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44 pp.217-223 제 3편 제 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 에 있어서의 위탁 제3절 부귀와 빈천 ①

은가루리나 2018. 9. 28. 16:09


제3편 위탁의 대상



제1장 위탁의 일반적 대상


제2장 현세적 사물에 있어서의 위탁 일반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제3절 부귀와 빈천 ①

 제4절 장소와 환경


제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건강과 질병

 제2절 질병의 지연과 그 결과

 제3절 삶과 죽음

 제4절 자연적 은혜의 분배에 관한 불평등에 대하여

 제5절 직무

 제6절 휴식과 평온


제5장 명성의 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호평

 제2절 굴욕

 제3절 선인으로부터의 박해


제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영광의 생명

 제2절 은총의 생명

 제3절 선덕의 실천

 제4절 죄를 피하는 일

 제5절 계명, 서원, 회칙 등의 준수


제7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어떤 종류의 영적원조의 상실


제8장 7장의 계속 - 실패와 과실

 제1절 분발심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3절 남의 영혼의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4절 우리 자신의 죄과


제9장 8장의 계속 - 내적시련의 일반


제10장 9장의 계속 - 유혹


제11장 10장의 계속 - 위안과 건조


제12장 11장의 계속 - 암흑, 무감각, 기타

 제1절 정신의 암흑

 제2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제3절 의지의 무력

 제4절 영적빈곤


제13장 12장의 계속 - 평화, 불안, 소심

 제1절 평화

 제2절 각가지 공포

 제3절 거룩하고 정의이신 천주께 대한 경의

 제4절 양심상의 小心


제14장 13장의 계속

 제1절 일반적 길인가, 신비적 길인가

 제2절 신비적 관상의 갖가지 상태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

 제4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제15장 기억해야 할 두가지 실례



p.217



제三편 위탁 (委託) 의 대상 (對象)


제  장 

외부적 선(善)과 악(惡) - 행(幸)과 불행(不幸)- 에 있어서의 위탁(委託)  



제三절 부귀(富貴)와 빈천(貧賤) ①




「마음으로 가난한 이는 진복자로다。천국이 저들의 것임이니라。」

(마테오5 .3)



성「프란치스 꼬. 살레시오」는 이에 덧붙여 말한다。


「그러므로 앙화로다 마음이 부유한 이여、

지옥의 비참함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부유한 사람이란、

마음 안에 재물을 가지는 사람이거나、

또는 재물 안에 마음을 가지는 사람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마음 안에 아무런 재물도 가지지 않으며、

또한 재물 안에 마음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다。



바다제비는 공 모양의 집을 지어、

윗쪽에만 하나의 조그마한 출입구를 남겨 둔다。


그리고 그 집을 물가에 걸어놓지만、

비록 파도의 비말(飛沫)을 받아도、

물에 젖지 않도록 견고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새는 바다 안에、

바다 위에 살면서 바다를 자기의 것으로 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필로테아』여、

그대의 마음도 그처럼 오직 하늘을 향하여 열려 있어야 하며、

재물이나 그 밖에 허무한 사물이 이에 침입(侵入)해 오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된다。


비록 그대가 부유하드라도 

그대의 마음은 재물에 애착하지 말고 항상 이것을 초월하여 

재물 안에 있어 재물을 가지지 않음과 같이、

재물의 노예가 되지 말고、그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대는 천상의 생명을 위하여 만돌어진 그대의 정신을 

지상(地上)의 사물의 포로가 되게 해서는 안된다。


항상 그대의 정신을 그 위에 두고、

결코 그 안에 들어박히게 해서는 안된다。」(「입문」三편 一四장)



p.218


위에 말한 것은、마음의 가난함에 관해서다。


이 가난함에는 궁핍에 있어서의 단지 인종(忍從) 

