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자애심 72 pp.377-381 제 3편 제9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내적시련의 일반 -①

은가루리나 2019. 6. 14. 19:50




옴니아  등급변경▼  조회 107  추천 0 2013.05.0502:45



제3편 위탁의 대상



제1장 위탁의 일반적 대상


제2장 현세적 사물에 있어서의 위탁 일반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제3절 부귀와 빈천 ①

 제4절 장소와 환경 


제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건강과 질병 

 제2절 질병의 지연과 그 결과 

 제3절 삶과 죽음 

 제4절 자연적 은혜의 분배에 관한 불평등에 대하여

 제5절 직무

 제6절 휴식과 평온


제5장 명성의 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호평

 제2절 굴욕

 제3절 선인으로부터의 박해


제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영광의 생명

 제2절 은총의 생명

 제3절 선덕의 실천

 제4절 죄를 피하는 일

 제5절 계명, 서원, 회칙 등의 준수


제7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어떤 종류의 영적원조의 상실 - 

 ⑴

 ⑵

 ⑶

 ⑷ 


제8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실패와 과실 -

 제1절 분발심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3절 남의 영혼의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4절 우리 자신의 죄과


제9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내적시련의 일반 -

 ①

 ②

 ③

 ④


제10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유혹 -


제11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위안과 건조


제12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암흑, 무감각, 기타

 제1절 정신의 암흑

 제2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제3절 의지의 무력

 제4절 영적빈곤


제13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평화, 불안, 소심

 제1절 평화

 제2절 각가지 공포

 제3절 거룩하고 정의이신 천주께 대한 경의

 제4절 양심상의 小心


제14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일반적 길인가, 신비적 길인가

 제2절 신비적 관상의 갖가지 상태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

 제4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제15장 기억해야 할 두가지 실례





p.377


제 3 편 위탁(委託)의 대상(對象) 


제 9 장 심령생활(心靈生活)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계속)



― 내적 시련(內的試鍊)의 일반 



우리는 물질적인 행(선), 불행(악) 및 영적 생활의 본질과,

그 다소 외부적인 양식(樣式)에 관해서는 이미 고찰을 마쳤다.


남은 문제는, 내적 생활에 있어서의 각가지 시련,

우선그 일반에 관해서,

다음에 

유혹, 건조, 암흑 등과 같은 특별한 종류의 것에 관하여 연구하는 일이다.


위탁이 행해져야 하는 것은 특히 이런 일에 관해서다.


왜냐하면,

이런 시련은 피하기 어렵고 또한 매우 빈번히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알퐁소」에 의하면 

내적 시련은 고통 중에서 가장 괴로운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에의 사랑」13.2)




「하루라도 다른 날과 전연 같은 날은 없다.」라고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는 말하고 있다.


「흐리거나 또는 비가 오며, 맑거나 또는 바람이 인다.


사람도 그와 마찬가지며,

그 생애는 마치 끊임없는 변화 속에 소용돌이치는 대해(大海)와도 같이

그 파도는 때로는 사람을 희망의 봉우리에 올리고,

때로는 공포의 구렁에 가라앉히며,

어느 때는 위로에 의해서 우편에로,

어느 때는 슬픔에 의해서 좌편으로 기울인다.


결코 같은 상태에 머무는 적이 없다......


우리는 어떤 곤란, 어떤 반대, 어떤 고통에도 부딪치지 않고

언제나 건조함이 없는 위안, 노고 없는 휴식, 근심 없는 평화 안에서 

안주(安住)하고 싶다.


그러나 이 소망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이가 있겠는가.


왜냐 하면,

우리는 불가능한 일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순수한 상태는 천국과 지옥에 있어서만 찾아볼 수 있다.


즉,

천국에는 아무런 악도 불안도 고통의 그림자마저 엿볼 수 없는

선과 휴식과 위안이 있으며,

지옥에는 아무런 선, 희망, 안심, 평화의 한 방울까지도 없는

악과 실망과 고뇌와 불안이 있다.


