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71 pp.369-376 제 3편 제 8장 제4절 우리 자신의 죄과

은가루리나 2019. 6. 8. 21:58



옴니아  등급변경▼  조회 121  추천 0 2013.04.19. 05:18



제3편 위탁의 대상



제1장 위탁의 일반적 대상


제2장 현세적 사물에 있어서의 위탁 일반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제3절 부귀와 빈천 ①

 제4절 장소와 환경 


제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건강과 질병 

 제2절 질병의 지연과 그 결과 

 제3절 삶과 죽음 

 제4절 자연적 은혜의 분배에 관한 불평등에 대하여

 제5절 직무

 제6절 휴식과 평온


제5장 명성의 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호평

 제2절 굴욕

 제3절 선인으로부터의 박해


제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영광의 생명

 제2절 은총의 생명

 제3절 선덕의 실천

 제4절 죄를 피하는 일

 제5절 계명, 서원, 회칙 등의 준수


제7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어떤 종류의 영적원조의 상실 - 



⑷ 


제8장 7장의 계속 - 실패와 과실

 제1절 분발심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3절 남의 영혼의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4절 우리 자신의 죄과 


제9장 8장의 계속 - 내적시련의 일반


제10장 9장의 계속 - 유혹


제11장 10장의 계속 - 위안과 건조


제12장 11장의 계속 - 암흑, 무감각, 기타

 제1절 정신의 암흑

 제2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제3절 의지의 무력

 제4절 영적빈곤


제13장 12장의 계속 - 평화, 불안, 소심

 제1절 평화

 제2절 각가지 공포

 제3절 거룩하고 정의이신 천주께 대한 경의

 제4절 양심상의 小心


제14장 13장의 계속

 제1절 일반적 길인가, 신비적 길인가

 제2절 신비적 관상의 갖가지 상태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

 제4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제15장 기억해야 할 두가지 실례





p.369


제 3 편 위탁(委託)의 대상(對象) 


제 8 장 심령생활(心靈生活)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계속)



―실패(失敗)와 과실(過失)―



제 4 절 우리 자신의 죄과(罪過)



아래에 우리 자신의 죄과에 관해서 언급하자.


우선, 죄를 피하기 위하여 최대의 열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섭리의 배려에 대해서는 온순한 인종(忍從)안에 머물러 있자.



성「프란치스꼬.살레지오」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참으로 천주께서는 더할 나위 없이 죄를 증오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총명하게도 이것을 허락하시는 것은

이성(理性)이 있는 피조물을 

그 본성의 조건에 응하여 행동하는 대로 맡기시며,

선인은, 그들이 계명을 깨뜨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스르지 않을 적에는 그를 더욱 선하게 하시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천주의 거룩한 허락하심도 흠숭하고 찬미하자. 



그러나, 죄를 허락하시는 천주의 섭리는,

그것을 동시에 무한히 증오하시기 때문에,

섭리와 함께 우리 역시 이것을 싫어하고 증오하며,

그리고 위에 말한 의미로 허락된 죄라 하드라도

결코 사람이 이를 범하지 않도록 전심으로 간구하자.


또한 그렇게 바랄 뿐 아니라,

나아가 죄의 발생, 그 진보와 그 지배를 저지하는데,

가능한 모든 치료방법을 다하자.


우리의 의지의 자유가 속박되지 않고,

가능한 한 의지를 죄에서 분리시키려고

끊임없이 격려하고, 약속하며, 위협하고, 금하며 명하고, 권장하시는

주를 닮도록 힘쓰자.」(「신애론」9편8장)



만일 우리가 

항구하게 기도하고, 경계하며, 싸움 가운데서 견인(堅忍)한다면,

진보함에 따라 죄를 범하는 일도 점점 드물어지고,

그 고의(故意)의 정도도 점차 감소하며, 그 보속도 보다 완전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은

더욱 더 탁월한 순결 안에 확립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성모께 베푸신 것과 같은 특수한 은총이 없이는,

세상에 있어 모든 소죄를 면하게 된다는 것은 전연 불가능하다.


성인들 자신도 죄를 고백하고 있었다.



p.370


그러나 만일 한번 죄에 떨어졌다면,

「그것을 없애기 위하여 우리로서 가능한 모든 일을 하자.


