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신부님 강의록

카를로스신부님 제2차 피정 강의록(제15강의-하느님 뜻과 인간의 뜻에 대하여) With Him

은가루리나 2019. 12. 20. 21:50

 

pp460-476

 

 

35. With Him

 

 

우리 두 번째 강의는 With Him ‘그분과 함께’ 라는 주제가 되겠습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처음부터 또 동시에 

일생 동안 우리의 영적 생활 안에서 계속 가져야 될 태도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그분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정화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해주시고, 

우리의 열정에 질서를 세워주시고, 

우리 성덕을 자라게 하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더 많은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 더 넓은 공간을 마련하십니다. 

 

이제 ‘예수님과 함께’ 우리 순례를 계속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 생활을 좀 더 완전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권 92장 1900년 7월 9일 : 

하느님 안에서 사는 것이야말로 참된 덕행이다 

 

 

2

“진실로 나의 소유가 된 영혼은 

하느님을 위해서 살 뿐만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살아야 한다. 

 

너도 내 안에서 살려고 힘써라. 

 

그러면 

내 안에서 모든 덕행을 담는 그릇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 안에서 사는 것이야말로 참된 덕행이다. 

 

이것이 영혼에게 하느님과 같은 형상을 부여하고 

하느님 안에 거처를 잡게 하며, 

하느님과 같은 덕행들을 지니도록 영혼을 변화시켜 

이를 양식으로 살아가게 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위해서 사는 영혼은 

불신도 받고 쓰라림도 체험하고, 

어떤 때는 불규칙하게 딴짓도 조금 하고, 

수난의 어려움도 느끼고, 

때로는 이 세상일들에 말려들곤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이런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격 안으로 들어가서 산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건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속한 것은 다 버려야 됩니다.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것을 모두 버리고, 자기 자신의 열정도 떠나 버리고,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을 떠나고 버려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을 위해서’ 사는 것과 ‘그분 안에서’ 사는 것 사이에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차이가 있습니다. 

 

‘그분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궁전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길을 따라 가면서 산다는 이야기이고, 

지금 우리는 아버지께 가는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는 동안에 온갖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위험도 있고, 유혹도 있고, 또 피곤해질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 다른 물건들에 의해서 다른 곳으로 주의가 흐트러질 수가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궁전에 도착하는 게 늦어질 수 있습니다. 

 

만약에 하느님 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에 사고가 나면 

병원에 입원해야 되니까 

하느님 집에는 못 가게 됩니다. 

 

아니면 깊은 구렁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집 안에 있으면 이런 위험은 없습니다.

 

 

길을 가는 동안에는 굉장히 조심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고속도로는 아주 위험합니다. 

 

고속도로에 만약 구덩이가 있으면 굉장히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코스타리카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홈스타트라는 고속도로에 얼마나 구덩이가 큰지 

자동차 한 대가 구덩이에 완전히 다 빠졌다고 합니다.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누구의 길에 더 깊고 큰 구덩이가 있나 

서로 경쟁을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집 안에 있지 않고 어떤 길을 가다 보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주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 ‘그분을 위해서’ 네가 모든 것을 다 할 때는 

그것은 네가 영적 생활에서 길을 가는 것을 시작했다는 뜻이다. 

 

너의 생애의 목적지인 그 집에 도달하려고 하는 그 열정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도전이다. 너는 싸워야 한다. 이것은 전투이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 사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너한테 속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버리는 것이다. 

 

너의 모든 열정과 모든 것이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고  

하느님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런 것들을 다 버려야 된다.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고 하느님 안에서 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벗어버려야 한다.”

 

 

진실한 제자에 대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6-27)

 

 

하느님 안에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과 모든 피조물과 모든 것을 

이미 완전히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 생활을 시작할 때 ‘그분을 위해서’ 산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그분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영적생활의 목표가 무엇인지 확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위해서’ 사는 이 시점에서는

아직도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안에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 나라에 도달하고 싶고 

하느님 안에서 살고 싶다는 목적은 확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물어보십니다.