그러나 멸망할 이 지상의 생활에 있어서는,

악이 따르지 않는 선, 노고가 없는 휴식, 고뇌가 없는 위안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다.」

(「입문」4편 13장,「대화편」3)



p.378


내적 생활도 또한 위에 말한 일반적 법칙을 도저히 면하지 못할 것이다.

허다한 변동과 시련은 반드시 닥쳐온다.


우리 천성(天性)의 비참함과 악마의 악의는

그런 것의 직접 원인이 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첫째 원인은 항상 천주시다.


각가지 시련이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서 생길 때,

이런 것은 

정신의 무지, 마음의 감수성, 상상(想像)의 불규칙(不規則), 경향의 타락성 

등에 기인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아담」의 자녀로서 태어난 것은, 천주의 뜻에 의한 것이며,

그리고 

리의 성화를 위하여, 이런 나약함도 참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천주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겠는가.


「다위」에 대하여 

질투와 증오의 유혹에 사로 잡혔던「사울」에 관해서,

성서는,

「나쁜 신이 야훼께로부터 그에게 덤벼들었다」(사무엘전 16.14)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신이 천주에게서 온 것이라면, 어찌 악한 것일 수 있겠는가.

또한 만일 악한 것이라면, 어찌 주에게서 오는 것일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즉,

악마는 사람들을 멸망에로 이끌기 위하여 귀찮게 군다.


타락한 의지의 점에 있어 악한 것이며,

천주께서 구령에로 이끄시러는 계획으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을 악마에게 허락하시는 점에 있어서는,

천주로부터의 것이다.


p.379


주께서는 흔히 당신 스스로 작용하시지만,

그러나 

각자의 영혼의 힘과 필요에 따라서, 또한 그들에 대한 계획에 따라서,

그 작용을 각가지로 바꾸신다.


여기에 

「천상 정배께서 당신께 속하는 영혼에 대한 감탄스러운 행동」에 관해서

존자(尊者)「루이.드.블로아」가 말한 감명 깊은 말을 인용한다.


처음 혼약(婚約)의 연분이 맺어지자 마자 

천주께서는 영혼을 방문하시고,

이것을 견코케 하시며,

비추시고 

당신께 대한 봉사에 있어 기쁨만을 찾아내게 하시며,

또한 그 마음을 포착하시고,

그 영혼을 가지가지 달콤한 매력으로써 재촉하시며,

그 어전에 있는 것의 기쁨에 의해서,

이를 만류하시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나타내신다.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천주께서는 영혼에게 기쁨과 감미만을 맛보게 하시어,

그 연약함을 어루만지신다.


그러나, 얼마 후 천주께서는 영혼에게서 젖을 걷우시고,

고뇌의 굳은 영양분으로써 이에 대치하시며,

그 눈을 열어,

당신께 따르면서 얼마나 허다한 고난을 감수해야 할 것인지 깨닫게 하신다.


이렇게 하여,

하늘도, 땅도, 지옥도, 함께 힘을 모아 영혼에 거스른다.


밖에서는 각가지 원수, 안에는 여러가지 유혹,

밖에는 고난과 암흑,

영혼의 깊은 바닥에는 건조(乾燥)와 황폐(荒廢)함이 떼를 짓는다.


즉, 모든 것이 힘을 모아, 순교의 고뇌를 퍼붓는다.


이 때,

천상정배(天上淨配)는 이미 영혼의 눈에서 자취를 감추시고,

일시적으로는 다시 나타나시드라도, 곧 새로이 영혼을 떠나신다.


즉 『무덤 안에 떨어뜨리시는 이는 천주시며,

그 곳에서 불러 일으키시는 이도 천주시니라』(성영)

말씀의 진리를 맛보게 하시기 위하여

또는 때로 죽음의 그늘과 공포의 도가니 속에 버려두시며,

또는 때로 다시 광명과 생명에로 다시 부르신다.」

(「수도자의 모범」6장 )



p.380


어째서 섭리는 그런 방법을 취하시는가.

그것은 우리 가운데 두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리브카』의 태내에는『야곱』과『에쌍으』가 잉태돼 있었던 것처럼

우리 마음에는 천주께 대한 사랑과 자기에 대한 사랑이 감추어 있다.

