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86 pp.444-449 제 3편 제12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계속) 제3절 의지의 무력

은가루리나 2019. 9. 20. 16:02


옴니아  등급변경▼  조회 131 추천 0 2013.08.13. 20:13



제3편 위탁의 대상



제1장 위탁의 일반적 대상


제2장 현세적 사물에 있어서의 위탁 일반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제3절 부귀와 빈천 ①

 제4절 장소와 환경 


제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건강과 질병 

 제2절 질병의 지연과 그 결과 

 제3절 삶과 죽음 

 제4절 자연적 은혜의 분배에 관한 불평등에 대하여

 제5절 직무

 제6절 휴식과 평온


제5장 명성의 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호평

 제2절 굴욕

 제3절 선인으로부터의 박해


제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영광의 생명

 제2절 은총의 생명

 제3절 선덕의 실천

 제4절 죄를 피하는 일

 제5절 계명, 서원, 회칙 등의 준수


제7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어떤 종류의 영적원조의 상실 - 

 ⑴

 ⑵

 ⑶

 ⑷ 


제8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실패와 과실 -

 제1절 분발심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3절 남의 영혼의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4절 우리 자신의 죄과


제9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내적시련의 일반 -

 

 ②

 ③

 ④


제10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유혹 -①

 - 유혹 -② 

 - 유혹 -③


제11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위안과 건조-①

 - 위안과 건조-②

 - 위안과 건조-③

 - 위안과 건조-④


제12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암흑, 무감각, 기타

 제1절 정신의 암흑  

 제2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제3절 의지의 무력

 제4절 영적빈곤


제13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평화, 불안, 소심

 제1절 평화

 제2절 각가지 공포

 제3절 거룩하고 정의이신 천주께 대한 경의

 제4절 양심상의 小心


제14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일반적 길인가, 신비적 길인가

 제2절 신비적 관상의 갖가지 상태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

 제4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제15장 기억해야 할 두가지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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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편 위탁(委託)의 대상(對象) 


제 12 장 

심령생활(心靈生活)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계속)



제 3 절 의지(意志)의 무력(無力)




아마 이 고난은 혹은 체력(體力)의 소모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 그것을 치료하는 방법은 체력을 조금씩 회복시키는데 있다.




아직 덕의 길에 그처럼 진보하지 않은 영혼, 냉담자나 죄인은 

그 행동에 있어, 다소 강한 정욕에 방해를 받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 필요한 것은 

고행과 내적 제욕과를 함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슬에서 해방되기에 이를 것이다.



온전히 천주의 소유가 된 영혼은,

아직 일반적 길을 초월하지 않고 있는 동안은

감정의 커다란 건조,

위에 말한 정신의 암흑과 마음의 무감각에 괴롭혀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그런 영혼이 덕의 실행에 있어, 

특히 기도를 바침에 있어 

일종의 의지의 무력을 느끼는데 충분하다.




그런 영혼이 경험하는 덕의 실천에 있어서의 무력은,

단지 상대적(相對的)인 것이며,

실제적인 것이라는 것보다는 오히려 외관상의 것에 불과하다.


우선 이 무력은 덕의 실천에 있어 감정이 동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도 통회도 그 밖의 덕도 느끼지 않는다는 그것만으로,

사람은 그 덕을 지니지 않고 무위도식(無爲徒食)하고 있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망상이다.


p.445


왜냐 하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좋은 행위를 하는 것과, 그것에서 좋은 감동을 느끼는 것과는 

전연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천주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행위이며, 감정이 아니다.


그리고 아무런 위로나 감미에도 의지하는 일 없이,

모든 의무에 충실한다면,

이 착한 의지는 그만큼 더욱 천주의 뜻에 맞갖는 것이며,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는 더욱 공로가 많은 것이다.


대개 그것에는 보다 희생의 정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 밖에 또 하나의 망상의 근원이 있다.

즉, 사람은 때때로 커다란 계획을 품고,

이상한 고덕(高德)을 꿈꾸며,

얼마간 가공적인 이상을 애무하고 있지만,

그러나 결코 그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허망한 이상의 어느 것을 잃고,

오만심도 얼만큼 줄어든다.