또는 소유에 관한 이탈에서 가난함을 「자기 숙녀(淑女)」로 삼은 

「아씨지」의 성「프란치스 꼬」의 열애에 이르기까지의 

무수한 단계가 있다。


이 마음의 가난함이 높은 완전성(完全性)에 이를 때에、

그것은 주께서 찬양하신 진복팔단의 하나가 된다。


이 가난함의 정신은、이를 무조건 기구하며、

그리고 행운에서나 곤궁에서도 그것을 강한 인내로 추구하여야 한다。


참으로 그것은 도달해야 할 목적이며、

그리고 성「벨나도」가 적절히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덕이 되게 하는 것은 가난함이 아니고、가난함을 사랑하는 정신이다。」

(「성 벨나도 서간」一○○)




p.219


이에 반하여 부귀(富貴)와 실제의 빈곤(貧困)과는 

거룩한 위탁의 주요한 대상(對象)의 하나다。


어느 정도의 물질적 재산이 없이는

하나의 수도원은 생계를 유지할 수도、

자선사업을 계속해 나갈 수도、

또한 장래의 안정(安定)을 적절히 전망할 수도 불가능하다. 


만일 물질적인 것에 부자유스럽지 않다면、

정신은 근심 걱정에 사로잡히는 일이 적으며、

더욱 자유스럽게 영적(靈的)인 것에 온전히 전심(專心) 할 수 있다。


천주께서 우리를 그 회계원(會計員)과 그 재산의 분배자로 정하신 이상、

우리는 결실이 풍성한 사도적 사명(使徒的使命)을 수행할 수 있음이 명하다。


그것은 물질상의 위안을 줌으로써 

천주를 위하여 많은 영혼을 획득할 수 있는 기희를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남을 행복하게 하는 기쁨도 맛볼 수 있다。



과연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되니라。」(사도행전2.35) 


그러기에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가 

「실제로는 부유하지만、마음으로 가난하다는 것、

이것은 그리스도신자의 위대한 행복이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 하면、

그로써 신자는 현세를 위하여 재물의 편의(便宜)룰 가지게 되고、

내세를 위해서는 가난함의 공로를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J (「입문」三편 一 四장) 

라고 한 것은 참으로 도리에 맞는 말이다。





그러나 「성「보나벤뚜라」에 의하면、

현세의 재물의 풍유함은 영혼에 끈적이는 끈끈이와도 같은 것이며、

영혼이 천주께로 날아가는 것을 방해한다。」

(성「알퐁소· 드·리고리오」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一 장 二절)


p.220


따라서 풍유한 재물은 수도자로 하여금 

지나치게 지상의 사물에 마음을 뻬앗기게 하고、그것에 마음을 애착시켜、

다소라도 생활의 엄격함을 포기하고、안락을 구하는 것에 몸을 맡겨、

천주에의 사랑을 냉각시킬 위험에 놓이게 된다。


돈은 세속적인 그리고 방종한 생활의 열쇠이므로 

부유함은 세속의 사람들을 보다 한층 두려운 유혹에 처하게 한다。

부유함에 잇달아 자존심、명예욕、오만、야심 등이 쉬이 마음에 들어온다


한마디로 말한다만、

「재물에의 애착은 모든 악의 뿌리」이므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고、

적어도 천주의 성심에 맞갖게 돼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만 부유한 자、

날마다 호화로운 향연을 일삼고、

문전에서 「나자로」가 굶주림에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돌보지않는 

부호의 도배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마테오19.23、루까12.21、16.19둥 참조)



