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84 pp.432-438 제 3편 제12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계속) 제1절 정신의 암흑②

은가루리나 2019. 9. 14. 22:31


옴니아  등급변경▼  조회 157 추천 0 2013.07.30. 03:36



제3편 위탁의 대상



제1장 위탁의 일반적 대상


제2장 현세적 사물에 있어서의 위탁 일반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제3절 부귀와 빈천 ①

 제4절 장소와 환경 


제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건강과 질병 

 제2절 질병의 지연과 그 결과 

 제3절 삶과 죽음 

 제4절 자연적 은혜의 분배에 관한 불평등에 대하여

 제5절 직무

 제6절 휴식과 평온


제5장 명성의 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호평

 제2절 굴욕

 제3절 선인으로부터의 박해


제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영광의 생명

 제2절 은총의 생명

 제3절 선덕의 실천

 제4절 죄를 피하는 일

 제5절 계명, 서원, 회칙 등의 준수


제7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어떤 종류의 영적원조의 상실 - 

 ⑴

 ⑵

 ⑶

 ⑷ 


제8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실패와 과실 -

 제1절 분발심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3절 남의 영혼의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4절 우리 자신의 죄과


제9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내적시련의 일반 -

 

 ②

 ③

 ④


제10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유혹 -①

 - 유혹 -② 

 - 유혹 -③


제11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위안과 건조-①

 - 위안과 건조-②

 - 위안과 건조-③

 - 위안과 건조-④


제12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암흑, 무감각, 기타

 제1절 정신의 암흑

 제2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제3절 의지의 무력

 제4절 영적빈곤


제13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평화, 불안, 소심

 제1절 평화

 제2절 각가지 공포

 제3절 거룩하고 정의이신 천주께 대한 경의

 제4절 양심상의 小心


제14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일반적 길인가, 신비적 길인가

 제2절 신비적 관상의 갖가지 상태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

 제4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제15장 기억해야 할 두가지 실





p.428


제 3 편 위탁(委託)의 대상(對象) 


제 12 장 

심령생활(心靈生活)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계속)



암흑, 무감각, 기타 - 


제 1 절 정신의 암흑 




그런데 위에서 일반적인 관찰은 마쳤으므로,

이제부터 잠시 이런 시련 가운데서 주요한 것을 검토하자.



우선, 이런 시련 안에는, 기도의 가치에 대한 불안이 있다.

즉 때로는 기도가 우리에게 있어 가치가 없는 것 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천주께 마음을 향하고,

있는 수단을 찾아 우리의 최선을 다하자.


우리가 천주께 말씀드리는 것을 몰랐던 것이라도

천주께서는 그것을 깨달으실 것이다.


천주께서는 우리의 선의를 기꺼이 여기시고, 이에 만족하시리라.


즉, 천주께서는 노력만을 요구하시지

성공은 조금도 이를 바라지 않으신다.


이와 같이 바쳐진 기도는

위안을 수반하지 않드라도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니다.


대개 그런 기도는

우리를 모든 의무에 어디까지나 충실한 이가 되게 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영혼을 비추며, 기르는 것이다.



그리고 「드.고사드」신부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경험은 나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가르쳤다.

즉 이런 탄식을 발하는 선의의 사람들은

모두 다른 이보다 잘 기도하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 하면,

그들의 기도는 더욱 단순하고, 보다 겸손에 충만된 것이며,

그리고 그 단순함 그자체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기도에 주의하지 않기 때문이다.」(동서)



p.433


다음에 우리의 선덕의 가치에 대한 불안이다.


그러나, 성「알퐁소」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유혹에 저항하며, 천주께 희망하고 천주를 사랑하며,

그 원하시는 것을, 원하시는 선행을 하는 것과,

이런 선행을 실제로 행한 것을 자각하는 것과는 전연 다르다.


후자의 경우,

즉 우리가 어떤 선행을 실천한 것을 아는 기쁨을 주지만,

그러나, 우리의 공로는 전자, 즉 선업의 실천 그 자체 안에 있다.


그런데 천주께서 전자에 만족하시고,

행위의 가치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은 모든 만족감을 제거하시려고

후자를 영혼에게서 앗아가시는 것은 우리의 만족감이 아니고,

우리의 공로이기 때문이다.」(「예수.그리스도에의 사랑」13.2 )



성녀「요안나.드.샹딸」이 이런 고통에 몹시 시달리고 있을때,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

그를 위로하여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오직 상부의지(上部意志)에만

적나라한, 무미건조한, 무감각한 행위를 수행해 가는 것에 

만족하는 것은,

거룩한 신심(信心)의 가장 훌륭한 절정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스러운 섭리를 흠숭하고, 

그 팔 안에, 그 품 안에 안심하며,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주여,

은총에 의해서 베푸신 선덕의 실행에 있어

내가 아무런 즐거움을 느끼지 않음이 원의시라면,

비록 그것이 의지를 거스르는 것이라도

나는 전심으로 이에 승복하나이다.