이 양자는 서로 몹시 반항하며, 간단없이 싸움을 계속해 간다.


주께서 『리브카』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배 안에 두 백성이 들어 있으며, 

너의 속에서 두 민족이 갈라지리라.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드세리니, 큰 이가 작은 이를 섬기리라』고.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은 두개의 사랑을 마음에 가지고 있으며,

감동과 사랑과 정열이 다른 큰 두 민족을 품고 있다.


그리고 『리브카』의 태내에 있었던 두 태아가,

그 상반(相反)되는 움직임으로써 그에게 큰 충격을 준 것같이,

우리 영혼 안에 있는 두가지 사랑은,

우리의 마음에 있어 커다란 고뇌의 씨가 된다.


그렇지만,

거기서도 또한 형은 아우에게,

즉 관능적 사랑은 천주께 대한 사랑을 섬겨야 한다.」

(「신애론」11편 20장)




자애(自愛)는 

고뇌에 대한 공포, 향락에의 추구, 특히 오만에 의해서 나타난다.


거기에서 저 대사도 성「바오로」가 탄식하며 호소한

내적 갈등(內的葛藤)이 야기 된다.



이 투쟁은 언제나 격심하고, 끈덕진 것인데,

그러나 어떤 이에게 있어서는,

또한 특히 어떤 점에 관해서 그리고 어느 연대에, 어떤 시기에,

어느 경우에 있어 보다 격심하다.


영적 생활의 길에 진보한 이에게 마저

은밀한 자애심의 뿌리, 거의 느끼지 않을 정도로 미묘한 오만이 남아 있어,

그것으로부터 그들이 자각하지 않는

허다한 불완전성, 헛된 자부심, 헛된 두려움, 허망한 소원,

자기 만족에 충만한 태도, 이웃에 대한 시기심과 조소,

결국 비참함과 나약함과 작은 결점과의 혼돈(混沌)한 덩어리가 생긴다.


p.381


도대체 이것을 치유하는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리스도교적 제욕(制慾)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천주의 은총을 이용하고 감연히 그것에 마음을 향하여 불요불굴하게

어디까지나 이 제욕에 종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때로는 광명이 결핍되고 때로는 용기가 꺾일 적도 있으리라.


참으로,

만일 천주께서 그 섭리의 작용에 의해서

유력한 도움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 안에 숨어 있는, 거의 분별할 수 없는,

이 적을 완전히 정복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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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81



천주의 섭리의 작용에는 두가지 길이 있다.


즉, 그하나는, 각가지 감미로움에 넘치는 길,

다른 것은 거룩하고 엄격한 길이다.


어떤 영혼이 천주께 몸을 바치기 시작하자 마자,

천주께서는 이를 끌어당기시어,

지상의 쾌락을 이탈시키시려고

이에 감성적 위안(感性的慰安)을 충만케 하신다.



이렇게 하여 

영혼은 점차로 피조물을 떠나서, 천주께 결합돼 간다.


그러나, 이 이탈은 아직 완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하는 모든 일에 만족을 탐구하는 것은,

아직 완전하지 못한 영혼의 일반적 결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각가지 감미로움은 

바로 정신의 오만, 또는 영적 탐식(靈的貪食)을 내포하는 

가장 맛있는 영양분이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알게 또는 모르게,

몇 번이나 새로이 자기 만족에 되돌아가며,

천주에게서 받은 은혜를, 자기의 것인냥 여기고,

일정한 신분에 머물러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천주의 무한한 자비를 찬미하는 대신,

그 공적을 적어도 은밀한 마음 안에, 자신에게 돌리게 된다.


그러므로 자애심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천주께서 영혼에게 내적 시련의 혹심한 타격을 가하지 않으실 수 없다.


물론 그것은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겠지만, 

결정적인 것이다.


p.382


이렇게 하심으로써 천주께서는 우리를 낮추시고,

가르쳐 이끄신다.


당신 영광을 보관하시고 우리가 그것을 도취(盜取)하여,

마음 안에 은닉함을 피하게 하시려고,

천주께서는 거의 모든 은총과 모든 은혜를 우리 눈에서 감추어 버리신다.



