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뜻 영성

하느님 뜻 안의 삶 ⑵ 2016년 이전까지의 견해

은가루리나 2019. 10. 19. 00:23



하느님 뜻 안의 삶(1) ▣ 보조교사방 


moowee  등급변경▼  조회 283  추천 0  2018.01.04. 19:51





저의 <하느님 뜻 안의 삶>에 대한 생각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약 2년 전,

상위 카페 <무형의 기도원 마리아처럼예수님함께>

올렸던 글의 일부입니다.





이해욱프란치스코60 2015.05.16



제가 가끔 말씀드리지만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겼다."는 것은,

그리하여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한 영혼이 하느님의 것이 되고

하느님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완전한 사람이란 곧 "거룩한 사람"을 말합니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11,44)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1베드1,15)


완전한 사람이란 곧 "하느님과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한 번 내맡겼다' 해서

하느님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겼다는 것은

"거룩한 내맡김을 통하여" 완전(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김으로

"완전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

완전(거룩)한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완전(거룩)한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는 말은

사람이 아직까지도 "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래서 

"죄를 벗어나기 위한 걸음"을 계속해서 걸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하느님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 * *



< 천상의 책 >


6-142 

하느님이 뜻 안으로 들어가는 첫걸음은 맡김이다.


"딸아, 내 뜻에 자기를 맡기는 영혼은,

마치 좋은 음식을 가까이서 보며 식욕을 느끼고,

입맛이 당기는 바람에 그 음식을 맛있게 먹기 시작하여

자기의 살과 피로 변화되게 하는 사람과 같다.


그가 그 좋은 음식을 보지 않았다면

식욕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맛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니,

줄곧 배가 빈 상태로 있었을 것이다.


3.

그러한 것이 영혼에게는 맡김이다.


내 뜻에 맡김을 통하여 신적인 빛을 보게 되고,

이 빛이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을 죄다 흩어 없앤다.


그래서 하느님을 뵙게 되면 그분을 향유하고 싶어지고,

하느님을 향유하게 되면

그때에는 하느님을 먹고 있는 느낌이 된다.


그렇게 하느님이 완전히 그 자신으로 변하는 느낌이 되는 것이다.


그런즉 첫걸음은 맡김이고,

두 번째 걸음은 모든 것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고,

세 번째 걸음은 하느님의 뜻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 것이고,

네 번째 걸음은 하느님의 뜻을 소화하여 자기 것이 되게 하는 것 이다.


그러나 첫걸음을 내딛지 않는다면, 

그 영혼은 하느님이 빈 상태로 있게 될 것이다.




16-37 

맡김은 거룩하신 뜻과 함께 날기 위한 날개를 이룬다.


"딸아, 내 뜻은 만물의 생명이며 활동이다.


한데 너는 알고 있느냐?

누가 내 뜻의 활동에 따라 내 영원한 의지 안을 날아다니는지. 


곧 내 뜻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영원의 영역 안에서 이 뜻이 행하는 대로 행하며 돌아다니는지를?


그것은 내 거룩한 뜻 안에 자신을 완전히 맡긴 사람이다.


맡김은 내 뜻과 함께 날기 위한 날개다.

이 맡김을 그치면 못 날게 되고 날개는 망가진다.




20-25 

하느님께서 피조물에게 주신 최초의 유산.


"딸아,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의지 안에 너를 맡기면 맡길수록 

이 의지의 길에서 그만큼 더 진보하고더 많은 지식을 얻으며,

하느님의 뜻 안에 있는 재산을 그만큼 더 많이 소유하게 된다.


하느님의 뜻 안에는 

알아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이 언제나 있는 까닭이다.




17-6 

창조주의 거룩함의 표징과 모습을 지닌 성덕.


13 

그러니 주의를 기울여라. 

네가 모든 권리를 지고한 뜻에 맡기면

내가 내 뜻 안에서 사는 성덕을 네 안에서 계속 길러 주겠다.


(이상은 천상의 책에서)



* * *



위의 천상의 책에 쓰여진 예수님의 말씀처럼

첫걸음을 통하여 

계속해서 하느님 앞으로 걸음을 걸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걸음을 멈추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날개를 계속 저어야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지속적인 내맡김이 필요합니다.

내맡김이 생활화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뜻 안에 사는 삶(영성)"이란 도대체 어떤 삶을 말하는 것입니까?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거룩한 내맡김의 삶(영성)"

죄 속에서도 '지속적인(끊임없는) 내맡김'에 의한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점점 죄에서 벗어나 마침내는 완전히 죄를 벗어난 삶"으로 

변화되어 가는 삶이라면


"하느님 뜻 안의 삶"은 

루이사 피카레타가 오랜 세월에 걸쳐 마침내 도달한 삶,

"죄에서 완전히 벗어난 삶을 살아가는 삶(영성)"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느님 뜻 안>으로는 "도무지" 죄가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 "하느님 뜻밖에 있다"는 뜻이 아닌지요?




* * * * * * *




moowee 18.01.04. 20:04



그러하던 저의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이끄심으로 말입니다.


제가 그런 생각을 갖을 수밖에 없었던 것의 가장 큰 이유는 

우리 가톨릭 교회의 교의(교리)가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교의(Dogma)를 모르는 신자들은 

저의 말(생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천상의 책의 내용>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설명할 수도 없는 말이었습니다.



만일 제가, <하느님 뜻 안의 삶>이 

죄를 지어도 누구나 살 수 있는 삶이라고 공언했다면,

저는 곧 <異端(이단)>에 빠진 신부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생각 전혀 없이, 

오로지 평소 저의 생각(소신)대로 말씀드렸을 뿐이었습니다.




만일 어느 신부님이

<교의 신학을 전공한 교수 신부>였고,


그 신부님이

<하느님 뜻 안의 삶>이 

<무죄한 이들만이 살 수 있는 삶이 아니다.>라는 

저의 말(생각)을 들었었다면, 


저는 <천상의 책>의 내용을 언급하기 전에,


이미 異端(이단)을 조장하는 신부로 낙인 찍혔을 것입니다, 

안 그렇겠습니꺄?



그리고 더나아가,

제 의견(생각)에 반대하는 신자가 있었다면,

그 신자야 말로 <사이비 신자>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안 그렇겠습니꺄?



지금도 

제 생각에 반대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 댓글을 통하여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닷!



아버지의 완전한 영광(21-23-14)을 위하여 말입니닷!



이제 제가 

과거에 갖고 있었던 <하느님 뜻 안의 삶>에 대한 

저의 생각을 바꾸게 된 이유를,


이 글에 이어지게 되는,

< 하느님 뜻 안의 삶(2) >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