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85 pp.438-444 제 3편 제12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계속) 제2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은가루리나 2019. 9. 20. 15:29


옴니아  등급변경▼  조회 150 추천 0 2013.08.06. 06:40



제3편 위탁의 대상



제1장 위탁의 일반적 대상


제2장 현세적 사물에 있어서의 위탁 일반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제3절 부귀와 빈천 ①

 제4절 장소와 환경 


제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건강과 질병 

 제2절 질병의 지연과 그 결과 

 제3절 삶과 죽음 

 제4절 자연적 은혜의 분배에 관한 불평등에 대하여

 제5절 직무

 제6절 휴식과 평온


제5장 명성의 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호평

 제2절 굴욕

 제3절 선인으로부터의 박해


제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영광의 생명

 제2절 은총의 생명

 제3절 선덕의 실천

 제4절 죄를 피하는 일

 제5절 계명, 서원, 회칙 등의 준수


제7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어떤 종류의 영적원조의 상실 - 

 ⑴

 ⑵

 ⑶

 ⑷ 


제8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실패와 과실 -

 제1절 분발심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3절 남의 영혼의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4절 우리 자신의 죄과


제9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내적시련의 일반 -

 

 ②

 ③

 ④


제10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유혹 -①

 - 유혹 -② 

 - 유혹 -③


제11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위안과 건조-①

 - 위안과 건조-②

 - 위안과 건조-③

 - 위안과 건조-④


제12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암흑, 무감각, 기타

 제1절 정신의 암흑  

 제2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제3절 의지의 무력

 제4절 영적빈곤


제13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평화, 불안, 소심

 제1절 평화

 제2절 각가지 공포

 제3절 거룩하고 정의이신 천주께 대한 경의

 제4절 양심상의 小心


제14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일반적 길인가, 신비적 길인가

 제2절 신비적 관상의 갖가지 상태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

 제4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제15장 기억해야 할 두가지 실





p.438


제 3 편 위탁(委託)의 대상(對象) 


제 12 장 

심령생활(心靈生活)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계속)



제 2 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되풀이 말하는것이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정욕의 노예가 된 영혼,

또는 유의적 원인(有意的原因)에 기인하는 냉담에 의해서 

약화된 영혼에 관해서가 아니고,

온전히 천주의 것이 되려는 단호한 결심을 지니고 있는 영혼에 관해서다.




「가장 거룩한 의무를 

냉랭한 마음, 산만한 정신으로써 수행하고,

아무런 열심도 느끼지 않으며,

언제나 의무에 일하고, 강요되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을 그것에 끌고 가야만 하는 것,


천주의 어전에 감동도 없이 

그저 막연한 무관심 안에 머문다는 것,


기도할 적에도 침착하지 못하고,

묵상에서도 애정이 솟지 않으며,

고백할 적에도 통회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영성체 때에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며,

하늘의 빵을 받는데도 물질적 빵을 먹는 정도의 만족을 느끼지 않고,

안에는 위로가 없으며, 밖에는 고통이 충만하고,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면서도,

그것을 가볍게 하는 은밀한 마음의 감동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


이런 것은 모두 참으로 슬픈 일이다. 」


이상은 「롬베스」신부가 교묘하게 묘사한 우리 시련의 축도(縮圖)다.

그러나, 이런 시련에 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p.439


그는 아직도 말을 계속한다.


「이런 상태는 참으로 인내의 고통이 많은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당신의 권리와 우리의 필요를 완전히 알으시는 천주의 섭리에 의해서 

위대한 예지로써 완화돼 있다.


...... 주여, 당신은 정의의 천주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내리시는 결정은 모두 공평 자체십니다.


그러나 당신의 자비하심 역시 

항상 당신의 계획 안에 매우 크게 들어 있나이다.



...... 선의의 영혼이여,

천주께서 위안을 제거하시는 것은 

죄과 때문에 그대를 벌하시기 위해서거나

혹은 그대의 공로를 더하시기 위한 것 중의 어느 것이다.


만일 그것이 그대의 죄과의 벌이라면,

왜 불만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가.


만일 그것이 그대의 공로를 더하게 하려는 성의시라면

어째서 천주께 불평하는가.


천주께서 그대가 그것에 맞갖도록 다루신다면,

어떻게 그대를 불의(不義)하게 대하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공로를 더하게 하는 것만을 바라신다면,

그대는 천주께 감사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대는 

천주께서 이 세상에 있어 너무나 쉬이 죄의 보상을 하게 하고

또는 몇가지 가벼운 고통으로써 

내세에 있어 그대를 너무나도 행복한 이로 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가.


아무리 말하드라도 결국 그대가 말하는 가혹한 처치는

반드시 이 두가지 이유의 어느 것에 바탕을 두는 것이어야 한다.