이 법칙에는 두가지 예외가 있다.


즉 감지(感知)되는 감각적 은혜로써 끌어당겨지고,

마음을 빼앗길 필요가 있는 초심자의 경우와,

이미 허다한 내적 시련을 겪어,

자애심이 정화(淨化)되고,

추호도 자기 만족에 떨어지는 일이 없으며,

마음 안에 지니고 있는 천주의 은혜를 자각할 수 있는 위대한 성인의 경우다.



일반적으로 

천주께서 이런 영혼에 채우시는 풍부한 은혜를 감추시는 것은,

이 영혼이 자기의 겸손, 인내, 진보,

천주께 대한 사랑을 조금도 자각하지 않을 정도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스로 이런 선덕이 없으며,

고난에 부딪치면 관대함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때로는 눈물을 금하지 못할 적이 있다.




동시에 천주께서는,

우리 인간 안에 있는 본래의 타락의 심연(深淵),

그들이 전에 그토록 한번도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었고,

또한 측량하려고도 생각하지 않았던 타락의 심연을 그들에게 폭로하신다.


천주께서는 이를 찬란한 광명에 의해서가 아니고,

몇번이나 거듭되는 쓰라린 체험에 의해서 서서히 드러내신다.


우리의 자애심에 있어,

이처럼 괴롭고 굴욕적인 광경과 같이 치명적인 것은 없다.


시시각각으로, 자신의 나약함을 느끼며,

절벽의 언저리에 서 있는 자신을 보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자신에게 의지하는 마음을 온전히 버리고,

오직 천주 한 분에게만 신뢰하도록 이끄는 가장 유효한 시련이 아닌가.


남 앞에서 수치를 당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우리 자신의 눈에 있어,

전연 무(無)와 같은 이로 보이는 것은 더욱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특히 우리 마음의 오만을 점차로 멸망시켜 주는 길이다.


p.383


그리고,

거기에 천주께서 이처럼 많은 내적 굴욕을 허락하시는 까닭이 있다. 


그것은 참으로 하나의 눈부시도록 명백한 교훈이며,

그리고 우리가 이 교훈을 이미 잊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몸에 배도록 배울 때까지, 

천주께서는 그것을 계속하신다.


언짢음과 싫증을 수반하는 거짓 겸손을 몰아내는

유순하고 평화에 충만된 겸손에 마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선용(善用)하는 방법을 아는 것만으로 넉넉하다.


참으로,

고통에 있어서의 언짢음과 싫증이 인내하지 못하는 행위인 것과 같이,

굴욕에 있어서의 언짢음과 싫증은 그 어느 것이나 오만한 행위다.

(드.고사드「위탁」2편 4장의 4,22, 6장의17, 7장의 14 참조)




이런 시련에 의해서 
천주께서는 우리들 안에 자아에서의 이탈을 완성하신다.

자애심은 일곱머리를 가진 뱀이다.
이것을 죽이기 위해서는 그 머리를 하나씩 베어 떨어뜨려야 한다.

우리는 먼저 세속, 지상의 행복, 오관의 쾌락, 건강 등에 대한 애착을
끊어 버리는데 노력하였다.

그리고 우리를 도우시기 위하여,
천주께서는 현세의 희락 위에 비애를 뿌리시고,
사랑하는 사람과 사물로써 우리를 채찍질하시며,
우리의 육체를 병약(病弱)함에 맡기셨다.

이 천주의 작용에 순순히 복종하여,
우리는 이미 커다란 이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런 점으로 파멸된 자애심은
다른 한층 미묘한 약점으로 우리를 대기하고 있다.


즉, 자애심은 신심(信心)의 감각적인 방면에서 사로잡히고 만다.

그리고 이 애착은 천한 것이 아니고, 
외관상 정당한 것이기에 더우기 경계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완전한 사랑은,
위안에 대한 이 애착과 천주와의 사이에
마음을 나누는 것을 견딜 수 없게 한다.

