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하느님과 하나 되어(마이스터 엑카르트) 1 영성

은가루리나 2020. 1. 4. 19:45


하느님과 하나 되어(마이스터 엑카르트) 1 영성


이해욱프란치스코60 등급변경▼ 조회 282 추천 0 2015.02.26. 00:20



독일어 논고



1.1 주제의 제시



쟁점: 무엇이 최고의 덕인가?


답변의 기준

하느님과 가까운 것, 

우리를 은총 속에서 하느님에게로 끌어올리는 것,

하느님 안에서 사람의 원형과 하나가 되게 하는 것.




나는 이교 현자들과 예언자들의 서적은 물론이고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의 문헌들도 많이 읽었습니다. 


나는 사람을 하느님과 가장 잘 이어 주고, 

은총에 의하여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이 될 수 있게 하고, 

하느님이 피조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하고 있었었던 형상, 

곧 하느님과 사람이 구별되기 이전에 하고 있었던 형상과 

사람을 가장 잘 일치시켜 주는 최고의 덕과 최상의 덕이 무엇일까 하면서 

찾아 왔습니다. 


내 이성이 도달 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최고의 범위에서 

모든 서적을 샅샅이 뒤지면서 

나는 모든 것을 능가하는 것은 순수한 초탈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든 덕은 피조물을 겨냥하는 반면, 

초탈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끊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10,42). 


그뜻은 이러합니다.

"마르타야, 근심하지 않고 순수해지려면, 초탈을 지녀야 한단다."




1.2 초탈은 모든 덕보다 뛰어나다



초탈사랑보다 뛰어나다.


바오로 사도처럼 현자들도 사랑을 높이 기립니다. 

바오로는 말합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내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아닙니다"(1코린13,1)



하지만 나는 온갖 사랑보다 초탈을 더 기립니다.


이유인즉 

초탈이 나를 시켜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시켜 나를 사랑하게 하기 때문이다.



첫째 이유는, 

사랑이 하는 최고의 일은 나로 하여금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지만, 

초탈은 하느님을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시켜 나를 위하게 하는 것이, 

내가 나를 시켜 하느님을 위하게 하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일입니다. 


하느님은 내가 그분과 결합하는 것보다 

훨씬 강렬하게 나에게 다가오시고, 

나와 훨씬 잘 결합하실 수 있습니다. 



초탈은 하느님을 시켜 나를 위하게 합니다.

나는 그것을 이렇게 증명합니다

만물은 저마다 자기에게 자기에게 꼭 맞는 자리에 있고 싶어합니다. 


하느님에게 자연스럽고 꼭 맞는 자리는 일치와 순수성입니다. 

일치와 순수성은 초탈로부터 옵니다.


그런 까닭에 하느님은 초탈의 경지에 이른 마음에게 

자기 자신을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초탈사랑보다 뛰어난 이유는, 

그것이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참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만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초탈을 사랑보다 더 높이 치는 둘째 이유는, 

사랑이 나로 하여금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참게 하는 반면에, 

초탈은 나로 하여금 하느님에게만 민감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 민감한 것이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참는 것보다 훨씬 값진 일입니다. 


고통 속에서 인간은 

고통을 야기한 피조물을 어느 정도 바라보는 반면에, 

초탈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완전히 끊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탈은 하느님 외에는 그 무엇에도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을 이렇게 증명합니다

늘 받아들여지는 것은 무언가의 안으로 수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초탈은 무無에 가깝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느님을 제외하면 

초탈 속에 머무를 수 있을 만큼 섬세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초탈한 마음속에서 머무를 수 있을 만큼 단순하고 섬세한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초탈은 하느님에게만 감응합니다.





초탈겸손보다 빼어나다

참된 겸손초탈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현자들은 겸손을 여타의 덕보다 더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나는 초탈겸손보다 더 높이 평가합니다. 


겸손초탈이 없어도 있을 수 있지만, 

완전한 초탈은 완전한 겸손이 없으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겸손은 자기 무화無化를 목표로 삼기 때문입니다. 

초탈은 무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초탈과 무 사이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겸손이 없으면 

완전한 초탈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튼 한 가지 덕보다는 두 가지 덕이 더 낫습니다.



초탈겸손보다 빼어나다.

겸손은 자기를 벗어나지만, 초탈은 자기 안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내가 초탈을 겸손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둘째 이유는 이렇습니다. 


말하자면 

완전한 겸손이 피조물 쪽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고, 

그런 경향 속에서 인간 역시 피조물을 지향하지만, 

완전한 초탈은 자기 안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바깥으로 나가는 것보다는 

자기 안에 머무르는 것이 훨씬 고귀한 일입니다. 



다윗 임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의 딸은 자신의 모든 영화를 안에서 누린다"(시편45,14)


완전한 초탈은 머리를 조아리지도 피조물을 넘보지도 않습니다. 

완전한 초탈은 아래에도 위에도 있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 자신으로 있고자 할 따름입니다. 


완전한 초탈은 사랑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피조물을 닮거나 닮지 않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러저러한 것을 가지려 하지도 않습니다. 


완전한 초탈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것이나 저것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완전한 초탈은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만물이 초탈의 간섭을 받지 않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해욱프란치스코60 15.02.26. 00:24


순수한 초탈(완전한 초탈) = 거룩한 내맡김

틈나는 대로 계속 이어지겠습니다.

주님, 순수히 초탈한 영혼들을 통하여 찬미영광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