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책 17권

<루이사 피카레타 탄생 150주년 기념 하느님의 뜻 영성 제 4차 국제대회> 카를로스 신부님의 강의

은가루리나 2019. 4. 27. 00:16


엄효선리나56  등급변경▼  조회 104  추천   2015.05.09. 23:17



<루이사 피카레타 탄생 150주년 기념 하느님의 뜻 영성 제 4차 국제대회> 


4월 23일- 26일 이탈리아 코라토 예수 성심 성당

2015년 4월 24일 안토니오 카를로스 마씨유 신부님의 강의 (46분)



1

코라토를 찾아와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행사를 위해 한 가족으로서 같이 걸어갈 수 있게 되어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함께 가면서 우리는 정말 하느님의 뜻을 실천했던

너무나도 작은 영혼을 같이 알 수 있게 된 기회가 된것 같습니다.


여러분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렇게 작은 마을 코라토에서 태어난 작은 여성이 지녔던 그 영성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또 여러분이 이곳에 오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이곳에, 

성령의 활동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예요.



저는 까를로스 신부입니다.


이곳 루이사피카레타 하느님의 종에 대한 여러가지 스토리는 알지만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어제 추기경님과 미사를 함께 봉헌하면서

더 깊이 있는 담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추기경님과 함께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다는 것은 

조금씩 조금씩 우리가 교회와 함께 걸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방법으로 일을 하십니다.


우리들의 마음 안에서 성령을 보내시고

그 성령의 힘을 통해서 자극을 받아서

조금씩 걸어갈 수 있도록 하시는 하느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면서 아주 조금씩 교회와 그의 모든 지부들은 

그것을 향해서 마음을 열고

이렇게 성령께서 우리들 마음 안에서 활동하시고 우리들을 자극하시고

앞으로 나아가게 함으로써

교회는 이 사건에 대해서 점차적으로 관심을 갖고 공지화 되게 합니다


여기에 계신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도록 합시다.



* * *



2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한국에서 오신 여러분들을 위해서 

루이사 피카레타 하느님의 종께서 기록하신 

몇몇 구절을 함께 읽고자 합니다


제 17권에 있는 몇명 구절들을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17권 14장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는 것과 이 뜻을 행하는 것의 차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과 그것을 사는 것과의 차이점에 관하여 

나누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종 루이사 피카레타를 통해서 

실제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제공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뉴스라고 할 수 있지요


하느님의 뜻을 (이행)실천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인류 역사, 

즉 예수님과 함께 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 주신 소명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느님 뜻을 실천하라고 하시면서 

당신이 수난 받으시고 돌아가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뒤

그 이후에 이 하느님의 뜻은 우리들 안에서 훨씬 더 강해졌습니다.


그런데 

'산다'라고 하는 것과 우리들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

이것은 그 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1924년 9월 18일 날 하느님의 종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시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과 제가 사는 것에 관해서 잠깐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 뜻에 관해 예수님께서 저에게 조금 더 설명해 주십사 

제가 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거룩한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지, 누가 실천해야 할 지를 

예수님께서 저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잠깐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초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 

이 하느님의 종께서 쓰신 모든 chapter의 가장 첫 마디를

조심스럽게 천천히 읽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매 chapter에서 시작하는 첫마디가 

예수님께서 앞으로 하시게 될 모든 말씀의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방금 읽었던 그 구절, 

즉 하느님의 종을 누가 이끌어 가고 있는지, 

분명히 첫 마디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교회의 자제였던 분,

혹은 이곳의 준설자이신 성 안니발레 데 프란치아 일수도 있고

당시 하느님의 종을 이끌어 가시던 영적 지도자 

- (그분이 안니발레 데 프란치아 일 수도 있습니다)


그분께서

"이런 마음에서 듣는 소리를 

누가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달라고 요구해라." 

라고 하셨다는 증거입니다.



루이사 피카레타 하느님의 종은 

그부분에 관해서 구체적인 확인 작업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을 내가 확인해야할까?'

무엇이었냐면 바로 

이 거룩한 하느님의 뜻을 실천(행)하는 것에 대한 확인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고해사제나 

혹은 성 안니발레 데 프란치아 조차도 이 거룩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영감을 청합니다.

'이 하느님의 뜻을 설명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요.' 라고 

기도하고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지요



{"내 뜻을 산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것이고, 

내 뜻을 행한다는 뜻은 내 질서 안에 있는 것이다.


첫번째는 소유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나의 명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통역)



{17-14,2 

"딸아,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는 것은 다스리는 것인 반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이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먼저 것은 소유하는 신분이고,

나중 것은 내 명령을 받고 그것을 실행하는 신분이다."} (천상의 책에서) 



이런 차이점은 여러분들 모두가 이해하셨을 줄로 믿습니다.

