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과 순결에 대하여

Re:<교육을 마무리할께요>

은가루리나 2018. 12. 26. 17:52


Re:Re:Re:Re:Re:순결과 동정  ╂ 오늘의 복음


무화  등급변경▼ 조회 198  추천 0  2017.12.01. 22:56



수도원의 영성 1: 순결 


moowee 등급변경▼ 조회 17  추천 0  2016.01.19. 16:10




제3장   순    결



제 1절  순결에 대한 윤리적 분석



순결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처음부터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삶도 있고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늘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마태복음 19:11-12)이다.


순결은 “하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들여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지키는 신앙 덕목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즉 이는 명령이 아니라 하나의 권고하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사도 바울의 글 가운데에도 순결에 관한 권고가 있다. 

이 권고는 다소 긴 문장으로 되어 있지만, 

문장 전체가 다양한 경우에 있어서의 순결한 

삶에 대한 권고이므로 여기 그대로 인용하겠다.


“나는 여러분이 근심 걱정을 모르고 살기를 바랍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지만 

결혼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에 마음을 쓰게 되어 마음이 갈라집니다. 


남편이 없는 여자나 처녀는 어떻게 하면 몸과 마음을 거룩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지만 

남편이 있는 여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 일에 마음을 씁니다. 


나는 여러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을 속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이 아름답게 살며 

딴 생각 없이 오직 주님만을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욕정을 억제할 수 없어서 자기 약혼녀와의 약속을 어겨야 할 경우 

그 약혼녀에 대해서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어쩔 수 없을 때는 원하는 대로 그와 결혼하십니오. 

그래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단단히 마음을 먹고 

구태여 그렇게 하지 않고도 자기 생각을 다스릴 힘이 있어서 

자기 약혼녀를 그대로 두기로 결심한다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 약혼녀와 결혼하는 것도 잘하는 일이지만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잘하는 일입니다. 


아내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은 남편에게 매이지만 

남편이 죽으면 자기가 원하는 남자와 결혼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꼭 교우하고만 결혼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 의견 입니다만는 과부는 혼자 지내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나에게도 하나님의 성령이 계신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렇게 상세히 상황 별로 순결한 생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에 대해, 

교서는 이런 순결한 생활의 선택이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게” 할뿐만 아니라, 

“하늘나라를 위하여” 선택이 이루어질 때, 

이런 선택은 “어느 정도로 세상 한가운에 하늘나라가 현존하고 있다”고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즉, 순결의 서약을 통해 봉헌된 사람들은

결혼 생활과 가정 생활의 일시적인 기쁨을 자유롭게 포기함으로써 

구원 경륜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음으로써” 

이 지나가는 세상한 가운데서 미래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선포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일치하는 삶, 그 삶 안에서 내포된 사랑, 

그리고 인간 마음의 다른 모든 사랑을 완전히 채우는 사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 제 9장”에서 봉헌된 순결 생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너희가 외출할 때 여자들을 보는 것을 금하지는 않지만, 

그들을 탐하거나 그들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다. 


만짐으로나 감정으로뿐 아니라 봄으로도 욕정이 일어나며 

부정한 눈길을 하고 있다면 깨끗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지 말지니, 

부정한 눈길은 부정한 마음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 정욕의 눈길은 주님께 혐오을 일으킨다(잠언 27:20, 칠십인 역본) 

…주가 악에 깊이 빠져들어 

어떤 여자로부터 어떠한 종류의 편지나 작은 선물을 몰래 받았을 때, 

그가 이 사실을 스스로 고백하면 용서해 주고 그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사실이 발각되고 확인되면 

사제나 원장의 판단에 따라 엄한 벌을 받게 된다.”



여기에서 보면 아우구스티누스는 

봉헌된 독신 생활의 중요성과 아름다움을 직접 깊이 개진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러 정황을 고려해 볼 때 

그 생활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는지 감지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저서 “거룩한 동정성”(401년 저술)은 

교부 시대에 이 주제에 관해 씌여진 가장 훌륭한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그는 봉헌된 동정의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가치가 

성적 절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봉사를 위해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데 있다고 본다.


“그것이 동정 자체 때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봉헌된 것이기에 영광스럽다.”

(거룩한 동정성8.8)

즉 동정의 탁월함은 

하나님께 더 완전하게 자기를 봉헌할 수 있게 한다는 점과  (거룩한 동정성 22),

썩어질 육체를 갖고 있으면서도 영원한 불멸을 추구하고 있음을 뜻한다

(거룩한 동정성12,13)는 사실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성 프란시스의 작은 꽃들”에서는 

‘거룩한 순결에 대하여’라는 항목으로 순결을 강조하고 있다.

그 중 몇 구절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악마는 사람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결코 그 사람을 유혹하려는 야망을 포기하기 않는다. 

사람이 육욕을 버리지 않는 한 은혜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악은 순결을 해친다.

순결은 그 위에서 숨만 내쉬어도 흐려질 수 있는 깨끗한 거울과 같은 것이다. 

