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61 pp.322-327 제 3편 제 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3절 선덕의 실천

은가루리나 2019. 3. 22. 00:46


옴니아 등급변경▼ 조회 93 추천 0 2013.02.05. 21:57



제3편 위탁의 대상



제1장 위탁의 일반적 대상


제2장 현세적 사물에 있어서의 위탁 일반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제3절 부귀와 빈천 ①

 제4절 장소와 환경 


제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건강과 질병 

 제2절 질병의 지연과 그 결과 

 제3절 삶과 죽음 

 제4절 자연적 은혜의 분배에 관한 불평등에 대하여

 제5절 직무

 제6절 휴식과 평온


제5장 명성의 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호평

 제2절 굴욕

 제3절 선인으로부터의 박해


제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영광의 생명

 제2절 은총의 생명

 제3절 선덕의 실천

 제4절 죄를 피하는 일

 제5절 계명, 서원, 회칙 등의 준수


제7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어떤 종류의 영적원조의 상실


제8장 7장의 계속 - 실패와 과실

 제1절 분발심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3절 남의 영혼의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4절 우리 자신의 죄과


제9장 8장의 계속 - 내적시련의 일반


제10장 9장의 계속 - 유혹


제11장 10장의 계속 - 위안과 건조


제12장 11장의 계속 - 암흑, 무감각, 기타

 제1절 정신의 암흑

 제2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제3절 의지의 무력

 제4절 영적빈곤


제13장 12장의 계속 - 평화, 불안, 소심

 제1절 평화

 제2절 각가지 공포

 제3절 거룩하고 정의이신 천주께 대한 경의

 제4절 양심상의 小心


제14장 13장의 계속

 제1절 일반적 길인가, 신비적 길인가

 제2절 신비적 관상의 갖가지 상태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

 제4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제15장 기억해야 할 두가지 실례





p.322


제 3 편 위탁(委託)의 대상(對象) 


제 6 장 본질적(本質的)인 영적선익(靈的善益)에 있어서의 위탁(委託)



제 3 절 선덕(善德)의 실천



사람이 과실을 거두기 위하여 과수를 재배하는 것과 같이,

천주께서는 우리에게 초자연적 덕행의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성성(成聖)의 은총으로써 우리 영혼의 본질을,

또한 대신덕( 對神德)과 성신의 은혜로써 우리의 능력을

말하자면 천주화(天主化)하신다.


주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시고, 모범을 보이신 것도,

보수를 약속하시고 징벌으로서 위협하시는 것도,

내적 외적 은총을 풍부히 주시는 것도,

요컨대 

우리에게 덕을 행하게 하시고죄를 피하게 하시며,

그럼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배려에서이다.


왜냐 하면,

성인(成人)에게 있어서는 덕의 실행이야말로

구령과 완덕에의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덕의 실행은 영적 생활의 직접적인 목적이며,

때로는 의무적인 것, 때로는 임의적(任意的)인 것이지만,

그 본질적 수업(本質的修業)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활동에 지시된 나날의 본분이며, 

일생의 일이기도 하다.


왜냐 하면, 덕은 무수하고 복잡하며,

한없이 그 완전성의 정도를 높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p.323


「 보수에」는 말한다.


덕의 실행은 

명시의지, 즉 천주의 명백한 명령에 속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위탁에도 무관심에도 실행의 여지는 없다.

덕을 지니지 않는 것을 달갑게 여기고,

또는 덕을 닦은 일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불경(不敬)한 짓이다. 」

(「묵상의 상태 」8편 14장)




성「프란치스꼬 . 살레시오」도 마찬가지로 말하고 있다.


「천주께서는, 우리가 수덕(修德)에 전력을 기울일 것을 명하셨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나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신애론」9편 7장)


또한 다른 곳에서 

우리는 덕을 바라고, 이것을 구하여 얻을 뿐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며,

절대 무조건으로 이것을 행해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대화편」6, 3장)




덕의 실행이 천주의 명시의지(明示意志)에 속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적 수덕(修德)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물론 은총의 도움을 기대하여야 하지만,

그러나 

천주께서 그 섭리의 배려하심에 의해서 

그것을 행할 것을 준비시키고 또한 그 의지를 새로이 드러내시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자신의 결심으로써 이에 나아가야 한다.


천주의 의지는 이미 명백히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것 만으로 충분하다.

적당한 기회를 마련하고,

또한 그 회칙과 사건에 의해서 주어지는 기회를 이용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또한 외부의 기회가 없어도

모든 덕의 내적 행위를 무제한으로 증가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수덕(修德)에의 근본 그 자체에 관해서는, 

위탁의 여지는 없다.


그러나, 

덕의 정도, 그 실천방법과 일정한 수단과 같은 허다한 일에 관해서는 

위탁을 실행할 여지가 있다.



p.324


(一) 덕의 정도



「러. 고디에」(Le Gaudier, A ) 신부는 말한다.


「덕의 정도는 동시에 사람과 은총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정도가 끊임없이 증대하도록, 전력을 기울일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해야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자하신 예주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는 정도에 만족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의 진보가 지지부진( 遲遲不進)하며, 또는 온전히 정지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덕의 실행을 중지하여 어떤 죄에 떨어진다면,

우리는 은총에 대하여 불충실(不忠實)하며,

천주께서 원하신 것에 응하지 않았음을 슬퍼해야 한다. 


그러나 

천주께서 그 영광을 더하시고,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시며,

또한 진보에 한정(限定)을 두시기를 바라신다면,

우리의 의지를 천주의 의지에 적합시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

(「영적생활의 완전」3부 2편 9장)



그러나, 이같은 경건한 저자와 함께, 

「우리가 보다 높이 오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많은 경우 우리의 잘못이다」라고 고백하자.