 

“너는 정말 내 안에서 살고 싶으냐? 

네가 진정 내 안에서 살고 싶으면 

우선 먼저 모든 것을 나를 위해서 해라. 

이것으로 시작해라. 

 

나만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하는 것, 

그것으로 시작해라.”

 

 

예수님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영적 생활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분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는 것에 대한 한계점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p.462

 

 

6권 17장 1904년 2월 7일 : 

 

하느님께 자기를 온전히 내어 드리는 영혼에게

하느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신다.

 

 

5. 

“내 딸아, 네 말이 맞다. 

과연 나를 위하여 많은 일을 하는 선한 영혼들이 숱하게 있다. 

 

그렇지만, 내게 모든 것을 주기 때문에 

나 자신 전부를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이는 자애심을, 어떤 이는 자만심을 그대로 지니고 있고, 

또 어떤 이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 설사 (그 대상이) 경건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 

버리지 못하는가 하면, 

 

약간의 허영심이 있는 사람, 

세상에 대한 애착이 남아 있는 사람, 

이해관계에 붙들려 있는 사람이 있다. 

 

요컨대, 어떤 사람은 이것을, 다른 사람은 저것을, 

모두가 그들 자신의 것을 얼마간 보유하고 있다. 

 

이것이 지장이 되어 

그들 내부의 모든 것이 신적인 것으로 변화되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의 음악에는 완전한 거룩함이 스며나지 않기 때문에 

내 귀에도 사람들의 귀에도 (너의 음악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없다.

 

 

6

그러므로, 그들은 많은 일을 하지만, 

그럼에도 자기를 아무것도 아닌 자로 여기며 

그 자신을 온전히 내게 주는 사람이 행하는 

사소한 일만큼의 효과도 거두지 못한다. 

 

그러니 나를 기쁘게 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지금 말씀의 결론은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은 

가장 높은 완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길로 가는 과정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모든 것을 

‘그분과 함께’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읽으려는 다른 장(章)에서 예수님이 쓰시는 말은 

‘그분의 인성을 통해서’입니다. 

 

이 부분에서 나오는 ‘그분의 인성을 통해서’ 라는 말은 

‘그분과 함께’ 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p.463

 

4권 91장 1901년 10월 8일 : 

 

예수님의 인성을 통해서 하는 행위는 그분께서

지상 생활 동안 행하신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2

“내 딸아, 영혼이 (비록 

하나의 생각이나 한 번의 숨 따위 무슨 행위든지) 

그가 행하는 모든 것을 내 인성을 통해서 한다면, 

 

이 모든 행위들은 

내 인성에서 솟아나는 것과 같은 수의 보석이 되어 

신성 앞에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내 인성에 의한 것이 되기 때문에 

내가 지상에 있는 동안 행했던 업적과 동등한 효과를 낸다.”

 

 

예수님과 함께 숨 한 번 쉬는 것, 

생각 한 번 하는 것, 작은 행동 하나 하는 것은 

전부 다 보석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에서 나오는 보석들입니다. 

 

그냥 보석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실 때 행동하신 것과 똑같은 

힘과 특성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행동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막달레나 수녀님이 접시를 닦습니다. 

 

그런데 수녀님이 ‘예수님과 함께’ 접시를 닦기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 서로 봉사하면서 접시를 닦는 행동 하나가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사실 때 했던 것과 똑같은 

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설거지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녀님이 ‘예수님을 위해서’ 접시를 닦을 때에는 

수녀님의 의지가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으로 접시를 닦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행동하셨던 것과 똑같은 가치를 가지지는 않습니다.

 

 

인간인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할 때는 내가 행동자입니다. 

 

행동의 주체입니다. 

그것이 첫 단계입니다. 

