님 쥬세페 마리아 레오 몬시놀께 맡겨드리며그분의 부성애로 이를 성성에 송달해 주시기를 간청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