비록, 아무런 맛을 느끼지 않드라도 그러나 진실로

『나는 신앙과 희망과 사랑을 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바란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나의 신앙과 희망과 사랑에서 아무런 기쁨도 바라지 않나이다.」

(「서간」490 )




유혹에 있어서의 승리에 관해서도 또한 불안이 있다.


그런 불안은, 그 자체가 아무리 치열하고, 짓궂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보다 훨씬 고통스러운것이다.


그러나, 선의의 영혼은 용기를 내어 안심하여야 한다.


p.434


왜냐 하면,

안에는, 감각이나 상상 안에는, 고의가 아닌,

따라서 죄가 되지 않는 많은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는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여 저항했겠지만,

그러나 우리를 에워싸는 암운(暗雲) 때문에,

우리는 그 경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의지에는 아무런 변동도 없었다.

경험은 바로 이 사실을 입증하리라.


단지 고의로 범하는 소죄에 의해서

천주께 모욕을 끼칠 기회가 생기면 우리는 주의 깊이 이것을 피하고

죄를 범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천번이라도 죽음을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경계하며 기도하고, 용맹히 싸웠다는 것,

그것만으로 우리에게 있어 충분하리라.


의무를 완수했다는 것을 확실히 자각할 필요는 없다.

도리어 겸손을 위하여 큰 선익이 되므로,

오히려 그것을 모르는 편이 더욱 낫다.




우리의 안에 있는 부패의 뿌리,

은총이 없이는 아마 최악의 혼란을 초래할 부패의 뿌리를,

천주께서는 허다한 경험에 의해서 우리에게 느끼게 하시기를 바라신다.


승리가 확실하다면, 굴욕은 적어지고, 

아마 겸손의 덕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일은 없으리라.


천주께서는 우리를 승리에 관하여 불확실한 대로 방치하시어,

굴욕을 깊게 하시고 겸손의 덕을 견고케 하는 데는 극히 유용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런 사정에 있어서는 자기 영혼에 관해서 불안이 있을 수 있다.


자신은 패배한 것이 아닐까, 현재 아직도 은총의 상태에 있을까.

그것을 확인하려고, 불안한 열심에 빠져서는 안된다고 

성「알퐁소」는 주의시키고 있다.


「그대는 천주께서 그대를 확실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싶은가.

현재 천주께서는 그것을 그대에게 알리시기를 바라지 않으시며,

그대가 자신을 낮추고, 그 인자하심에 맡겨,

그 거룩하신 의지에 체념하여 복종하는 것만을 생각하시기 바라신다.


p.435


그리고 경외심(敬畏心)이 깊은 이가,

은총을 잃었는지 어떻는지를 걱정하고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확실히 잃지 않았다는 것은,

영적 생활의 권위자가 모두 이구동성으로 승인하고 있는 교설이다.


왜냐 하면,

아무도 명확히 알지 못하고서,

천주를 잃는 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에 의하면,

그대가 천주를 사랑하고,

고의로 가장 사소한 불쾌한 일이라도 천주께 끼치지 않겠다는 결심을,

적어도 마음 안에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그대가 은총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그대는 천주의 자비하신 품에 몸을 맡겨라.


그리고 천주와 그 성의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천주께 말씀드려,

모든 두려움을 마음에서 쫓아내라.


아, 이 무서운 암흑의 복판에 있어 행하여진

신뢰와 인종(忍從)의 행위는 얼마나 주의 뜻에 맞갖는 것이랴!」

(성 알퐁소.리고리오「거룩한 반성」39,「내적 고뇌」2절)




이런 모든 불안 가운데 가장 괴로운 것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관한 불안이다.


천주로부터의 계시가 아니면, 

현재 자신은 사랑 혹은 미움을 받고 있는지

더구나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는지,

그렇찮으면 슬픈 종말을 맞이할 것인지,

아무도 완전히 확실하게 알 까닭이 없다.


그리고 이 불확실이 없으면 우리는 교만에 도취되든지

혹은 어리석게도 무모하게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할지 모른다.


도리어 불확실하기 때문에,

천주께서는 그것에 의해서 우리를,

자신에게 의뢰하지 않는 겸손한 태도에 

또는 항상 깨어 있는 분발심 안에 머물게 하신다.


그렇게 하여 천주께서는

당신의 최고주권(最高主權)을 주장하시고,

우리가 천주께 절대로 의존해야 할 것을 상기시키시며,

끊임없이 기구하고, 경계하며,

제욕하고 거룩한 업을 증가 시킬 필요를 느끼게 하여,

우리의 신앙과 신뢰와 위탁에 더욱 광휘와 가치를 덧붙이신다.


p.436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고마운 섭리의 배려를 흠숭하자.