주께서는『까르뽀』에게, 

만일 필요하다면,

오직 한 사람의 죄인의 구령을 위해서도,

다시 죽는 것을 사양하지 않으시겠다고 확언하셨다.」



그렇지만,

「우리의 통회가 강하고 깊으며, 견고하고, 평온하며,

결코 마음을 산란시키지 않는 근심과 낙담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라고

성「프란시스꼬.살레시오」는 덧붙이고 있다.

(「동서」9편 7,8장,「전기」5편)




「내가 사랑과 신뢰로써 천주께로 높이 오르는 것은,

천주님이 나를 대죄에서 비호해 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 비록 

이 세상에 있어 범할 수 있는 모든 죄의 책망을 마음에 느끼드라도,

나의 신뢰심이 결코 잃어지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있읍니다.


나는 주께서 탕자를 자비로써 대하신 것을 알고 있읍니다.

성녀『마리아 막달레나』, 간음한 부인, 『사마리아』여인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읍니다.


그런 일에서 나는 

주님의 사랑과 애련하심에 의지할 길을 알고 있으므로

누구라도 결코 나에게 공포심을 품게 할 수는 없읍니다.


나는 이 허다한 죄가 

마치 치열한 불 가운데 던져진 한 방울의 물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없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읍니다.」라고,

영해 예수의 성녀「데레사」도 말하고 있다. (자서전 11장 )



p.371


그러므로, 우리는 

온건한 통회를 아무래도 모순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을 본받아서는 안된다.


그들의 신앙의 정신이 두려워 하는 무관심과

인내치 못함으로써 던져지는 싫증과 낙담과의 사이에는

바른 중용(中庸)이 없겠는가.


죄에 의해서 생기는 불안감(不安感)에 관해서는,

아무리 경계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런 불안은 약이 되기는 고사하고, 더우기 가해진 새로운 병이다.


더구나,

죄 그 자체는 아무리 유해한 것이라 하드라도,

그 결과에 있어 불안, 낙담, 때로는 실망마저 일으킬 경우에는

더우기 유해하다,


이에 반하여,

통회에 있어서의 평안이야말로 극히 바람 직한 것이다.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가 어떤 과실에 빠졌을 때,

이것을 주의 어전에서 괴로와 슬픔에 잠겨 있으면, 

주는 그에게 

솔직하게, 신속하게, 그리고 활발하게 깊은 신뢰로써 되돌아서는 것은,

죄로써 모욕을 당하는 것보다도

더욱 당신의 성심에 적합한다는 뜻을 알리셨다.



모든 성인은 죄를 범하였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죄, 그것도 매우 큰 죄를 범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토록 위대한 성인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간선된 이에게 있어서는

만사가 함께 작용하여 유익함이 없지 않을 것이라고

성『바오로』는 말하고 있지만,


성『아우구스띠누스』는, 죄마저 그렇다고 말하였다.」

(암브로시오.드 롱베스 「내적평화」4편6장)



실제,

우리의 죄과를 선용하는 한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커다란 비결은,

죄과 그 자체와 천주께 끼친 모욕이 아니고,

내적 굴욕(內的屈辱), 자애심(自愛心)에 따르는 수치를

온전히 겸손하게 수락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신뢰와 평화에 충만된 겸손에 깊숙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만심,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실패의 주요한 원인이 아니겠는가.


이것을 낫게 하는데 유효한 의약은

치욕이란 자신에게는 당연하고도 남는 것이라고 여겨

이것을 감수하는 것이다.


사람은 남에게서 받는 굴욕은,

부당하다는 이유 밑에 매우 쉬이 이를 면하려 하지만,

그러나 자신의 죄가에 의해서 생기는 가혹한 교훈은

어떻게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죄과는 우리의 본래의 부패와 싸움에 있어서의 무력함을 

여실히 폭로한다.


굴욕은 이것을 잘 받는 이에게는 겸손의 원인이 되고,

또한 겸손은 헛되이 지낸, 

보상해야 할 시간, 용서를 간청해야 할 죄과를 

끊임없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통회의 마음을 자아내게 하고,

영적 활동력을 자극하며,

남에게 대해서는 깊은 동정이 된다.



p.372


「드.고사드」신부

이것에 관해서 매우 현명한 성찰을 하고 있다.


천주께서 우리에게 사소한 과실을 묵과하시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나약함을 깊이 깨닫고,

그럼으로써 이 불행한 우리의 자존심, 자부심, 은밀한 자신(自信),


요약하면,

마음의 참된 겸손의 방해가 되는 것을,

조금씩 우리 마음에 있어 죽게 하기 위해서다.



