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론

신앙의해, 사순 제4주일(2013, 03, 10) ▣ 주일강론

은가루리나 2018. 8. 12. 22:38

moowee 등급변경▼ 조회 338 추천 0 2013.03.10. 09:30



< 신앙의해, 사순 제4주일 > 2013, 03, 10

 

 

하지 정맥류 수술 때문에 한국에 다녀왔다.

압박 스타킹의 착용과 불편한 다리 때문에 병원과 필요한 곳만 다녀왔다.

 

지난 1월 병원 진료에 맞추어 오랜만에 어머님을 찾아뵌 후 약 2개월만에

다시 어머님을 찾아뵈었는데도 올해 九旬이 되신 어머님께서 이번엔

저의 손을 잡으시며 너무 보고 싶었다며 긴 눈물을 흘리셨다.

 

평소에도 가끔 손녀에게 "왜, 하느님은 우리 신부님을 일본으로 데려가셨어?" 라고

말씀하셨다는 어머니께서는 이번엔 "'내가 죽을 때가 됐는지 신부님이 너무 보고

싶다' 고 했더니, 손녀가 '할머니, 지난 1월에 신부님을 보셨는데 뭘 또 보고

싶으세요?' 라고 해서, 어머니는 손녀에게 '내가 낳아서 그렇다 왜?' " 라고

말씀하셨다며 저의 손을 잡고 계속 눈물을 흘리셨다.

 

가슴이 짠해 지면서도 저는 "어머니, 이 세상은 지나가는 나그네살이에요.

하느님 만나서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살 때까지는 어쩔 수 없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늘 하느님만 생각하시면 서로 떨어져 있어도

하느님 안에서 늘 함께 만나는 거에요." 라고 말씀드려도

어머니께선 좀처럼 눈물을 그칠 줄 모르셨다.

어린애가 되셨다, 나도 눈물을 흘렸다.

 

저 또한 어머님의 말씀이 좀처럼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낳아서 그렇다 왜? 내가 낳아서 그렇다 왜? 내가 낳아서 그렇다 왜? ~~~

 

그렇다!

오늘 복음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 에서 아버지는 왜 못된 작은아들,

돌아온 아들을 그토록 기쁘게 반기며 잔치까지 벌여주었는가?

그 답은 한 가지 "아버지가 낳은 아들" 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지금까지도 "탕자의 비유" 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 표현은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말일 뿐이며,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탕자" 가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되찾은 아들(루카 15,22)" 일 뿐이다.

 

큰아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작은 아들이 탕자로 여겨지지만,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그저 자신의 작은아들일 뿐이다.

왜? 그를 낳아준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느님에게 있어서의 우리 인간은 누구일까?

하느님에게 있어서의 우리 인간은 '죄인'이고 '의인'이고 이전에

먼저 하느님이 만드신 하느님의 소중한 피조물, 하느님의 것일 뿐이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당신과 비슷하게 창조하셨고

모든 피조물 중에서 인간을 으뜸으로 세워주셨고 가장 소중히 여기신다. 

 

한마디로 하느님은 우리가 매 주일미사에서 입을 모아 함께 고백하듯이

우리를 만들어주신 우리의 "전능하신 천주 성부, 우리의 창조주" 이시다!

 

진짜 주인은 자기가 만든 물건이나 작품을 매우 소중히 여긴다.

자신의 모든 혼을 담아 그 물건과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하고 보고 싶어하는 것은 그 아들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혼과 어머니의 피가 섞여져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러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진짜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을 절대로 마귀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으신 것이다.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시며,

그 예수님께는 "의인" 보다 "죄인" 이 더 소중하였다.  

 

왜? 당신이 성부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죄인의 구원" 에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도 예수님처럼 "영혼 구원" 을 사명으로 여긴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비슷해진다, 비슷해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따라쟁이" 가 될 수밖에 없다.

 

오늘 복음의 아버지에게는 큰아들보다 집을 나간 작은아들이 더 소중한 것처럼,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의인들보다 죄인들이 더 소중하였고,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17)." 고 말씀하셨다.

 

이제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그러면 "누가 의인이고 누가 죄인이냐?"  하는 것이다.

"누가 큰아들이고 누가 작은아들이냐?" 하는 것이다.

"누가 건강한 자이고 누가 병자냐?"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시는가???

 

저는 그동안 적지 않은 많은 분들이 스스로를

"건강한 자로, 큰아들로, 의인으로 여기는 분들" 을 많이 보아왔다.

 

병든 자는, 작은아들은, 죄인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겸손하다" 는 사실이다.

역으로 건강한 자는, 큰아들은, 의인의 특징은 "교만하다" 는 사실이다.

교만한 사람 앞에서는 하느님의 "전능함" 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나는 겸손한 사람인가 교만한 사람인가?

 

오늘 복음의 첫 부분에 답이 아주 명확히 잘 나와 있다.

겸손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예수님 가까이 몰려드는 사람이고,

교만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투덜거리는 사람이다.

 

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예수님 "가까이 몰려드는 사람" 인가

아니면 "투덜거리는 사람" 인가?

 

교만한 사람은 무슨 일에든 잘 투덜거린다.

 

오늘 복음의 첫 부분, 매일미사책을 펴시고 첫 줄부터 다섯 째줄까지를

다함께 큰소리로 낭독하는 것으로 강론을 끝맺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