주인이 아니라면 제대로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삼성 대기업의 주인이 아니라면

사장으로써 직원들에게 명령할 수가 없겠지요.


바로 이 차이점을 예수님께서는 이해시키고자 하셨습니다.


한 노동자, 일하는 사람

즉 누군가의 명령을 따라 일하는 사람과 주인과는 다르지요.

거기에 대한 지도자와 

그 지도자의 명령을 따라 사는 사람과에 대한 차이점은 큽니다.



"나의 뜻을 너희들이 실천하는 것은 바로 나의 의지다."

그래서 그 뜻에 열려 있어라!


여러분은 차 주인입니다.

누군가가 빌려 달라고 했을 때 여러분들은 빌려줄 수 있는 주인입니다.

그런데 내가 차주인도 아니면서 다른 사람의 차를 빌려 줄 수는 없겠지요.


우리가 하느님 뜻의 주인이 아니면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라고 명령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한다는 것은 내 삶 안에서 내가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산다'는 말씀에 대해서 

베네딕도 16세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는데

참 중요한 가르침이십니다.


'데오스 까르따스에스' 라고 하는 회칙이 있습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께서는 이렇게 언급하십니다


"사랑의 완덕은 

우리들의 의지를 하느님의 그 뜻에 복종시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의 완덕은 하느님의 그 뜻에 가능한한 더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그 뜻이 그냥 그 뜻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하느님의 뜻이 내것화 되는 것이 사랑의 바로 완덕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느님의 뜻이 여기에 있다' 라고 해서 O K 하고, 

'저것은 하느님의 뜻!' 이라고 멀리 보는 것과


'하느님의 뜻은 저쪽에 계시는 하느님의 왕좌와 같이 있는 것이 그 뜻이야' 

라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명령하는 게 하느님의 뜻이야' 

라는 생각


그런데 나는 하느님의 뜻은 저쪽에 있고 나는 이곳에 멀리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 나에게 명령할 때 

나는 먼 거리에서 그것을 들을 뿐입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께서는 

"그렇게 먼 곳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것,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완덕은 

그 하느님의 뜻이 내 안에 살고 내가 그 안에 살 때 완벽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나의 뜻' 

그것이 일치했을 때, 그것이 영원한 삶이고 하늘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지상이 아닌 천국에 살고 있는 이들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 두개의 뜻이 일치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세상입니다.



* * *



3

그런데 우리가 지은 원죄 때문에 

이렇게 두 뜻이 일치한 완전한 사랑의 관계가 분열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 자리를 다시 한 번 

이 두개의 뜻이 일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본 역사 속에서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잘 보여집니다.


홍수가 일어나기 전까지 아무런 법도 없이 모범으로 살았습니다.

홍수 때까지 그 어떤 법도 드러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당시에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지 모르는 

무법천지였습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암흑의 시대가 바로 그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어둠의 시대가 모든 인류가 죄중에 살도록 했습니다.

오죽하면 하느님께서 창세기에서 이렇게 탄식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인간을 창조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모든 욕심이 덧없다' 라고 탄식하십니다.


'이제 인간을 파괴할 것이다'

그러면서 노아의 홍수가 일어났고, 

모두가 더럽혀졌지만 유일하게 한 가족만은 정결하다고 선별하십니다.


그 한 가족을 통해서 인류가 구원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들의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오랜 시간이 걸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로부터 나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십니다


"십계명이란 무엇인가요?"

십계명은 바로 '하느님의 뜻' 입니다.


그 하느님의 뜻을 아주 구체적으로 10개로 기록한 것입니다


가장 필수적인 것을 10개로 요약하신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사실 인간은 

처음에는 하느님의 모든 뜻을 자신의 안에 함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죄를 지은 후에 너무나도 위대하고 큰 그 선물을 잃게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위대한 선물을 다시 인간에게 주고 싶어 하세요


하지만 원죄를 통해서 너무나도 상처받았고 너무나 심각한 상태였기 때문에

한꺼번에 주시지 않고 아주 천천히 그 선물을 우리들에게 주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한꺼번에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했던 것이 원죄입니다.



그러면서 모세를 통해서 계약을 맺으시고, 

그 계약에 드러나는 증거가 십계명이고

그 십계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십계명을 지키겠다고 약속합니다



즉, 이제 더 이상 태초에서부터 하느님의 뜻과 일치해 있는 상태가 아니라 

그 하느님의 뜻이 멀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명령을 수행하겠습니다' 라고 약속을 드립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구약의 많은 예언자의 외침과 예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십계명을 지키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니까 야훼께서는 예언자를 통해서 두 번째 계약을 하시게 됩니다.      