 

그리고 완성의 이 두 번째 단계는 

내가 무엇을 할 때 ‘예수님과 함께’ 하기 때문에 

이 행동에서는 예수님이 행동의 주체입니다.

 

 

내가 무엇을 할 때,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살면서 했던 것과 

똑같은 효과와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예수님과 함께 설거지를 했는지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것을 하신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마 나 자신도 예수님과 함께 설거지를 한다고 해놓고도 

대부분의 경우에는 

나 자신조차도 ‘예수님과 함께’ 하는지를 못 느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믿음 안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이렇게 하는 것은 굉장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 못 느낄지라도 

내가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때, 

설거지를 할 때, 빨래를 할 때, 방 청소를 하는 이런 모든 행동에서 

나 혼자가 아니라 영원하신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영원 속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의 삶을 이 지상에서 계속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복녀 삼위일체의 엘리사벳은 

자기 자신의 삶이 예수님의 삶의 연장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게 되고 싶어 했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렇게 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삶이 계속되는 존재, 예수님 삶의 재현입니다.

 

 

루이사가 예수님께 물어봤습니다.

 

 

3

 “오, 주님, 저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행동할 때 얼마나 하찮은 것이건 

단지 그 지향만으로도 (이 모든 일을 이룰 수 있으니) 

어찌 된 일입니까? 

 

당신께서 보시기에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고 텅 비어 있는 것이건만, 

오직 당신을 기쁘게 해 드리겠다는 지향만 가지고 있으면, 

당신께서는 이 지향을 보시고 

그것을 당신의 일과 일치시켜 

특별한 모양으로 채워 주시고 드높여 주셔서 

굉장한 일이 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4

“그렇다, 딸아, 

인간의 활동은 (그것이 얼마나 거창한 일이건) 

아무 것도 아니고 텅 비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와 하나 되어 

오직 나를 기쁘게 하겠다는 지향만 있으면 

이 단순한 지향이 그것을 가득 채운다. 

 

나의 활동은 (비록 한 번의 숨에 불과하더라도) 

모든 조물이 함께 행하는 모든 일을 무한히 능가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것이 그토록 굉장한 일이 되는 것이다.

 

 

5

그러니 자기 자신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나의 인성을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내 인성의 열매를 먹고 

나 자신의 음식으로 양육되는 것이다. 알겠느냐?

 

6

게다가 착한 지향은 인간을 거룩하게 하지만 

악한 지향은 인간을 타락시키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데 행위 자체가 언제나 다른 것은 아니다. 

같은 행위로 못된 길로 빠져드는 인간이 있는 반면, 

성덕의 길로 가는 인간도 있으니 말이다.”

 

 

7 그런데,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동안 

나는 그분 안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푸른 나무 한 그루를 보았고, 

오로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그분의 인성을 통해 활동하는 영혼들을 보았다. 

 

그들은 그분 안의 이 나무에 달려 있었다. 

그분의 인성이 그들의 거처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의 수는 극소수에 불과할 뿐이었다!

 

 

지향에 따라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 한 

유다의 입맞춤을 생각해 봅시다. 

 

입맞춤은 사랑의 아주 아름다운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입맞춤이 배반의 입맞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유다는 사랑으로 입맞춘 것이 아니라 나쁜 지향으로 했습니다. 

입맞추는 행동은 하나이지만 그 지향에 따라서 좋은 행동이 되기도 하고 

나쁜 행동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지향의 순수함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20권에서 30권, 36권으로 더 높은 권수로 갈수록 

 

예수님께서 

“지향이 우리 행동의 영혼이다. 

우리 행동의 알맹이다. 

지향이 없는 우리의 행동들은 시체와 같다. 

우리가 하는 행동들에 합당한 이유와 지향이 없으면 

다 아무 가치도 없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의 행동이 겉보기에는 훌륭할 수도 있지만 

나를 위해서, 나만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한 행동이 아니라면, 

그것이 좋은 행동이라서 금과 같지만 

진흙으로 덮인 금이다.”

