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Re:3회 토마스 머튼의 생애 2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 /< 후속 > 20.

은가루리나 2019. 12. 15. 20:03


옴니아|등급변경▼|조회 80|추천 0|2019.12.15. 16:45



<관상과 활동의 통합>
토마스 머튼은 점점 영적으로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글쓰기라는 것이
자신의 관상가로서의 삶에 방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글을 쓰면 쓸수록 더욱 하느님께 가까와지고,
글을 씀으로 인해 더 깊이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결정적인 표현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관상가가 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여기서 관상과 활동의 통합이 시작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성당 일, 기도 열심히 하시는 분들 볼 수 있는데
관상과 활동이 통합되지 못하고 분리되어 있는 분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일을 하지만 나중에 공허감을 느끼기도 하고
기도만 열심히 하는 상태에서 나중에 실질적인 활동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관상은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열매가 없는 관상 생활은 울리는 징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진정한 관상가가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때 깨닫게 됩니다.


(...)
"완벽한 장소는 없다.
다만 완벽한 고독이 있을 뿐이다"

토마스 머튼은 성소의 식별이 있어서 장상에게 순명을 했고 또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장소를 옮겨서 고독을 찾는 것이 아니라 더 완벽한 고독을 위해서 달려갔고

나중에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살면서 미국인 최초로 ,수도원에 살면서  동시에 은둔자로

살아가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각자 자기가 받은 자신의 성소가 있을 겁니다.
자기 가정이 있고 환경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할 때

약함을 통해서 더 깊고 큰 것을 보여주시고 더 큰 선으로 인도해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토마스 머튼은 의식의 변화가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했습니다.

(...)
우리 마음을 준비시키십시요.
우리가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갈망하고 하느님께 기도 드릴 때★
준비된 영혼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실 겁니다.

그래서 그 목소리가 들릴 때 우리는 네 라고 응답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 후속 > 20. 내맡김의 영성은 관상과 활동의 온전한 일치| ■ 내맡김 영성 ■

moowee       2010.04.18. 08:14       //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루카10,38~42)

 

"상이냐 활동이냐 관상과 활동이냐?"

활동없는 관상, 관상없는 활동은 모두 절름발이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관상"이라는 말의 어원을 굳이 끌어오지 않아도 우리는,

관상이란 "하느님을 바라봄으로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잘 알아듣고 있습니다. 

 

흔히, 위의 루카10,38~42의 말씀 중에서 예수님 발치의 마리아를 "관상생활"로 표현을 하고,

마르타의 예수님을 위한 시중을 "활동생활"로 표현들 하고 있습니다.

 

관상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누구에게나 필수적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과 일치하는 일"이 어디 영화 "위대한 침묵"에 비춰졌던

봉쇄 수도원의 수도자들처럼 어느 특수계층의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일이겠습니까?

 

관상이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관계되는 말로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좋은 몫인, "하느님과의 일치"는 하느님을 신앙하는 모든 사람들이

결코 빼앗겨서는 안될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관상없는 활동을, 활동없는 관상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관상있는 활동을, 활동있는 관상을 원하십니다.

 

"내맡김의 영성"은 관상과 활동을 동시에 온전히 충족시키는 매우 탁월한 영성입니다.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여 그분과 일치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겨 드리겠다는 "굳은 결심의 봉헌"으로

하느님과 일치한 생활을 할 수 있으며, 또한 그럼으로써

하느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맡김으로 삶이 곧 활동이 되는 삶,

삶 속에 하느님이 함께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삶 자체가 관상이요 활동인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맡김의 영성은 누구에게나 열려진 참으로 현대적인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누구라도 자신의 생활 속에서 "수도자아닌 수도자의 삶"을 살 수 있는 영성입니다.

수도자적인 평신도의 삶, 세상 속의 수도생활이 바로 "내맡김의 삶"인 것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긴 이들은 어떤 제복을 입고 사는 것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하느님의 뜻"을 제복으로 입고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위무위 19.12.15. 17:39


<토마스 머튼은 점점 영적으로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글쓰기라는 것이
자신의 관상가로서의 삶에 방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글을 쓰면 쓸수록 더욱 하느님께 가까와지고,
글을 씀으로 인해 더 깊이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아멘입니다, 아멘!

하느님에 대한 글을 쓰면 쓸 수록 하느님과 더욱 가까와집니다,
제가 지리산에 살면서 하덩 일 중에 가장 첫 번째 일이 <마리아처럼에 글쓰기>였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하느님과 점점 가까와지게 되었고,
지금 이곳에서 열~심히 댓글을 써오신 분들도 그것을 이미 체험하셨을 겁니다~^-^


마음의 생각은 엄청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생각을 글로 옮기면 그것은 더욱 큰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거내영 봉헌을 하신 하내영 중에서도 댓글에 참여하지 않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것이 지속되면 받은 은총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 사실도 이곳의 지난 10년의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모두모두 댓글에 열심히 참여합시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