왜냐 하면,

은총은 모든 충실한 영혼에게 풍부히 주어지지만

우리는 충분하게 높은 이상을 품지 않고,

용기와 견인(堅忍)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p.325


(二) 덕의 실천의 불완전한 방법



숨어 있는 오만심, 향략의욕구, 고통의 공포 등은

참으로 덕의 실천에 잠입(潛入)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에 질서를 회복시키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제욕(制慾)의 임무인데,

그 개개의 수단은, 

천주의 섭리가 자진하여 이것을 우리에게 주신다. 


아래에 몇 보기를 들자.



우선, 첫째 이기적 방법(利己的方法)이다.


즉, 이것은 천주로부터의 

거룩한 위안, 신심행위(信心行爲), 덕의 진보에 있어서까지.

자기 자신의 일만을 탐구하는 태도다.


천주께서는,

우리들이 보다 순수한 보다 단순한 의향으로써,

그 거룩한 뜻만을 사랑하며, 오직 덕의 양성에 힘쓰고,

더구나 그것은,


「이런 덕이 

우리 마음을 만족시키고, 우리에게 유용하며, 명예가 되고, 

자애심을 기쁘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며,

천주의 의지에 적합하고, 그 명예를 위해 유용하며,

또한 영광을 현양한다는 유일한 목적」으로 행해지도록,

점차로 우리를 자기에 대한 애착에서 떼어 놓으신다.

(「신애론」9편 16장)



이것이 

가장 탁월한 영혼까지도, 건조상태(乾燥狀態)안에 버려지고

기질에 맞지 않는 무수한 고뇌와 곤란에 괴롭혀지며,

자신의 무력과 비참함의 자각에 바수어지고 압박되는 이유다.


즉, 

그들이 순수한 신앙의 정신으로써 당신 만을 섬기는 것을 배우도록

천주께서는 그들의 오만과 향락적 경향에서 떼시는 것이다.



p.326


다음에 불안한, 성급한 방법이 있다.


세상에는 덕의 수득(修得)으로써 

자신을 완전하게 하려는 소망에서 

빨리 모든 덕을 획득하려고 기도(企圖)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완덕에 이르기에는

따로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고,

다만 그것을 동경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과 같다.



천주께서는 우리가 환경과 소명(召命)에 응하여,

각기 행하여야 할 덕을 충실히 실천하고,

그로써 우리 자신에게 부과된 것을 완수하기 바라신다.


이렇게 천주께서는,

우리가 고요한 마음으로, 한 걸음씩 완덕을 향하여 노력하는 것에 

습관을 붙이려 하신다.


그리고, 그것에 도달하는 일의 지속(遲速)에 관해서는

섭리에 맡기기를 요구하시며,

당신께서 스스로 우리의 성급한 욕망을 제어하시고,

겸손 안에 머물게 하도록 이끄시는 것을 바라신다. (「대화편」10)




(三)  덕의 실천에 있어서의 어느 종류의 수단



천주께서는 자유로히 장해를 없애고, 

기회를 주며, 노고를 가볍게 하기 위하여

원하실 때에 간섭(干涉)하신다.


이 간섭은, 임의의지(任意意志)에 의한 각가지 사건에 의해서,

모든 사람을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이용하시는데,


「그러나, 어떤 이를 고난 중에 있어서보다 활동생활 안에,

다른 이를 순교, 박해, 자발적 고행(自發的苦行), 질병 같은 것 안에서 

사용하신다.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은,

이러한 모든 일에 구애되지 않는 태도를 견지하고,

천주의 임의의지를 참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이 일단 명백히 되자 마자,

그 거룩한 의지를 마음으로 포옹하고, 굳게 간직하는 일이다.」

(러. 고디에「동서」3부 2편 9장)



천주의 의지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총명하고, 자부(慈父)의 정(情)에 넘치며,

또한 무한이 은혜로운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누구도, 왜 천주께서 자기를 그런 처지에 두셨는가,

왜 다른 길에 의해서 인도하지 않으시냐고 물어볼 권리는 없다.


p.327


더구나 우리는 천주께서,

특별한 관여에 의해서 영혼을 비추시고 타오르게 하며,

변화시키시고, 또는 적어도 단시간(短時間)동안에,

그것도 우리편에서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서

영혼에 현저한 진보를 이룩하게 하시도록 요구 할 권리는 없다.


성녀 대「데레사」는

그 자서전의 몇 군데서(17,21, 24, 25, 27, 31장등)

이와 같은 종류의 보기를 들고 있다.


특히 그는, 

최초에 천주로부터 받은 황홀상태(恍惚狀態)에 의해서,

그것은 온전히 순박한 것이었는데 

깊이 애착하고 있던 각가지 우정관계(友情關係)에서 

갑자기 이탈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이후, 

천주께서 유일한 사슬이 아닌 어떤 우정도 맺는 일이 

이미 불가능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자서전 24장)


그러나, 

이러한 급속한 상승(上昇), 돌연한 조명(照明), 감탄스러운 변화는 

극히 드물게 밖에 볼 수 없는 예외다.


우리에게 지성(知性)과 자유의지(自由意志)를 부여하시고,

또한 그 은총을 마련하시어,

천주께서는 「우리 스스로의 결정의 손 안에 우리를 맡기셨다.」

(집회서 15.14)


그러므로, 덕의 실행은

이것을 은총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과 아울러,

우리 자신의 영적 활동(靈的活動)으로 구해야 한다.


천주의 이상한 관여에 기대를 두고, 

자신의 자발적 노력을 소홀히 하여, 태만의 잠속에 잠겨 있는 자는 

극히 무모한 자며, 또한 어리석은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