* * *



4

즉 새로운 계약입니다.


그것은 

'나는 나의 계약을 너희들의 마음 안에 기록하겠다' 였습니다.


처음에는 하느님의 뜻은 돌 위에, 돌 판에 쓰여진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민족도 하느님의 뜻이 

인간의 눈으로 읽고 볼 수 있는 기록된 하느님의 뜻을 

어떤 민족도 소유하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자신들이 읽을 수 있는 십계명에 대해서는 지키지 않습니다.

불순종하게 됩니다.


눈에 보여도 지키지 않으니까, 

이제 야훼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그 당신의 뜻을 사람들의 마음 안에 기록하시겟다고 선포합니다.


사람의 존재 안에, 마음 안에 그 하느님의 뜻을 써 놓았을 때 

실천하기가 더 쉽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베네딕도 16세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뜻은 저 멀리 왕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뜻 안에 하느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강생의 신비,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성령께서 우리들의 마음 안에 하느님의 뜻을 기록하셨습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이러한 하느님의 선물, 하느님의 뜻이 마음에 새겨져 있지만 

이제 세례성사를 통해 받은 것을 계속 가꾸지 않으면 안됩니다


구약 성서에서 드러난 것처럼 

우리들은 지속적으로 그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구원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젊은 부자 청년에게 분명히 답하십니다.


그는 "하늘나라를 얻기 위해서 제가 무엇을 해야합니까?"

"영원한 삶을 얻고 싶으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라" 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다가가기 위해서, 영원한 삶에 들어가기 위해서 

유일한 길은 바로 그 뜻을 내가 실천할 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늘, 천국은 또 다른 차원입니다.

즉 천국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삶을 내가 흡수하고 소유하는게 바로 하늘의 삶입니다

모든 '하느님의 뜻'이 바로 '나의 뜻' 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내가 하느님의 뜻을 명령을 받고 실천하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그 뜻 자체가 그저 나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원하는 것은 내 것이 되고

내가 원하는 것은 하느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 뜻은 완벽하게 일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 *



5

이제 실천적인 면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늘의 삶을 

과연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지상에서 실천할 수 있을까?


두세가지 아주 구체적인 요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내것인양 소유한다는 것은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내가 돈이 있다고 해서 살 수 있거나 

영신서적을 읽으면서 내가 습득하거나

혹은 어떤 참회나 고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선물'입니다.


'나에게 속해 있지 않은 하느님의 삶을 내가 무상으로 받는 것'

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삶을 소유한다는 것은 나는 수동적인 자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물의 주인은 그분이시고

그분이 나에게 주어야만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느님의 뜻은 분명하게 선물입니다.


그것을 내 삶에서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은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내가 잘해서 받는것도 아닙니다.

덕을 실천하거나 희생이나 고행을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선" , "물" 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 선물을 우리들에게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 선물을 가장 먼저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습니다.

그 선물을 그들은 원죄 때문에 잃었습니다.


아담과 하와 때부터 지금까지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을 당신의 집으로 계속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신약에서 탕자의 비유로 상징됩니다.

즉 하느님의 집으로부터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집을 떠난 탕자가 된 그들을 다시 찾고 

집으로 되돌아오게 하시고자 합니다.



아버지의 집은 바로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있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성인이신 안니발레 데 프란치아께서는

이 집의 이름을 그렇게 명명하십니다



1924년 

하느님의 종 루이사피카레타께서 이곳에 와서 생활하시기 시작할 때

이 집 자체를 '하느님 뜻의 집' 이라고 부르셧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하느님의 뜻'. 

그 집으로 이끌어가고 싶어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 자체인 그 집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집입니다.


그 하느님의 뜻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거기에 걸맞는 옷을 입지 않으면 안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집은 예수 그리스도만 들어갈 수 있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길이고 문이십니다.


그분이 없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집으로 걸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이렇게 우리들에게 다시 그 선물을 주고 싶어 하시는데

그러한 선물을 우리들에게 주고자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십니다.


그 하느님의 성자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티없으신 거룩하신 동정마리아를 통해서 오셨고

그 동정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신 여성입니다.


바로 그 티없으신 성모님은 스승이시고 

바로 이 왕국에서 함께 하시는 어머니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의 작은 종 루이사 피카레타는 

바로 그런 하느님의 뜻을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이입니다.


하느님의 편에서는 모든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이러한 선물을 받느냐 안받느냐는 우리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 * *



6

그것을 받아들이는데도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두가지 다른 차원으로 그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아주 중요한 것은 나의 의지가 어떠냐입니다.