그런데, 천주께서는 어떤 수단을 강구하시겠는가.

p.384

만일 그처럼 풍부한 혜택을 받지 못하고,
천주께서 그토록 시기심이 깊은 ,
부드러운 사랑을 베푸시지 않는 영혼이라면,
이런 영혼이 평화 안에 거룩한 감미로움을 맛보아 즐기도록 맡기시며,
감각적인 희열(喜悅)을 희생하는 것만으로 천주께서는 만족하시리라.

실제, 이것이 어떤 신심가(信心家)의 일반적 방법인데,
그런 신심에는 일종의 자기애(自己愛)가 혼입(混入)하고 있다.

물론 천주께서는 그들의 결점을 승인하지 않으시지만
그러나 그들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일이 보다 적기 때문에,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그렇게 탁월한 완전함은 아니다.

특별히 간선하신 영혼에게는 각별한 계획을 가지시기 때문에,
이에 요구하시는 바 역시 전연 특종(特種)인 것이다.

천주의 사랑의 질투는,
그 사랑의 농도(濃度)와 같다.

간선된 영혼에게 자신을 온통 주시기 열망하시는 천주께서는
또한 그들의 마음을 나누는 일 없이, 완전히 소유하시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천주께서는 외부적인 십자가와 고통으로써,
그들을 피조물에게서 이탈시키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이탈시켜,
그들 안에 있는 자애심의 마지막 뿌리,
즉 신심(信心)의 감정에 애착하고, 그것에 의지하며,
그것으로 자신을 기르고, 그것에 만족을 느끼는 
자애심의 마지막 뿌리를 없애버리기 바라신다.

이 제二의 죽음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천주께서는 모든 위로, 모든 감미, 모든 내적 지지(內的支持)를 앗으시고,
건조, 혐오, 무감각, 그밖의 고뇌로써 영혼을 시험하신다.

그래서 영혼은 마치 허무와 같은 상태가 돼 버린다.



천주의 작용은,
반드시 언제나 이토록 격심한 정도에까지 이른다고는 할 수 없다.

즉,
천주께서는 당신의 사랑의 계획과 동시에 영혼의 힘과 관대함에 응하여
그 작용을 가감(加減)하신다.

그리고 천주께서 그와 같은 거룩한 가혹함으로써
그들을 다루시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여기실 적에는
적어도 그들에게 
위로와 무미건조, 평화와 싸움, 광명과 암흑을 교대로 보내신다.

이 끈임없는 변동에 의해서, 
천주께서는 영혼을 당신의 모든 작용에 대하여 
유순하고, 부리기 쉬운 것으로 하신다.

왜냐 하면,
이 내적 상태의 간단 없는 변화에 의하여
영혼은 드디어 어떤 상태에도 이미 고착(固着)하지 않게 되며,
성의대로 또한 성의 쪽에 부르시는 천주 성신께서 바라시는대로
어떤 상태라도 취할 수 있는 각오를 가지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p.385

이것을 요약한다면,

존자「루이.드.블로아」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런 모든 시련에 의해서 

천주께서는 영혼을 정화(淨化)시키시고, 

낮추시며,

그 의지에 순종하기 쉬운 것으로 하시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천하고 추루한 흉측한 곳을 도려내시고,

그 눈에 드시는 모든 장식으로 꾸미신다.


그리고 그들의 인내와 선의에 충만된 충성을 보실 때.

각가지 고난으로써 오래 시험하시며

은총의 도우심으로써 그들이 드디어 이 높은 완덕,

즉 거기에는 어떤 종류의 유혹 고난도,

평온하게 기쁨으로써 감수할 수 있는 높은 완덕에 도달한 것을 보실 때,

천주께서는 가장 완전히 그들을 당신과 일치시켜,

그 현의(玄義)와 신비를 드러내시어,

당신을 온전히 그들에게 나누어 주신다.」(「수도자의 모범」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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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85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사랑으로써 천주를 사랑해 드리는 나날이다.


그 때, 우리는 

자기를 희생하여 천주 자신을 위하여 천주를 섬기기 때문이다.


아, 즐거움 안에 있어,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어떤 헛된 만족에도 사로 잡히는 일 없이,

순수한 사랑으로써 천주를 사랑한다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그러나 내적 십자가와 고난을 당할 때, 이것을 거룩히 받는다면,

이미 천주와의 친교(親交)에는 자애심이 혼입할 것을 두릴 필요는 없다.