천주께 대한 완전한 신뢰를 수반하고 있는

이와 같은 완전한 자기멸시보다도,

천주의 마음에 맞갖는 것은 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 지선하신 천주께서 우리의 자애심이나

부패한 인성(人性)에는 두려운 이 잔을 마시는 것을,

자주 우리의 뜻을 거슬려서 까지 강요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커다란 은총이다.


그것이 없이는 우리는 숨은 불손과 오만한 자기 신뢰에서

치유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p.373


그리고 모든 악은 자신에게서,

모든 선은 천주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어디까지나 충분히 깨달을 수 없으리라.



이와 같은 이중(二重)의 생각을 깊이 뇌리에 새기기 위해서는,

허다한 체험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 영혼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악덕이 

보다 크고, 보다 뿌리가 깊을수록, 이 체험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죄에의 이러한 타락은

우리를 천주의 어전에 항상 극히 작은 이로서 낮추게 하여

자신에 의뢰하는 것을 그치게 하며,

자기 눈에 허무한 자로서 보이게 하는데 유익한 점에 있어,

극히 유용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

한 계단씩 겸손의 단계를 오르며,

모든 참된 성덕에 불가결한 토대를 보다 깊이 마련하기 위해서는,

하나하나의 죄과를 선용하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이 있겠는가.


이렇게 우리의 죄과 그 자체로부터도,

우리를 위하여 최대의 이익을 이끌어 내실 수 있는

천주의 무한한 인자하심을 감탄하고, 찬미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죄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이에 관해서 양순하게 스스로 낮추는 것,

떨어질 적마다 불굴의 견인(堅忍)으로써 항상 일어 서며,

자기를 시정하도록 노력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드. 고사드「위탁」2편 3장 15,  4장 8,13,  6장17)



p.373


죄의 결과인 벌에 관해서 말한다면,

만일 천주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피할 것을 불가능하게 하신다면,

천주의 임의의지(任意意志)에 겸손히 적합하여, 

그것을 수락해야 한다.


그것은 예컨대 동료 수도자 면전에서 수치를 당하고,

호평을 잃거나 또는 건강을 해롭게 하는 경우 등이 있다.


때로는 우리들 자신의 태만, 조심성 없는 말투, 훼방, 조급한 성질,

결국 우리의 악한 성향(性向)이 원인이 되어

불쾌, 굴욕, 억압, 손해 등을 초래할 수 있을 것이다.


죄과는 그 후에 우리를 

마음의 산란, 정신의 불안, 쓰디쓴 근심 안에 머물게 한다.


천주는 죄를 원하지 않으셨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바라신다.


우리를 치유하시기 위하여 고뇌에 맡기시고,

후세에 있어 벌하지 않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채찍질하신다.



그 때, 우리는,

주여, 그것은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이를 허락하시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셨나이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나 그것을 공경하고, 이에 순종하나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천주께서는 지극히 죄를 증오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자아포기와 자기경멸 안에 보전하시기 위하여,

그것을 매우 유용한 수단으로서 사용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마음을 산란시키지 말고, 걱정하지도 말며, 불안함도 없이,

낙담하지도 말고, 위와 같이 기도하자.



p.374


단지 부주의에서 생기는 쓰라린 결과도,

같은 효애와 평화에 축만된 적합으로써 기꺼이 받아 들이자.


「드.고사드」신부에 의하면,

「이것처럼 몹시 자애심에 저촉되는 시련은 또 없으며,

따라서 이보다도 더욱 우리를 성화하는 것도 역시 없다.


외부로부터 받는 굴욕,

더구나 아무리 보아도 자기 과실에서 나온 것이 아닌 치욕은 

이것에 비한다면, 그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 자체로 보다 중대한 죄로써 생긴 고뇌도,

만일 외부에 나타나는 일 없이 끝난다면,

사람은 훨씬 쉬이 이것을 인종(忍從)한다.


그렇지만 한가지 사소한 부주의가

대중의 눈에 띄는 것과 같은 귀찮은 결과를 초래하는 적이 있다면,

참으로 이것이야말로 모든 치욕 가운데서 가장 큰 것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것은 자애심을 자멸(自滅)시키는데 절호의 기회이며,

결코 이것을 선용함이 없이 묵과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럴 때,

우리는 쌍수로써 자기품에 힘주어 껴안고

내심(內心)의 치열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인종(忍從)의 행위를 할 것이다.


완전한 위탁의 마음으로써

이루어지소서』라는 말을 몇번이고 되풀이 할 때는 바로 그 때이며,

또한 감사를 바쳐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신께』라고 덧붙이기에 이르도록 힘써야 한다.