천주께서는 

그 손으로 이룩하시는 사업을 미워하시는 일은 절대로 없으시며,

또한 사람들을 봉사에 부르시는 것은, 

불행에 빠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다.」(「내적 평화」3편 7장)



우리의 의지가 어디까지나 견고하고 또는 관대하다면,

우려하기를 피하자.


병자가 의사에게 자기를 맡기듯이, 우리는 천주께 자신을 맡기자.


그 때 특히 천주께서는 

우리를 치료하시고 우리를 구하도록 배려하신다.


p.440


자애심(自愛心)은 아마 

우리의 통회가 그칠줄 모르는 눈물로써 나타나며,

또한 우리의 사랑이 넘칠만큼의 달콤한 유화함으로써 나타나기를 

바랄것이다.


자애심은 또한 우리의 덕의 업적을 샅샅이 알고, 보고 느끼고,

그것으로써 안도감을 가지며, 그것에 도취되고,

혹은 거기에서 만족을 찾아내기를 바라리라.


이 세상의 생애에 있어서는,

이 교활한 자애심에 의해서 모든 선물은, 

그것이 알려지자 마자, 즉시 독(毒)으로 변해버릴 위험이 있을 만큼,

우리의 천성(天性)은 비참한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천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을

우리의 눈에 숨겨 둘 수 없는 이유다.


즉 천주께서는 선물 자체를 우리 안에 보존하시드라도,

우리의 눈에 찬란하게 보이는 것이나

우리의 마음에 아부하는 것을 제거하신다.


만일 자기의 참된 이익을 충분히 깨닫는다면,

우리는 천주의 그러한 처사를 귀중한 은혜로 간주하며

또한 그 손을 보다 무겁게 우리 위에 느끼게 하실 때보다도 

더욱 깊은 신뢰로써 그 손에 친구한다는 것은 결코 없으리라.



실제, 본성이 이러한 내적 고통 안에 있어,

그것에서 치료돼야 할 아무런 구제의 방법도 발견하지 못할 때,

자애심은 사고(死苦)의 우민에 말려 들어가, 

바야흐로 숨을 걷우려 한다. 


아, 이 비참하고 혼란한 자애심은 오히려 더욱 죽는 편이 좋을 것이다.


우리의 가련한 영혼 안에 잠입하는 이 적, 천주와 모든 선의 이 원수는 

십자가에 못 박힐지어다! (드.고사드 「위탁」2편 6.5,8)




그러나 

천주께 대한 이 무서운 무관심에 관해서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고, 

그대는 말하리라.


..... 의지가 모든 의무에 대하여 어디까지나 충실한 한,

이 무관심은 외관적인 것, 영혼의 하부(下部) 안에 있는 것에 불과하다.


영혼의 상부(上部)는 천주를 바라고,

그리고 천주께서는 그 의지에 만족하신다.


p.441


다음의 사실은 그 명백한 증거다.


즉, 그대는 모든 신심업에 있어 

천주를 사랑함을 느끼지 않는 것을 슬퍼하고,


그래서 그대는 다만,

「천주여, 그러므로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못하나이다」라고

괴롭게 탄식하고 호소할 도리 밖에 없을 때,

천주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유일한 두려움이

그대를 그토록 몹시 괴롭히는 이상,

온전히 천주의 것이겠다는

그대의 내심의 깊은 소원은 얼마나 열렬한 것이랴!


그것은 그대의 냉랭함, 그대의 무감각,

그대의 표면상의 무관심의 복판에 있어,

천주께서 그대의 마음 안에 치열한 사랑의 불꽃,

천주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두려움 그 자체에 의해서

항상 내적으로 보다 강력하게 증대해 가는,

점점 열렬하게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을 놓으신다는 확실한 증거다.


그러므로,

그대의 고민은 곧 그대를 안심시키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위에 또한 탁월한 하나의 증거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가 천주의 뜻에 맞갖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아무런 감동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행위는 본디 영적인 것이며,

영혼의 상부에 있어 서서히 세련돼 간다.


그 때 영혼의 하부가 

그것에 협력하는지, 활동하지 않고 머물러 있는지,

또는 반항하면서까지 작용하는지는 항상 제 2차적인 일이다.


근본적인 것은 

통회로써 눈물을 흘리는 일이 아니고,

통회에 의해서 의지가 개선(改善) 되는 것,

거룩한 사랑이 넘치는 유화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우리의 의지를 강하게 천주의 의지에 결합시키는 일이다.



다른 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좋은 결과를 거두는데 감각은 필요 없으며,

도리어 그것은 자애심의 먹이가 되자 마자 오히려 유해(有害)한 것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천주께서 마음의 무감각에 의해서 파괴하시기를 바라시는 장해물이다.