그리고 공연히 정신을 산란시키고, 낙담시키는 것에 불과한 

옳지 않은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말고,

활동력을 자극하여,

위험을 경계토록 하는 사랑이 깃들인 경외심(敬畏心)을 배양하도록 유념하자.



내세를 확보하는 참된 길은 현재를 성화(聖化)하는 것이다. 


「준수성법」의 저자는,

자신의 운명에 관하여 우려하는 나머지 불안과 오뇌(懊惱)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 우민(憂憫)이 일어나 

공포와 희망 사이에 흔히 동요하고 

드디어 비통에 견디기 어려워 어느 날, 성당에 들어가, 

기도하기 위하여 그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그것을 생각하면서 말하였다.


『아, 내가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면!』이라고.

그러자, 그 사람은 곧 천주의 대답을 마음 안에서 들었다.


『그대가 만일 그것을 알았다면, 무엇을 하려는가.

그대가 그 경우에 하려고 생각하는 것을 지금 행하라.

그러면, 그대는 완전히 안전하리라.』고.


이에 그 사람은 즉시 위로를 받고,

또한 용기를 얻어 자기를 천주의 성의에 맡겨 드리고

그때부터 이미 우민에 괴롭히는 적은 없었다.


그 사람은 이제야, 무엇이 자신에게 대하여 일어날 것인가 등을

호기심으로 탐구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천주의 의지와 그 뜻이 무엇인지 인식하여,

그것에 의하여 모든 종류의 선업을 시작하고,

또한 그것을 수행하려고 노력하였다.」(1편 25장)



이 사람은 분명히 현명하였다.


우리도 또한 신뢰하여 기도하고, 의무를 수행하는데 진력하며,

그렇게 하여 

겸손과 자아포기와 순명과 거룩한 사랑 안에 사는 것만을 염두에 두자.



그리고 자비 자체신 천주,

적을 위해서마저 생명을 넘겨 주신 주,

완고하여 등지고 도망치는 양의 뒤를 찾아 헤매는 착한 목자는,

선의의 영혼의 거룩한 생애가 비참히 끝나기를 결코 허용하지 않으신다.


그 위에 우리는 최후까지 견디는 견인(堅忍)의 은총을 끊임없이 기구하고,

또한 그것을 하늘의 어머니의 전달에 의해서 간구하자.


성모께 대하여 신심이 두터운 영혼이 영원히 멸망할 수는 결코 없다.


p.437


위에 말한 것 외에, 각가지 정신의 암흑이 생길 수 있다.


즉 자기를 비추는 수단을 강구하면서도

사람은 혹은 자기 내적 생활에 있어,

혹은 남의 지도에 있어 광명이 결여될 경우가 있다.


어떤 때, 천주의 허락하심에 의해서

우리는 사방팔방에서 암흑으로 포위되는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암흑이 어떤 성질의 것일지라도,

또한 아무리 농후한 것일지라도,

아무래도 이성(理性)과 신앙(信仰)을 갇우어 버릴 수는 없다.



즉, 구령의 길로서 사제와 신자에게는,

성교회와 성경과 양서(良書)가,

수도자에게는 장상과  회칙이 항상 대비하고 있다.


이것은 영복의 나라의 항구에 확실히 도달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시련은 우리에게 하나의 귀중한,

그러나 남용할 수 있는 힘의 보충을 가져오는 바

특수한, 빛나는, 유쾌한 광명만을 우리에게서 앗아가는데 불과하다.


여하튼 그런 광명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 편에 과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만일 천주께서 그것을 우리에게서 앗아가시드라도,

우리에게 위탁과 노력에 의한 

넘칠만큼의 대상(代償)을 찾아 얻게 하실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건조와 암흑 안에 있어서도

뜻대로 우리를 이끄시도록 천주께 맡기도록 하자.


무한한 예지와 인자 자체신 이 성부께 신뢰하여

그 모든 의지를 사랑으로써 완수하려는 것 외에는 모든 우려를 버리자.


p.438


영해 예수의 성녀「데레사」는 그렇게 하였다.


「나에게 암흑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천주님께 감사하고 있읍니다.


그래서 나는 깊은 평화를 느끼고 있읍니다.


주께서 데려다 주신 이 어두운 지하도 안에서 수도생활을

최후까지 계속할 것을 기꺼이 받읍니다.


나의 유일한 소원은 나의 암흑이

죄인을 위하여 광명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참으로 하나의 위안도 없음을 매우 행복히 여기고 있읍니다.」

(「아녜스 동정에의 서간」4,「회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