한편으로 

궁핍은 정신을 불안과 근심으로 압도하므로、

자기를 온전히 천주께 바쳐버릴 수 있는 자유를 전연 남기지 않는다。


그것은 아직 약한 영혼을 낙담과 불평과 반역의 위험에 임하게 한다。


그리고 궁핍이 만일 언제까지나 계속되고 또한 그것이 지나치게 심하면、

생활을 거의 불가능하게 한다。





부유와 궁핑과의 사이에 사도 성「바오로」가 위대한 부(富)로 간주한 

하나의 중간계급(中間階級)이 있다。


그것은 생활을 위하여 충분한 소유 내지 의식(衣食)에 만족하는 

정신의 절도(節度)를 수반하고 있는 경건이 그것이다。



(티모테오전서6.7-8) 성 「프란치스꼬·살레시오」는 

그 주교관의 가난함에 관하여 사람들로부터 말을 들었을 적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여하튼 적절히 의식(衣食)을 충당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 이상의 것은 악과 근심의 씨、사치 밖에는 되지 않는다。


나의 수입은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넉넉하다。

그것 이상의 것이 있으면 여분(餘分)의 것이리라。


필요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으로 다만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데 불과하다。


즉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흔히 천주의 재산을 낭비하는 종을 위해서만 사용하게 된다。



조금 밖에 가지지 않는 이는 회계도 간단하다. 

여분의 것을 조금 가진 사람은 베풀어야 할 곳도 적고、 

누구에게 줄까 하여 고심하는 것도 적다。


왜냐 하면、

영광의 왕이신 천주께서는 식별(識別)로써 섬김을 받으시고、

흠숭되시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수입이 많은 이는 

때로 연말에 가서 비록 부채(負債)는 없다 하드라도 

남는 것은 나보다도 많지 않다. 


나는 빚이 없는 것을 큰 재산 이라고 생각한다。


그 위에 나의 교구는 

나에게 있어 『돌레드』 대교구의 가치와도 비견(比肩)할 수 있다。

그것은 나에게 천국이나 지옥의 어느 것을 얻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정신」一四편 一四、三四)


p.221


같은 성인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현세에 있어、

마치 정신은 천국에、육체는 무덤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생활하여야 한다. 


지상에 있어서의 참된 행복은 족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에 있다。


주 예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어、

그것을 생애의 충실한 반려(伴侶)로 삼으신 가난함을 

감히 누가 사랑하지 않겠는가。


조그마한 것에 만족하기를 배우기에는 

우리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넉넉하다. 


왜냐 하면、

우리가 가난하다는 것은 비교적인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필요한 것만을 바란다면、

가난하게 되는 일은 거의 없으리라。 


그런데 욕망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얻으려 한다면、

언제까지나 부자는 되지 않을 것이다。


짧은 시간으로 

더구나 수고하지 않고 부유하게 되는 비결은 

욕망을 조절하는 것이며、

붓을 가하여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는 화가(盡家)에게 아니고、

끌을 넣어 그 작품을 완성하는 조각가(彫刻家)에 닮도록 하는 것이다。

(「한모」신부의「성 프란치스꼬·살레시오 전」七· 一四)



p.222


그러므로、우리는 거록한 위탁을 수련(修綠)하여야 한다。


그것은 한편에 있어 

궁핍을 피하고 부유한 신분이 되기 위해서는 

근로(勤勞)와 정돈(整頓)과 절약(節約)의 정신、

선덕까지도 지녀야하기 때문이다。


물론 천주께서는 어디까지나 당신의 소유물의 주가 되시며、

그것을 뜻대로 주시고、또는 거절하시기 때문이다。


또 다른 편에 있어

우리는 자기의 궁상(窮狀)을 성화(聖化) 하고、

또는 재물을 선용하는 것을 과연 알고 있는가。


아니다、우리는 그것을 전연 모른다。

아시는 이는 오직 천주 뿐이시다。



그러므로 최선의 길은、

자신을 천주의 손에 완전히 맡기고

구약의 현자(賢者)와 함께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다。


「주여、

내가 극도의 곤궁에 빠지는 것도、부유하게 되는 것도 허용하지 말으소서。

오직 필요한 양식을 내게 주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당신을 잊고 

『주는 누구냐』고 호언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혹 궁핍으로 말미암아 불의 (不義)를 행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잠언30. 8-19) 




