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59 pp.314-318 제 3편 제 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영광의 생명

은가루리나 2019. 3. 8. 17:36


옴니아 등급변경 조회 114 추천 0 2013.01.29. 19:05



제3편 위탁의 대상



제1장 위탁의 일반적 대상


제2장 현세적 사물에 있어서의 위탁 일반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제3절 부귀와 빈천 ①

 제4절 장소와 환경 


제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건강과 질병 

 제2절 질병의 지연과 그 결과 

 제3절 삶과 죽음 

 제4절 자연적 은혜의 분배에 관한 불평등에 대하여

 제5절 직무

 제6절 휴식과 평온


제5장 명성의 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호평

 제2절 굴욕

 제3절 선인으로부터의 박해


제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영광의 생명

 제2절 은총의 생명

 제3절 선덕의 실천

 제4절 죄를 피하는 일

 제5절 계명, 서원, 회칙 등의 준수


제7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어떤 종류의 영적원조의 상실


제8장 7장의 계속 - 실패와 과실

 제1절 분발심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3절 남의 영혼의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4절 우리 자신의 죄과


제9장 8장의 계속 - 내적시련의 일반


제10장 9장의 계속 - 유혹


제11장 10장의 계속 - 위안과 건조


제12장 11장의 계속 - 암흑, 무감각, 기타

 제1절 정신의 암흑

 제2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제3절 의지의 무력

 제4절 영적빈곤


제13장 12장의 계속 - 평화, 불안, 소심

 제1절 평화

 제2절 각가지 공포

 제3절 거룩하고 정의이신 천주께 대한 경의

 제4절 양심상의 小心


제14장 13장의 계속

 제1절 일반적 길인가, 신비적 길인가

 제2절 신비적 관상의 갖가지 상태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

 제4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제15장 기억해야 할 두가지 실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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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편 위탁(委託)의 대상(對象) 


제 6 장 본질적(本質的)인 영적선익(靈的善益)에 있어서의 위탁(委託)



제 1 절 영광의 생명



본 장에 있어서는,

영적 생명(靈的生命)의 본질이 되는 모든 사항,


(1)  그 본질적 목적인 영광의 생명에 관해서,


(2)  현세에 있어 그 본질을 이루는 은총의 생명에 관해서,


(3)  지상에서의 그 본질적 영위(營爲) 즉,

선덕의 실행죄로부터의 도피(逃避)에 관해서,


(4)  그 본질적 계명, 서원(誓願) 및 회칙(會則)의 준봉(遵奉)에 관해서 

고찰한다.




이러한 모든 것은 수도자, 재속자를 불문하고 

주께서 그들에게 주신 경우,

그들을 이끄시려는 길이 어떤 것이건,

성인(成人)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런 것은 천주의 명시의지(明示意志)의 고유한 대상(對象)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은 본디 위탁의 영역에는 속하지 않고,

순명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에 관해서까지도 위탁을 실행할 기회가 왕왕 발견될 것이다.




제 1 절 영광의 생명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시는 성의를

천주께서는 누구나가 이것을 모른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모든 방법,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명시(明示)하셨다.


그러므로,

비록 사람은 모두가 사실상 구령할 수 없드라도

의지가 

어디까지나 참된 천주의 의지임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며,

이 의지는 당신의 본성과 우리의 본성에 따라,

우리 안에 작용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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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천주께서는 은총을 아낌없이 주시고,

또한 공로를 세우는데 필요한 자유를 우리에게 남기신다.


「천주께서 우리의 구령을 바라시는 것처럼,

우리 역시 이것을 바라야 한다.  


따라서 단호한 결의로써,

천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을 바라며,

이를 포옹하여야 한다.


왜냐 하면,

우리의 의지가 천주의 의지에 적합한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신애론」8편 4장 )


이와 같이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는 말하고 있는데

나는 그의 교설을 정관파(靜觀派)의 남용에서 옹호하기 위하여

위의 귀절을 새삼스럽게 인용하였다.



「보수에」주교는 위의 점에서 출발하여,

구령은 우선 무엇보다도

천주의 명시의지(明示意志)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즈네브」의 거룩한 주교는 그것을 위탁 밑에 두지 않는다는 것,


또한「비록 그가 거룩한 무관심을 모든 일에 해당시킨다 할지라도」

이것은 천주의 임의의지에 기인하는 사건에만 한정한다는 것을

무수한 논거에 의해서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영원한 구령, 또는 멸망에 관해서 무관심하다는 것은

천주께 대해서는 불경(不敬)이며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잔혹한 처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괴(奇怪)한 무관심은 

정관주의자(靜觀主義者)의 금과옥조(金科玉條)였다.


그들은 천국을 바란다는 것은 부당한 것으로서 배척하고,

망덕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그 이유로서 

어떤 이는 그러한 소망은 하나의 행위이기 때문이라 하고,

다른 이는 완덕은 

사람이 순수한 사랑에 의해서만 행동할 것을 요구하고,

또한 순수한 사랑은 

두려움과 희망과 그 밖에 모든 자기의 이익을 배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그러한 설은 모두 유설이다.