순결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욕망과 감정을 제어하며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경건 문학은 오늘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 

지나치다 할만큼 엄격한 순결을 강조하고 있다.


금욕주의를 하나의 영적 전쟁으로 여기고 있으며, 

육체를 이기는 자는 모든 적을 이기는 것이고 

모든 선을 얻는 자라는 견해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는 

‘순결한 마음과 단순한 의도에 대하여’라는 항목으로 순결을 다루고 있다. 

그 중 중요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사람을 높이 끌어올릴 수 있는 두개의 날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단순성순결성이다. 


단순성은 우리의 의도 속에 존재하고 

순결성은 우리의 애정이나 감정 속에 존재한다. 


단순성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따라 나아가게 하고 

순결성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이해하고 느끼게 해준다. 


당신이 만일 내면적으로 절제하기 어려운 욕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어떠한 선한 행실도 당신에세 지장을 초래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경건 서적에서는 

순결을 영혼의 고향이요 하나님을 체험하는 고귀한 길이라고 

강조하면서 

육적인 순결보다는 내면의 순결을 더 강조하고 있다.



이와같이 중세 수도자들은 

철저한 독신주의와 완벽한 금욕의 형태에 따른 순결의 생활을 강조했다. 

육체적 욕망을버리는 것이 중요한 영적 삶의 내용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독신생활과 성적 욕망으로부터의 완전한 절제를 추구하였다.




순결이 의미하는 바를 몇가지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순결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표현이다. 


그 본질적인 의미에 있어서 순결은 

동정성의 보존이나 성 관계에 대한 금기에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봉헌봉사에 진정한 의미가 있다. 


순결은 하나님의 나라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수도자의 삶은 자신을 봉헌하는 삶이며, 

그중에서도 자신의 의지와 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것이 가장 귀한 것이다.


순결을 지키는 목적과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보존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순결이며, 

몸의 순결은 그 그릇과 같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순결을 지킴으로 

이 죽을 육신으로 이미 영원한 생명에 닮은 영적 생활을 할 수 있다. 


육신이 만일 영혼을 위해서만 산다면 

더욱 더 영혼을 닮은 상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순결의 결과 그 영혼이 하나님을 닮게 된다. 

순결하고 인하여 영혼은 더욱 빛나게 된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




순결을 통해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체험을 얻고자 함이다. 


순결을 추구하는 자들은 몸과 마음을 모두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바쳐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혼인 관계를 이루게 된다. 


그런의미에서 

‘수도 서원을 한 동정의 순결은 순결의 방법 중 가장 완전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제 2절 순결의 실천 방법



수도원 운동에서 말하는 순결이란 

기본적으로 독신 생활 즉 동정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독신 생활이 순결의 내용이요, 또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인 것이다. 


또한 순결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 

수도자들은 고행의 길을 택하기도 하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기도 했다. 


물론 노동 역시 순결의 삶을 살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지만, 

노동에 대해서는 다른 항목에서 따로 논하기로 한다.


독신 생활이란 일생 동안 마음과 몸을 그대로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인대 

이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단계까지 지켜지는 순결’ 

독신 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그리스도는 독신 생활의 창시자’라고 강조하면서, 


결혼이 이성을 사랑함으로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법을 배우게 해 준다면, 

정결은 육체적 사랑을 포기함으로써 

온전히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르게 하고, 

편견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자유인이 되게 한다고 주장한다.


독신제와 더불어 모든 고행이 또한 이 순결을 실천하는 방법이 되고 있다. 

고행은 금욕주의의 실천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고행이란 감각적인 쾌락을 포기하는 여러 방법을 말한다. 

넓게 보아서 노동, 묵상, 기도까지도 고행의 한 형태로 간주될 수 있다.




제 3절 순결과 노동과의 관계



순결의 문제는 죽을 때까지 수도자를 괴롭힌다. 


특히 성적 유혹과 충동은 수시로 다가오는데 

이러한 성의 유혹을 물리치는 가장 쉽고 종은 방법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수도자들은 고행의 방법이나 적당한 노동, 

때로는 정서적인 생활을 통해 성욕을 올바르게 다스려 나가야 했다.


동방의 은둔 수도자들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악한육체와 싸우는 노력을 힘써 경주하기도 하였지만, 


“베네딕트 수도 규칙”은 

보다 건전하고 승화된 방식으로 노동(manual labor)을 강조하고 있다.


수도자의 일과 중 여섯 시간의 노동이 포함되어 있는 이유는 

‘보다 더 건강한 마음으로 독신을 유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베네딕트 수도 규칙” 제 8장에는 ‘매일의 육체노동’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 첫마디는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정해진 시간에 육체 노동을 하고 

또 정해진 시간에 성독(聖讀)을 할 것이라고 권면이다.


사실 육체 노동이란 

수도자에게 있어서 육체적 고행, 손과 몸으로 하는 일 

기도에 따르는 언동,음식이나 수면의 절제를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몸의 휴식과 게으름에서 벗어남으로 

쓸데없는 생각이나 성적 충동이 작용하지 못하도록 활동하는 모든 일을 

일컫는다.