왜냐 하면,

이 친교에 있어서는 자애심에 있어

고통의 원인이 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아, 순수한 사랑의 가치를 깨닫는 이에게 있어,

이 확신은 스스로 얼마나 위로가 되겠는가!


그러므로,

많은 성인들은 위로나 즐거움보다는 오히려 궁핍과 고통을 택하였고,

위로를 받는 것을 괴롭게 느꼈을 정도로,

고뇌를 열렬히 사랑하였다.

(드.고사드 「위탁」2편 4.12)


p.386


그것은 천국을 위하여 풍성히 추수할 때다.


왜냐하면,

그 때야말로 영혼은 바로 순수하게 사욕(私慾)을 떠난

거룩한 업의 실천에 오르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위로의 상태에 있을 때, 사람은 관능적 즐거움을 포기하고,

치욕이나 역경을 인내하는데는 그 토록 커다란 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혜택을 받은 영혼은 모든 것을 감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흔히 그 인내는 천주께 대한 사랑의 힘에 의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맛보고 있는 감미(甘味)에서 생기는 것이다」라고,

성「알퐁소」는 말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에의 사랑 13.2)



이에 반하여 

자신의 비참함, 나약함, 감정, 악습 또한 그 밖에 우리를 시정하시기 위하여 

천주께서 사용하시는 모든 고통을 잘 인내한다는 것은,

평범한 덕으로는 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내적 정화(內的淨化)와 이탈을 겪은 후에,

우리는 비로소 쉽게 완전한 위탁에,

홀로 천주께 대한, 효애로 부터의 신뢰에 올라간다.


바꿔 말하면,

가장 탁월한 덕이 우리에게 있어 거의 자연적인 것이 된다.


그러기에 얼마나 이러한 비참과 이러한 시련이

성인들의 내적 투쟁, 그 승리, 은총의 개선의 기회가 되어,

그들에게 풍부한 수확을 얻게 했을 것인가.



한편으로,

우리가 천주만을 생각하고, 천주만을 맛보며, 천주께만 의뢰하고,

천주 안에서만 기뻐하게 되는 것은

자아(自我)로부터의 이 이탈이 완전히 성취된 후에 있어서다.


그것이야말로 예수.그리스도에 있어서의 새로운 생명이며,

묵은 사람이 멸하고, 새로운 사람이 건설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 위를 기어다니는 대신에

누에의 번데기가 죽어 공중을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나방이 되는 것처럼,

자신에게 죽는 것을 서둘지 않겠는가.

(드.고사드 「위탁」2편 4.22, 5.17, 6.3 참조)


p.387


그러나, 자애심은 짓궂게 오래 살며,

기나긴 무서운 죽음의 고통을 겪은 후가 아니면 숨을 걷우지 않는다.


아직 불완전한 영혼은 ,

타오르기 전에, 조르르 수분을 내놓으면서 신음하며,

휘어지는 생나무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또한 조각가의 끌 밑에 있는 소상(塑像),

쇠망치로써 쪼개지려는 돌과도 비슷하다.


유혹, 건조, 그밖의 고통은,

몸에 스며드는 그 타격의 아픔을 격심히 우리에게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것 없이는,

우리는 언제까지나 형태를 갖추지 못한 덩어리에 불과하며,

고난을 받으시고, 수치를 당하셨으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의 모습을 닮을 수는 없다.


몇 번이고 자기를 이탈한 후에 비로소,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기도의 길에, 사랑의 일치에, 참된 성덕에 깊이 나아가려는 소망이 클수록,

우리는 이탈한 자유스러운 이가 돼야 한다.


만일 우리가 가장 두려운 고독 안에 있어서도

천주를 섬기는 것을 배우지 않는다면,

위로주이신 천주보다도 오히려 천주의 위로를 찾는 것이 된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내적 고뇌는 완덕에 이끄는 길이며,

천주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편에는 아무런 과오가 없드라도, 우리에게서 제거하신다.