그것은 괴롭기는 하지만, 매우 유효한 수술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몹시 탄식하고 호소하는 대신에

우리를 치료하시기 위해서만 고통을 겪게 하시는 천주의 손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친구하자.



p.442


마음의 무감각은,

적어도 아직 완전한 위탁에 도달하지 못한 영혼에 있어서는

참으로 괴로운 고통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경건한 감정이 빼앗긴 위에 권태, 혐오, 내심의 반역이 수반할 때,

시련은 더욱 가혹한 것이 된다.


그것은 

커다란 희생을 목전에 두었을 때, 혹은 쓴 잔이 충만했을 때에 

우리의 본성이 느끼는 격동(激動)이다.


이런 혐오나 반역은 인내하여 이를 극복하고,

또한 의지가 그것에 이끌려 동의하지 않는 한,

전연 죄가 되지 않는다.



그 때,

우리의 의지는 천주의 의지와 어디까지나 일치하여 움직이지 않고,

모든 의무에 충실한 이상,

천주께 복종하고 있다는 것의 감각적 인상만이 결여돼 있다.


만일 주의 「겟세마니」동산에 있어서의 우민과 고통을 상기한다면,

마음의 쓰라림과 고민의 가혹함은

완전한 복종과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님을 알리라.


반항은 다만 영혼의 하부 위에 있을 뿐이며,

그 상부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복종이 지배하고 있다.




이런 시련이 우리의 영적 진보의 장해물이라고

믿는 것을 피하도록 하여야 한다.


도리어 그것은 「드.고사드」신부가 말하고 있듯이,

성「바오로」와 그 후의 영적 생활의 모든 권위자들이 말하고 있는

내적 싸움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의인이 싸움에 의해서 감각의 지배를 면할수 있는 방법이며,

또한 이 세상에 있어서는 평화와 

영혼의 하부에 있어서의 가급적인 복종을,

천국에 있어서는 천주의 몫을 얻게 하는 위대한 승리다.


그런 폭풍 안에서 사람은 모든 사물에서 석방되어,

괴로운 희생마저 자주 바치고,

많은 일에 있어 자기를 극복하고,

인내와 겸손과 위탁을 탁월한 정도로 실행하는 것을 배운다.


p.443


그것은 자신은 거의 자각하지 않고

정신의 미묘한 첨단에서 행해지는 것이며,

비록 외관상 흔히 복종하지 않는 것 같이 생각되더라도,

실제로는 복종하고 있다.


이런 혐오감은 천주로부터 떠난 표시가 되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의 생각이 미치지 못할 정도의 풍부한 은혜다.


왜냐 하면,

그런 것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나약함과 부패를 깊이 깨달아,

천주의 인자하심에만 모든 것을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때,

천주의 명령에 거스르는 짓은 조금도 하지 않고,

또한 실망하여 비탄에 잠기는 일이 없으며,

도리어 겸손되이 「이루어지소서!」라고 외우는 것,

이것이야말로 

랑에서 더우기 지극히 순수한 사랑에서 나오는 완전한 복종이다.


아, 만일 우리가 그런 시련에 부딪쳤을 때,

존경과 신앙과 흠숭과 복종과 위탁과 희생의 정신으로 이루어지는

침묵 안에 머무르는 것을 안다면 

고난을 성화(聖化)하고,

동시에 이것을 완화할 수도 있는 비결을 찾아냈으리라.


우리는 그런 정신을 수련하고,

이에 점차로 익숙하도록 힘쓰며,

그런 정신이 결여됐을 적에도

마음을 산란케 하지 않도록 충분히 경계하고, 

즉시 

평화스럽고, 온화한 겸손으로써 효애에 충만한 위탁에 돌아서도록 

힘써야 한다.



이런 때 우리는 은총의 조력(助力)을 기대할 수도 있다.


천주께서는 우리에게 커다란 십자가를 보내실 때,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과감히 짊어지려 하는 것을 보실 때

시련의 크기에 비례(比例)한, 때로는 그것 이상의 힘과 평화를 주시며,

보이지 않는 방법에 의해서 우리를 지탱하실 것을 결코 거절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기도와 내적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무미건조, 빈약, 비참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결코 그것을 중지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된다.


물론 그런 행위는 우리에게 있어 맛없는 것으로 생각되겠지만,

그러나 우리의 신의를 보시는 분의 마음에는 

더할 나위 없이 맞갖는 것이 된다(드.고사드「위탁」2편 6.21)



p.444


영해 예수의 성녀「데레사」를 본받아

항상 자기 주에게 위로를 받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착한 스승을 위로해 드릴 것을 이상(理想)으로 하는 영혼은 

얼마나 복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