천주께서 하시는대로 맡기고,

은총에 대하여 온순한 이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활동 그 자체가 아니고,

활동에 있어서의 불완전한 점만을 배제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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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활동은 은총에 응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이를 돕는다.」


사랑의 동기는 가장 완전한 것이지만,

그 밖의 모든 초자연적 동기도 또한 올바른 것이며,

그리고 천주 자신은 사람들 안에 이러한 동기를 일으키는 것을 기뻐하신다.


애덕은 선덕에 생기(生氣)를 부여하고,

그런 것을 지도하며, 고상하게 하지만,

결코 그런 것을 배제하는 일은 없다.


말하자면 애덕은 

반드시 그 모든 동반자(同伴者)를 거느리고 가는 여왕(女王)이다.



애덕은 제 1위를, 망덕은 제 2위를 차지하지만,

어느 것이나 필요하며,

서로 배제하기는 커녕 완전한 조화 안에 활동하는 것이다.


더구나 사랑의 성질은

일치(一致)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사랑의 불이 치열해짐에 따라,

이 일치의 소망도 강하게 된다.


즉 사람은 그 지극히 사랑하올 분을 상기하며,

그 현존(現存)과 그 우애(友愛)와 친밀(親密)을 갈망하고,

이미 그것은 불가결한 것이 된다.



그리고, 한 사람의 열심한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잠시 지연되는 것을 기꺼이 승낙할 때에는,

이것은 바로 천주의 거룩한 의지를 포옹하며,

천주를 기쁘게 하고,

또한 영원에 걸쳐 보다 잘 천주를 뵈옵고,

보다 완전히 소유하려는 소망에서다.


결국, 구령은 항상 활동하는 불변 완전하고, 순수한 사랑이며,

이에 반하여 영원한 멸망은 이 사랑의 전체적 결정적 소멸이 아니겠는가.

( 보수에「 묵상의 상태」8.9장,  뿔랑「 묵상의 은혜」27 )



「모이세」는 참으로,

만일 천주께서 그 백성을 용서하지 않으시겠거든

생명의 책에서 지워지기를 원하였다. (출애굽기 32.32)



성「바오로」역시,

그 형제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버림 받기를 바랐다. ( 로마서 9.3 )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는 영웅적으로 무관심한 영혼은

「천주의 의지가 따르지 않는 천국보다는

천주의 의지가 따르는 지옥이 더 낫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불가능한 상상이기는 하지만,

만일 그러한 영혼이 자신의 구령보다도,

영원한 멸망이 보다 더욱 천주의 뜻에 맞는다고 안다면,

구령을 버리고 멸망에 달음질할 것이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신애론」9편 4장,「대화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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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불가능한 가정(假定)에 의해서

성인들은 자기의 사랑의 위대함, 열렬함, 황홀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를 소유하느냐, 천주를 잃을 것이냐,

영원히 사랑하느냐, 영원히 증오하느냐에 관해서는,

그러한 부조리(不條理)한 무관심 따위와는 훨씬 거리가 멀다.


그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오직 천주의 의지를 성취하기 위하여,

죄만을 제외하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지상의 모든 고통, 지옥의 고벌(苦罰)까지도

감수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성인들은 천주를 사랑하고,

천주께서 바라시는 모든 일을 완수하여 그 성의를 기쁘게 해드리며,

많은 영혼을 회심시켜,

천주께 영광을 돌려드릴 소망에 충만돼 있다.




영해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그들의 심정의 충실한 반영이 되어,

「자신이 얼마나 주를 사랑하고 있는가,

얼마나 주께서 도처에서 사람들에게 섬겨지고, 

영광을 돌려 받으시기 바라고 있는지를,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몰랐을 때, 

지옥에 있어서도 주께서 영원히 사랑을 받으시기 위하여

스스로 기꺼이 지옥의 심연(深淵)에 떨어지는 것을 승락하리라」고 외쳤다.



「실제 그런 일은 주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우리의 행복만을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할 때에는

사람은 여러 가지 어리석은 일을 말하고 싶어 집니다.」(자서전 5장 )


그러한 극단적인 주장은,

성「바오로」나 「모이세」및 그 밖의 위대한 성인에게 있어서는

매우 진지한 것이지만,

그러나 아직도 그처럼 완전하지 않는

영혼이 그런 말을 뇌까리는 것은 외람된 망상, 자애심(自愛心)에

헛된 먹이를 주는 위험을 범하는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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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천주께서 명하시는 것은 적극적으로 이것을 바라야 한다.


그리고 천주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행복만큼 깊이 배려하시는 것은 또 없으시므로,

우리는 자신의 구령을 절대적으로

그리고 만사를 초월하며 바라야 한다.


이에 관해서 위탁(委託)이 적용되는 것은 다만,

앞에서 삶과 죽음에 관하여 말한 것처럼,

구령을 얻는 것의 빠르고 더딤에 관하여,

또한 이제 설명하려는 의미에 있어

은총과 영원한 영광의 정도에 관해서 뿐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