그리고 그들이 노동을 통해 얻은 수익은 

보통 가난한 자들이나 죄수들에게 주어졌거나 

아니면 수도원 자체 유지에 쓰여졌다. 


또한 서방의 수도원 운동에 있어서 

이 육체 노동이 아주 질서정연하고도 조직적으로 수행되었던 결과 

유럽의 황무지 가운데 많은 지역을 개간할 수 있었다.


육체 노동과 더불어 정신 노동도 중요했다. 

수도자들의 정신 노동은 주로 성서나 다른 거룩한 저적들의 독서와 연구였다. 


수도원 사본 실에서는 

고대 사본들을 복사하는 일이 수도자들의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는 고전적인 고대인들의 저술들의 대다수를 보존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 자연스런 결과로서 

서예, 회화, 도화, 사본의 채식(彩飾) 등이 발전하게 되었고 

또한 어떤 수도원들은 그것들을 학습과 정에 넣었다.

 그래서 현대 유럽의 도서관들에 소장된 

가장 귀중한 소장품들을 구성하고 있는 예술 작품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육체 노동, 정신 노동과 더불어 외부 작업도 노동의 일부분으로 여겨져야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선교와 교육 사업이다. 


동방 교회의 수도자들은 세상과의 모든 관계를 떠나 

기도와 노동으로 삶을 영위해 갔다. 


그러나 서방의 수도자들은 

예컨대 영국과 독일 같은 나라의 국민들에게 복음을 전파는 선교사가 되었고, 

실로 유럽의 개종을 가져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수도원 내에 학교들이 세워졌다. 

이러한 선교 사업과 교육 사업까지도 

모두를 노동 개념의 범주로 넣어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와같이 노동에도 여러 방법이 있으나 

중요한 점은, 

노동은 순결을 지키는 유효한 방법 중의 하나요 

그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노동 자체가 수도원 운동에 있어서 독립된 덕목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노동의 문제는 청빈의 문제와도 연관되고 있다.


즉 공동체를 위한 자급자족으로서의 노동이 잉여 물자를 생산해서 

수도원을 부요케 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순결을 지켜 나가는 건전한 방법으로서의 노동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순결의 실천 방법으로서의 노동은 

건전하고도 생산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도 지적해야 한다.




제 4절 순결과 오늘의 성윤리



중세 수도원 운동에서 말하는 순결은 

말할 것도 없이 독신 생활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수도자들의 독특한 생활 양식이요, 

카톨릭 성직자들의 길이기 때문에 

현대인의 삶에 일반적으로 적용하거나 용인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독신 제도 자체에 대한 문제가 여러 가지로 거론되기도 했으며 

카톨릭 교회 안에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영과 육, 즉 몸과 마음이 함께 성장하는 인간의 성장을 강조하기도 했다.



성서에 보면 바울은 결혼한 부부가 서로 합의해서 금욕을 실천하는 것이 

기도와 금식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설명해, 

독신 제도를 주장하는 것만이 아니라 

결혼 생활의 자발적인 금욕을 미덕으로 강조하기도 했다.



개신교(게혁주의) 입장에서는 독신 제도는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창조 질서에 위배되는 인간 제도라고 혹평한다. 


즉 인간이 창조될 때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로 구별되어 창조되었으며, 

이 둘이 합하여 한 몸이 되고 한 가정을 이루어 생식하는 것이

창조 질서라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해 준 질서이다. 

성생활은 이에 따르는 필수 요건이다.


그러므로 

성생활을 고의로 금지하거나 피하는 것은 자연스런 인간의 행위하고 볼 수 없다. 


성생활이 없는 인간성은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존재를 성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성은 하나님을 섬기는 능력의 한 부분이다.


성 관계 안에서 부부된 두 사람이 연합하여 

특별한 형태의 인격체를 구현하는 것이다. 


충분한 성적 연합이 이루어질 때 

부부는 육체에 의해 서로의 전 인격을 파악한다. 

그러므로 성은 우리의 존재의 본질을 이룬다.



문제는 오늘 현대 사회에 성적인 부패와 타락이 만연해 있다는 사실이다. 

성도덕의 타락이 위험 수위에까지 이르렀고, 

성 문제가 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로 점점 부각되고 있는 시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현대 사회를 살아감에 있어서, 

순결의 형식(독신 제도)이 아니라  

중세 수도원 운동이 추구하고자 했던 순결의 궁극적 목적을 오늘에 되살려 

건전한 삶과 인격의 지침을 삼는데 도움을 얻도록 해야 한다.


즉 수도 생활의 순결 서원이 말하는 성생활, 

가정, 결혼의 포기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사랑을 추구하는 방법으로 승화시키고 

이를 통해 세상적인 것에서 이탈하게 하는 한 방법으로 

신앙 안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덕의 문란은 

육체의 피폐함과 더불어 정신 세계의 타락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바, 

인간의 몸과 영혼의 순결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나가는 일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순결의 덕은 독신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봉헌되었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했는데, 

금욕이나 절제 자체를 강조하기 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에 순결한 삶의 진정한 의미가 있음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