 

그러니까 선한 일을 하는 것은 확실히 더 좋은 일이지만, 

아예 지향이 없거나 나쁜 지향이나 악한 지향으로 한다면, 

또 단순히 자선적인, 인류애적인 것만을 한다면 

그것은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인간적인 사랑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 

자선으로, 인류애로 하는 행위는 

사랑의 완성이 아닙니다. 

 

사랑의 기초 단계입니다. 

 

그것은 자신도 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인간을 위해서 어떤 좋은 일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들 사이에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인간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는 내가 어떤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하면 

그것은 그 사람이 단순히 나와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만 하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 그리스도의 지체고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애덕입니다. 

아주 진정한 의미의 애덕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면서 인간애로서 하는 것은 

그냥 자연적 수준의 인간적인 사랑이지 애덕은 아닙니다. 

 

아주 특별한 초자연적인 사랑은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적어도 인간으로서 

인류애적인 사랑을 꼭 실천하라고 권고해야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지체이고 예수님의 교회의 구성원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르쳐주어야 되는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가

르쳐야 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p.467

 

6권 75장 1904년 10월 17일 : 

 

신성을 찾아 만나려면 그리스도의 인성 및

그리스도의  뜻과 일치하여 활동해야 한다.

 

 

2

“딸아, 신성을 찾아 만나려면 

그리스도의 인성이라는 막을 통해 활동할 필요가 있다. 

 

즉, 그리스도의 인성 및 그리스도의 뜻과 일치하여, 

그리스도의 뜻이 영혼 자신의 뜻과 하나인 것처럼 활동함으로써 

오로지 그리스도의 마음에 들려고 하는 것이다.

 

3

이는 그리스도와 같은 방식으로 일하면서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 

무슨 일을 할 때든지 그리스도를 불러 

그리스도가 바로 그 자신의 일을 하는 것처럼 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활동하는 영혼은 하느님과 부단히 접촉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을 가리고 

우리는 몸과 영혼과 뜻과 지성과 생각과 마음을 다해서 

이것을 원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과 함께 하고 

동시에 그분의 동반자가 되기를 

우리가 아주 자발적으로, 자유로운 의사로 원하기를 

그분께서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결혼할 때 두 사람의 의지가 합쳐져야 결혼이 성사됩니다. 

 

결혼을 할 때 

한 사람은 

자기 배우자한테 모든 사랑과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은데, 

그렇게 한 사람만이 마음속에 완전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사랑을 가지는 것이 결혼하기에 충분한 것일까요? 

 

그 결혼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결혼을 위해서는 두 사람 모두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양쪽이 다 그렇게 간절한 사랑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결혼이 성사되지 않습니다. 

그 결혼은 무효입니다.

 

 

내가 누구의 은인이 되려고 하면 

그쪽에서 꼭 원해야지만 

내가 그의 은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어떤 한 그룹의 노인들이나 한 그룹의 고아들한테 

내 생명과 나의 모든 재산까지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이 고아들이나 내 목숨을 바쳐서 사랑을 해주려고 하는데 

그 노인이나 고아들이 나를 꼭 알아야 될 필요가 없습니다. 

몰라도 됩니다. 

 

그런데 결혼에서는 그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결혼에서는 양쪽이 서로서로 사랑하기를 원해야 됩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자기 자신을 주어야 됩니다. 

안 그러면 그 결혼은 무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동반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해서 우리의 뜻으로 

예수님의 동반자가 되기를 원하고 바라십니다.

 

 

p.472

 

7권 69장 1906년 11월 28일 : 

예수님과 함께하는 행위가 가져오는 선익 

 

 

2

“사랑하는 딸아, 내가 얼마나 긴밀한 일치를 이루며 

너와 함께 있는지 이제 알겠느냐? 

 

이와 같이 너도 나와 긴밀히 일치하기 바란다. 