아마 우리는 세속에 있었을 적보다도 

수도원에 있어 위로의 감미로움을 맛보는 일이 보다 적을지 모르겠다.


이것은 천주께서 보다 완전하게 당신께 우리를 일치시키시려고

보다 유효한 수단으로써 우리를 정화(淨化)하시기 위해서다.



참으로 잔은 쓰다.

그러나 지옥의 고뇌는 더욱 쓰라린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께서는 애련히 여기시는 성의에서,

후세에 있어 받아야 할 가혹한 고뇌를 대신하여,

이 경감(輕減)된 고뇌로써 우리를 정화하신다.


p.388


한편 이 구원의 잔을 부득이 마셔야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을 덕을 실천하는 기회로 삼자.

그것은 잔의 쓴맛을 완화시키는 수단이다.


시련에 의해서 정화되고,

이탈이 진보함에 따라,

모든 것은 우리에게 있어 감미로운 것이 돼 갈 것이다.


그리고 천주께서 허락하시는 경우,

피로할 때, 또는 특히 치열한 시련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미 고통을 거의 느끼지 않을 것이다.


왜냐 하면,

혹심한 고통의 대부분은,

죽음도 사양도 바라지 않는 자애심의 강한 반항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천주께 대한 사랑은,

만일 우리의 마음에 저항하는 아무런 장애물도 발견하지 않는다면,

감미롭고, 즐거운 인상만을 주는 것이리라.


결국,

흠숭하올 주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일종의 고통에 잠기셨는데,

우리는 지상에 있어 천국의 즐거움을 맛보고,

장미의 향기로운 길만을 나아가려고 원해서 좋을 것인가.


천국은 모든 희생을 지불하여 획득하도록 돼 있다.


그리고 

고통은 오직 영적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의 독점물(獨占物)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들의 고통은 사랑과 희망의 향기를 지니고 있다.


결국,

냉담한 이가 방종한 정욕의 멍에 밑에 지쳐 버리는데 비하여,

이런 사람에게 있어,

성덕을 향하여 달음질한다는 것은 훨씬 수월하다.

(「동서」2편4.12, 5.17)




그러므로,

우리는 천주의 은혜를 방해하는 것을 주의 깊이 피하도록 노력하자.


그러나 우리가 묵상 및 영성체에서 감각적인 위안을 맛보고,

지극히 사랑하올 분과의 일치가 

희열과 감미만을 초래한 

이런 맑은 날을 우리에게서 앗으시는 것이 천주의 뜻이라면,

이 유쾌한 위안에 미련을 가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왜냐 하면,

천주께서 우리로부터 위안을 앗아가시는 것은

우리의 과실 때문이 아니고, 

실은 그것이 임무를 마쳐,

이미 전과 같이 우리에게 있어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 현세에 있어서의 순교와 죽음의 고통은,

얼마나 귀중한 것이랴!


만일 우리가 

이 복된 내적 굴욕을 기꺼이 받아들여 중히 여기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항상 굴욕을 느끼며,

언제나 거기에 머무르기를 바랄 것이 틀림 없다.


왜냐 하면,

그것으로써 우리는 천주의 곁에 보다 가까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p.389


많은 성인들은, 그 고난을 당할때,

특별한 영감(靈感)에 충만되어,

다음과 같이 기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주여, 더욱 고통을!」이라고.

「드.고사드」신부에 의하면,

이 모범을 따르려는 것은 흔히 외람되고 미혹한 짓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바라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신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그런 소망을 간직하기에는,

우리는 너무나도 작은 이, 약한 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는 결코 스스로 어떤 고통이나 반대를 원하지 않았고,

더구나 그것을 간구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지도했던 한 여성을 훈계하여,

현재 보다 많게도 적게도 고통을 천주께 기도하기를 금하고 있었다.



그것은 천주께서 우리 이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의 올바른 정도를 알으시기 때문이다.


천주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시련만으로 충분하며,

스스로 그것을 기구하고, 또는 자초(自招)할 필요는 더구나 없다.


평소에 시련을 기대하고,

그것에 대비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닥쳤을 때, 이를 효과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더욱 힘과 용기를 주는 최선의 방법이다.(동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