이를 슬퍼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겸손 안에 머물게 하여, 현실에 되돌아가게 하시는 천주를 

찬미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런 모든 엇갈림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의 것이 여전하게 온전히 가능하리라.


그것은 성성(成聖)의 근본을 이루는 것,

즉 천주와 성교회의 계명, 및 우리의 일상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한다는 것이다.



수도자는 항상 자기의 서원을 지키며 회칙을 사랑하고,

장삼에게 복종하며,

형제들과 평화스럽게 지내고, 

정욕을 억제하며,

자기 행위를 천주께 바치고,

고통을 참아 극복하며,

그로써 덕과 공로의 측량할 수 없는 보물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완덕에의 참된 길이다.


그것은 절대 확실한 길,

우리에게 하나의 매우 넓은 덕의 실행범위를 개척해 주는 길이다.




이 의지의 무력은 

특히 내적 행위 및 묵상에 있어 나타나는 일이 있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또한 그것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성 「알퐁소」에 의하면,


「이 때, 영혼은 천주를 향하여 높이 상승(上昇)하는 것도,

사랑, 통회, 인종(忍從)등의 여하한 업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p.446


왜냐 하면,

의지의 최첨단에 있어서만이라도,

그런 행위를 시험하는 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 때, 이런 행위가 그대의 열심을 불태우지 않고,

맛없이 생각되며, 감지(感知)되는 것이 아니라도 

천주께서는 그것을 좋아하시며, 그것에 만족하신다.



그렇지만 이 암흑 안에 있어서도 가능한 한가지가 있다.


즉 그것은 천주의 어전에 자신을 허무한 것으로 하며,

자신의 비참함을 고백하고 

그 애련하심의 품 안에 몸을 던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영적 상태에 있을지라도,

끊임없이 기도하여 싫증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암흑 안에서도,

주여, 뜻에 맞갖는 길을 나로 하여금 걷게 하소서.

나는 그 밖에 아무 것도 바라지 않나이다.」라고 항상 주께 외쳐야 한다.

(「수도자의 성화」14. 2의 3 )



비록 우리가 말이나 감정으로써 소원을 나타내지 못할망정, 적어도 

신앙의 정신으로써 필요한 은총을 받겠다는 진실한 소망을 간직하면서

천주의 어전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참된 기도이다.


왜냐 하면 천주께서는 우리의 결의(決意)를 보시며,

우리가 천주께 말씀 드릴 수 없는 것도 알으시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우리가 현실적으로 천주를 바라지 않는 것에 관해서만 무력하다.


따라서 천주께서 바라지 않는 것에 관해서 우리가 뜻대로 성공할지라도

우리에게 있어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는다.

( 드.고사드「위탁」2편4장의7, 13, 6장의 7).




지선(至善)하신 스승은 혹은

우리를 단지 겸손, 이탈, 거룩한 위탁 안에 보다 더욱 강화시키려는 뜻에서

시험하시기를 바라실지도 모른다.


그런 경우에 천주는 감각적 위안과 영적 감미를 제거하시며,

암흑과 무감각, 혹은 혐오의 정으로써 이에 대신하신다.


p.447


이 때, 우리는 가급적 양서(良書)에 의하든가, 또는 

체험(體驗)이 사주(使嗾)하는 다른 경건한 방법에 의해서 이를 완화하면서 

과감하게 시련을 참아 견디고, 모든 의무를 수행하며,

기도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항상 노력하여야 한다.


또한 천주께서는

우리를 일반적 길에서 신비적 길에 옮기시려는 뜻일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에는 천주께서 

추리적(椎理的)인, 방법적인, 복잡다양한 행위를 점차로 제거하시며,

보다 손쉬운 보다 변화가 적은 행위를 동반하는 

단순한 직관(直觀)인 하나의 관상(觀想), 

혹은 사랑에 충만된 침묵에 인도하신다.


이 천주의 작용은 매우 귀한 은총이다.

우리는 이것을 거스르는 것보다는 오히려 신뢰에 충만한 유순함으로써

자신을 그것에 맡기자.