 

하지만, 오직 기도할 때나 고통을 받을 때만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오히려 언제나, 언제나 그렇게 하여라.

 

3

네가 움직이고 숨쉬고 일하고 먹고 자고 하는 모든 것 

- 이 모든 것을 나의 인성 안에서 하는 것처럼 하고 

다 내게서 오는 것처럼 행함으로써 

너는 다만 조가비같이 되어야 한다. 

 

너의 행위라는 이 조가비를 쪼개면 

신적인 행위의 결실인 속살이 나타나 보이도록 말이다.

 

 

4

너는 온 인류의 선익을 위하여 

내 인성이 현존하듯이 그렇게 하여라. 

 

마치 내가 사람들 가운데 살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네가 나에게서 생명을 받겠다는 지향으로 

극히 하찮고 사소한 행위까지 모든 것을 행하면, 

그 모든 행위가 내 인성의 공로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내가 조금 전에 말한 그 결혼에서처럼 

우리가 그분과 함께 모든 일을 하는 시점에 도달하면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하고 함께 일을 하면 그 일은 너 혼자 한 게 아니라 

우리 둘이 함께 일을 한 것이다. 

 

온 인류를 위해서 우리가 둘이 함께 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혼의 예와 같이 출산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일하면 아주 풍성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그분과 함께’ 일하면 

예수님의 삶을 교회에게, 인류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원하십니다. 

“너는 이 사실을 알고 의식하고 있어야 된다. 

 

네가 같이 일하자고, 같이 기도하자고 나를 초대하면 

그것은 모든 인류를 위해서 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구원을 위해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세상의 성화를 위해서 

사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과 함께 일하기 시작하면 

그분이 당신의 느낌, 영원한 사랑, 

또 그분의 보편적인 사랑을 우리 안에 집어넣어 주십니다.

 

 

p.473

 

주님께서 루이사와 신비적인 결혼을 하실 때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권 39장 : 

네 가지 생활 수칙을 받다

 

 

11. “넷째로, 이제부터 너와 나 사이에는  

너 니  나 니 하는 구분이 없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네가 한다 거나  내가 한다 라는 말 대신에  

우리가 한다 는 말로 바뀌어야 한다. 

 

또한,  너의 것 이니  나의 것 이니 하는 말도 사라져야 한다. 

 

그 대신, 무엇에 대해서든지 우리의 것 이라고 말하기로 하자. 

 

너는 나의 충실한 신부로서 

세상의 운명을 나와 함께 나누어 가지며 이끌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12. 

나의 피로 구속된 사람들은 모두 나의 자녀들이요 형제들이니, 

그들 모두가 나의 자녀들이요 형제들인 것처럼 

너에게도 자녀들이요 형제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 너는 참 어머니로서 자녀들인 그들을 사랑할 일이다. 

 

형제요 자녀인 이 사람들은 

우리에게 셀 수 없이 많은 고통을 치르게 할 것이다. 

 

그들 대부분이 

자제할 줄 모르고 고집스럽게 자기 본위로 사는 사람들이고, 

타락한 사람들도 많으니 말이다.“

 

 

주님께서 계속하십니다.

 

p.473

 

7권 69장 1906년 11월 28일 :

예수님과 함께하는 행위가 가져오는 선익

 

 

4

“너는 온 인류의 선익을 위하여 내 인성이 현존하듯이 

그렇게 하여라. 

 

마치 내가 사람들 가운데 살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네가 나에게서 생명을 받겠다는 지향으로 

극히 하찮고 사소한 행위까지 모든 것을 행하면, 

그 모든 행위가 내 인성의 공로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5

나는 사람이었지만 또 하느님이었기에 

나 자신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있었으니 말이다. 

 

즉, 내 숨 안에 모든 사람의 숨을 담고 있었고, 

나의 동작 안에 모든 사람의 동작을, 

나의 생각 안에 모든 사람의 생각을 담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그들을 성화하며 신화(神化)하였고 그들의 죄를 보상하였다.