이렇게 인내한다면,

한가지 시련이라도 허다한 덕행보다도

더욱 우리의 영혼을 진보시키는 것이다.」(「위탁」2편6장,「서간」24 )



p.375


성「프란치스꼬.살레지오」는,

「자신에 대해서도,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해서도,

이것을 조금도 무심히 여긴 적은 없었다.


또한 그 죄 때문에 불쾌함을 느꼈을 적에도,

평온하게, 침착하게,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죄를 뉘우침에 있어 

가혹하고, 초조하게, 그리고 성내며 통회하기 보다는 

태연하고 견고한 통회로써 자신을 징계함이 더욱 낫다고 여겼다.


더구나 그러한 성급하고 가혹한 통회는,

죄의 중함에 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경향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므로,

더욱 그렇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말한다.

만일 대죄에 떨어졌을 경우에도,

나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마음을 비난할 생각은 결코 없다.

즉, 그토록 몇번이나 굳게 결심했음에 불구하고,

이런 헛된 일에 열중하는 너는 얼마나 비참하고, 저주 받을 몸인가!


죽을 만큼 수치를 느껴라.

이제는 하늘을 우러러 봐서는 안된다.

소경, 파렴치한(破廉恥漢), 천주께 대한 불충자(不忠者) 배반자! 』라고.



아니다,

나는 잘 설득시켜 동정하며 부드럽게 경고하리라.

『아, 가련한 나의 마음이여,

그처럼 떨어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있던 함정에 결국 떨어지고 말았다.

일어나, 이제는 다시 결코 그 함정에 떨어지지 않으리라.


천주의 자비하심을 간청하자.

그 도우심으로써 이제부터  더욱 견고히 재기할 수 있음을 희망하며,

그리고 겸손의 길을 다시 걷자.

기운을 내서 경계하자. 

반드시 천주께서 도우시리라.』


이와 같은 자기질책(自己叱責)을 바탕으로 하여

나는 적절한 수단을 강구하며,

다시는 같은 죄에 떨어지지 않기로 굳이 결심하겠다. 」

(동「성인전」5장)




「드.고사드」신부는 또한 마음 안에서 간단 없이

다음과 같이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주여, 원컨대 모든 죄,

특히 이러저러한 죄에서 나를 수호하소서.


그러나 자애심을 치료할 고통과 오만심을 무찔러

이를 없애야 할 굴욕과 거룩한 비하(卑下)에 관해서는,

원하실 때를 위하여 미리 받고 은혜로서 감사하나이다.


주여 이런 쓰디쓴 의약이 효과 있게 하시어,

그것으로써 나의 자애심을 고치시고,

내적 생활과 모든 완덕의 견고한 토대인 거룩한 겸손의 덕을 

얻게 하소서.」(「위탁」2편3장, 「서간」3)


p.376


기도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죄가 생길 수 있으리라.


그런 때, 유일한 의약은 

어디까지나 보다 깊이 자신을 낮추게 하고,

변함없는 신뢰로써 천주께 되돌아 가며,

결코 용기를 잃지 말고 싸움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오직 한번이라도,

가장 사소한 죄에 대해서까지 진심으로 자신을 낮추며,

평화와 유순함으로써,

천주께 대한 신뢰에 의하여 빨리 일어서는 것을 배운다면,

그것은 과거의 죄에 대한 확실한 의약이 되며,

미래에 대해서는 유력한 도움,

효과 있는 예방제(豫防劑)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위탁을 충분히 이해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한걸음으로 성덕의 극치(極致)에 이르도록 바라게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것에서 멀어지게 하는 이런 성급함에서 구해줄 것이다.


유일한 길은 겸손의 길이며, 성급함은 일종의 오만의 형태에 불과하다.



우리는 전력을 기울여 결점의 시정에 노력하자.


그렇다고, 다만 하루로써 그 모든 것을 근절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달아 체념해야 한다.


오직 천주 안에서만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완전히 자기에게서 이탈시키는 이 결정적인 은총(즉 겸손)을

가장 두터운 효애심에서 우러나는 신뢰로써,

굳은 인내로 천주께 간청하자.


그러나 동시에, 

이 은총이 주어지는 날과 시의 결정은 

마찬가지의 효애에 충만된 위탁으로써 

이것을 천주의 배려하심에 맡겨 드리자.」

(「위탁」2편 3장 「서간」19 및 부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