천주께서 부유 또는 과부족이 없는 상태 혹 곤궁에 버려두실 때에도、

거기에는 항상 

임의의지(任意意志)와 명시의지(明示音心志)가 함께 뒤섞여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항상 순명에 위탁을 덧붙여야 한다


만일 천주께서 우리에게 그 은혜를 풍성히 베풀어 주신다면、

우리는 사도 성 「바오로」가 현세의 부자에게 준 교훈、

즉 「교오한 생각을 가지지 말며、

의뢰치 못할 재물을 의뢰치 말고 

시사(施捨)하여 선업(善業)에 풍부한 자 되어、

다른 이들에게 대하여 후하게 하며、

또한 자선을 행함으로써 참된 생명을 얻도록 

장래를 위한 견고한 기초를 자기를 위하여 세우게 할지니라。」

(티모테오 전서6 .17-19)  /////------------------------------------



p.223


우리는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의 권고에 따라서 

현세에 있는 동안은 

「우리의 마음 안에 동시에 부유함과 가난함、

또한 현세의 사물에 대한 깊은 배려와 큰 경멸심을」두도록 노력하자。


즉 자기 재산에 대한 세속 사람들의 그것보다도 

우리는 더욱 깊은 배려를 하여야 한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만 일하지만、

우리는 천주를 위하여 일하기 때문이다。


이 배려는、

거기에서 홀러나오는 의무감과 같이

평온하고 평화에 충만한 침착한 것이어야 한다。


「천주께서는 참으로 

우리가 당신에 대한 사랑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기를 바라신다。」



또한 여기에 재물에 대한 경멸을 덧붙이자。


「이 재물에 대한 배려가 탐욕으로 변하지 않도록、

아직 가지지도 않은 재물을 오랜 동안、몹시 초조하게 욕구하지 않도록、


그리고 이미 가지고 있는 재물에 지나치게 애착하는 나머지、

이에 마음과 생각이 사로잡혀、

이것울 잃는 것율 매우 두려워 하거나、근심하는 일이 없고、

그리고 만일 그것을 잃는 적이 있어도 극도로 슬퍼하지 않도록 

경계하자. 


왜냐 하면、

손실(損失)에 대한 슬픔처럼、

잃은 것에 대한 애착을 강하게 입증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입문」三편 一四、一五장)



「폭풍우、화재、홍수、가뭄、도난(盜難)、소송(訴訟)과 같은、

우리를 다소 빈곤에 빠지게 하는 불운(不運)에 부딪칠 때야말로 

참으로 평온하게 이 재산의 손실을 감수하고、

곤궁한 상태에 굽히지 않으며、

굳센 인내로 이에 순응하여、

가난함의 정신을 실로 실천해야 할 때다。


사람은 아무리 부유하드라도、

무엇인가의 부족을 느끼는 일이 허다히 있을 수 있다。


『필로테아』여、

지금 말한 것과 같은 재난에 부딪치는 것을 기꺼이 여기며、

그것을 감수하고 달갑게 견디는 것이 좋다。」(동상 一五장) 



「그러므로、

만일 그대가 혹 병을 앓을 때에  의약을、

흑 겨울에 불을、

혹 때로는 의식(衣食)까지도 결핍될 때에는、

『천주여、당신은 나에게 부족함이 없나이다』라고 기도 하여 

마음을 평화로이 간직함이 좋으리라。」

(성「알동소·드·리고리오」의「예수.그리스도의 참된 정배」一三장 二、五)



p.224


「사랑하는 『필로테아』여、

만일 그대가 진실로 가난하다면、

더우기 정신의 가난함을 지키어、 

그대가 놓여진 경우를 하나의 선덕으로 변하게 하며、

청빈(淸貧)의 보물을 그 참된 값어치대로 활용하여야 한다。


청빈의 보물의 찬란한 빛은 현세에서는 사람의 눈을 끌지 않지만、

그러나 사실은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미려하고 귀중한 것이다。


그대에게는 착한 벗이 있다。

실망할 필요는 없다。


주 예수께서도、성모께서도、사도들도、또한 그 밖에 많은 성인 성녀도、

가난하게 생활하시고、

그러고도 부자가 될 수 있었는데도 재보(財寶)를 업신여긴 것이다。


.... 그러므로, 

가난함 가운데 탄생하시고、가난함 안에 살으셨으며、가난하게 서거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랑하셨던 반려(伴侶)인 청빈을 포옹할 것이다。」