 

6

그러니 네가 내게서 너의 행위 전부를 받으면서 모든 일을 한다면, 

그것으로 인해 너 역시 네 안에 모든 사람을 수용하게 되고, 

너의 행위가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하여 두루 퍼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못하더라도 

너에게서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이다.” 

 

 

이 강의의 결론으로 하신 말씀으로 가겠습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행동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완전한 행동 속에 참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니다.

 

 

p.474

 

9권 22장 1909년 11월 9일 : 

주님께서 즐겨 연주하시는 영혼 내면의 오르간

 

 

1 평소와 다름없는 상태로 있노라니, 

우리 주님께서 내 안으로 두 팔을 뻗쳐 

거기에 있는 오르간에 양손을 얹으시고 

짧은 소나타 한 곡을 연주하시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지금 여기에서 오르간 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오르간은 나무로 만들어졌거나 여러 가지 것들로 만들어졌습니다. 

 

수녀님이 오르간을 치시면 

오르간 소리는 수녀님의 몸 밖 오르간에서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우리 모두가 우리 안에 오르간을 가지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오르간을 연주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분의 손으로 작은 소나타를 연주하고 싶어 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 오르간 연주를 하시면서 아주 즐거워하셨습니다.

 

 

그래서 루이사가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나, 정말 즐기시는군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2

“그래, 즐기고 있다. 

네가 네 일을 나하고 같이 했으니까 

 

- 즉, 네가 내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고, 

내 흠숭으로 나를 흠숭하며, 

나 자신의 보속으로 내게 보속하고, 

다른 모든 것도 그렇게 했으니까 

- 네가 행한 일들은 바로 나 자신의 일들처럼 무한한 것이 되었으며 

이 활동 속의 일치가 이 오르간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 두어라.”

 

 

그래서 여러분들 자신 안에 오르간을 가지고 싶으시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제 아시겠지요? 

 

여러분들이 몸 밖에 오르간을 가지고 싶으면 

악기점에 가서 오르간을 하나 사야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에 오르간을 가지고 싶으시면 

여러분들이 하는 모든 일을 함께 하시자고 

예수님을 여러분 안으로 초대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활동을 하면 됩니다.

 

 

3

한데, 네가 고통을 하나 더 받을 때마다 

이 오르간의 건반도 더 불어난다. 

 

그러면 새로운 건반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알아보려고 

내가 즉시 와서 내 작은 소나타를 연주하므로 

내 즐거움도 하나 더 불어나게 된다. 

 

따라서, 네가 고통을 더 받을수록, 

그리하여 내 오르간에 아름다운 소리를 더 보탤수록, 

나의 즐거움도 그만큼 더 불어나는 것이다.” 

 

 

이 장(章)에서 예수님께서 지금 고통이 

영적 오르간에 키를 하나 더 보태는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3. “네가 고통을 더 받을수록, 

그리하여 내 오르간에 아름다운 소리를 더 보탤수록, 

나의 즐거움도 그만큼 더 불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영혼 안에 얼마나 굉장한 음악이 연주되겠습니까? 

 

나는 잘 모르지만, 

보통 오르간에는 키가 52개인가 있는 것 같은데 

그 키만 가지고도 굉장한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데, 

여러분의 행위 하나하나가 여러분 안에 있는 영적 오르간에다가 

키를 매번 하나씩 더 추가시킨다는 것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영적 오르간을 연주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니 

그 음악은 아마 진짜 굉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것에서 예수님의 동반자입니다. 

 

그래서 그분 사랑의 이 굉장한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에 대해서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분과 내가 하나가 되어서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모든 것을 함께 함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런 아름다운 일을 하는데 있어서 

성모 마리아께 우리를 도와 달라고 청합니다. 

 

모든 것을 성부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분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하기 위해서, 

이 지상에 있는 그분 교회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드립니다.

 

아멘.