나의 의지, 나의 뜻이 있어야만 

하느님의 뜻을 향해서 내가 개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뜻이 없다면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그 모든 뜻은 정지해 버릴 것입니다.



즉 선과 악을 행하는데 있어서도 

내가 어떤 뜻을 지니냐에 따라서 그것이 가능해집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존재들 안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우리들은, 우리들의 뜻이 있습니다.

이것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결정권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성심에 

또 당신의 손에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가지고 우리 앞에 오셨어요.


그리고 여러분들 각자에게 주시려고 합니다

그 앞에서 내가 "yes" 라고 하면 됩니다



너무나도 큰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너무나도 큰 선물을 

여러분들의 매 삶의 순간순간 마다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저 한 번 주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돌아가실 때까지 매순간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분께서 나에게 매일 매 걸음마다 매 초마다 그 선물을 주고 싶어하신다면 

여러분들은 매일 예수님께 

"예수님, 저는 그것을 원해요"라고 청해야 합니다


루이사 피카레타 하느님의 종께서는 

어떤 chapter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선물은 청하십시오"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네가 그것을 자주, 정말 자주 청한다면 

어느날인가 나는 그것을 영원히 너에게 주겠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 편에서 해야하는 활동입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그 선물을 매일매일 청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즉시

"예수님 저는 매일 당신의 뜻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그 선물을 제게 주세요" 라고 청하는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런 선물을 청하고

여러분들의 하루 일과를 살아가시면서

화살기도 중에 지속적으로 이 선물을 청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학교에 학원에 아이들을 데릴러 가야할 때 운전대를 잡고 

"예수님 제가 지금 아이를 데릴러 가는데 저와 함께 가 주세요.

그래서 당신 뜻을 실천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라고 

화살기도를 해 보십시요


혹은 여러분들이 집에서 남편과 부인, 자식들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해야할 때도 예수님을 주방으로 부르세요.


"예수님 저와 함께 이 음식을 만드셔서 당신 뜻대로 이것을 만들고 

가족과 함께 당신 뜻대로 먹을 수 있게 해 주세요."


기도하러 갈 때나 가족들과 대화를 나눌 때에도 어떠한 일을 할 때나

예수님의 뜻, 하느님의 뜻을 청하십시요.


제가 기도하는 이 공간에,

가족들과 함께 하는 이 공간에

'당신의 뜻이 함께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십시요



이것이 바로 베네딕도16세께서 아주 장엄하게 선포하신 구절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하느님의 뜻이 내 뜻이 되고

내 뜻이 하느님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내 안에 사시고내 뜻이, 내가 그분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필리보에게 하신 말씀이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살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사시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들 각자 안에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항상 

"나를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는 사람이다."라는

모범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살고 아버지는 내 안에 사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는 갑자기 순간적으로 오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 예수님의 뜻이 내 안에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내가 학교에 갈 때에도, 주방 일을 할 때에도, 

운전을 할 때에도, 잠자러 휴식하러 갈 때에도

그 모든 내 일상 안에 

하느님께서 내 안에 사시고 내가 그 안에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매일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실천사항입니다.




두 번째

주 중요한 차원이 있습니다.

읽기 입니다. 읽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을 발생시키는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은 하루 일과를 시작하면서부터 참 중요합니다.


이렇게 실천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면

그 하루의 와중에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읽어야 합니다.


즉 성서 말씀을 통해서, 가톨릭 교리서를 , 

또 하느님의 종이신 루이사 피카레타의 저서에서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하면 잘 실천할 수 있는지

하루 일과 중에 이 세가지를 읽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그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오는 효과는 무엇인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내가 하느님께 어떤 영광을 드릴 수 있는지.


저와 함께 하는 시간은 이것으로 끝난 것 같습니다.


이 곳에 예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하시고

그래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을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같이 이렇게 반복해 봅시다.


"예수님, 저는 당신 뜻대로 살고자 합니다.

나의 엄마 마리아, 제 뜻을 하느님의 뜻으로 채워 주세요.

하느님 뜻의 작은 딸 루이사 피카레타여, 하느님 뜻을 실천하도록 

가르치소서." 




* "거룩한 열정의 딸 수도원" 

성 안니발레가 기도 수도회 총장으로 자신을 계숭하도록 선정한 

판탈레오네 팔마 신부가 1927년 10월 7일에 개원한 수도원에 

'하느님 뜻의 집'이라고 명칭을 붙였음


루이사가 수녀들과 함께 살면서 자신의 영성으로 

그들을 가르치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