그러나, 우리는 무슨 양(良書)안에,

특히 경험있는 지도자에게 

그 때, 특히 필요한 광명과 지도를 구할 것이다.




이런 어느 경우에도 영적 진보와 효애심에서 우러나는 위탁의 실행에

훌륭한 기회가 주어진다.


「드.고사드」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안심함이 좋으리라.

그대는 묵상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보다 조용한 묵상을 할 수 있겠지만,

보다 유익한 보다 공로가 되는 묵상은 결코 할 수 없으리라.


왜냐 하면

고뇌와 허무감의 상태에서 하는 묵상은 이미 쓰라린 것이므로,

그만큼 영혼을 정화(淨化)하는데 유용하며,

보다 빨리 자아(自我)에 죽고,

천주 안에 천주를 위해서만 살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아, 그대가 천주의 어전에 지혜 없는 동물처럼 침묵하고,

모든 것에 무감각이며,

모든 유혹의 무거운 짐 아래 짓눌리는 것 같이 되어 하는 묵상을

나는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천주의 어전에 그대의 영혼을 낮추게 하고,

부끄럽게 여기도록 하며,

허무로 돌아가게 하는데

이보다 더 적당한 방법이 어디에 있겠는가.


p.448 


이것은 천주께서 목표로 하시는 것이며,

또한 이 외관상의 비참함이 이끌어 주는 것이다.


그대의 영혼의 이 어리석은 상태가

그대의 의무의 수행에 회칙의 준수에, 

신심업의 실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천주께서 주신 하나의 시련,

거의 모든 성인이 마찬가지로 경험한 시련이라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충실하라.

그런 상태를 기꺼이 받아 들여라.


그러면, 그대는 인내, 복종, 내적 겸손의 탁월한 공로가 되는

수련(修練)의 기회를 발견하리라.


이 시련은 서서히 사멸해 가는 자애심에 있어서만,

더구나 

모든 외적제욕(外的制慾) 이상으로 유해(有害)한 것이 되는 만큼

더욱 유효하게 자아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이런 각가지 무감각, 절대적 무력(絶對的無力)을 겪지 않으면,

사람은 자신에게 의뢰하기를 버리고 

천주께만 완전한 신뢰를 바치는 영역(領域)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이처럼 놀라운 효과를 자아내는 이런 상태야말로,

얼마나 복된 것이랴!


한편에 있어 짓바수어지고,

허무로 돌아간 마음의 이 온전한 자기 봉헌처럼

천주의 성심(聖心)에 맞갖는 희생은 또 없다.



그것은 참으로 향내 드높은 번제(燔祭)다.


가장 감미로운, 가장 열렬한 묵상,

자발적인 가장 엄격한 제욕의 행위라도

도저히 이것과는 비교되지 않으며, 곁에도 갈 수 없는 것이다.」

(「위탁」2편4장1, 6, 7장 2 )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도 또한 같은 내용을

성녀「요안나.드.샹딸」에게 써 보냈다.


「아, 부인이여, 무슨 이유로 그렇게 눈물을 흘립니까.

아닙니다, 그대는 이미 여자이어서는 안됩니다.

남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천주께 대한 봉사에 살고,

또한 죽으려는 굳은 의지만 가지고 있다면,

암흑에도 무력(無力)에도,

기타 어떤 장벽에도 두려워 해서는 안됩니다.


p.449 


천국에서는 이미 장벽은 없읍니다.

그것에 괴롭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뿐 입니다.


천주께서는 우리의 비참함을 당신의 자비하심의 옥좌,

우리의 무력을 그 전능하신 처소로 삼으실 생각이십니다.」라고.



이어 경건한 박사는 무력과 암흑 안에 있어서도

언제나 겸손, 평온, 유화, 신뢰를 잃지 않도록 

성녀에게 권고하고 있다.


갑갑하게 생각하지 않고, 마음을 산란시키지 말며,

자기 암흑 안에 꼭 머물러 있어,

이 십자가를 기꺼이, 과감하게, 용감히 안는다는 것이 

성녀에 대한 그의 소망이었다. (「서간」417, 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