(「입문」三편 一六장)




성녀 「마리아·막달레나·뽀스뗄」은 

그 작은 수도단체와 부득이 마굿간에 머물러야 했을 적에, 기쁨에 넘쳐、

「아、자매들이여、나는 만족합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탄생하실 때에 

왕궁도 아니고、대리석의 여인숙(旅人宿)도 아니며、

「베틀레헴』의 외양간에서 탄생하신 주께 더욱 닮게 되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훗날에 이렇게도 말하였다。


「나는 수도원이 부유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하고 있읍니다。

다만 없어서는 안될 것만을 바라기로 합시다。


그리고 또한 

그러한 것까지도 우리들의 활동에 의하여 얻도록 하여야 합니다。


부자가 되려는 것과 같이 열심으로 힘을 기울여 일하십시오.

렇지만 어디까지나 가난하기를 바라고 또한 원하여야 합니다。


천주께서 나에게 세우도록 명하신 수도회는、

청빈과 겸손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청빈의 정신이 잃어질 때에 회는 반드시 넘어지고 맙니다。」

(「동 성녀전」一○ 一八장)



p.225


성 「요셉」은 빈궁에 있어서의 섭리에 대한 위탁의 감탄스러운 모범이다。


「천주께서는 그가 항상 가난하기를 바라셨다. 

이것은 인간 위에 닥칠 수 있는 가장 혹심한 시련의 하나다。


성『요셉』은 사랑으로써 더구나 평생 그것에 복종하였다。


그 가난함은 세상의 모욕과 배척의 과녁이 되었고、

생활에도 어려울 정도였다。


수도자가 서원에 의해서 약속하는 자발적인 청빈은 극히 바람직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받음을 방해하지 않으며、

단지 여분만을 포기시키므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성요셉』과 주와 성모의 가난함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요셉』의 빈곤은 자발적인 것이기는 하였지만、

그리고 또한 그가 그것을 매우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경멸과 배척과 굴욕과의 과녁이었다。


참으로 사람들은 

이 위대한 성인을 하나의 가난뱅이 목수로 밖에 간주하지 않았다。


그는 그 작은 가족 전체의 생활을 지탱하기 위하여는 

누구도 미치지 못할 깊은 사랑을 기울여서 몸율 아끼지 않고 일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에 필요한 각가지 것을 얻기에 

충족할만한 일은 아마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다하고 나서도 빈곤과 비천이 계속되는 동안、

아마 자주 닥쳐온 내적 권태(內的倦怠)에 결코 패배하는 일도、

압도되는 일도 없이、

매우 깊은 겸손으로써 항상 천주의 의지에 복종하고 있었다。」

(성 프란치스 꼬· 살레시오」「대화편」一九)



p.226


위에 든 위대한 모범에 따르기 위하여、

「사랑하는 『필로테아』여、

그대는 결코 그대의 가난을 한탄해서는 안 된다。

한탄하는 것은 이를 싫어하는 증거이다. 


만일 그대가 가난함을 싫어한다면、

이미 그대는 청빈의 정신을 잃고、욕망에 있어 부유한 자라고 말해야 한다。


필요할 정도로 남에게서 원조를 받지 못함을 슬퍼해서는 안된다。


왜냐 하면、청빈을 바라면서도 그 부자유를 싫어하는 것은 

청빈의 명예와 아울러 재물의 편리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입문三편 一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